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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님의 서재입니다.

난 당하고는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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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작품등록일 :
2021.05.17 12:01
최근연재일 :
2021.10.06 12:49
연재수 :
136 회
조회수 :
358,762
추천수 :
9,781
글자수 :
946,637

작성
21.06.20 11:00
조회
2,473
추천
79
글자
22쪽

10. 모난 놈이 맞는다 [5]

DUMMY

이렇게 되면 안 된다.

일우의 계획 중에는 복수도 있었고, 용사질 하며 미소녀와 뭔가를 할 생각이 가득한 머저리에게 딱 적합한 복수도 있었다.

아예 남자구실도 못하게 만들어서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게 만들 예정이었다.


“아, 아니면······ 그냥······ 여기서 머리카락만 길러도······여자아이 같이 되지······ 않을까요?”


헌데 그 계획을 본인이 원하게 되면, 그건 복수가 아니라 자비가 된다.

일우가 원하는 건 복수지, 영규에게 새로운 인생의 문을 활짝 열어주려는게 아니었다.


“얌마! 정신 차려!”

“그치마안······ 더 이상 용사 같은 거 하기 싫단 말이에요오······ 히잉.”

“돌아버렸어? 어? 돌아버렸냐고! 사내새끼가 갑자기 왜이래!”

“어차피 남자도 아니라고 다들 비웃을 텐데.”


남성에게 있어서 소중한 신체부위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위에 있고 다른 하나는 아래에 있다.

그 아래쪽을 상실했다고 인식한 것도 모자라 일우에게 정신적 압박으로 남자로서 제구실도 못하는 모질이라고 계속 압박을 당했으니, 그의 정신 중에서 이쪽이 먼저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그······ 말씀드리기 좀 그런데······ 사시이이일······.”

“사실 뭐.”

“제가 살던 세계에서도 가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


혹은, 원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그래서 외형도 최대한 미소녀같이 꾸민 거고······.”


단발 미소녀인지 그냥 미소년인지 헷갈리는 영규의 외형 또한 그의 비뚤어진 욕망이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그 욕망을 틀어막던 정신력이 박살났으니, 아예 대놓고 욕망에 굴복한 것이다.

다른 이들이라면 식욕이나 색욕, 권력욕의 비뚤어진 발현이었겠지만, 이 속알맹이부터 글러먹은 양반은 변신욕구였다.

미소녀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욕구.

상황을 얼추 파악한 일우는 두 손으로 서류철을 곱게 잡아 영규의 머리를 낼쳤다.


“흐아!”

-빡!

“끄악!”

[집중 주시 대상, ‘머저리 1호’에게 심각한 물리적 피해. 순수 피해 추정량, 사망 가능.]


머리통을 터뜨리고도 남을 강렬한 힘이 영규의 머리통을 강타했지만, 이미 죽지 못하도록 손을 써두었기에 영규는 목숨을 위협하는 강렬한 일격에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끝! 당분간 끝! 검증 따윈 없어! 이게 뭔 놈의 용사야! 감! 점! 아니, 낙! 제!”


디테일을 위해 일우는 기절한 영규를 향해 그 말을 외친 뒤 빠져나왔다.

허나 감옥을 빠져나오고 지상에 도달했을 때, 자신이 괜한 짓을 해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 꼴 되도록 아무 짓도 안하는 거 봐선, 처음부터 관리할 생각도 없고 몰래 지켜보는 것도 없는 게 확실해.”

[긍정. 관리자 감시체계 확보 시 예상되는 개입 및 관리 필요 상황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개입 흔적 발견되지 않음.]

“젠장, 이렇게 될 줄은 예상을 못 했는데. 외형을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게 손댔을 때 예측을 했어야 했어······.”

[해당 영역에 대한 예측은 현 요원의 정보 수집 자산 역량 상 불가능함.]

“······그래서 상식적인 선으로 접근을 했지만, 상대가 맛이 간 놈이라는 고려를 전혀 안 했어.”


보편적인 사람의 심리를 고려해서 행동했지만, 애초에 용사랍시고 끌려온 네 사람은 일반인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이 상황은 일우가 통제 가능한 영역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고, 만회의 여지가 있다.


“뭐, 좋아. 어차피 용사라는 놈들이 일반인이랑 거리가 한참 먼 게임 폐인놈들이라는 걸 깜빡한 건 내 실책이니까. 이번 건에서 그 점을 배우면 돼.”

