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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님의 서재입니다.

난 당하고는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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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작품등록일 :
2021.05.17 12:01
최근연재일 :
2021.10.06 12:49
연재수 :
136 회
조회수 :
358,680
추천수 :
9,781
글자수 :
946,637

작성
21.06.19 11:00
조회
2,545
추천
91
글자
22쪽

10. 모난 놈이 맞는다 [4]

DUMMY

랑키의 관심을 끊어낸 일우는 용사 검증을 핑계로 한 영규의 멘탈 박살내기 작업에 돌입했다.


“자! 전술적 감각 검증 시간이다!”

“그게 용사랑 무슨 상관이에요?”

“감점! 용사가 왜 무모한 전술을 채택할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니까! 왜 대군의 선봉에 서겠어? 그게 가장 유효한 전술이니까!”


영규가 취약할 부분을 집중적으로 두들겨 그의 무능력을 강조해 용사라는 것과 전혀 안 어울린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런고로 전술적 감각은, 용사라면 당연하게 지니고 있어야 하는 거지.”

“아니 그냥 마왕만 때려잡는 용사가 있을 수도 있지······.”

“전투에서도 전술은 필요하고, 단순히 육체적 능력에만 의존하는 머저리는 꼭 전술에 말려서 당하지!”

“히, 힘이 넘치면 그런 것도 안 통하잖아요!”

“네 몸 봐. 넌 힘이 넘쳐나니?”

“으윽.”


그 뒤로 일우는 스카웃을 통해 수집한 각종 전술서를 바탕으로 수많은 전략전술에 대한 질문을 했다.

당연히 영규의 대답은 시원찮은 말밖에 나오지 못했고, 일우는 격하게 서류철을 영규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팍!

“윽!”

“때려치워! 말이 되냐!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하, 하지만 충분히 변형해서 적용하면 가느······.”

“다른 세계의 군대가 무슨 전략전술을 쓰는지는 몰라도, 그게 현지에서 통용되는 게 아니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말했잖아요! 마법사를 활용하거나 비슷한 기술을 개발해서······.”

“그래, 말이야 쉽지. 군 마법사한테 시속 200km를 넘게 날아다니면서 화염 마법을 쾅쾅쾅 쏟아 부으라고 시켜봐. 아니면 최대속도로 동하는 중장갑 기마대 등짝에 달라붙어서 투사마법 쏘라고 시켜보라고.”

“그러면 충분히 돼요! 그러면 내가 말한······윽!”

-팍!


주워든 서류철을 다시 영규의 얼굴에 집어던진 일우는 영규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며 고함을 내질렀다.


“되겠냐! 머저리야! 그럴 능력이 되는 마법사가 뭐 하러 군대에 머무르고 있겠어? 모험가 길드에서 최고 등급 대우 받거나 캐피탈 의회에서 의장을 하고 앉았지!”

“그, 그렇긴 하지만······.”

“차라리 기사들한테 투석전을 하라고 시켜라! 그게 훨씬 가능성 있겠다!”

“그러면 되잖아요! 거 봐! 어떻게든 구현을······아야야야!”

“머어어엉처어어어엉아아아아아! 그럴 거면 기사놈들이 돌진해서 썰어버리면 되지 뭐한다고 그런 등신짓을 하겠냐고오오!”


일우는 영규의 귀를 잡아당기며 그의 귀에 고함을 질러댔다.

아무래도 영규는 현실에서 군대를 다녀온 모양이고 나름 이런 쪽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지만, 현대 지구의 전술이론은 검과 마법의 세계에선 대부분 헛소리 취급당하기 딱 좋은 것들이었다.

한참 밀착 압박을 하던 일우는 귀를 놓아버리고 손을 가로로 홱 그었다.


“알겠냐?! 네가 아무리 그쪽 세계의 전직 군인이라도 여기서 네가 아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으으······.”

