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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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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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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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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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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잘 됐으면 좋겠다. 다들!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이 다소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2월 중순에 대구지하철에서 발생한 참사를 의식했는지 몰라도 잔칫집이라기보다는 현충일 같은 숙연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거기에 날씨까지 흐려서 더욱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류지호와 나래안전 시스템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방화 사건이자 최악의 묻지마 테러 사건을 막지 못했다.

류지호는 참사일과 시각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방화범의 이름도 몰랐다.

치안당국과 대구지하철공사의 비협조도 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하는데 한몫했다.

대통령 당선인 신분인 고유현에게 직접 부탁을 해보았다.

류지호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긴 했지만 당선자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회귀자로서 올바른 일을 하려고 해도 도와주는 이 하나 없다.

9·11 테러사건으로 위원회 조사를 받은 후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들을 보며 참사를 막는데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말고는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본인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 중요했다.


‘난 할 만큼 했어.’


외면하면 차라리 편한데....

기억하고 있는 불행한 사고에 발을 걸치는 순간부터가 번뇌다.


짝짝짝.


류지호가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제16대 대통령취임식장 단상 아래 마련된 지정석에 앉아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멍하니 단상에 나란히 앉아 있는 전직 대통령들을 바라봤다.

전직 대통령들 뒤로 군부독재에 부역했던 전·현직 삼부요인들도 앉아있다.

웃긴 모습이다.

군위주의 시대의 악당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그들에 대한 투쟁가였던 ‘상록수’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일반 초청자들 사이에서 연신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꽤 많았다.

열렬한 고유현의 지지자인 모양이다.


‘역사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고 하지.’


결코 시간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역사는 도도히 흐를 뿐.

류지호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시대는 그저 변하기만 하는 걸까 아니면 발전하고 있는 걸까?”


높은 단상 위에는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던 권력자들이 절반 이상이다.

국민대화합이니 대통합이니 하는 정치쇼의 일환이겠지만.

국가와 국민을 지키라고 쥐어준 총으로 국민을 사살하지 않나, 온갖 부정부패로 산 같이 부를 축적한 이들을 어렵게 감옥에 보냈더니 통합·화합이란 궤변으로 풀어주고, 집안을 풍비박산 내도 시원찮을 판에 호화롭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눈을 감아주는 것이 과연 국민대통합이란 말에 어울릴까.

국민은 저마다 자유로운 생각과 의사표현을 할 권리가 있다.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갈등이 생기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생각·의견 등으로 갈등이 벌어지면 그걸 합리적으로 조율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정치다.

그래서 정치를 종합예술에 빗대기도 한다.


‘그런데 이놈에 나라 정당들은 당비를 내는 300만 명이나 되는 당원들의 뜻도 무시하고 몇 명의 보스들이 모든 걸 쥐락펴락 하지. 기득권의 바지사장이 되어서.’


이 당시만 해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 10년 밖에 안 됐기 때문에 덜 성숙한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류지호가 얼어 죽을 시점에 가서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정당은 당파적 주장만 난무한다.

국민 개개인들의 생각이나 의견이 충돌하거나 갈등이 발생했을 때 어떠한 고도의 의견 조율이나 합의노력이 없다.

그러면서 화합을 떠들어댄다.

국민통합이란 말에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깔려있다.

결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 함께 사용될 수 없는 용어다.

전체주의 혹은 국가주의적 표현을 진보라고 스스로를 규정한 정부가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이 류지호는 상당히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정치인은 다른 생각을 가진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찾아내 이를 입법 등의 활동으로 실현하는 직업일 것이다.

정치가 국민 개개인의 이념과 사상을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합의를 도출하는 것, 그런 것이 정치의 출발이 아닐까.


‘개뻑다귀 같은 생각이지....’


시청자 투표는 무시되고 방송국 고위관계자들과 광고협찬사의 입김에 놀아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런칭 전부터 짜인 각본대로 흘러가는 시즌제 권력다툼 예능.

그것이 투표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는 류지호다.

그래서 유권자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겠지만, 지나치게 과몰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예능프로그램에 과몰입해 봐야 남는 것 하나 없으니까.


“......!”


