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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님의 서재입니다.

난 당하고는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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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작품등록일 :
2021.05.17 12:01
최근연재일 :
2021.10.0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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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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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6. 문 열어 [4]

DUMMY

아로엔의 등장으로 잠시 관심 밖이었던 도적, 정확히는 ‘도적으로 세뇌된 민간인’들이 병사들에게 끌려나왔다.


“도적들은 어떻게 처분하시겠습니까?”

“처형한다.”


그 말에 일우는 손을 쫙 펼쳐 아로엔과 ‘도적’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당장 해결해줄 수 없지만, 이들은 사건에 휘말린 민간인이다. 이들을 구제할 수는 없더라도, 진상이 드러난 뒤 이용된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는 상황까지 방치할 순 없었다.

게다가 이 공주님, 아로엔의 성격을 봐선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뭔가 심하게 비뚤어질 가능성이 높다.


“잠깐.”

“뭔가. 이것은 왕가의 혈통으로서 이들에게 정당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이다.”

“그건······ 너무······.”

“온정인가? 같잖은 온저······.”

“······비효율적이잖아! 머저리야!”


진실을 알려줄 수 없지만 온정에 기대 설득하지도 않는다.

‘연금술사 우’의 시선에 이 처형은 끔찍할 정도로 비효율적인 무능한 마무리고, 따라서 도저히 내버려둘 수 없다.


“하나, 둘, 셋······ 와! 아무튼 머릿수만큼 노동력! 노동력은 뭐다? 국력! 국력은 뭐다! 힘!”

“허나 이들은 왕국의 어기고 질서를 어지럽······.”

“나는 사형이 제일 나쁜 제도라고 생각해. 왜냐? 써먹을 인적 자원을 그냥 내다 버리는 제도잖아!”


죄값을 면책하자는 게 아니다. 그냥 봐주자는 게 아니다.

이 살짝 정신 나갔지만 능력 있는 연금술사의 주장은 조금씩 아로엔이 내린 결정에 틈을 내기 시작한다.


“한 일만큼 갚아라! 죽인 만큼 낳아라! 아, 낳아라는 아니지. 아무튼 간에! 얘들 도적이라며? 근데 물적 손실을 낸 놈들을 그냥 죽여? 너 손실 그냥 매몰해? 매몰은 무능력의 상징인데?”

“크윽······!”


일우가 내뱉은 ‘무능’이라는 단어에 아로엔이 움찔거리자, 일우는 확실하게 그들을 살려내기 위해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 때, 스카웃이 긴급상황을 알리는 경고를 연달아 쏟아냈다.


[경고! 중립대상의 방화벽 체계에 심각한 이상 증상 발생! 일시적 방화벽 무력화, 원격 제어루트 활성화, 해당 대상의 정신 상태, 일시적 무력화. 원인 파악 중, 행위 지속 시 상대방에 대한 적대적 행위로 인지될 가능성, 극히 높음!]


CIS 기준으로 이건 중립지대에서 전투 상태가 아닌 플레이어에게 적대적 행위를 할 경우 발생하는 경고음이었다. 무시하고 계속 공격하면 상대의 인터페이스에선 적으로 인식된다.

아무래도 일우가 한 말 중에 아로엔을 최면 상태로 유도하는 명령어가 들어 있는 모양이고, 스카웃이 그걸 인식해 적대 행위로 파악한 모양이다.

순간 흐릿해진 아로엔의 푸른 눈동자를 본 일우는 중간에 멈출까 했지만, 그러기엔 주변의 시선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상대방이 최면에 무방비인 이상, 일우가 이런 행위를 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일우는 두 팔을 좍 펼치고 마치 무언가를 찬양하듯,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외쳤다.


“자, 따라해보렴. 강! 제! 노! 역!”

“강제······노역?”

“혹은, 무보수 무기한 육체적 채무 상환! 좀 더 세련된 표현으론, 노동교화!”

“노동교화······?”

“그거 여론 때문에 그냥 붙인 건데, 사실 쓸모없으니 제껴. 아무튼, 이 얼마나 아름답고 극한의 효율을 쥐어짜내는 용어인가! 아아, 노역 만세! 무급여 노동력 만세! 막 부려먹어도 도망도 못 치고 항의도 못 하고 급료 지불 안 해줘도 되는 일꾼 최고!”


일우는 거의 광란에 젖은 모습으로 죄수들을 노동력으로 부려먹는 정책을 찬양했다.