“그런 정신머리로 무슨 용사가 되고 선봉에서 활약을 하겠다는 거야? 검 휘두르다 아군이나 박살 안내면 퍽이나 다행이겠다.”


서류철을 집어든 ‘연금술사 우’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쓱쓱 적고 혀를 찼다.


“아무튼 오늘도 감점! 쯧, 이대로 가면 넌 영영 용사고 나발이고 못 빠져나올 줄 알아!”

“그냥 풀어줘요오오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소용이 있지! 진짜로, 정말, 물론 그럴 일은 없더라도 네가 용사라도 이 꼬라지론 절대 못 보내! 넌 용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크윽!”

“감점! 감점! 감점! 감저어어어어엄! 이 마이너스야! 이게 승급 시험이었으면 넌 반영구적으로 시험장 출입 정지를 먹어도 모자랄 정도야!”


일우는 붉은 색으로 ‘감점’,‘실격’,‘자질부족’,‘모자람’,‘미달’이라는 단어로 도배된 서류를 영규의 얼굴에 내밀었다.


“이걸 보라고! 적색용사도 아니고 이게 뭐냔 말이다!”

“마, 만회할 여지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널 용사라고 인정할 단 하나의 긍정적인 요소라도 보이란 말이다!!”

“으으······.”

“오늘은 끝! 내일 다시 올 때까지, 네가 용사라는 걸 내가 믿을 수 있는 구석이 뭐가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 검증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아, 알았어요······.”

“목소리가 작잖아아아아! 세상 어느 용사가 목소리가 그렇게 개미만하냐고오오오!”

“아, 알았다구요!”


감옥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일우는 영규를 끝없이 압박했고, 지상으로 빠져나오자 손을 툭툭 털었다.


“좋아, 오늘 분량은 이걸로 끝.”

[업데이트 패키지 구성 준비, 정보 요청.]

“뭔데. 말해봐.”

[집중 주시 대상, ‘머저리 1호’에 대한 작전 진행 속도, 스카웃의 사고회로 상 권장 속도 대비 27% 수준.]

“왜 빠르게 조지지 않냐고? 굳이 이렇게 느릿느릿 진행할 필요는 없어보여?”

[긍정]


스카웃의 지적대로 일우는 멘탈을 갈아버리는 것 치곤 꽤 온건하고 느리게 일을 진행하고 있다.

허나 다 이유가 있었다.


“이유는 세 가지야. 첫째, 그 녀석을 여신이 지켜보고 있다면 함부로 손을 쓰면 안 돼. 순수하게 말빨로 밀어붙여서 스스로 무너지게끔 만들어야 해.”


상대는 바로 여신이 직접 고른 용사고, 본인이 했던 말에 따르면 스탈리스에서 홀로 시련을 이겨내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우는 그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다른 세상으로 끌고 온 존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안전장치를 준비해뒀을 수도 있고, 지금도 여신의 감시망 아래에 놓여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가급적 일우의 정체가 들통 나지 않도록 이런저런 명분을 대며 조금씩 정신을 갉아먹으려는 것이다.


“둘째, 섣불리 관두게 만들면 나중에 각성이다 뭐다 정신 차리는 전개가 벌어질지 몰라. 빨리 조지면 그만큼 후환이 남아. 그래서 공들여서 천천히, 자기 의지를 스스로 박살내도록 만드는 거야.”


모든 것은 관성이 작용한다.

사람의 행동이나 정신도 마찬가지.

게으름에 젖은 이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영규를 천천히 무력감 속에 가라앉혀야 한다. 그래야 훗날 ‘용사님이 각성하기 딱 좋은 상황’에서 손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셋째, 그 캐피탈 의원인가 뭔가 하는 헐벗은 양반이 아직도 안 떠나고 있어. 거기에 가슴만 더럽게 큰 마법사도 나한테 들러붙었지. 내가 작업 다 쳤다고 방심했을 때 그쪽들이 혹시라도 채갈지도 몰라. 그러면 다 망하는 거야.”


