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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님의 서재입니다.

난 당하고는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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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작품등록일 :
2021.05.17 12:01
최근연재일 :
2021.10.0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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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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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6. 문 열어 [3]

DUMMY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이델린 지방의 국경 검문소 중 하나인 ‘이델 관문’에 틀어박히게 된 기사 웰즈.

그는 한없이 늘어선 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씨이이이발. 괜히 그때 공 세운다고 나대지만 않았어도······.”


대륙 정세에도 불구하고 올베린 왕국은 기사단 전체가 움직일 일이 없었고, 덕분에 기사들은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때마침 이델린 지방에서 일어난 수상쩍은 실종사건과 도적단 출몰 소식에 기사들은 벌떼같이 임무를 맡겠다 자처했다.

덕분에 임무 수행 대상을 뽑기 위해 제비뽑기까지 했다.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공주님과 함께 이델린 지방의 평화를 되찾으러 왔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좌천이었다.


“진짜 공주님께 연락을 하시려는 겁니까?”

“일단 변동사항이나 특이사항은 즉시보고가 원칙이니까.”


하지만 좌천되었어도 기사는 기사.

기사로서 맡은 일을 수행하는 건 그의 의무.

공주에게 관문에서 있었던 일이 적힌 보고서를 연락수에게 전달한 웰즈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의자를 기울였다.


“진흙탕에 뒹굴어도 나는 기사다. 양아치같이 굴어도 기사다. 왜냐면 나는 기사로서 해야 할 의무를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내 의무는, 나랑 같이 흙바닥 뒹구는 공주님께 이 사실 전하는 일이야.”

“······공주님 성격에 웰즈 님을 가만 내버려 둘까요?”


가문의 수행원이자 병사, 동시에 웰즈와 함께 이 관문에 처박힌 불운한 병사는 나지막하게 그 말을 했다.

병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지 못한 웰즈는 당당하게 가슴을 쳤다.


“뭐라도 해보려는 용기가 가상하다고 평가하시겠지. 아! 세일톤의 양아치라 불리는 웰즈도 기사가 맞긴 하구나! 나중에 왕성으로 돌아가면 좀 더 신경써줘야지!”

“치부를 드러낸다고 죽을 때까지 밟히는 거 아닙니까?”

“······와, 세상에. 그럴 수도 있겠네. 나 뭐 한 거지?”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난 웰즈는 옥상으로 달려나갔고, 마침 연락수가 보고서를 서신 전달용 새의 발목에 매달고 날리려는 참이었다.


“야야야야야! 야! 날리지 마!”

“예?”

“날리지 말아보라······ 아아악! 안돼!”


하지만 외침이 무색하게 새는 날아올랐고, 빠르게 허공 저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저 새를 잡아버릴까 생각했지만 그 죄 또한 무겁기에, 웰즈는 주저앉는 것으로 자신의 절규를 온 몸으로 드러냈다.


“조졌어. 너희랑 나는 이제 지옥으로 떨어진 거야. 정확히는 공주님 발에 짓밟히겠지만.”

“아니 그거 웰즈 님이 지른 거고······.”

“무슨 일입니까?!”


웰즈의 절규를 듣고 막 병사들이 옥상으로 올라왔을 때, 웰즈는 비척대며 일어났다.


“연대책임. 아무튼 간에, 혹시 아가씨 발에 짓밟히는 취향 가진 사람? 축하한다. 이제 너희들에게 포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 걸 누가 좋아합니까······?”

“이제부터 좋아해야 할 거야. 미래가 정해졌으니 거기에 우리가 맞춰야하지 않겠니?”

“대체 뭔 소리를 하시는 거래.”

“공주님이 듣고 길길이 날뛸 내용을 지금 보내셨어.”


뒤늦게 올라온 병사들이 그 말을 듣고 기겁했다. 이 일은 그냥 이 검문소에서 조용히 처리할 줄만 알았고, 이틀 뒤에 그냥 무단 침입자가 넘어왔다는 보고를 보낼 것이라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독단적으로 일 벌렸다는 소식을 공주님이 들으면 길길이 날뛸 게 뻔했다.


“조졌네. 웰즈 님 때문에 이중으로 조졌어.”

“그러니까 편하게 수도에 계시지 괜히 공적쌓자고······.”

“웰즈님 가문 밑이라는 게 죄지.”