취임식에 초청된 사람 가운데 몇 명이 눈에 띠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존경해마지 않는 독립운동가.

그 분의 후손이 보였다.

전 공군 참모총장이자,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했던 인물.

5.16 군사쿠테타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 멤버로 참여한 인물.

힘든 길을 걸어온 부친과 달리 탄탄대로의 삶을 살아온 인물.

유신의원으로 권력을 누리다가 12.12가 되자 권력을 잃고 자택에서 시간을 보냈던.

한쪽에서는 존경을 보내고, 한쪽에서 비판하는 그런 존재.

권력의 자리라는 게 그렇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지난 정권의 인사들은 크게 몰락시키는 게 기본이다.

부는 삼대가 이어질 수 있어도 명예나 명성은 삼대를 못 간다.

그런 걸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집안이 전 공군참모총장 가족이다.

한국 공군의 로얄패밀리.

독립운동가의 후손 중에서 매우 드물게도 해방 직후부터 기득권에 편입되어 잘 나가는 집안이다.

독립운동가 2대 후손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문제는 삼대 즉 손자들로 내려오면서 문제가 크게 발생했다.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에 연루되어 조부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된다.

보훈처장을 지낸 둘째 아들은 공군 헬기 도입 비리로 구속되고, 막내아들은 뇌물을 받고 중요서류를 빼돌려 구속되기도 한다.

아직 벌어지거나 밝혀진 일들은 아니다.

독립운동가 중에 형제, 자매, 부자지간에 함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분들도 꽤 있다.

대가 끊긴 집안도 부기지수다.

사실 독립운동가의 후손도 이기적인 한 인간일 뿐이다.

조부가 위인이라고 해서 손자까지 위인일 순 없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정작 자신들의 가정과 자녀에 소홀했다.

일부 독립투사의 자녀 중에는 변절한 자도 더러 있다.

공산주의를 혐오해 우익의 편에 선 것 가지고 뭐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군부독재에 부역하고 그것으로 권력을 얻어 심지어 부패한 삶을 살고 있다면, 독립운동가 집안이란 이유로 후손에게까지 존경과 감사를 보낼 순 없지 않을까.


‘수신제가....’


남더러 뭐라고 하기 전에 류지호 스스로가 집안을 잘 돌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1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멜란가문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그레이엄 가문에서도 망나니가 나타났다.

류지호의 후손 중에서 그 같은 망나니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인 탄생하는 장소에서 류지호는 내 가정에 대한 책임감, 사회에 대한 책임 그리고 세상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느꼈다.

억만장자라고 해서 세상과 또 이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가족에 서운하고, 친척을 못마땅해 하고, 사회가 불만스럽고, 세상이 개판인 것처럼 느껴질 때일수록, 다시 한 번 자신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세상사라는 것은 결국에 류지호 같은 개인 70억 명이 서로 상호작용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니 화합이나 통합이 아니라 조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다.


‘나와 내 주변을 성찰할 시간 없이 매일매일 앞 만 보고 달리고 있긴 했지.’


때때로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1200년 전 만들어진 한 구절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들먹일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하고 그것이 사회에 영향을 끼침으로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일 테니까.

국가 시스템이 엉망이라면 나부터 잘하면 된다.

내가 잘함으로써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한명 한명이 수신제가하면, 가까운 미래에 평천하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아직 영화를 찍으려면 멀었다.

그럼에도 온갖 상념이 류지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앞으로 찍을 영화 톤들이 <REMO> 빼고 대체로 어둡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 삐딱하게 보게 된다.

세상이 너무 나쁜 쪽으로만 보인다고 할까.


❉ ❉ ❉


대통령 취임식에 많은 외빈이 참석했다.

류지호와 안면이 있는 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한국이름으로 신호겸 의원은 1993년 하원의원으로 미국 정계에 진출한 이후 1999년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한인 출신 정치인이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지역 3선 의원인 장홍선 하원의원,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당선자 이종혁과 함께 류지호를 찾아와 티타임을 가졌다.


“WHO 사무총장에 당선되신 거 축하드려요.”

“고맙네.”


이종혁 사무총장 당선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UN기구 수장에 오른 인물이다.