게다가 영규를 주시하는 사람이 남아있다.

랑키는 관심을 끊겠다고 말한 뒤에도 아직 이곳에 남아있고, 혹시라도 일우가 영규를 놓자마자 채어가려고 벼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은 붙들고 있을 명분이 충분하기에, 최대한 놓아주는 시기를 늦추고 있었다. 랑키가 제 풀에 지쳐 돌아가거나, 관심을 완전히 끊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 계속 붙들고 있는 쪽이 훨씬 안전한 선택이다.


[확인. 업데이트 패키지 정보를 갱신합니다.]

“거기다 중요한 이유는 아니지만, 어차피 시간 들여서 하는 작업도 있으니까. 당분간 여기서 급하게 떠나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 최대한 느긋하게 가자고.”

[해당 지역에 상주 중인 명분 관련 이슈 추가 시, 대응으로 인한 지연이 우려됨.]


다만 스카웃의 지적대로, 일우가 변명으로 내세웠던 그 연구소가 발견되면 여기에 아예 발목을 붙잡히게 되어버린다.


“그것까지 고려해서, 뭔가를 준비중인 거야. 프로세스센터를 내가 그냥 깔려고 하는 게 아니야.”

[확인. 해당 사항을 반영한 변수 계산 중. 완료. 작전 진행에 차질을 주는 요소 검증 결과, 사소한 문제로 재분류됨.]

“나도 다 생각하면서 움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일우는 스카웃과의 대화를 마치고 야드 시로 들어서는 길목의 한 언덕에 도달했다.

헐벗은 지형인데다 매장된 광물도 없는 언덕은 무엇 하나 없는 휑한 장소였다.

어제까지는 말이다.


“이게 대체 뭐람.”

“어제까지는 여기에 아무것도 없었잖습니까?”


휑한 언덕 꼭대기에는 뭔가 거대한 탑 같은 구조물이 세워졌고, 거기엔 페니카 지부 길드마스터와 랑키, 에멜린, 그리고 몇몇 대머리와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춰선 여행자들이 몰려있었다.


“마스터, 이 괴상망측한 거 어쩔 생각이우? 어? 무슨 사람 놀리는 거도 아니고······.”

“아니, 이거 내가 듣기론 이 땅을 우 님이 사들였다는 소문만 들었는데······ 그 분이 이런 걸 만들었다고?”


길드마스터들은 이 ‘구조물’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모험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곤혹스러운 시선으로 현장을 바라보았다.

랑키의 경우엔 이 구조물의 형태와 내부 원리를 보고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세상에······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골렘이라니. 대체 이런 게 어느 순간에 나타난 거지?”

“페, 펜토락시움 덩어리? 아니, 펜토락시움이 이만큼 크게 나왔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겹쳐 쌓은건가?”


곁에 서 있던 에멜린은 탑의 재질을 보고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겉보기엔 단순히 석재를 쌓아 만든 탑 구조물이지만, 탑 전체가 거대한 마력소재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오기도 전에 이 구조물의 등장을 알아차린 이들이 몰려있다는 걸 확인한 일우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 ‘연금술사 우’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두 팔을 좍 펼치며 군중에게 다가갔다.


“완성이 되었다는 소식이 슬슬 퍼지나보군! 그래, 잘들 봐라! 이몸의 족적을 미리 기념하는 예술혼을!”

“예술······?”

“그래! 예술 조형물이지. 이름하야, ‘솟아오르는 희망’!”


일우는 자랑스럽게 ‘조형물’을 가리켰지만, 그걸 지켜보는 길드마스터나 랑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이거 저희 놀리려고 만든 거 아닙니까?”


구조물의 형태는 거대한 기둥과 그 위에 솟아난 꽂혀있는 스탈리움 막대, 그것도 매우 유연하고 가늘어서 바람 가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탑 끝에 난 머리카락 같은 모양새였다.