[긍정. 현 상황은 향후 작전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정보자산이 될 것으로 예상됨.]

“문제는 말이지······ 내가 그 놈을 위해 준비했던 게 전부 쓸모 없는 게 되었어. 열 받게도 말이야.”


일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이내 분노가 끓어오르는 걸 주체하지 못하고 악을 썼다.


“내가 그렇게 말이야, 어? 정성스럽게 엿먹여주려고 했던 게 정작 그 자식이 입 떡 벌리고 먹여주길 기다리던 게 되어버렸단 말이야. 이러면 뭐가 돼? 복수가 아니라 자선사업이 되는 거잖아!”

[해당 계획의 대대적 수정이 필요함.]

“그래! 당연히 뜯어 고쳐야지. 그 자식이 절대 원하지 않을 거랑, 그리고 영영 용사짓도 못하게 어딘가에 처박아 버릴 거야. 일단 살려둔 채로.”

[집중 주시대상, ‘머저리 1호’에 대한 감금 계획은 비추천함.]

“왜.”

[배후 세력의 주기적 보고 및 점검 시 확인된 변동사항을 통해 고의적인 방해세력의 징후를 감지할 가능성이 있음]


스카웃의 말을 들은 일우는 다시 한번 기분이 착 가라앉는 걸 느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좋아, 그러면 이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그거네. 일단 대체 계획 설립하고, 그 녀석을 안 들키게 어딘가에 처박아 둘 방법을 찾아야겠어.”


홀로 중얼거리던 일우는 어느 새 상업 거리에 들어섰다.


“좋아, 새로운 발상을 떠올리는 데엔 이런저런 걸 구경하는 게 최고지. 좋은 발상은 내 머리 속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의외로 남의 것을 적당히 고치는 것에서 시작하니까.”


영규를 엿 먹이기 위한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일우는 상업 거리를 쏘다니려 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보이는 건 별로 창의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의 기분을 즐겁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뭐야 저건?”

[노예 매매장으로 추정됨.]

“본인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인력거래시장이다 그거구만.”


사람이 사람을 돈 주고 사는 건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특히나 민주주의다 평등주의다 보편적 인권이다 하는 사상을 배우고 자란 일우로선 언짢기 짝이 없는 일이다.

혹은, 그걸 보고 영 재수 없는 상황을 떠올렸거나.


“······꼭 저런 예쁘장하고 사연 있어 보이는 여자애랑 엮여서 용사 각성하는 상황도 있었지? 씁. 진짜 그 새끼를 어쩌면 좋냐.”

“자아! 다음 노예! 14세 소녀! 전 귀족 가문의 영애였으나 현재는 이름 모를 노예!”

“뭐, 그런 일 일어날 것 같진 않지만. 그냥 평범하게 망한 집 자식이 팔려온건가 보네.”

“톨라의 바로 그 몰락 마도사 귀족! 그 혈육이 바로 여기에! 정통 마도사의 혈통이 보장하는 소녀! 당연히 후손을 가진다면 마도사의 가능성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

“제기랄, 그런 배경설정 붙이지 말라고. 안 그래도 암컷이라고 주장하는 불발탄 같은 놈을 어째야 할지 고민인데 그런 애가 근처에 있으면 뭔 일이라도 생길 것 같잖······.”


노예상인의 매물 영업에 홀로 중얼거리던 일우는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지금 엄청나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백업 플랜.”


사연이 넘쳐흐르는 귀족 영애 출신 노예 소녀를 통해 꼬인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아이디어를 떠올린 일우는 경매장 쪽으로 다가가며 소매에서 뭔가를 잡았다.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신품 노예! 자아, 이번 상품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나다!”

“엇?”


최근 페니카 지역을 뜨겁게 달군 ‘연금술사 우’의 등장에 노예시장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우는 막 경매장에 등장한 노예 소녀를 가리켰다.


“걔 내놔.”

“어, 저, 여기는 경매자······.”

“지금 내 심기는 불편하고 내 눈에 거슬리거나 날 더 불편하고 언짢게 만드는 놈이 있으면 어떻게 만들어버릴지 장담 못 해.”


다른 건 연기였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딱 망한 상황을 보완할 훌륭한 작전의 중요한 부품이 될 사람이다. 저 소녀가 다른 이에게 팔려가면 일우는 다시 자신의 머리를 쥐어 짜야 한다.

