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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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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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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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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타이밍. (6)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골치 아프네....“


그의 앞에는 4권의 영어와 한글로 작성된 시나리오가 놓여 있다.

<REMO Ⅲ>, <The Punisher>, <민중의 적 Ⅱ>, <군계>.

올해부터 4년 동안 할리우드, 한국, 일본을 넘나들며 총 네 편의 영화를 연출하기로 되어 있다.

매년 한 편 꼴로 영화를 연출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이다.

<REMO>는 슈팅 스크립트에 근접한 수준이 이미 나와 있다.

<민중의 적> 후속편은 한창 집필 중이다.

<군계>와 <The Punisher>는 각각 도쿄다카라와, JHO Pictures에서 이제 막 기획을 시작했다.

제 아무리 연출기계라고 해도 매년 한 편씩 영화를 연출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한편에 모든 걸 바쳐도 잘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 영화흥행이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해야 하는 작업은 쉽다.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할리우드에서 하는 작업이다.


“DOP는 누구로 할래?”


앨런 포스터의 물음에 류지호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미국에서 연출하는 영화는 가급적 로저 딕스와 하고 싶었다.

2006년까지 줄줄이 계약이 되어 있다.

<The Killing Road>를 촬영했던 롭 리차드슨 역시 2005년 이후에나 스케줄이 비어 있다.


“리차드슨씨는 일본에서 찍는 영화는 잘하면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글쎄. <에비에이터>가 예정대로 2004년 초에 촬영이 끝나고 곧바로 합류해 주면 가능할 것도 같긴 한데.....”

“쿤디씨는 마음에 안 들어?”

“레이는 VFX 영화에는 뛰어난 감각을 보여주지만, 드라마와 심리묘사가 조금 아쉬워서.


끄덕.


앨런 포스터도 동의했다.

레이몬드 쿤디는 좀 더 상위 레벨의 DOP로 올라설 수 있음에도 <루니툰>이나 <가필드> 같은 특수촬영 위주의 작품이 주로 들어오고 있다.

여전히 일류 촬영감독이긴 하지만 한계 또한 명확했다.


“<REMO>까지만 하고, 다음 영화부터는 DOP를 바꿀 생각이야?”

“그럴까 고민 중이야.”

“젊은 DOP 중에 데온 비베는 어때?”

“<시카고> 촬영했던?”

“응. 오스카 노미네이트 DOP가 되었으니 단번에 A-List에 올라가진 않더라도, 여기저기서 많이들 찾을 거야.”

“완전히 할리우드에 정착할 것 같아?”

“당연하지. <시카고>로 떴는데 호주로 돌아가겠어?”


류지호는 자신 앞에 놓여있는 시나리오를 정리해 서랍에 넣었다.

책상에서 벗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Gower Studios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류지호 전용 스테이지를 제외한 모든 시설들이 365일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 2 스튜디오인 브론슨 스튜디오 역시 마찬가지다.


“.....”


류지호가 창가에 서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가장 시급한 촬영감독부터 생각을 정리했다.

창밖을 보던 류지호가 몸을 돌리고 앨런 포스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줄리아는 프리프로덕션 중이야?”

“줄리아?”

“<The Last Domino>를 준비하고 있는 줄리아 리처드슨.”

“가을에 크랭크인 할 계획이라 한창 바쁠 걸?”

“지금 프로덕션 오피스에 있을까?”

“아마도.... 왜?”


류지호는 대답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앨런 포스터가 얼른 일어서서 류지호의 뒤를 따라갔다.

Gower Studios 본부 건물에는 수십 개의 프로덕션 오피스와 감독 및 프로듀서 작업실이 존재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영화인들이 본부 건물을 들락거리고 있다.

류지호가 producer/Julia Richardson 명패가 걸린 사무실로 들어갔다.


“헤이, 보스!”


금발의 백인 미녀가 류지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줄리아 리처드슨은 UCLA에서 시나리오 과정을 수료하고, 프랜시스 다라본이라는 유명한 제작자 밑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했다.

UCLA에서 시나리오 수업을 들으며 친하게 지냈던 호주 출신의 작가 스튜 베티가 뉴욕의 택시 기사와 킬러 승객 그리고 여성 사서와의 삼각관계 로맨스 각본을 보여주었는데, 각본이 마음에 들어서 프랜시스 다라본에게 가져갔다.

그렇게 워너-타임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었는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개발지옥에 빠졌다.

줄리아 리처드슨은 UCLA 영화과에서 가장 유명한 동문졸업생을 떠올렸다.


“지호 류에게 가져가 보면 어때?”

“JHO Pictures의 지호 류?”

“할리우드에 지호라는 이름을 가진 거물은 그가 유일하지.”

“만나 줄까?"

"....아마도.“

“우린 UCLA 졸업생도 아니잖아?”