게다가 구조물의 주변에는 각종 금속계 마법소재로 만든 동상 비슷한 것이 붙어있었는데, 하나같이 울끈불끈한 대머리 남자들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머리 동상들은 경쟁하듯 탑을 기어올라가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마치 저 탑끝에 난 스탈리움 머리카락을 자기가 차지하겠다는 듯이.


“꼭대기의 머리털을 쟁취하려는 대머리를 형상화한 작품입니까. 예술적 가치는 상당하군요.”

“언니야? 용사 때문에 머무는 거야 이해를 하지만 그런 식으로 우리들을 우롱하면 재미있수?”


이 ‘예술품’의 모습에 별 정신적 타격을 입지 않은 랑키는 무덤덤하게 감상평을 남겼고, 길드마스터를 비롯한 대머리들을 대놓고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문제는 당분간 손을 떼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지금은 지극히 개인적인 업무 때문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만······.”

“아까워! 펜토락시움을 이런 데 낭비하다뇨!”


하지만 그들의 언쟁은 에멜린의 경악에 찬 외침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연금술사 우’는 뭐가 대수냐는 듯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쟨 또 왔네.”

“마력신호 증폭제로서 가치가 어마어마한 자원을 이런데 쓰시다뇨! 이건 완전 낭비에요! 차라리 절 주세요! 다른 유용한 데 쓸 아이디어가 잔뜩 있어요!”

“그 요청은 거절한다.”


칼같이 에멜린의 부탁을 거절한 ‘연금술사 우’는 군중들을 물려세우고 탑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뒤, 군중들을 돌아보며 탑을 가리켰다.


“이건 이 지역에 사는 무수한 자들의 투쟁을 형상화한 것이자 그들의 숭고한 여정을 후대에 길이길이 남기기 위함이니까!”

“······어르신, 저희들이 보기엔 그냥 대머리 우롱입니다.”

“하지만 내가 성과를 이룩하면 이건 기념물이 되지!”

“그 발모제는 아직 실마리도 잡히지 않았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길드마스터와 랑키의 말에 군중들도 동감하는 표정이었다.

허나 ‘연금술사 우’는 확신에 가득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힘있게 말했다.


“어허! 나는 한다! 그게 오늘일지 내일일지 혹은 머나먼 훗날인지가 다를 뿐이지! 내가 만들어낸다는 결과는 변함이 없어!”

“정말입니까? 우 님만 믿고 이 지역을 헤매는 수많은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그 말이 정말이어야 합니다.”


길드마스터는 뒤에 선 대머리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울먹임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물론 ‘연금술사 우’는 그런 표정에 흔들리는 인물이 아니었고, 냉철하게 대꾸햇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말던가. 내가 뭐 너희들 탈모 치료를 못하면 내 손모가지를 날린다고 말이라도 했어?”

“그, 그렇지요······.”

“공식적으로 나는 너희들한테 의뢰만 내걸었고, 그 의뢰로 할 일이 너희들한테 매우 이득이 되는 거야. 그걸 잊으면 곤란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가 발모제가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길드마스터와 대머리들은 그냥 입 다물고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자세가 옳다는 듯 ‘연금술사 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멜린을 가리켰다.


“그래서 내가 저 가슴만 큰 아가씨를 대놓고 무시하는 거야.”

“저기, 그러지 마시고 제게도 관심 좀······.”

“시작부터 선을 넘으면 난 끝이야. 말도 되는 소릴 하고 앉았어.”

“으으······.”


당분간 손 잡아서 이득이 없는 사람은 무시하기로 작정한 일우는 대놓고 그 말을 했지만, 에멜린의 반응을 봐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다.


“자! 다들 이제 내 예술의 의도를 알겠지? 그럼 천천히들 내 예술 세계를 감상하고, 박수도 치고, 내가 잘난 놈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더 마음속에 새겨두라구.”

“······어, 저희들은 바빠서.”

“가······ 갑시다. 연구소 찾으러들 가죠.”


