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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님의 서재입니다.

난 당하고는 못 살아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papercraft
작품등록일 :
2021.05.17 12:01
최근연재일 :
2021.10.06 12:49
연재수 :
1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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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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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1
글자수 :
946,637

작성
21.06.23 11:00
조회
2,382
추천
93
글자
10쪽

?. 소년과 소녀, 그리고 전설의 시작.

DUMMY

한 때 이 땅은 페니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마력의 근원지, 힘의 중심이라는 칭호까지 붙으며 세계의 중추라고도 불리기까지 한 곳.

허나 시대는 몰락하고, 문명은 부흥괴 쇠퇴를 반복해왔으며, 그 명성을 드높이던 자원은 고갈된 지 오래.

다만 이 메마르고 고갈되었을지라도 이야기는 전승되는 한 불멸이요, 샘솟으리라.

그리고 그 샘의 이름을 희망이라 부르고자 하는 이들의 갈망을 적셔 주리라.


-콰자자작---콰아앙--!


언제 세워졌을지도 모를 거대한 문.

세월의 무게는 흙먼지가 되어 그 입구를 숨겼고, 오랜 세월동안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하지만 기어코 그 문을 찾아낸 자가 있었고, 허락 없이 들어선 유적의 도굴꾼마냥 부수고 비틀어 문을 연다.

세월이 감춰둔 비밀을 파헤친 이는 자랑스러울 법 하다. 세상이 모두의 이름을 칭송하고 업적을 치하해도 모자란 법.

허나 그 위업을 달성해 낸 이는 소년이고, 상처 입고 피폐해진 채 비틀대며 오래된 통로에 발을 디딘다.


-털썩

“끄으······으······.”


한계에 도달한 듯 통로를 걷던 소년의 몸이 무너지며 그대로 켜켜이 쌓인 먼지 위에 자국을 남긴다.

이곳까지 도달하는 동안 그는 수많은 상처를 입었고,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다.


-쿠웅---!


소년은 온 몸이 찢어질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았고,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소리를 감지했다.

저 소리는 소년을 찾고 있는 자의 것.

지금 당장 일어나서 걸어야 한다.

너무 지치고 괴롭고 아프지만,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

이대로 영영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도, 그러기엔 소년이 짊어진 것은 너무 많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 모두가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난 용사가 아니야······ 콜록! 아니란 말이야······.”


부들거리는 팔을 지지대 삼아 소년은 일어났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게 아니다.

그저 그 헛소문에 가까운 전설만을 믿고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준 어리석은 어른들을 위해서였다.

그깟 용사가 대체 무엇이라고, 소년을 위해 희생했다.


“젠장······!”


피가 얼룩진 얼굴에 먼지가 더해진다.

먼지 때문인지, 자신을 향해 마지막 얼굴을 보여준 이들이 떠올라서인지, 아니면 눈가의 상처가 따끔한지 눈이 시큰거린다.

하지만 그 무엇 하나 씻어낼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소년은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나 많은 것을 흘렸다.

더 이상 흘릴 것이 있다면, 그의 꺼져가는 생명 뿐.

기나긴 복도를 걸은 끝에 소년은 알에 도착했다.

비석에 담긴 전설대로라면 이 안에 용사가 잠들어 있다.

소년은 그 속에 담긴 기적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전설대로······ 이 안에······.”


피로 얼룩진 손이 유백색 알의 표면에 닿자, 사방을 울리는 공명음이 퍼져 나오고, 이내 소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그 단어는 절망적이었다.


[암호를 말하시오.]

“암······호.”


겨우 도달했지만 또 다른 장벽.

전설에 그 어느 것도 알려진 것 없는 것.

소년의 희망은 절망이 되었고, 곧 분노가 되었다.


“몰라! 그런 건 없었단 말이야!!”

[확인되었습니다. 봉인 해제절차를 개시합니다.]

“어······?”


절규하듯 외친 그 말에 감화되기라도 한 듯, 알의 봉인이 천천히 풀려난다.