“시끄러워 부하놈들아. 그럼 놀리? 백작님이 자식 공 언제 세우나 맨날 갈궈대는데 나만 괴로울까?”


웰즈에게도 나름 사정은 있다. 백작가의 삼남이 기사랍시고 별다른 활약도 없이 있으니 가주님의 불똥이 튄 것이다.

물론 부하들은 그런 웰즈의 속내를 알아도 결과가 이러니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개중에 여성 병사는 웰즈에게 한껏 비아냥댔다.


“녜! 녜녜녜녜녜녜! 웰즈님만 괴로우시어야죠!”

“나아아쁜새끼. 그래서 내가 지른 거야. 같이 죽자. 공주님한테 같이 밟히자고.”

“싫여요! 웰즈님만 밟히시여요! 져는 싫여요!”

“넌 공주님한테 안 밟혀도 내가 밟을 거다 나쁜 놈아.”

“와! 웰즈님이 여쟈를 뱗는데! 끼야악 악당!”

“저 새끼 말투 이상하게 하니까 배로 열 받네? 지금 확 밟아?”


전장의 등을 지킬 부하들이자 가문의 식솔이지만, 지금 웰즈의 눈에는 주인 배신하는 나쁜 놈들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우애 깊은 상관과 부하들 사이에서 남모를 홍조를 짓는 이가 한 명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 관문 아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망했어. 반나절도 안 지나서 못해먹겠다고 돌아왔네.”


하루도 지나지 않아 들리는 일우의 목소리에 웰즈의 수심은 한층 더 깊어졌고,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우리 쟤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입 닦을까?”

“저 양반이 웰즈 님보다 세다면서요?”

“아차, 그랬지.”


강자를 함부로 모함하면 뒤끝이 안 좋다는 걸 아는 웰즈는 한층 더 얼굴이 어두워졌다.

허나 일우는 웰즈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주기 위해 돌아온 게 아니었다.


“뭐해 이것들아! 일 다 끝내고 왔다고! 문 안 열어?!”

“어······?”


그 말에 웰즈는 후다닥 달려가 옥상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형씨?!”

“끝났다고! 쓸었어! 아니면, 아직 모자라? 여기도 쓸어주랴?!”


기대도 하지 않았던 희소식에 웰즈는 급격히 좋아진 표정으로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아, 안 밟혀도 되겠다. 그치?”


그리고 부하들 중에는 남몰래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려 애쓰는 이도 있었다.


***


일우가 한 건 거하게 쓸어버린 장소에는 꽁꽁 묶인 도적단과 바닥을 나뒹구는 붉은 콩들이 있었다.

현장을 돌아보던 웰즈는 바닥에 밟히는 붉은 콩을 집어 들며 고개를 갸웃댔다. 그가 알기론 이 콩은 이웃 나라에서만 키우는 작물이기 때문이다.


“······뭐야, 얘네들 콩밥먹고 살았나? 어차피 잡히면 콩밥이라서 미리 감옥식단 체험이라도 했나. 아니면 콩 팔이 상단 털어서 한 건 했나?”

“아, 그거? 내가 한 거야.”


일우는 그 말을 하며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옌 방문 기념으로 거기 특산물이라는 칠리콩과 관계된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었거든.”

“······어, 만든다는 개념이 뭔지 몰라?”

“칠리콩 알지? 모든 콩이 다 그렇듯, 껍질이 좀 그렇잖아. 근데 칠리콩은 껍질이 두 겹이라고! 불합리해!”


카이옌이 장인들이 모이는 지역이 되기 전까지 이 곳에서 제일 유명한건 붉은 색을 띄는 칠리콩이었다.

단순한 붉은 콩이 유명해진 이유는 별 거 없다. 콩깍지 안에 든 콩껍질이 두 겹이기 때문이다.

이중 껍질 때문에 보관성도 좋고 벌레가 잘 갉아먹지 못하는 장점도 있지만, 껍질을 두 번 까야하는 불편함도 있었다.


“그래서, 칠리콩의 껍질 까는 기계를 구상해 봤지!”

“아니, 그러면 지금 콩 까는 기계를······.”

“특산물! 칠리콩! 칠리콩 껍질만 까는 기계! 칠리 콩 까는 기계!”


CIS의 미군 차세대 주력소총은 그렇게 칠리 콩 까는 기계로 변했고, 일우는 자신이 한 설명이 흥에 겨운 듯 몸을 흔들어댔다.


“유---후.”