트라우마를 계속 마주하라는 일우의 권유에 길드마스터와 대머리 모험가들은 황급히 물러섰다.

‘연금술사 우’의 정신상태가 멀쩡하지 않다는 걸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 이상,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뿐이다.

대머리들이 물러간 걸 확인한 일우는 랑키를 돌아보며 슬쩍 그녀의 의중을 떠보았다.


“근데 왜 너는 여기 머물고 있어? 여기 머무는 건 싫다더니 노출증에 드디어 눈이 뜨이셨나?”

“······좀 더 신중해져보려 합니다.”

“뭘.”

“용사 건 말입니다.”


랑키가 포기했던 용사를 다시 언급하자 일우는 미간을 좁혔다.


“개인적으로 조사해보니 놀이터에 과하게 빠진 부유층의 자식이나 은둔한 마법사들의 목록에서 그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극히 낮은 가능성이 적중할 수도 있는 법이죠.”

“뭐 그러던가. 당분간은 나도 걜 가둬놓고 희망고문용으로 써먹는 중이니, 그 와중에 살짝 몇 개 더 검사를 해 보지 뭐.”


갑작스레 랑키가 마음을 바꿨지만, 일우는 이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히죽 웃으며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진짜로 걔가 용사라면, 이정도 시련이야 하품일 거 아냐. 그치?”

“그렇긴 합니다. 만일 진짜 용사라면······.”

“어차피 진짜도 아닐 텐데.”


곁에 서 있던 에멜린이 랑키의 바램에 재를 뿌리자, 랑키는 에멜린을 째려보았다.


“시끄러워. 성과도 못 내는 반푼이가.”

“어머어? 성과가 안 나와서 가짜일 게 뻔한 용사나 붙들고 계시는 쪽은 누구시더라?”

“환경연구랍시고 손댄 지 몇 년이 지난 주제에 아무런 결과도 못 뽑아내는 너보단 나아.”

“흥! 나는 지금도 자료가 쌓이고 있어. 다만 충분히 발표하고 정리하지 못했고, 비교표본이 부족할 뿐······.”

“아아아아! 시끄러워! 내 예술혼 앞에서 너희들의 그 사소한 감정싸움은 집어 치워! 나의 위업을 미리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라 니들끼리 물고 뜯으라고 만든 줄 아냐!!”


두 사람의 신경전이 시작되려는 찰나, 그들의 사정 따윈 아무런 관심도 주고 싶지 않은 일우는 그렇게 악을 쓰며 말을 끊어버렸다.

다음 날, 영규의 멘탈을 갈아버리기 위해 일우는 감옥으로 향하며 홀로 중얼거렸다.


“애석하게도 네가 기다리는 그 용사는 평생 안 나와. 시간 지날수록 그 녀석 멘탈은 가루가 될 거고, 용사로 재기는 고사하고 용사 바라보는 구경꾼 1호나 되겠지.”

[긍정.]

“좋아! 오늘도 힘차게 가보자고!”


한껏 기합을 밀어넣은 일우는 한껏 소리를 지르며 영규가 갇혀있는 감옥으로 들어왔다.


“자! 오늘도 시작되었다. 네가 정말 그 용사가 맞는지 알아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갈팡질팡하는 조사 시간이 돌아왔다!”

“······.”


하지만 일우가 등장했지만 영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슬슬 정신이 망가질 조짐이 보이자, 일우는 히죽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정신 똑바로 차려. 보통 용사들 기록에서 이런 감금 및 취조는 단골 순서라고. 네가 정말 다른 세계에서 온 용사고, 아직 용사질을 할 생각이라면 이 정도는 버텨야지.”

“······.”

“그렇게 입 다물고 있어봤자 소용없어. 내 검증은 멈추지 않는다. 내가 결론을 낼 때까지! 그리고 내 결론이 나오려면 좀 걸릴 거야.”