아로엔의 눈동자가 멍해진 것을 눈치챈 병사나 기사는 없었다. 그들도 이 정신 나간 연금술사의 말에 정신이 멍한 상태기 때문이다.


“공주님의 평가, 마이너스 1점. 넌 노동력을 낭비하려고 했어.”

“그······런가?”


하지만 이대로 계속 내버려둬도 문제다. 언젠가는 다들 일우의 헛소리로부터 정신을 차릴 것이고, 아로엔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테니까.


“빌어먹을, 다들 왜 이걸 몰라주는거람. 전부다 죽이니 뭐니······ 다 손해라고. 이득을 생각해야지. 자원을 아끼고 활용을 해야지. 낭비가 심해. 물질이고 인적 자원이고 전부 다······.”


일우는 궁시렁대며 다른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벌렸고, 마치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모습처럼 행동했다.

속삭임이 그 누구에게도 안 들릴 거리에 도달한 일우는 빠르게 중얼댔다.


“해제 명령어, 빨리. 아니면 억지로 정신 차릴 수단 검색해.”

[약물 주입을 추천함. 해당 항목, ‘뉴럴 밸런서.’]

“좋아, 뉴럴 밸런서 준비. 쟤한테 접촉할 때 주입한다.”

[확인.]


응급 대책을 수립한 일우는 곧바로 홱 몸을 돌려 멍하니 서 있는 아로엔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자원을 아끼자! 대륙을 깨끗하게! 인간 쓰레기도 재활용할 수 있어! 효율이 곧 절약이고 절약이 곧 효율!”

[뉴럴 밸런서 주입 개시. 체내 주입 후 효력 발생 확인. 방화벽 재활성화 확인. 상태, 안정화됨.]

“으윽!”

“절야아아아아악!”


어깨를 흔들어대며 주입한 상태이상 해제 약물이 효과를 냈고, 곧 아로엔의 푸른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중간에 발생했을 기억 공백을 무마하기 위해 일우는 아로엔의 이마를 쿡 찔렀다.


“기억해. 처형하면 쓰레기, 살려두면 자원이야.”

“조······ 좋다. 이들의 처형은 보류하지. 압송하도록.”

“좋아! 그거야! 세상이 혼란스럽고 사람이 죽어나가면, 노동력은 점점 가치가 올라가지. 버리면 안 돼. 써먹어야지.”


황급히 상황을 수습했지만, 정신을 차린 아로엔이 죽을 때까지 부려먹으란 소리를 ‘지쳐 죽도록 만들어준다’로 이해하면 이 모든 게 의미가 없다.


“아 참. 그거 알지? 노동력은 죽으면 날아가는 거. 최대한 살려가면서 오랫동안, 최대 효율!”

“그러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게······.”

“넌 한 달 빡세게 굴려서 골로 보내는 거랑 한 3~40년은 곡괭이질하면서 인생을 갈아 넣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가혹하다고 보냐?”

“그건······.”

“당연히 뒤쪽! 총 수익도 뒤쪽! 그리고 죽어서라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괴로운 삶의 연속이니 뒤쪽! 선택지를 고르라면 당연히 뒤쪽이 더 매력적인 제안!”

“그, 그대의 말이 일리가 있으니 따르도록 하지.”


세뇌된 주민들이 처형되거나 강제노역 중 과로사를 당할 가능성이 사라지자, 일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만족스럽군. 이제 그 드릴이 쏙 들어가는 공간확장형 투구 같은 쓸데없지만 다들 한 번 씩 궁금해지는 질문을 할 수 있겠어.”

“그, 그런가?”

“농담이고,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는 걸 알았으니 정말 대화라는 걸 나눠보자 이거지.”


‘연금술사 우’는 히죽 웃으며 여태까지 한 것이 마치 아로엔을 시험하기 위한 행동인 양 포장했다.

실상은 예상 못 한 시한폭탄을 아슬아슬하게 해체하는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말이다.


***


이델린 지방에 당분간 머물며 치안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게 된 기사단과 아로엔 공주는 이델린 지방의 중심이자 관문도시인 ‘델린’에 머물고 있었다.

델린으로 향하는 아로엔과 함께 한 일우는 그들의 보급품을 싣고 다니는 마차에 탄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마차가 아니라 인력거였다.


“기병이 아니라 자전거병이라니, 이거 실용성은 있나?”