“······웰즈님보다 더 이상한 사람은 처음 본다. 그치?”

“너 진짜 맞는다 그러다가.”


조금 전 말로 웰즈의 속을 긁어댔던 여성 병사가 속닥대는 걸 들은 웰즈는 한 대 쥐어박으려다, 이내 껍질이 벗겨져 반토막 난 콩을 바닥에 내던졌다.

중요한건 콩이 아니라, 도적단을 쓸어버렸다는 것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간 건지 모르겠지만······ 지하 수원지에 있었다고? 야, 근데 이거 말이 안 되잖아.”


웰즈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퍽 진지한 표정을 한 웰즈는 이 주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여기 다 조사하고 했는데, 그때 별 이상 없었지?”

“예.”

“허 참.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자신의 주인이 진중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려 애쓰자, 그제야 병사들도 상황이 수상쩍다는 걸 인지하고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처음 파견되었을 때 기사단과 휘하의 병력들은 처음부터 마을 수색부터 시작했다. 당연히 수원지를 조사했고, 독을 푼 흔적이나 각종 이상 징후를 살펴보았다.

그런 장소에서 뜬금없이 도적들이 소탕되었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원인을 알고 있는 이가 있었다.


“저놈도 흔적 있는지 추적해봐.”

[인접 지역 전투병력 스캔 중······ 완료. 해킹 침투 상태로 확인됨. 등급, 2단계.]


스카웃을 통해 스캔한 결과, 이미 병사들은 물론이고 기사에게까지 최면이 걸렸다.

최면 마법 관련 정보에 따르면, 2단계 최면은 물건이나 대상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보다 높아지면 아예 행동 자체가 변하고, 최종적으로 민간인을 도적단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일우는 다른 이들이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걸 놓쳤는지 의구심에 빠진 사이, 스카웃을 이용해 상황을 분석했다.


“저 녀석들도 이곳 수색하다 걸린 건가?”

[부정. 해킹 프로세스 분석 결과, 해당 지역의 해킹은 은폐 및 지역 주거민을 대상으로 적용됨. 병사 및 기사, 타 지역에서 시도된 해킹의 영향으로 추정.]

“이미 걸려서 왔다면 추가로 걸린 놈들이 더 있겠지. 어쩌면 내려왔다는 녀석 전체가 그럴 수도 있고, 혹은 중간 기착지나 거점에서 걸려서 온 거일 지도 모르고.”

[사고회로 계산 결과 중간 경유지의 가능성, 낮음. 해당 해킹 프로세스 상 장기간의 시일이 소요됨. 임시 거점에 설치된 포인트에서 해킹이 진행되었을 가능성, 매우 높음.]

“······그럼 이 자리에서 말해주면 안되겠네.”


상황을 파악한 일우는 최면의 존재 자체를 숨기기로 판단했다.

인근 지역 주민은 물론이고 일을 처리할 기사까지 손도 못 쓰고 당했다. 이 상황에서 자신들이 최면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면 범인을 찾겠다고 대대적인 수색에 나설 가능성이 높고, 실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범인이 몸을 숨길 가능성도 크다.

재수가 정말 없으면, 범인이 숨긴 비장의 수단으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 지경에 도달하더라도 일우는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귀찮음이 부쩍 늘어날 것이다.

기사들이 일우를 진범으로 몰아가고 그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면, 소란을 피해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사라진다.


“자, 주목!”

“응?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천재적인 지능과 범상치 않은 혜안을 가진 이 몸은 한번에 파악하지만, 니들같이 덜 떨어지는 애들은 못 알아보는 흐름이 있지. 잘 듣고 고개나 끄덕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 일우가 할 일은 그럴싸한 말로 이 상황을 저들이 받아들이게끔 납득시키는 것이다.

최면은 쏙 빼고.


“뭐 그런 거겠지. 너희가 삽푸고 여기 볼일 없다고 뜨니까, 딱 얘네들이 와서 살림 차린 거.”

“아······ 하. 말 되네. 얘네들 한군데 박혀있는 게 아니었구만. 그러면 말이 되네.”

“원래 수색은 같은 장소에 두 번은 안 가게 되잖아. 그걸 노린 거지.”

“허······ 이 교묘한 새끼들 봐라.”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웰즈를 포함한 모두가 그 말을 쉽게 받아들였다.


[알림, 해킹 패턴에 대한 신규 정보 확인. 최면에 직결된 사항에 대한 정보의 곡해 유도 반응 감지.]