하지만 일우가 계속 말을 걸어도 영규는 별 반응이 없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일우는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모종의 변수로 진도가 급격히 나가버리면 그것도 상당히 곤란할 뿐더러, 여신 누아즈가 손을 쓴 결과일지도 모른다.


“왜 말이 없어? 정신이 나갔나? 뭐 여신이 영혼을 거둬가기라도 했나?”

[주시대상, 수면 상태.]

“······얌마!”


그냥 단순히 푹 잠든 것이라는 분석 결과를 듣자, 일우는 거칠게 영규의 다리를 걷어찼다.


“흡! 으으으, 아으······.”

“정신상태는 용사감이다. 이 상황에서 느긋하게 자고나 있고.”

“아니······ 그래도 이 상황에서 할 일이라고는 자는 거 밖에······으아아!”

“내애가아아아 너한테에에 들이는 노고를 봐서라도오오오 진지하게 좀 임하란말이다아아아아아!”

“으으윽!”


두 볼을 잡고 죽 잡아당겨 영규를 잠에서 깨운 일우는 한층 또렷해진 눈망울이 된 영규를 바라보았다.


“하루 빨리 네가 용사인지 사기꾼인지 글러먹을 개쓰레기인지 분류를 끝내야 할 거 아냐. 진짜 용사면 날 감명시켜서 이 위기를 극복을 하라고. 어?!”

“저어, 그거 말인데요······.”

“그거 뭐. 왜. 특별한 자기증명수단이라도 떠올렸어? 꿈에서 여신이 알려주디?”


‘연금술사 우’가 빈정거리자, 영규는 주저하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 갇히고 나서 아저씨한테 이런저런 소리 들으니······ 별로 용사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그게 말이 되냐! 여태까지 네가 했던 소린 다 뭐가 돼!”


영규의 태도가 바뀌었지만 일우는 곧바로 그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연기는 디테일이 생명이고, ‘연금술사 우’는 자기가 꽂힌 안건에 대해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캐릭터다.

하루아침에 상대의 말이 뒤바뀌더라도 자기 일은 밀어붙이는 사람이다.


“정신 차려! 여신이 너한테 왜 이런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었겠니? 어?! 내가 바로 용사의 각성이나! 스승······.”

“······.”

“······은 안 해! 가르쳐주기 귀찮아! 아무튼 뭐 그런 거 있잖아! 용사의 전설에서 막 그렇고 그런, 아무튼 중요한 인물!”


‘연금술사 우’가 ‘용사라고 주장하는 소년’을 가둬둔 이유는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확실한 건 그가 용사가 진짜인지 아닌지 검증하는데 온갖 정성을 쏟아 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우는 그 상황에서 나름의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다분히 개인적이고 쓸데없지만 그럴싸한 설정을 덧붙였다.


“난 그런 게 하고 싶다고! 그러니 이 짓거리를 하지!”

“용사는 안 해요?”

“하고야 싶지! 근데 귀찮아!”

“······.”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줘라 아주 지긋지긋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보여준 ‘연금술사 우’의 정체성 중 하나는, 바로 유명세였다.

실력만큼의 명성을 가지는 게 옳다는 사상을 가진, 살짝 정신 나간 연금술사.


“난 내가 하고 싶은 거만 할 거고, 난 유명해지고만 싶다고! 역사에 언급은 되고 싶어! 그러면 뭐겠니?”

“그, 글쎄요.”

“바로 너에게 시련을 주고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거지! 와오!”

“그러려고 절 여기 붙들어놓은 거에요? 그것 때문에?”

“자, 여자인지 남자인지 정체성이 불분명한 꼬마야? 잘 생각해봐. 네가 시련을 극복하고 밖에 나가는······.”

“······그, 그거 말인데요.”


‘연금술사 우’가 쏟아내던 말을 듣던 영규는 슬쩍 얼굴을 붉히며 말을 꺼냈다.


“그거, 뭐, 왜. 말해봐. 빨리.”

“저 그냥······ 어차피······ 남자로서는 이 세계에 있지 못하는 거잖아요. 그쵸?”