“역시 연금술사라서 그 질문부터 나오는군. 답변하자면, 군대는 실전에 쓸 수 있는 병기만을 도입한다고 해 두지.”


곁에서 페달을 밟고 있는 아로엔이 그렇게 말하자, 일우는 손가락을 움직여 스카웃을 통해 이들의 ‘자전거’의 구조를 분석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전거가 아니다. ‘인력전차’라는 명칭이 있지만, 우리들은 전차라고 부르고 있다.”

[해당 탑승물, 자전거와의 유사성 50%. 공통점, 구조적 형상 및 기본 원리. 차이점, 조향장치 및 제동장치, 동력보조기관.]

“흐음, 양쪽 손잡이에 달린 집게를 당겨야 좌우 조향이 되고 풀면 정면으로 방향이 돌아가는 구조구만. 거기에 제동장치는 허벅지 옆에 달려있고, 거기에 동력배가장치도 달아놨군.”

“역시 간단히 파악하는군. 그 차이가 자전거와 전차의 차이점이지.”

“뭐, 나 정도 되는 수준이면 처음 본 장난감도 떡하니 알아봐.”


일우는 그렇게 대답한 뒤, 목적지와 인근 지명에 대해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여긴 뭐하는 동네길래 이델린이라는 이름에서 울궈먹기를 반복해? 관문은 이델이고, 도시는 델린? 작명가가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냐?”

“연금술사이면서 이델린을 모른다는 건가?”

“알 게 뭐야. 나는 내 성과 말곤 다른 건 별로 관심 없어. 인물, 지명, 사회, 문화, 정치, 그 외 이것저것 전부 다.”

[이델린 지방과 관계된 사회, 역사, 연금술 관련 자료 확인. 불러오는 중.]


일우가 히죽 웃으며 말하자, 스카웃은 곧바로 해당 지역 정보를 불러왔고, 정보를 확인한 일우는 의혹의 눈빛을 보내는 아로엔을 향해 히죽 웃었다.


“이델린이라는 아가씨가 그렇게까지 이름을 쪼개서 쳐발라야 할 업적을 쌓은 건지도 의심스럽고 말이야.”

“이 전차도 그분께서 고안하신 발명품이다만.”

“그러니까아. 고작해야 말 대신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발명이 그렇게까지 유구하게 내려질 부동산에 박힐 수준이냐 그거지.”

“허! 저 친구 자기 능력 된다고 이델린 님까지 깎아내네.”


세뇌된 주민들을 압송하느라 비어버린 호위병력 대신 동행했던 기사 웰즈가 빈정거리자, 일우는 보란 듯이 말했다.


“걔가 뭐 했는지 짚어봐? 탈 것 하나, 기계장치 몇 개, 공식 몇 개, 거기에 던전 좀 들락거린 거. 끝. 별 거 없네.”

“······그런데도 그런 반응이라고?”

“다아, 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파묻힐 수준이란다. 물론 난 유언장에다 ‘내 이름 도시나 지명에 함부로 쓰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멱살을 잡고 흔들어댈 거니 쓰지 마라!’라고 박아둘 거지만.”

“거 참.”


웰즈는 헛웃음소릴 내면서도 한편으론 ‘연금술사 우’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뭐, 솜씨 보여준 거 보니 연금술사로서 어떨지는 몰라도 모험가로선 엄청난 뭔가를 보여줄 것 같긴 해.”

“웰즈. 닥치도록.”

“······공주님 너무하십니다. 저 아니었으면 저 친구 만나지도 못했을 텐데.”

“초면 당시에도 언급했지만, 자네는 내 무의식적인 거부감을 불러내는 사람이다. 이 시국에 호위가 부실해지면 이런저런 말이 나올 걸 우려하지만 않았어도 동행하진 않았을 거다.”

“그냥 제가 그 도적들 인솔해서 오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믿을 수 없으니까.”

“너무 하시네 진짜. 여자들은 왜 전부 다 나한테 이러지?”


직속 부하도 그렇고 아로엔도 그렇고 모두 웰즈에게 차가운 모양이었고, 곁에서 구경하던 일우는 느긋하게 짐에 기댄 채 말했다.


“댁 인상은 암만 봐도 양아치야.”

“맙소사! 내가 어디가 어때서! 보라고! 금발도 아니고 갈색 피부도 아니야! 녹색 머리! 흰색 피부! 선량한 인상!”

“아냐, 얼굴에 양아치라고 써 있어. 관문에서 볼 때도 양아치같이 행동하던데.”