이것 또한 최면의 영향이라는 것이 스카웃을 통해 포착되었고, 이들은 최면이 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거 참······ 올베린의 기사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구만.”

“네가 부끄러울 거 없어. 넌 모자란 게 아니니까.”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설명을 받아들인 웰즈는 거칠게 뒷머리를 긁적였고, 일우는 한껏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내가 엄청나고, 무지막지하고, 기절할 정도로 대단한 거지.”

“인정. 당신 정말 대단해. 자, 박수!”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웰즈는 곧바로 병사들을 돌아보며 그렇게 외쳤고, 뜬금없이 박수라는 소리에 병사들은 멀거니 웰즈를 바라보았다.


“뭣들 해. 박수들 안치고. 능력자를 인정하는 거야말로 대인배의 기본소양이고, 사나이의 기초잖아.”

“젼 사나이 아닌뎨요.”

“어허 씁. 저 새끼 맞으려고. 우리 공주기사님 입버릇 몰라?”


끝끝내 자신과 투닥대는 여성 병사를 향해 혀를 찬 일우는 손을 휘적대다 이내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왕국의 병사이자 기사로서 성별은 관계없이 오로지 올베린의 명예와 깃발에 충성을 다할지어다!”

“······.”

“아무튼, 그 명예로운 깃발이 퇴색되지 않도록 정의로운 집행을 선사한 이 방랑자에게 박수우!”


그 말을 시작으로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나왔고, 그 중에서 웰즈는 격렬하게 박수를 쳐댔다.

하지만 일우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내가 왜 방랑자가 된 거야?”

“미안해 형씨. 하지만 우리도 기록을 남겨야 하니, 약간 미쳐 돌아간다는 소문이 나도는 연금술사에게 도움 받은 것보단 무명의 방랑자에게 도움 받았다는 쪽이 좀 더 그럴싸하거든.”


‘연금술사 우’가 행한 일은 정식으로 올베린 왕국의 기록에 남을 것이다. 기사가 출병하고 무슨 일을 했는지는 다 기록되고, 지금 당장 스카웃을 통해서 조회가 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그 기록에 ‘올베린의 기사들이 2주동안 삽질해서 못 해내던 도적 퇴치를 지나가던 미치광이 연금술사가 해냄’이라고 적기엔, 당사자로서 약간 꺼려지는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연금술사 우’는 그 행동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싫은데? 나는 원하지 않아도 내가 한 일이 남의 걸로 돌아간다던가 이름 없는 뭐시깽이가 한 짓으로 넘어가는 건 죽어도 못 봐.”

“······명예 안 따진다며? 좀 봐주라.”

“명예가 아니지. 내가 한 족적이 사라지는 거니까.”

“그게 그거 아냐?”

“아무튼!”


더 이상 최면을 의심할 여지가 없자, 일우는 슬슬 이 곳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최면술사가 어딘가에서 뭔가를 저지르고 있다면, 이 지역에 머무를 동안 그 영향을 벗어나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 파악하고, 조사해서, 그 최면술사라는 놈에게 죄값을 물을 것이다.

일우를 귀찮게 한 죄값 말이다.


“나는 할 거 다 했고, 그것도 24시간 안에, 심지어 그거 반도 안 쓰고도 끝냈어. 그러니 나는 합법적으로 통과······.”

“아, 잠깐.”

“잠깐은 무슨. ”


웰즈가 불러세웠지만 일우는 신경쓰지 않고 걸어나갔다.

허나 웰즈가 한 ‘잠깐’은 말만으로 한 게 아니었다.


“그냥은 못 보내줘.”


-쿠웅---!


지하 수원지와 지상을 연결하는 문이 닫혔고, 일우는 미간을 좁혔다. 장치를 조작한 웰즈는 그에 맞서 히죽 웃었다.


“문 열어.”

“이거 우리도 체면이 있고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아니 필요 없으니 문짝 열라고. 내가 직접 뜯을까?”

“우리 공주님 좀 알현하고 가줘.”


발목 붙잡혀서 이것저것 도와달라고 말할 줄 알았던 웰즈는 의외의 말을 꺼냈고, 그냥 꺼지라고 대꾸하려던 일우는 잠시 주저했다.

그리고 ‘연금술사 우’답게 대꾸했다.


“내가 왜?”

“그야, 공주기사님을 뵙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잖아?”

“필요 없어.”