조금씩 금이 가던 알이 열리며, 그 안에 잠들어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신비한 은발 머리카락의 소녀.

소년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에 손을 가져가려던 찰나, 뺨에 손가락이 닿기 전 소녀의 눈이 천천히 뜨인다.

청명한 푸른 눈에 소년의 얼굴이 비춰졌고, 소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넌 누구?”

“전설의 비석을 따라왔어······ 네가 전설속의 그 사람이야?”

“······모르겠어.”


긴 잠에서 깨어난 것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러한 것인지 소녀는 공허한 대답을 할 뿐이다.

자신이 원하던 상대가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소년은 그것을 깨닫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제길, 어쩌란 말이야······.”


희생을 하고, 잃어버리고, 떠나보내며 이정표를 따라왔다. 허나 그 이정표가 가리킨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벌판.

그 속에서 소년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소년을 궁지로 몰아세우던 존재들이 밀어닥쳤다.


-쿠그그극--- 콰아앙--- 콰르르륵······.


[발견. 발견. 발견]

[명령, 부적합객체 수색 및 제거, 실행.]

[절차에서 벗어나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이가 헛된 시도를 벌였지만 성공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금속과 돌이 합쳐진 오래된 문명의 망령.

그들은 자아를 가지고 이 세계에 번성한 새로운 세계와 문화, 문명을 그릇된 것이라 정의내렸다.

소년의 세계는 저 기계의 망령으로 망가졌다.

저들을 물리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용사의 전설을 따라 길을 나섰다.

허나 여정의 결말은 모두를 잃고 혼자 남았고, 도착한 장소에서 만난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뜬 낯선 소녀 뿐.


“······지쳤어. 더 이상 뭘 할 기운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파멸하라.]

[해당 객체, 기준 초과, 폐기.]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재활용 과정 후 당신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기계들은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소년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녀는 천천히 손을 든다.


“잘 모르지만······ 기억이 떠올랐어.”


소녀의 말에 소년의 고개가 돌아간다.

꺼져버린 희망이라는 이름의 불씨가 다시 타오른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날 찾아올 사람이 있다고 했어.”

“······정말? 그 전설이 사실이야? 용사가 잠들어있다는 전설이······ 사실이야?”

“······.”

“맞지? 네가 그 전설에 나오는, 비석에 나오는 용사 맞지?”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소년은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제발 도와줘······ 네 힘이 필요해······.”

“난 용사가 아니야.”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기억을 끌어 모은다.

잠들기 전에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했던 정체불명의 인물이 소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듯 투영된다.


‘자! 신비한 소녀는 뭐가 필요하다? 은! 발!’

‘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전 은발이 아닌데······.’

‘깨어나면 넌 은발 소녀가 되는 거야. 그리고, 뭐 이것저것 챙겨줄게. 지식도 대충 주고, 힘도 좀 주고······ 힘은 좀 많이 줘야겠다. 아무튼 간에!’


노예로 팔려나갈 운명에서 소녀를 건져 올린 남자는 이 낯선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선택지가 없던 소녀는 남자의 말에 순순히 따랐고,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여놓았다.


‘깨어나면 너보고 도와달라는 사람이 있을 건데,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 나쁜 애다 싶으면 일단 패버리고 다시 자면 되고, 착하거나 불쌍한 애다 싶으면······ 뭐, 도와주던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말하는 나도 모르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굿 나잇!’


기억이 끝나고 현재로 되돌아온 소녀.

그 눈에는 자신을 이끌었던 남자 대신, 포악하고 흉흉한 기계 팔을 뻗어 모든 것을 찢어발기려는 광경만이 보인다.

그 순간, 소녀는 깨닫는다.

왜 그 남자가 자신을 여기로 이끌었는지.

무엇 때문에 소년이 자신을 깨웠는지.

소년이 말하는 용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날 찾아온 용사님을 위해, 내 힘을 빌려줄게.”