한국의 위상은 알게 모르게 국제사회에서 점차 높아지고 있다.


“신 부의장님도 오랜 만에 뵙네요.”

“워싱턴에는 방문이 뜸한 것 같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고 있어서요.”

“여기 이분은 러시아 이르쿠츠크 장홍선 의원이시네. 인사 나누게.”

“처음 뵙겠습니다. 의원님.”

“만나서 반가워요, 러시아에서도 류 의장 소식은 자주 듣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참 대단합니다.”

“우리말을 참 잘하시네요?”


신호겸 상원 부의장이 설명했다.


“장 의원님은 고려인 출신이지. 부친께서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어릴 때부터 한국말과 문화를 가르치셨다네.”

“훌륭하신 부친을 두셨습니다.”

“내게는 누구보다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르쿠츠크라면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도시 맞지요?”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지만, 시베리아 지역에서 대표적인 도시이긴 합니다.”

“제가 방문하면 환대해 주실 거죠?”

“언제든지! 의장님이 방문한다면 환대뿐이겠습니까? 온 시민들이 반갑게 맞아줄 겁니다.”

“감사한 말씀이네요. 영화촬영 문제로 방문하게 되면 신세 좀 질게요.”

“하하하. 손님에게 절대 야박하게 굴지 않습니다.”


러시아 이르쿠츠크는 한반도의 3.5배의 면적이지만 인구는 겨우 60만 명이 살고 있다.

바이칼 호에 인접해 있고, 예술의 도시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에는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의 중요 근거지였다.

이 당시만 해도 이르쿠츠크에는 총영사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2008년경에 가야 들어서게 된다.

류지호가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당선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외신 기사 확인하셨습니까?”

“무슨 기사?”

“JHO 홍콩 지사에서 희귀 질병에 대한 정황이 의심된다는 보고가 올라왔더라구요.”

“희귀 질병?”

“중국 남부와 홍콩을 중심으로 폐렴하고 비슷한데 다른 형태의 괴질이 돈다는 소문이 급박하게 퍼지고 있답니다. 그 괴질로 이미 중국에서는 수백 명이 죽었고, 공포가 확산되면서 온갖 민간요법이 판을 치고 있다네요. JHO와 가온그룹에서는 중국과 홍콩 등 동남아지역 출장을 당분간 자제시키고 있다고 들었어요.”

“보고 받은 건 없네만. 자네 회사 직원을 출장 보내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하던가?”

“중국에서 수백 명이 사망한 건 중국정부가 확인해 주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홍콩에서는 괴질에 감염된 사람을 저희 직원이 직접 확인했다고 하네요.”


류지호가 이야기는 하는 괴질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즉 사스(SARS)였다.

이제 막 홍콩에 사스가 상륙하는 시점이다.

뉴욕을 떠나기 직전 도널드 제이콥으로부터 전달받은 최신 정보였다.

류지호가 소유하고 있는 그룹의 전 계열사에 중국 남부와 홍콩 여행 및 출장 자제 권고를 내린 상황이다.


“뜬소문 아니었나? 실제 발생하고 있는 일이라는 건가?”

“그렇다고 하네요. WHO로 복귀하시면 점검해 보세요. 자칫 알 수 없는 질병이 발병했다면 큰일 이잖아요. 소문이 너무 흉흉해서 주재원들을 일시적으로 철수시킬까 고민 중이에요.”

“일단은 정보 고맙네.”


사무총장 당선자가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떠났다.

세계 각지에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JHO에서 나온 정보다.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한국의 보건복지부에도 똑같은 정보를 전달했다.

정보를 믿어줄지 알 수 없었다.

WHO에서 선제적으로 행동에 나선다면,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를 대폭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고.

결국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이전 삶의 기억을 토대로 행동에 나서게 되는 류지호다.

외면하고 방관하다가 받게 될 죄책감보다는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아서 겪게 될 스트레스가 그나마 나을 테니까.


‘앓으니 죽지, 내가 아주....!’


✻ ✻ ✻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2개의 충무로가 존재한다는 말이 유행이다.

두 개의 충무로는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충무로와 합정역 주변을 중심으로 하는 충무로다.

강남구에는 투자회사와 주요 배급사들이 모여 있다.