“공주기사라고! 그 희소한! 아니, 좀 흔한가? 아무튼 간에, 아로엔 님 뵙고 가. 이런 공적을 남긴 사람이 그냥 휙 떠나면 내 처지도 말이 아니고, 공주님도 언짢게 여기실 테니까.”


그럴싸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조금 전 보낸 보고서 때문이었다.

‘카이옌에서 미치광이라는 소식이 자자한 연금술사를 도적단 때려 잡으러 보냈음’이라는 내용으로 축약되는 보고서를 본다면, 아로엔 공주의 성격 상 분명 이 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현장 상황이 다 끝났다는 걸 알게 되면, 여러 가지 방면으로 웰즈가 문책을 받을 것이다.

멋대로 국경 통과를 시킨 것도 그렇고, 이런 능력 있는 사람을 왜 보내줬냐는 내용도 그렇다.

하지만 그건 웰즈의 사정이지 일우의 사정이 아니고, 일우가 제대로 확보하지 않는 정보 중 한가지는 현 시대의 인적 사항이었다.


“그게 누구야?”

“······어, 몰라?”

“나한테 시사 상식을 바라지 마라. 공주기사고 나발이고, 아로엔인지 알로에인지 알 게 뭐람.”


웰즈는 단순한 모른 척이라 생각했지만, 정말 일우는 그게 누군지 몰랐다.


[해당 정보 검색 불가. 대체 정보 검색 중. 완료. 올베린 왕가에 대한 자료 불러오는 중.]


그 사이 또 개선한 듯 아로엔 공주의 정보를 찾지 못한 스카웃은 그 대신 아로엔의 선조인 올베린 왕가에 대한 정보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 정보를 확인한 일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올베린의 셋째 공주이자 공주기사 아로엔을 모른다고?”

“어. 그러니 문 열어.”

“공주님이라고! 공주기사! 그 소문의!”

“알 바 아냐. 알고 싶지도 않고, 알기도 귀찮아.”


진심이었다.

소설에서 나오는 공주기사가 실존하고, 만날 기회가 있지만, 일우는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스카웃이 검색한 올베린 왕가의 정보, 그것도 왕족 초상화를 봤기 때문이다.

상당수가 못생기거나, 추남이거나, 추녀거나, 혹은 끔찍하게 못생긴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이 구제 불가능한 면상을 지닌 혈통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진 않았다.

일단 기사고, 명예를 우선시하고, 왕가에 충성을 다하는 이에게 시비 걸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예 모른다고 말했으니, 그 내용을 번복할 수도 없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공주님이라는 걸 떠나서 여자라는 것만 생각해도 당신한테 손해 보는 거 아냐.”

“댁이 얼마나 그 왕가에 충성스러운지 이해하니까, 방해 좀 하지 마.”

“아니 그러지 말고오오. 왕가니 명예니 다 떠나서, 공주님이라는 것도 떠나서 그냥 미인을 보러 간다고 생각이라도 해 줘!”

“그래, 네가 최고다. 올베린 왕가가 네 행동 보면 정말 충신이라고 하겠어.”


유전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선조가 저렇게 끔찍한 얼굴이라면, 후손 또한 마찬가지.

한편으로는 이렇게 못생긴 사람의 후예를 그렇게 포장을 하는 기사 웰즈는 정말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혹은, 왕가의 못생김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거나.

확실한건 일우는 일단 이렇게 못생긴 사람들의 후손은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안 봐도 최면술사를 잡는데엔 큰 영향이 없을 테니, 괜히 봐서 기분만 나빠질 게 뻔하다.


-콰앙----!


거칠게 문짝이 열리고 일우가 그 문을 짓밟고 밖으로 나가자, 웰즈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무튼 난 바쁘니 갈 거야.”

“이봐아아아! 서류 처리가 늘어난다고오오! 성의를 봐서라도 보고 가!”

“놔라. 너도 문짝처럼 만들어줄까?”

“밟아도 돼! 오실 때까지 밟으며 기다려달라고! 야! 니들도 붙어! 같이 말려!”

“거 그 양반 간다고 우리가 망합니까? 웰즈 님만 망하지.”

“싫여요. 저의는 변태 기사 웰즈님처럼 뱗히고 싶지 아니어요.”

“저년 저거······ 씨이, 주인은 지금 위기에서 허우적대는데.”