허나 노예상은 순순히 일우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 당신이 아무리 좀 유명세를 탔다고 해도 이건 엄연히 허가받은 거래요!”

“그러니까아, 돈 주고 산다고. 머저리야? 내 말 이해를 못하니? 즉시구매! 이런 개념 몰라?”


게임에서 쓰이는 용어고, 스탈리스에선 안 쓰는 용어다.

당연히 노예상은 모른다는 표정이었고, 한숨 푹 내쉰 ‘연금술사 우’는 노예가 올라서 있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 막 입찰 경쟁을 시작하려던 이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야! 나랑 입찰경쟁 붙을 놈! 당장 나와라! 참고로 난 얘를 당장 살 생각을 했고, 그 생각 변함이 없어. 빨리 나와. 그리고 네가 낼 수 있는 금액을 모조리 싸들고 와. 그거 두 배 내놓고 데려갈 테니까.”


그 말을 하는 일우의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고, 막 어린 여자아이를 사들여 이것저것 할 생각이 넘쳐 오르던 이들은 잠자코 손을 내렸다.

경쟁자들을 손쉽게 날려버린 일우는 노예상을 돌아보며 품 속의 금괴 덩어리 하나를 집어 던졌다.


“됐지?”

“어우! 무, 물론입니다요. 헤헤헤, 즉시 구매라니, 뭐 자기 거라고 정해두신 분께서 그러시니 어쩌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야. 자존심 어쩌고 하면서 나한테 안 판다고 했으면 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거든.”

“뭘······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나한테 물건을 안 판다면, 내 눈에 보일 필요가 없으니······ 콰앙!”


그 말을 들은 노예상은 식은땀을 흘렸다. 여러 경로를 통해 듣는 각지의 소식에서는 그가 폭발하는 뭔가를 만들어내는데 탁원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정보는 소문으로 듣는 게 최고고, 직접 겪지 않는 편이 좋다.

그렇게 삽시간에 사연 있는 소녀를 구매한 일우는 팔짱을 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꼬마야, 난 널 인본주의나 동정심으로 산 게 아니란다. 조금 전에 떠올린 기가 막힌 발상이 있는데, 네가 딱 거기 어울리거든.”

“······?”


몰락한 가문의 영애는 자신에게 몰아닥친 시련에 절망해버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거액을 주고 그녀를 산 ‘주인님’은 그런 소녀의 결심을 흔들리게 만들 말을 쏟아냈다.


“넌 지금부터 당분간 아무것도 안하고 옴짝달싹 못한 채로 있어야 해. 언제 깰지도 모르고, 당연히 누가 구해주기 전까진 영영 파묻힌 신세가 되어야 하지.”

“그게······ 무슨 뜻이죠?”

“하지만 깨어났을 땐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힘을 가지게 되지! 자고 일어났더니 최강자가 되면 좋겠다는 누군가의 소망을 네가 대신 이루게 되는 거란다! 어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래, 나도 내 말이 무슨 뜻으로 하는 건지 몰라. 그건 같네.”


일우는 무표정을 유지하는 소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사는 원래 이런 여자애를 봉인에서 풀어주는 것부터 출발을 해야 하는 거야. 소년과 소녀의 모험활극! 이 얼마나 좋은 생각이냐!”

“······.”


어차피 노예시장에서 팔려나간 소녀의 운명은 누구를 만나도 크게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모르던 세계를 알아가고, 순수함은 얼룩지고, 결국 타락하여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그런 미래만을 안겨줄 이가 조금 전까지 경매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도저히 이해가지 않는 이상한 소리를 계속해서 떠벌대는 남자를 본 순간, 소녀는 차라리 그 뻔한 흐름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수면 학습이라는 개념, 들어봤어?”

“······.”

“네, 아니오라는 대답을 할 줄 모르면 지금 당장 노예시장으로 반품할거야.”

“······각오하고 있어요. 어차피 가문이 몰락한 뒤 제 운명은 크게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 대머리로 만들어 버린 뒤에 반품하려고 하는 건데?”


그 말을 듣자 소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가렸고, 대머리라는 단어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한참 이 지방에서 이름이 나도는, 심지어 팔려나가는 노예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도는, 미친 사람.