대충 이름 있는 영화사만 주워섬겨도 양성규필름, 기획의시대, 써치드림, 뭐토스씨네마, 미라신필름, 아스트로 엔터테인먼트, 씨앤무비, 규씨네마, 이스트씨네마, 고려필름, CN필름, 성원엔터테인먼트, IM필름 등.

수십 곳이 강남에 몰려있다.

반면에 합정역 일대와 동교동 인근에 퍼져 있는 영화사들로는 WaW 픽처스와 씨네-누보, 브라이트필름, 필름앤쿠, 모호씨네마, 진인사 픽처스 등 주로 WaW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제휴영화사들이 소재했다.

무비서비스가 둥지를 틀고 있는 충무로 일대는 과거의 영광에서 멀어진 느낌이다.

고우찬만 대동한 류지호가 홍대 유흥가 골목길의 한 호프집을 찾았다.

테이블에는 UCLA 후배 김윤희와 남녀 4명이 동석 중이다.

뜨끈뜨끈했던 치킨이 식어 가고 있지만, 누구도 선뜻 포크를 찌르지 않고 있다.

어색한 적막을 깬 것은 30대 초반의 남자다.


“입봉도 하지 못한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저희들에게 시나리오를 맡기시겠습니까?”


김윤희를 제외하고 일행들은 예비 작가들이다.

김윤희가 UCLA에 다닐 때 알게 된 타 학교 시나리오 전공자도 있었고, 미래에 잘 나갈 작가지망생도 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김재명은 이전 삶에서 꽤 잘나갔던 시나리오 작가다.

맏언니격의 송지연 작가는 USC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했다.

박선주와 김진주 작가지망생은 이전 삶에서 류지호가 삼류판을 전전할 때 안타깝게 여긴 후배들이었다.

김윤희가 UCLA를 졸업할 즈음 이전 삶에서 인연을 맺었던 후배 작가들을 모아 시나리오 창작집단을 만들 궁리를 했다.

마침 김윤희가 한국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자리를 잡게 되어서 계획을 실행시킬 수 있게 됐다.


“오늘은 아마추어지만, 내일은 입봉하지 말란 법도 없죠.”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이 들을 때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한국영화 제작비가 상승하면서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투자사와 제작사는 신인보다는 검증된 기성작가를 선호하는 흐름으로 변했다.

입봉하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김 작가와 함께 창작집단을 꾸리게 되면 그 시간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하네요.”


아직 충무로에 집단창작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이다.

방송계에서 일반적인 집단창작 행태도 제대로 된 시스템은 아니다.

새끼 작가들의 창의력과 고혈을 빨아먹는 착취 구조일 뿐.


“사실 저희들끼리 만나서 의견을 모아보았습니다.”

“.....?”

“감독님께서 받아만 주시면 정말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건을 건다거나 이거저것 따지고 들 줄 알았다.

단번에 승낙을 할 줄은 몰랐다.

류지호가 손을 내미는데 토를 달 영화인이 있을까 싶지만.


“좋네요. 환영합니다. 작가님들.”


류지호가 한명 한명과 악수를 나눴다.

안면이 있는 송지연 작가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명의 작가는 황송하다는 듯 류지호와 악수를 나눴다.

이들 창작집단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게 될 김윤희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다 좋은데요, 감독님.... 그게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무슨 조건?”

“설마 우리 다섯 명의 작가를 노예처럼 부려먹으려는 건 아니죠?”

“김 작가 많이 컸다?”

“아이, 선배. 그래도 내가 명색이 창작집단의 대표 작가잖아요. 조건을 물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누가 뭐래? 따로 원하는 조건이라도 있어?”

“...음.”


류지호가 예비 작가들을 슥 훑어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원하는 게 있으면 편하게 말해 봐요.”

“조건은 먼저 제시하는 게 아니라고 들어서요. 아니면 인터넷에서 배운 대로 일단 계약금부터 원하는 금액보다 뻥튀기해서 말씀드릴까요?”


송지연이 민망하다는 듯 말했지만, 그 속에는 솔직함이 담겨있었다.


“하하. 아뇨.”