어차피 문책은 웰즈만 당할 게 뻔한 걸 아는 병사들은 웰즈의 발버둥을 보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 사이 웰즈는 일우의 걸음걸이에 맞춰 질질 끌려나갔다.


“젠장! 연금술사라면서 뭐 이리 힘이 세?”

“힘만 세겠니. 그냥 너보다 센 거지.”

“그 좋은 힘 좋은 세상을 위해 좀 펼칩시다! 시간 좀 내줘!”


웰즈가 그렇게 다리를 붙잡고 질질 늘어졌지만 일우는 눈 깜빡하지 않고 제 갈길 걸어갔다.

허나 웰즈의 발버둥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알림, 중무장 병력 감지. 탑승물 감지.]

“이런.”


도로 저편에서 뭔가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감지되었고, 일우는 미간을 좁혔다.


-카라라라락!


그리고 나타난 것은 바이크로 착각할 것 같은 육중한 모양새의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중무장 갑주들이었다.

선봉에 서 있는 이가 가장 화려하고 장식된데다 여성의 육체가 고스란히 드러난 갑옷을 입은 걸 봐선, 그 공주님이 분명했다.

물론 투구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왔다, 웰즈.”

“오, 세상에. 공주님!”


자전거에서 내린 공주, 아로엔이 등장하자 웰즈는 곧바로 벌떡 일어나며 흙먼지를 털었다.

외모와는 별개로, 투구 너머로 들리는 공주의 목소리는 꽤나 매혹적이었다.

애석하게도 일우는 그 매혹적인 목소리를 신경쓰지 않았다.


“망할. 그냥 씹고 갈걸.”

“국경에 소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도착했지만, 생각만큼의 소란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아닙니다! 소란은 이미 진정되었습니다.”

“헛소리를 보고했다면 각오하도록. 목을 치겠다.”


그리고 그 목소리로 살벌한 말을 꺼냈고, 고작 밟히고 끝날 거라 생각한 웰즈는 황급히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일우는 빈정거렸다.


“역시 인성과 외형은 비례해. 못생기니 사람 목도 막 치려고 들고.”


목 날아가지 않도록 황급히 상황을 설명한 웰즈의 말을 들은 아로엔의 머리는 곧바로 일우를 향했다.


“호오, 그러한가? 그럼 다른 의미로 소란이 벌어진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고를 한 겁니다! 진짜로.”

“시끄럽다. 칭찬 듣기엔 그 경박스러운 언행이 문제라는 걸 모르나?”

“······.”


가볍게 웰즈의 입을 닥치게 만든 아로엔은 성큼성큼 일우에게 다가갔다.


“그대가 그 연금술사인가? 이름은?”

“댁 부하한테 들으쇼. 나는 댁같은 고오오오귀한 양반네한테 이름 가르쳐주기 싫어. 왜냐면 나는 능력주의자라서 천부적으로 타고난 혜택을 업고 살아가는 사람 싫거든.”


한껏 빈정거리며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오히려 아로엔은 그런 일우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 동의한다. 나 역시 능력이 부족한 자는 경멸하니까.”


그 말을 하며 아로엔은 자신의 투구를 벗었고, 놀라울 정도로 치렁치렁한 금발 롤 헤러가 투구 속에서 쏟아져내렸다.

그리고 그 눈부신 금발 사이에 보인 얼굴은, 누구라도 혹할 만한 매혹스러운 보석 같은 아름다운 미인의 것이었다.

유전자에 기반한 예측이 빗나가자, 일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거 내 예상이랑 다른데.”

“무엇이? 내 얼굴과 언행이 불일치함을 뜻하는가? 이런 외모로 숙녀의 조신함과는 거리가 먼 발언을 하는 것이 그러한가?”

“뭐 여러 의미로.”

“소문은 충분히 퍼졌다고 본다만.”

“아, 그 소문 난 몰라. 관심도 없고.”

“그러하겠군.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자는 세속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는 법.”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기자 그 미모가 한층 더 반짝였고, 아로엔은 방긋 웃어 그 매력을 배가시켰다.


“올베린의 기사이자 왕가의 혈통으로서, 당신과 한담을 나누고자 한다. 거절한다면 그 뜻을 꺾지 않으나, 필히 응해주길 바란다. 나는 그대의 능력을 높이 사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니 말이다.”

“요란한 권력만큼이나 말도 요란하구만. 대화 좀 하자고 간략하게 말 못하는 고질병이라도 있어?”

“후훗.”