“······기사 웰즈. 관문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한 것 같지 않다는 민원이 제기된 것 같다만.”

“아닙니다아아아아! 참말로! 진짜! 이건 모함입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공주 아로엔의 기사 웰즈 핍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우는 그 대화를 엿듣는 대신 나지막하게 스카웃에게 말을 걸었다.


“계속 모니터링 하고 있지?”

[목표대상 정밀감시 중. 현재까지 해킹 관련 이슈, 0. 방화벽 정상.]

“일상대화는 트리거가 없거나, 기사같이 최면이 먼저 걸린 녀석한테는 발동 안 되는 조건이 달려있을지도 모르겠구만.”

[긍정. 더 많은 정보 획득을 위한 심층 조사가 요구됨.]

“그건 나중에 저택에서 하도록 하자고.”


일우가 스카웃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이에도 공주기사와 양아치로 오해받는 기사는 일방적인 설전을 나누었다.


“너무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공주님을 받들어 모시는 기사입니다. 왜냐면 기사니까.”

“내 외모에 혹한 것이겠지.”

“······아니라고 부정을 못하는 게 참 슬프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십쇼! 공주님의 미모가 그만큼이나······.”

“이봐들, 니들의 그 재미없는 잡담은 나 가고 난 뒤에 하고. 저기가 댁들 본거지다 그거야?”


듣다 못한 일우가 끼어들어 그들의 대화를 틀어막으며 길 저 편에 보이는 거대한 도시를 가리켰다.

강을 끼고 펼쳐진 상당한 규모의 도시 이곳저곳에는 굴뚝에서 뿜어지는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환경오염에 지대한 공헌을 끼치는 도시구만. 걔 이름 붙을만했네.”

“······댁 이델린 님 싫어해?”

“좋아하진 않았는데, 이제 별로야. 난 환경을 지키는 엘프의 마음을 갖고 있거든.”

“······.”


그러는 사이 일우가 탄 인력거와 자전거는 빠르게 도시로 접근했다. 도시로 들어서는 관문에 근접할 때까지만 해도 참으로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정지. 신분을 밝히시고 탑승물에서 하차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로엔 공주와 그 호위병, 그리고 공주님의 손님이시다.”

“신분 확인되었습니다. 별 일 없으셨습니까?”


관문 수비병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역시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다만 일우의 시선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경고! 해킹 시도 감지! 방화벽 능동대응 가동 중, 해킹 역추적 완료. 위치 표시, 광대역 해킹 중계형 모듈. 최우선 무력화대상지정 구조체, 현재 해킹 영향권 범위 대상, 51!]

“허······.”


관문 아치 위에 박힌 문양이 바로 최면을 유도하는 구조체인 모양이다.

딱 봐도 오래되 보이는 성벽과는 달리 아직 새것의 느낌이 가시지 않은 모양새였다. 일우는 미간을 좁히며 그 문양을 가리켰다.


“이봐. 저건 성벽이랑 따로 노는데 이 동네 상징이라도 돼?”

“예?”

“관문 위에 달린 저거.”

“어······ 아, 예. 좀 오래되었습니다.”

“의미가 뭔데?”

“어······.”


그리고 그 문양의 정체는 고사하고 존재조차 인식 밖에 있는 모양이다.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수비병의 멍해진 표정에 일우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봐!”

“아, 예!”

“저어어기 성벽 위에 달린 종 말이야. 저거. 청동 종인데 왜 저리 반짝반짝해?”

“아, 아아······ 그거 말씀 하신 겁니까?”

“그럼? 뭐 다른 거 있어?”

“물론······ 없지요. 예, 그 종은······.”

“이델린 님이 성벽을 처음 세웠을 당시에 매달아두신 기념용 종이다만.”


어느 새 다른 수비병들과 대화를 마친 아로엔이 일우에게 다가왔다.


“아 그래? 어쩐지 마음에 안 들더라. 아주 자기 업적 치하하려고 기를 쓰고 앉았어.”

“그대의 기준에 못한 이가 더한 자취를 남긴 게 불만인가?”

“아니? 겸손이라는 걸 눈곱만큼도 모르는 애송이가 남긴 낙서같은게 싫어.”


‘연금술사 우’는 그렇게 투덜대며 턱짓을 했다.