기나긴 잠에서 깨운 소년이야말로 소녀의 용사님이다.

그리고 용사님에겐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오랜 세월동안 잠들어있던 소녀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즈으우우우웅--- 치이이익---!


소녀의 손끝에서 일어난 마법의 힘.

기적과도 같이 소년을 위협하던 적들을 일격에 갈라버린다.


[문제 발생. 문제 발생. 문제제제제제제---]

[파손, 손상, 임무 수행 불가, 치직, 치지지직--!]

[귀하는 귀중한 자산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가했습니다! 이게 얼마나---즈즈즈즉!]

-끼기긱, 끼이이이이이이기긱---!!


요란한 금속 마찰음과 엉망진창으로 파편이 무너지는 소리.

소년의 두 눈에 보인 소녀는 기적과도 같고 희망처럼 빛나고 그 무엇보다 아름다워보였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소년의 가슴을 괴롭혔지만, 그보다 먼저 소녀가 손을 뻗으며 입을 연다.


“내 이름은 아이델. 네 이름은?”

“로······엔.”

“만나서 반가워, 로엔. 이제 나는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너를 도울게.”


소녀가 내민 새하얀 손과 소년의 때가 타고 피가 묻어 더러워진 손이 겹쳐진다.


“그게 내가 잠들어 있던 이유, 내가 구원받았을 이유일 테니까.”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이 교차한다.


“내가 너를 구원해줄게.”


소년과 소녀의 만남으로 이 세상에 새로운 전설의 첫 장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앞날은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 역경과 괴로움이 험준한 산맥과도 같이 펼쳐질 것이고, 그 길을 지나며 흘릴 눈물은 바다를 채울 정도로 서글프리라.

허나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믿고, 때로는 갈등과 오해라는 고비를 지나, 결국 싹튼 마음을 깨닫고 그 온기를 느끼기 위해 으스러지듯 끌어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녀가 잠들어있던 지점에서 정확히 10미터 밑에 왠 대머리 고자가 파묻혀 있다는 사실도 파묻어버릴 것이다.

만에 하나 기적과도 같은 확률로 그가 깨어나더라도, 이미 세상엔 막 용사가 된 소년과 그를 도울 소녀가 나타났다.

그를 기억해줄 사람도 없고,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작가의말

뜬금없이 주인공이 노에시장에서 소녀를 샀던 이유가 이겁니다.

그렇습니다, 주인공은 후대에 길이 남을 전설의 토대를 깔아버렸습니다.

참고로 암호는 ‘몰라’입니다. 주인공다운 센스죠.


소녀가 봉인되었던 위치에서 정확히 10미터 밑에 똑같은 알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대머리는 잠들어 있죠.

근데 여러분, 두 개가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게 되더라도 둘 중 누굴 고르겠습니까? 전설 속에 길이길이 남을 위업을 산처럼 쌓은 연금술사가 직접 손 써서 초강력 마도병기가 된 은발 미소녀랑, 그냥 대머리 중에 누굴 고르시겠냐구요.


후일담 시기는 딱히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게 몇 년 뒤일지, 몇십 년 뒤일지, 혹은 몇백 년 뒤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미래에 벌어질 일이고, 주인공이 그 시간대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주인공의 손길 하나하나가 대륙의 역사의 한 장을 채우는 겁니다. 와오!


아참, 제가 지난번에 중간보스 이야기 했었나요? 저 대머리가 중간보스 아니냐구요? 

에이, 누가 봐도 저건 일개 대머리입니다. 그냥 대머리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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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2] +2 21.07.11 1,932 73 17쪽
70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1] +8 21.07.10 2,042 86 15쪽
69 ?. 그 사람 찾으러 갑니다 +6 21.07.09 2,142 7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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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11. 고래가 난다요 [1] +3 21.06.24 2,408 75 13쪽
» ?. 소년과 소녀, 그리고 전설의 시작. +9 21.06.23 2,383 9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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