조금 전에 보인 성격대로라면 불같이 화를 낼 법 하지만, 아로엔은 오히려 웃으며 일우의 말에 긍정했다.


“좋다. 나도 사실 이런 헛짓은 싫다. 격식과 예의는 질색이니까. 하지만 네 실력과 능력은 관심이 많다. 그러니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만.”

“뭐······ 나는 내 능력 잘 보는 사람은 마다하지 않거든.”


미인은 싫지만, 능력을 높이 사는 사람에겐 호의적이어야 한다. 그 지침에 따라 ‘연금술사 우’는 아로엔과의 대화를 수락했다.

그 광경을 본 기사 웰즈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조금 전에 내가 뭐라고 말할 땐 싫다고 하더니.”

“나는 나보다 약한 놈의 말은 안 듣거든.”

“······.”


할 말이 없었기에 웰즈는 입을 닫았고, 일우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아로엔에게 던졌다.


“아, 한 가지 질문해도 돼?”

“뭔가?”

“투구에 그 드릴 달린 머리카락이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야? 그게 돼?”


살짝 정신 나간 연금술사다운 질문이지만, 일우 본인의 호기심이기도 했다.


작가의말

저는 ‘최면에 약한 공주님은 엄청난 미인’이라는 국제표준협약을 준수합니다. 예? 협약 없다구요? 알게 뭐에요 이게 정석인데. 저는 정석을 준수합니다.

개그콤비가 연인으로 이어지는게 당연하듯, 최면에 약한 공주기사는 미인인건 상식입니다. 이걸 어기는 사람은 벌받아야 합니다. 질서이며 법칙이며 아무튼 간에 지켜야함.


저는 한 번 뭔가 쓸 때 두 가지 이상 담아내고자 합니다. 예, 재탕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빈 백으로 끝나도 될걸 굳이 이름을, 저렇게, 두 번이나 까는 거로 만들었습니다. 칠리콩까네 칠리콩까네 칠리콩 콩콩 까네. 예아. 

콩이 나왔는데 이걸 그냥 넘겨? 그럴 순 없지.

그래서 ‘1’만자를 넘겼고, 1이 2에게 3하는 것을 기리기 위해 세번째에 올렸습니다.


참고로 이 글에 나오는 것들 중 대부분은 이렇게 두 번 울궈먹을 것을 염두에 뒀습니다. 여러분들이 스쳐지나간 것들, 뜬금없는 순간에 한번 더 써먹습니다. 재활용 만세.


거기에 캐릭터 한 명의 말은 ‘일부러’ 저렇게 쓴 겁니다. 일부러. 저 기사놈 빡치라고 일부러 말투 저렇게 하는거임. 오타 아니어요.


그리고 제가 막 요새 분량 퍼부으니 비축분 푼다고 오해하실지 몰라 말씀드리는데....

전 비축분 안쌓아두고 삽니다. 임시로 구상한 골조가 좀 있지 대부분은 바로 써내려가는 스타일이에요. 비축이라고 해 봤자 올라갈 분량을 하루 전에 쓰기 시작하는거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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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10. 모난 놈이 맞는다 [2] +3 21.06.17 2,548 88 18쪽
46 10. 모난 놈이 맞는다 [1] +4 21.06.16 2,588 90 15쪽
45 9. 모자람 없는 고민 [7] +5 21.06.15 2,589 96 19쪽
44 9. 모자람 없는 고민 [6] +2 21.06.14 2,606 83 13쪽
43 9. 모자람 없는 고민 [5] +3 21.06.13 2,637 90 17쪽
42 9. 모자람 없는 고민 [4] +7 21.06.12 2,723 99 12쪽
41 9. 모자람 없는 고민 [3] +8 21.06.11 2,873 9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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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8. 너만 빼고 모두 즐거워 [1] +2 21.06.04 3,268 7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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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7. 공짜로 베푸는 고기는 없다 [3] +9 21.06.03 3,497 92 28쪽
30 7. 공짜로 베푸는 고기는 없다 [2] +5 21.06.03 3,574 90 23쪽
29 7. 공짜로 베푸는 고기는 없다 [1] +7 21.06.02 3,697 101 15쪽
28 6. 문 열어 [4] +10 21.06.02 3,960 115 24쪽
» 6. 문 열어 [3] +8 21.06.01 3,916 113 24쪽
26 6. 문 열어 [2] +6 21.06.01 4,009 109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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