“씁, 기분 나빠졌어. 아무튼 그 대화라는 거 나누러 댁 묵고 있는 장소로 가자고. 어디 저택에 머물 거 아냐? 담소를 나누자고. 종이나 달고 땡땡땡거리는 녀석 기억 지울 정도로 막대한 양의 담소.”

“좋다. 그대가 얼마나 위업을 가릴 정도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줬으면 싶군.”


아델린 공주는 한 지역에 이름이 각인될 정도의 위업을 지닌 연금술사를 하찮게 여기는 ‘연금술사 우’가 과연 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처로 정한 저택에 들어선지 3시간이 지나고, 그 생각을 후회했다.


“그래서, 현재까지 종합한 내 이론에 따르면······.”

“그, 그러한가.”

“······너 설마 여태까지 내 설명 안 들었니?”


3시간동안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의 고차원적 지식의 홍수에 시달린 이델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연금술사 우’는 매우 실망스럽다는 듯 격하게 벌떡 일어났다.


“삐졌어! 처음엔 내가 말할 내용 다 이해할 것 마냥 행동했으면서! 내가 좀 본격적인 연금술사 나으리의 면모를 보이니까 두뇌 빼놓은 좀비같이 굴고 말이야!”

“며, 면목 없다. 허나 그대가 언급한 지식은······.”

“모르면 처음부터 말을 해! 시 쓰는 오크 수준으로 수준 확 깎았어야 했는데 삽질을 하게 만들고 앉았어!”

“그 점에 대해선······ 으음, 나도 이쪽에 대해 많은 학식을 쌓았다 했지만 부질없는 것이었군.”

“그러니까 이델린인가 하는 땡땡땡이나 찬양하고 앉아있지. 씁.”


일우는 자리를 떠나며 투덜댔다.


“됐고, 오늘 만남은 아아아아---주 불만스러웠다는 것만 기억할게.”

“송구스럽군. 그대 같은 지혜를 가진 이를 제대로······.”

“시끄럽고, 지식 못 알아들으면 가르쳐준 거 실천이나 하고 있어. 재활용 정신. 알았어?”

“아, 알겠다.”

“나중에 숙제 검사할거야, 아로엔 학생?”


갖은 불평과 불만족스러움을 드러내며 아로엔의 거처를 빠져나온 뒤, 일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스카웃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 보고.”

[해당 대상의 심각한 해킹 취약점 포착, 백도어 감지, 3. 방화벽 약화, 키워드 기반 디도스 방식 공격 감지, 진단 중 발견된 해킹 로그, 153. 심각한 수준의 해킹 로그, 6.]

“젠장, 아예 대놓고 메인 타겟이구만.”

[요원의 발언 도중 감지된 해킹 디도스 트리거 키워드, 4 확인. 요원의 발언으로 인해 발동된 해킹 패턴 트리거, 2 확인.]


세 시간동안 일우는 아로엔이 어떤 단어에 반응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최면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덕분에 아로엔은 그 시간 내내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일우는 그 상황을 이해되지 않는 지식을 쏟아내서 혼란에 빠트린 것으로 교묘히 유도했다.

수고를 들인 성과가 있었지만, 결과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바이러스 백신도 없이 성인물 사이트 들어간 수준이구만.”

[요원의 비유, 윤리규범에 어긋남. 허나 적합한 비유.]

“이 정도로 아주 사람을 잘근잘근 최면을 걸었다는 건······ 아주 박살을 내버리겠다는 거네. 아니면 꼭두각시로 삼거나.”

[수집된 정보 통합 절차 진행중, 완료. 주 목표, ‘공주기사 아로엔’.]

“그래, 그걸 위해서 아예 지역 전체에 멘탈 터지게 만들 사건들을 쏙쏙 심어뒀고.”


실력 지상주의 인물이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면 항상 결말은 좋지 않게 흘러가고, 더군다나 자존심 강한 인간은 자기가 당했다는 사실에서 눈 돌리기 쉽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입는 심리적 타격으로 ‘방화벽’이 하나씩 무너지면, 점점 더 깊은 최면에 빠질 것이다.


“주민들도 공주 멘탈 터뜨리는 희생양 정도였겠지. 분명 공주 성격이면 죄다 처형하라고 했을 거고, 나중에 진실을 밝히면 피해자들을 자기 손으로 처형했다는 결과만 남으니까.”

[긍정. 해당 공격 성공 시, 심각한 방화벽 붕괴 요인으로 작용됨.]

“좋아, 무의식적으로 디펜스 하나 했군. 음, 장하다 인간 방화벽.”