“좋아! 변경! 네가 비협조적이니 널 좀 더 유용하게 써야겠어! 여태까지 여자애한테 한 번도 시험해본 적이 없지만, 생각해보니 비교표본으로 여자들 쪽 자료도 필요해!”

“무, 무슨 자료를······.”

“남자들 머리를 단숨에 민머리로 만드는 약품은, 과연 여자에게도 통하는가!”

“히익---!”


감옥에 갇혀있을 때 분명 들었다.

발모제를 연구한답시고 잡혀온 죄인들을 대머리로 만들며 이상한 실험을 하는 남자.

이 남자에게 조금이라도 비협조적이었다간 자신도 대머리가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녀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러지 말아요! 제발 머리는······!”

“그러면 협력을 하던가.”

“할게요! 하겠으니까······.”

“오! 그래, 그런 대답을 원했어. 시원하고 빠르게 대답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후회할, 그런 대답.”

“저, 저한테 대체 뭘 원하시는데요?”

“별 거 아냐. 그냥 누가 깨우기 전까지 어딘가에 봉인된 것 마냥 완벽하게 포장된 채로 잠만 자고 있으면 돼.”


허나 섣부른 대답과 결정은 언제나 좋지 않은 결과가 되는 법.

소녀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는 일우에게 질질 끌려갔다.


***


며칠 뒤, ‘연금술사 우’는 침통한 표정으로 모험가 길드 집회소를 둘러싼 군중들을 돌아보았다.

물론 혼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읍읍!”

“애석하게도, 검증 결과 이 녀석은 우리가 바라는 그 용사는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참으로 침통하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게도 말이다!”


오랜 기간 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영규도 동행했다.

물론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입은 재갈이 물려있었다.


“내 시간! 내 노력! 역사에 남을 내 족적이 다아---- 허공에 날아갔다고! 내 걸 돌려줘!!”


영규가 용사가 아니라는 소식을 듣자 대머리들의 표정에 혼란과 절망이 드러났다.


“용사가······ 아니라고?”

“그럼 발모제는?”

“······글렀지.”

“하지만! 나는 너희들보다 배로 똑똑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다.”


웅성대는 대머리들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킨 일우는 이어서 꽁꽁 묶이고 재갈도 물려진 영규를 가리켰다.


“이 녀석이 사실 진짜로 용사였다면? 아니, 용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감당을 하지 못하고 ‘호에엥 저는 암컷이에요!’라고 헛소리를 주절대는 거라면?”

“어······ 그러니까, 용사는 맞는데 각성 같은 게 필요한 겁니까?”

“그래. 이 녀석에겐 용사의 자질이 분명 있었을 거야! 허나 그걸 담을 그릇이 폐급이라서 망한 거지!! 이 쓰레기야!!”

“으읍!”

“하지만 걱정 마라. 이 천재적인 머리로, 이 녀석이 가지고 있을 그 용사로서의 가능성을 쥐어짜내줄테니까!!”


그 말을 한 일우는 구석으로 걸어갔다. 거기엔 천으로 덮인 무언가가 있었고, 일우는 천을 벗겨냈다.


-펄럭---!

“바로 이것이다!”


천이 벗겨지며 드러난 건, 두 명이 각각 드러누울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정체불명의 기계였다.

대머리들은 이게 뭔지 감이 안 잡힌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들 사이에 끼여서 구경하던 랑키와 에멜린은 뭔가 감이 잡히는 모양이다.

허나 좋은 목적은 아니라고 예상한 듯, 얼굴 표정은 어두웠다.


“이건······.”

“설마 제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입니까?”

“그렇다! 여기엔 두 자리가 있지. 하나는 용사였을지 모를 자신도 망각해버리고 암컷이 되길 소망하는 머저리 용!”


기계에 마련된 한쪽 좌석을 가리킨 일우는 이어서 반대편을 가리켰다.


“하나는 그 녀석에게 딱 원하는 부분만 빼내서 받아들 운 좋은 녀석 용!”

“그만 두십시오! 이건, 이건······ 용납해서는 안 될 행동입니다!”

“대체 왜 안 돼! 뭐가?!”

“타인의 힘을 뺏는 장치는 불법입니다! 이건 금기란 말입니다!”

“맞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힘을 갈구하는 자들이 타락해버리는 가짓수는 여러가지지만, 그 중에 하나는 ‘타인의 힘을 뺏어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

눈앞에 나타난 이 기계와 ‘연금술사 우’의 설명을 봐선, 영규가 품고 있는 용사의 힘을 뽑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용도일게 분명했다.