친한 건 친한 거고, 이전 삶에서 안타깝게 여겼던 것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당연히 계약은 계약이다.

류지호가 고우찬에게 눈짓을 보냈다.

고우찬이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작가들에게 한 부씩 돌렸다.


“......!”


김윤희와 송지연을 제외한 예비작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약서 페이지가 꽤 많았기 때문이다.

계약서가 두껍다는 것은 권리와 책임이 그 만큼 세세하게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예비작가들은 계약서 조항보다 금액 부분만 빠르게 확인했다.


“제가 올해 귀인을 만난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감독님이신 것 같아요.”


유일한 남자인 김재경이 말하자, 용기를 얻은 박선주와 김진주가 차례로 말했다.


“저희는 감독님이 불러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솔직히 저는 밥만 먹여주셔도 괜찮아요. 감독님 영화에 참여만 할 수 있다면.”


류지호는 잠시 말을 아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 모습에 테이블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은 그냥 우리끼리 얼굴을 익히는 자리로 마련한 겁니다.”


끄덕끄덕.

예비작가들이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와 관련해서는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저희는 변호사를 고용할 여력이...”


김윤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신 대답했다.


“재명 오빠, 걱정 마. 감독님은 할리우드 스타일이시거든. 절대 충무로에서 하는 이상한 계약 안 해줘. 그렇죠?”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 본인이 불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면 불리한 것이고, 좋은 계약을 했다고 만족하면 좋은 계약을 맺은 것이고.”

“그럼 난 드라마 계약에 만족하니까 좋은 계약을 한 거겠네요?”


김윤희와의 계약에는 내용 공개 금지 조항이 있다.

현재 지상파에서 최고 대우를 받는 방송작가와 비교해 전체적인 계약규모는 턱없이 적다.

다만 작가의 권리와 책임을 비롯한 수많은 세부 계약을 넣어 놨다.

미국식 쇼러너(Showrunner) 시스템을 도입하기에 앞서 계약부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미국 TV시리즈의 쇼러너는 창작자면서 동시에 프로듀서 역할도 한다.

대본의 최종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제작에 주어진 예산을 할당·관리하는 권한과 책임도 지고 섭외도 총지휘하며, 편집 등 후반작업도 쇼러너의 몫이다.

미국 방송가에서 작가는 스태프라이터부터 막내작가, 프로듀싱 라이터를 거쳐 최종적으로 쇼러너가 된다.

쪽대본에 허덕이는 한국 방송계에서는 꿈도 못 꾸는 시스템이다.

대본 집필에도 시간이 모자란 탓이다.

류지호는 전업으로 집필활동만 하는 작가와 프로듀싱까지 겸하면서 드라마 완성도까지 책임지는 쇼러너 시스템을 WaW와 다솜방송에 구축할 생각이다.


“참고로 나는 다온로펌의 변호사가 도와줬어. 여기 선배와 같은 편이라 처음에는 의심했는데, Aram 프로덕션에서 보내온 계약서를 조항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더라. 계약은 걱정 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긴장하지 마.”


작가들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여러분들이 내 제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선배 치킨 다 식은 거 같아요.”

“아, 그래? 그럼 새로 시키자.”

“아니에요! 저희는 식은 것도 잘 먹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리 건배부터 할까요?”


류지호가 500cc 잔을 들어 올리자, 작가들이 일제히 잔을 들어올렸다.

여섯 잔의 호프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김재명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그동안 많이 고민했습니다. 막상 결정을 하고 보니까, 속이 후련하네요.”


김재명의 이름이 알음알음 충무로에 알려지고 있는 시기다.

각색 제의가 제법 들어오고 있었다.

당장은 각색 작업만으로 먹고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을 정도다.

비록 막무가내로 이것저것 요구하는 프로듀서와 감독들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있지만, 글을 쓴다는 사실이 마냥 즐거웠다.

그런 상황에서 류지호 감독의 시나리오 팀 제의가 들어왔다.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류지호가 원하는 시나리오만 써야 하는 것은 아닌지.

즉 단순한 글 기계가 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었다.

김윤희 작가로부터 류지호에게 대해서는 귀가 따갑게 들었다.

그럼에도 미심쩍은 것이 없지 않았다.