정황을 알기도 전에 한 일이지만, 일우가 했던 민간인 보호 작업은 결과적으로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예상보다 규모가 훨씬 큰, 그것도 누군가를 파멸하기 위한 집요한 계획이라는 걸 깨달은 일우는 쉽게 마무리되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 덕에 여유가 생겼으니, 여기에만 줄곧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최면에 무지막지하게 약한 공주님 문제는 도시 머물면서 해결할 장거리 과제고, 보조 목표라고 쳐.”

[확인.]

“이제 내 일 볼 시간이야. 겸사겸사 걔 일 알아볼 수 있으면 알아보고.”


일우는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도시의 모험가 길드 쪽으로 향했다.

이 곳을 도착지로 설정한 이유는 카이옌에서 벗어나고 세론 왕국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도시 근처에도 던전이 있기 때문이다.

길드에 들어선 일우는 성큼성큼 접수원 아가씨를 향해 자신의 모험가 등록증을 들어보이며 말을 걸었다.


“자, 아가씨. 오늘 내가 처음 온 사람인데, 여기 길드마스터 성격은 어때?”

“나쁘진 않지만, 좋지도 않은 분이시죠.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죠?”

“내가 이웃 도시에서 왔거든. 아주 개같은 길드마스터한테 대접 못 받아서 말이야. 여기서도 그런 일 있을까 싶어서 그러지.”


접수원 아가씨의 눈에 일우의 등록증이 들어왔고, 이름을 확인하자 깜짝 놀랐다.


“아······ 아! 혹시 카이옌에서 오신 분이시죠?”

“그렇지.”

“아, 역시! 우 님이시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은 우 님에 대한 불합리한 대우가 절대 없다고 보장해드릴 수 있어요.”

“오, 그거 마음에 들어.”

“특히, 지금 우 님 같은 분들이 해결해주셔야 할 의뢰가 아주 많답니다.”

“오, 여긴 죄다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네.”


접수원이 손바닥을 내밀며 가리킨 길드 게시판은 일우가 받을 수 있는 일거리가 한가득이다.

하지만 일우는 여기서 의뢰나 하자고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난 던전에 가고 싶은데.”

“그게······ 저어, 규정상 우 님은 최하급 등급이시니······ 저희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얄미운 아가씨 같으니라구. 근데 내가 여기 오면서 뭔가 왕국 기사님들의 문제를 해결해줬다고. 길드 제도에 특별 공헌 같은 거 있잖아?”

“그건 또 기사단 분들이 검증을 해주셔야 해서 시간이······.”

“······애석하게도 던전은 임시 폐쇄되었습니다.”


접수원과의 대화에 끼어든 목소리에 일우는 고개를 홱 돌렸고, 거기엔 피로에 찌든 모습의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걸친 안경이 떨어질락 말락 하는 걸 봐선, 조금 전까지 격무에 시달린 모양이다.


“뭐어?!”

“진정하세요. 길드마스터입니다. 우 님을 핍박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정책이 그렇습니다. 저도 보내드리고 싶어요.”


‘연금술사 우’에 대한 정보는 이미 확보한 듯, 길드마스터는 양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보이며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다고 일우가 멱살을 붙잡는 걸 막지는 못했다.


“왜 문을 닫아!”

“······이델린 지방이 이렇게 난리 법석이라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던전에 들어갈 모험가들은 전부 산적이나 강도 때려잡으려고 돌아다니거나, 실종된 주민들 찾으러 개고생중입니다.”


이델린 지역의 길드마스터는 피로가 겹겹이 쌓인 눈두덩이를 꾹 누르며 게시판 쪽을 가리켰다.


“덕분에 기술 협력 요청 의뢰가 미친 듯이 넘쳐나고 있죠. 정비인력 과부화 때문에.”

“저런.”

“그래서 잘 오셨습니다! 카이옌 소문 다 들었으니 저희 좀 도와주십쇼!”

“싫어! 던전 문 열어!”

“안 된다니까요? 저희 좀 도와주세요오오오!”

“좀 도와주셔요오오오! 저희들도 좀 쉬고싶어요오오!”

“문을 열라고오오오! 내가 여기 뭐 때문에 왔는데에!”