“무슨 헛소리야? 왜 내가 힘을 뺏어?”

“조금 전에 설명하신 대로라면······.”

“이건 이 녀석의 머리털을 유지하는 원리를 뽑아내서 이식하는 물건!”

“······예?”

“이름하야 ‘모자람 이식기’!!”


뭔가를 뽑아내서 잡아넣는 원리는 맞지만, 전혀 엉뚱한 걸 다룬다는 말에 랑키와 에멜린은 서로를 멀거니 바라보며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머리털?”

“그러니까······ 힘이 아니라?”

“뽀, 뽑아서 다른 사람한테 넣으면 안 되지······ 않아?”

“그, 글쎄다. 캐피탈의 의회에서 금기시 여기는 건 타인의 힘을 뺏는 것이지 머리카락은······.”


전문가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일우는 ‘머리털’이라는 말에 반응한 대머리들을 돌아보며 영규를 가리켰다.


“이 녀석이 구제 불가능한 암컷이 되고 싶다고 하지만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 녀석이 가지고 있을 용사의 가능성을 포기할 순 없지!”

“그런데 그 가능성이랑 머리카락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말했지? 세상에 모든 용사는 찰랑찰랑한 머릿결을 가졌다고! 이 기계는 그 부분만을 정확히 뽑아내서 이식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완벽······한 장치입니까?”

“내 이론이 정확하다면, 내가 계획대로라면, 그리고 내 계산대로라면 머리카락만 술술 자라날 거야. 그리고 이 장치를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지.”


간단하게 말하면, 용사가 되지 못한 폐급을 일종의 머리털 자라나는 촉매로 쓴 발모 기계였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말하는 본인조차 이게 헛소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허나 대머리들은 그런 헛소리마저 붙잡아야 할 정도로 절실했다.


“너희들 중에 가장 운 좋은 누군가는 제일 먼저 풍성한 머리가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가겠지. 할 사람?”

“······.”


‘연금술사 우’의 말에 대머리들은 서로를 힐끔대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모두가 일제히 손을 치켜들며 자신을 뽑아달라고 아우성쳤다.


“저요! 제가 하겠습니다!”

“내가 할 거야! 우 님! 절 시켜주십쇼!”

“전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 노고를 봐서라도! 어르신!”

“좋아, 이렇게 다들 마음이 간절한 모습을 보니 참 기쁘구만.”

“으으으읍!”

“물론 넌 아니겠지만. 자! 모자람 이식기를 체험할 녀석은 제비로 뽑는다! 공정하게! 확률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잠시 후, 치열한 제비뽑기의 승리자가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장치에 드러누웠고, 반대편 자리엔 영규가 억지로 눕혀졌다.


“저기, 어르신. 좌석이 좀 좁······으윽.”

“누가 멋대로 몸뚱아리에 근육 붙여서 고깃덩어리같이 만들고 살라고 했어? 눕는 자리는 표준을 기준으로 설계한 거야.”

“끄응······ 머리털을 위해서 참아보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연금술사 우’는 히죽 웃으며 작동 레버를 당겼다.


“자! 연금술의 새로운 도약이 이 자리에서 벌어진다아아!”

-철컥! 파즈즈즈즈즉---!


레버를 잡아당기자 기계는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그 빛 속에서 기계에 들어간 누군가의 겉모습이 점점 달라지는게 실루엣으로 언뜻 보였다.

모든 과정이 끝났다는 듯 천천히 빚이 사라지자, 모두의 시선은 기계에 누워있는 이들을 향했다.

하지만 일우가 말했던 그런 극적인 기적의 결과물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어어, 어어어······ 어어······?”


자신의 머리를 만지던 남자는 기계를 쓰기 전과 변함 없는 대머리라는 사실에 멀거니 일우를 돌아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계산이 틀렸어.”

“예? 하지만 어르신이 설명하신대로면······.”

“이 망할놈의 구제불가능한 쓰레기는 내 예상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개 쓰레기였다고오오오오오!!”


일우는 버럭 화를 내며 영규 쪽으로 다가갔다.

확실히 기계가 작동하긴 했다.

하지만 영규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대머리에게서 자라나지는 않았다.

기절해있던 영규가 깔끔한 대머리 근육질이 되었을 뿐이다.