“그래. 그건 잘 아네. 깨졌지. 와장창.”

“그으러면 말이죠오오······.”

“말이죠 뭐.”


한참 주저하던 영규는 얼굴을 붉혔다.


“혹시, 저······ 여자로 만들어주실 수는······ 없어요?”

[경고! 집중 주시대상, ‘머저리 1호’의 급속 정신붕괴 징후 포착! 작전 계획에 심각한 문제 발생!]


영규의 멘탈을 박살내는 건 계획에 있었지만, 영규가 갑자기 미쳐버리는 건 계획에 넣지 않았다.

영규를 이런 식으로 만들 계획은 있었지만,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만들어달라는 소리를 할 줄은 예상도 못했다.


“허, 망할.”


일우는 자신이 연기하던 캐릭터인 ‘연금술사 우’의 정체성을 순간 망각해버리고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작가의말

예, 사실 주인공이 대충 붙잡은 용사를 고츄 있는 여자애나 뭐 성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그런 녀석으로 마개조해버리는 플랜은 있었습니다. 

‘미소녀를 끼고 희희낙락할 너에게 영영 그런 거랑 담 쌓도록 날려버리겠다! 용사는 개뿔! 넌 용사도 남자도 아니고 그냥 암컷일 뿐이다!’, 뭐 그런 마인드죠.


하지만 말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걸 해주면 그게 과연 복수일까요? 자기가 스스로 ‘호에엥 저는 암컷이에요’라고 주장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인공의 계획이 엉뚱하게 조져졌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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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하고는 못 살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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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14. 코랄해방전선 [1] +4 21.07.17 1,675 57 13쪽
76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7] +5 21.07.16 1,681 65 18쪽
75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6] +3 21.07.15 1,688 56 13쪽
74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5] +5 21.07.14 1,778 59 17쪽
73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4] +5 21.07.13 1,779 61 15쪽
72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3] +4 21.07.12 1,914 63 16쪽
71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2] +2 21.07.11 1,932 73 17쪽
70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1] +8 21.07.10 2,042 86 15쪽
69 ?. 그 사람 찾으러 갑니다 +6 21.07.09 2,142 72 16쪽
68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8] +6 21.07.08 2,039 72 14쪽
67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7] +5 21.07.07 2,065 74 16쪽
66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6] +6 21.07.06 2,050 77 12쪽
65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5] +8 21.07.05 2,047 88 13쪽
64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4] +3 21.07.04 2,051 76 13쪽
63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3] +4 21.07.03 2,040 71 15쪽
62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2] +7 21.07.02 2,085 77 13쪽
61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1] +5 21.07.01 2,119 79 13쪽
60 11. 고래가 난다요 [7] +4 21.06.30 2,126 76 20쪽
59 11. 고래가 난다요 [6] +4 21.06.29 2,083 72 15쪽
58 11. 고래가 난다요 [5] +3 21.06.28 2,123 72 13쪽
57 11. 고래가 난다요 [4] +4 21.06.27 2,140 70 14쪽
56 11. 고래가 난다요 [3] +1 21.06.26 2,189 70 13쪽
55 11. 고래가 난다요 [2] +3 21.06.25 2,227 79 13쪽
54 11. 고래가 난다요 [1] +3 21.06.24 2,408 75 13쪽
53 ?. 소년과 소녀, 그리고 전설의 시작. +9 21.06.23 2,382 93 10쪽
52 10. 모난 놈이 맞는다 [7] +3 21.06.22 2,403 77 18쪽
51 10. 모난 놈이 맞는다 [6] +6 21.06.21 2,430 69 18쪽
50 10. 모난 놈이 맞는다 [5] +8 21.06.20 2,473 79 22쪽
» 10. 모난 놈이 맞는다 [4] +13 21.06.19 2,546 91 22쪽
48 10. 모난 놈이 맞는다 [3] +1 21.06.18 2,580 8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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