계약서를 보고 나니 일말의 의심과 고민이 싹 사라졌다.

대략적으로 류지호가 그리는 집단창작 시스템의 구조를 알 것도 같았기에.

반면에 박선주와 김진주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드라마 작가 작업실에서 잡일이나 하면서 막내작가 축에도 끼지 못했던 자신들이다.

뭘 보고 스카우트 제의를 한 것인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합류해 줘서 고마워요.”


류지호가 박선주와 김진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예비작가 둘이 황송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풀어주기 위함인지 김윤희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선배는 하여간....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니깐....”

“가식일지도 모르지만, 난 한 번 내 사람이 되면 끝까지 책임집니다. 굶어죽이지 않을 테니, 날 한 번 믿어보세요.”


이전 삶에서 두 녀석은 겨우 50만원 받고 윤색을 해주면서도, 회의가 있는 날이면 밤을 새워서라도 시나리오를 고쳐왔다.

전 날 회의에서 감독이 요구했던 걸 날밤을 새어가며 모조리 고쳐왔던 독종들이다.

그런 싸구려 삼류영화가 뭐라고...

감독과 PD에게 온갖 갑질을 당하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류지호는 제 코가 석자라서... 후배들이 그런 처참한 대접을 받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자신이 참여한 영화가 개봉관을 못 잡아 표류하고 있을 때, 안절부절 못하던 두 녀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자신들이 고민을 거듭해 만들어놓은 캐릭터를 감독이 무너뜨리고, 핵심 대사까지 사정없이 날려버렸을 때, 엉엉 울던 모습이 기억에 선명했다.

솔직히 두 후배가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재능이 충만한지는 자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집단창작 시스템에서 할 일은 틀림없이 있다.

중요한 것은 녀석들에게 후회라는 감정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치킨이 식어서 먹기도 그런데, 2차 갑시다!”

“선배, 이왕이면 양주로.”

“아는 바 있으면 안내 해 봐라.”


일행은 송지연 작가가 아는 바에서 술을 마셨다.

집단작가 시스템.

방송 분야에서 비슷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긴 했다.

본래의 의도와 달리 많이 왜곡되어 있다.

인기 드라마 작가들이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주고 보조 작가를 채용해서 일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정해진 임금 체계가 분명하게 실행된다.

막내 작가라 해도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작가 조합의 파워가 세기에 실질적으로도 작가들 사이에서 갑질이 있을 수가 없다.

부당한 일들에 대해서 막내작가들도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조합의 중재와 민사 소송을 통해서.

한국에서는 드라마가 말만 작가의 예술이다.


“70년대 평화시장에서 미싱 타는 여자가 있었다면 오늘 날 여의도에는 타자기 타는 여자가 있지.”


최악의 근로현장으로 꼽히는 산업현장이 봉제공장이다.

그것에 빗대어 방송 드라마 작가 사무실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말 타자기 탄다는 표현이다.

한국의 작가 세계는 철저한 계급사회다.

인턴과 작가의 대접은 하늘과 땅의 간극이 있다.

미국 작가 조합에서 진행한 대규모 파업 때 수많은 방송들이 제작을 하지 못하고 멈춘 일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가능하기나 할까?

절대 가능하지 않다.

잘나가는 작가일수록 조수들을 더 고생시키고, 보수가 더 짜다.

일이 많고 보수가 적은 것보다 더 문제는 업계 전반에 만연한 가스라이팅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사정은 더 최악이다.

엉망진창이다.

지금 이 시간 충무로 어딘 가 여관에서 감독의 수발을 들어가며 조감독이 각색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예산부족의 이유를 들어 헐값으로 재능을 제공 받고 있다.

류지호가 모든 작가들을 먹여 살릴 수는 없다.

그가 할 일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시스템을 만들고 정착시키는 것이다.

최소한 굶어죽는 작가가 없도록.

자신처럼 한겨울 반지하방에서 얼어 죽는 비참한 영화인이 없도록.

본인이 겪어봤기에 잘 안다.

류지호는 그럴 수 있는 위치가 됐다.

영화업계에서 영화를 통해서 막대한 부를 이룬 류지호의 최소한의 도리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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