“잠깐 기다리십시요. 이 사람······ 그 자입니까?”


군중 중 랑키가 그 점을 지적하자, 일우는 어느 근육질 대머리 꼴이 된 영규를 붙잡아 흔들어대며 악을 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신의 단말마까지! 그냥 영혼까지 개 쓰레기였어. 이제 이 녀석은 영웅도 뭣도 암컷도 뭣도 아냐! 그냥 대머리지!”


일우는 그렇게 말하며 정신을 잃고 있던 영규의 뺨을 후려쳐 깨웠다.


“야, 얌마. 일어나!”

“으, 으어······.”

“야! 대머리! 용사도 뭣도 아닌 일개 대머리! 일어나!”


막 눈을 뜬 영규는 아직 상황파악이 덜되었다는 듯 헤롱거렸다. 다행스럽게도 그 상태는 금방 고쳐졌다.

일우가 내민 거울을 받아들고 자신이 무슨 꼴이 되었는지 확인한 영규는 펄쩍 뛰어올랐다.


“무, 무무무무······ 대체 무슨 일이······.”

“네가 가지고 있던 그 좁쌀만한 용사의 가능성은 대머리한테 패배했단다.”

“안돼에에에에에에에에에!!”

“안되긴 뭐가 안 돼. 이미 다 끝났는데.”

“이럴 순 없어! 내가, 고······ 고자인 것도 모자라 대머리라니! 대머리 고자라니이이이!”


영규는 버둥거리며 자신에게 밀려들어온 절망에 절규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건 속임수였다.

일우는 그냥 영규를 근육질 대머리 고자로 만들어버릴 생각이었고, 혹시라도 여신이 지켜볼 것을 우려해 마치 특별한 발명품을 선보이는 것으로 행동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폐급 용사의 머리카락 나는 힘’이 ‘평범한 모험가의 탈모력’에게 패배했을 뿐이다.


작가의말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건 복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글은 주인공이 다른 누군가에게 앙갚음하는 게 전부인 글입니다.
게다가 이번 에피소드에서 계속 대머리 대머리 노래를 불렀죠.

그렇습니다, 이제 용사 1호는 고자인것도 서러운데 근육질 대머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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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5] +5 21.07.14 1,779 59 17쪽
73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4] +5 21.07.13 1,780 61 15쪽
72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3] +4 21.07.12 1,915 63 16쪽
71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2] +2 21.07.11 1,933 73 17쪽
70 13. 코볼트에게 자유를 [1] +8 21.07.10 2,043 86 15쪽
69 ?. 그 사람 찾으러 갑니다 +6 21.07.09 2,142 72 16쪽
68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8] +6 21.07.08 2,039 72 14쪽
67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7] +5 21.07.07 2,065 74 16쪽
66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6] +6 21.07.06 2,050 77 12쪽
65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5] +8 21.07.05 2,047 88 13쪽
64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4] +3 21.07.04 2,051 76 13쪽
63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3] +4 21.07.03 2,041 71 15쪽
62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2] +7 21.07.02 2,085 77 13쪽
61 12. 연금술성 폭우경보 [1] +5 21.07.01 2,120 79 13쪽
60 11. 고래가 난다요 [7] +4 21.06.30 2,126 76 20쪽
59 11. 고래가 난다요 [6] +4 21.06.29 2,084 72 15쪽
58 11. 고래가 난다요 [5] +3 21.06.28 2,124 72 13쪽
57 11. 고래가 난다요 [4] +4 21.06.27 2,140 70 14쪽
56 11. 고래가 난다요 [3] +1 21.06.26 2,190 70 13쪽
55 11. 고래가 난다요 [2] +3 21.06.25 2,228 79 13쪽
54 11. 고래가 난다요 [1] +3 21.06.24 2,408 75 13쪽
53 ?. 소년과 소녀, 그리고 전설의 시작. +9 21.06.23 2,383 93 10쪽
52 10. 모난 놈이 맞는다 [7] +3 21.06.22 2,404 77 18쪽
51 10. 모난 놈이 맞는다 [6] +6 21.06.21 2,431 69 18쪽
» 10. 모난 놈이 맞는다 [5] +8 21.06.20 2,474 79 22쪽
49 10. 모난 놈이 맞는다 [4] +13 21.06.19 2,546 91 22쪽
48 10. 모난 놈이 맞는다 [3] +1 21.06.18 2,581 8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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