이델린 지방의 모험가 길드가 일우를 격하게 반긴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정사정하는 길드 사람들을 뿌리치고 길드 건물 밖으로 나선 일우는 길드마스터에게 쌓여있던 피로가 옮은 것 마냥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좋아, 계획 변경. 그 최면술사, 곱게는 못 죽게 만들어주마. 감히 내 예정에 방해가 되는 걸 넘어서서 틀어막아?”

[현지 임무 변경, 해커 수색 및 보복. 보복 수준, 최고 수준.]

“좋아! 너도 나날이 발전하는구나. 최고 수준의 보복. 마음에 들어.”


이 난장판에 일우를 끌어들인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의 앞날은 이제 고통과 괴로움이 한가득 담겨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라도 일우가 그렇게 만들어버릴 테니 말이다.


작가의말


문을 열라고 말하는 건, 닫혀있다는 의미입니다. 던전도 문 열고 닫을 수 있습죠.


저는 제 단점을 압니다. 빠른 전개라는 건 제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도 이거 한 3분의 2에서 마무리될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분량이 확 올라오면 결국 빠른 전개가 되지 않겠습니까? 남들 5천자에서 1만자 정도면 끝낼 이야기를 1~2만자로 만들어버리지만, 결국 올라오는 분량이 두 배가 되면 속도는 똑같잖아요. 그쵸?

아닌가?

이게 얼마나 오래갈 지 장담은 못합니다만, 적어도 중간보스까지는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공모전 끝나기 전에 거기까지 진도를 빼야 하지 않나 싶거든요.


현재 상황으로 공모전은 뭐.....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슬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겠죠. 후, 주인공은 저런데 왜 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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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10. 모난 놈이 맞는다 [2] +3 21.06.17 2,548 88 18쪽
46 10. 모난 놈이 맞는다 [1] +4 21.06.16 2,587 90 15쪽
45 9. 모자람 없는 고민 [7] +5 21.06.15 2,588 96 19쪽
44 9. 모자람 없는 고민 [6] +2 21.06.14 2,606 83 13쪽
43 9. 모자람 없는 고민 [5] +3 21.06.13 2,637 90 17쪽
42 9. 모자람 없는 고민 [4] +7 21.06.12 2,723 99 12쪽
41 9. 모자람 없는 고민 [3] +8 21.06.11 2,873 95 18쪽
40 9. 모자람 없는 고민 [2] +8 21.06.10 2,906 86 15쪽
39 9. 모자람 없는 고민 [1] +7 21.06.09 2,993 95 14쪽
38 ?. 건드리지 마시오 +7 21.06.08 3,023 83 13쪽
37 8. 너만 빼고 모두 즐거워 [5] +7 21.06.07 3,056 99 17쪽
36 8. 너만 빼고 모두 즐거워 [4] +7 21.06.06 3,052 91 18쪽
35 8. 너만 빼고 모두 즐거워 [3] +6 21.06.05 3,052 82 21쪽
34 8. 너만 빼고 모두 즐거워 [2] +7 21.06.05 3,092 89 19쪽
33 8. 너만 빼고 모두 즐거워 [1] +2 21.06.04 3,268 74 18쪽
32 7. 공짜로 베푸는 고기는 없다 [4] +10 21.06.04 3,466 96 19쪽
31 7. 공짜로 베푸는 고기는 없다 [3] +9 21.06.03 3,497 92 28쪽
30 7. 공짜로 베푸는 고기는 없다 [2] +5 21.06.03 3,573 90 23쪽
29 7. 공짜로 베푸는 고기는 없다 [1] +7 21.06.02 3,696 101 15쪽
» 6. 문 열어 [4] +10 21.06.02 3,960 115 24쪽
27 6. 문 열어 [3] +8 21.06.01 3,915 113 24쪽
26 6. 문 열어 [2] +6 21.06.01 4,008 109 17쪽
25 6. 문 열어 [1] +5 21.05.31 4,390 91 18쪽
24 ?. 아직 계산 안 끝났어요 +8 21.05.31 4,611 121 26쪽
23 5. 여기 연금술사님 왔다 감 [2] +4 21.05.30 4,567 114 12쪽
22 5. 여기 연금술사님 왔다 감 [1] +4 21.05.30 4,555 11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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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4. 용사는 대량학살극 따윈 안 한다네 [4] +2 21.05.29 4,680 117 20쪽
19 4. 용사는 대량학살극 따윈 안 한다네 [3] +8 21.05.28 4,720 118 17쪽
18 4. 용사는 대량학살극 따윈 안 한다네 [2] +5 21.05.28 4,757 12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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