“파티에서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비록 침실까지 가는 건 실패했지만. 날 기억해 줄 거야.”


줄리아 리처드슨은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외모가 뛰어났다.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기회를 잡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미모를 써야 할 때가 온다면 마다할 성격도 아니었다.

특히나 그녀는 할리우드의 젊은 거물이자 매력적인 동양남자와 사귈 기회가 왔을 때 거부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고 여기고 있다.

두 사람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갖은 고생을 해가며 류지호와 만날 수 있었다.


“마이크 만을 감독으로 데려와. 그러면 투자할게.”


결국 두 사람은 <히트>의 마이크 만 감독을 제작자 겸 감독으로 영입했고, 이후로 계약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JHO Pictures가 아닌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로 영화를 넘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를 위해 영화선택 권리 하나를 사용했다.

이 영화가 바로 LA의 택시 운전사와 킬러 사이에서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숨 막히는 서스펜스를 그린 느와르풍의 스릴러 영화 <콜래트럴>이다.

감독이 결정된 후로 주인공 캐스팅에서 혼선이 있었는데, 류지호의 제안으로 마이크 만 감독이 직접 톰 메이포더를 만나 출연 승낙을 얻어냈다.

골드글로브 시상식이 끝난 다음 날 흑인 무비스타 에디 비숍(Eddie Bishop)이 합류하면서 영화제작이 본궤도에 올라섰다.


“디렉터 만은 DOP와 여전히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어?”

“응.”


사무실로 찾아와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는 류지호가 내심 섭섭한 줄리아다.

차분히 인사도 나누고 근황도 묻고 그런 과정이 있어야 하지 않나.

매우 바쁜 남자인 것은 알지만.


“계약은?”

“트라이-스텔라 법률팀과 조율 중이야.”

“아직 테스트 촬영은 시작하지 않았지?”

“계약을 마치면 곧바로 시작할 것 같아.”

“혹시 촬영감독을 교체할 순 없을까?”

“단테 스피노 대신 선택한 DOP가 파울이야.”


마이크 만 감독은 <인사이더>에서 작업한 촬영분야의 거장 중 한 명인 단테 스피노를 마다하고 <스워드 피쉬>의 파울 캐머런을 기용하기로 했다.

같은 촬영감독과 두 작품 이상 작업하는 법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번에 새롭게 기용한 파울 캐머런과 밤장면과 디지털 촬영에 있어서 이견을 보이고 있다.


“<시카고>를 촬영한 데온 비베 어때?”

“젊은 촬영감독이 마이크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견뎌낼 수 있을까?”

“<시카고>의 압박감도 이겨내고 훌륭한 결과물을 내놓았어. 비록 테스트 촬영에 그쳤지만 <이퀄리브리엄>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다뤄본 경험도 있고.”


ParaMax Films의 <이퀄리브리엄>을 디지털 영화로 제작하려고 했었다.

결과적으로 필름으로 제작됐다.

류지호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이전 삶과 백팔십도 달라진 완성도를 보여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 한국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기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퀄리브리엄>은 평단과 흥행 양측에서 실패를 맛봐야 했고, 일부 마니아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그쳤다.


“네가 소유한 회사의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해 본 거야?”

“그것까지는 나도 몰라. 영화가 제작될 당시에 난 한국에 있었거든.”

“마이크와 이야기 해볼게.”

“함께 만날까?”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콜래트럴>은 너와 스튜의 영화니까.”


<콜래트럴>의 프로듀서는 줄리아 리처드슨이다.

류지호와 마이크 만은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만약 작품상을 수상하게 된다면 줄리아 리처드슨이 수상자가 된다는 의미다.

작품상 수상은 프로듀서 크레디트를 가진 사람이 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 계약 시 크레디트와 관련해 조항이 들어 있다.

모든 영화의 크레디트는 계약서에 따라 이름이 올라간다.

할리우드는 개별 조합과의 합의규정에 따라 스태프를 관리한다.

반면에 프랑스는 자격증을 발급하고 있다.

프랑스 국립영화센터는 자체 기준을 충족한 영화 스태프에게만 자격증을 발급한다.

프랑스 장편영화 4편 이상에서 제작 팀원으로 일해야 제작 실장(라인프로듀서)이 될 자격을 얻고 다시 4편 이상에서 제작 실장으로 일해야 프로듀서가 될 수 있다.

그 기준대로라면 충무로에서 프로듀서라고 할 수 있는 이는 몇 명 되지도 않는다.

현장 경험도 없는 자가 프로듀서랍시고 갑질을 하다가 현장 분위기 개판으로 만드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 충무로 영화현장이다.

할리우드 역시 경험도 없는 애송이에게 함부로 프로듀서 크레디트를 주지 않는다.

<타이타닉>에 공동 프로듀서 크레디트를 받기 전까지 류지호는 수많은 영화에서 이그제큐티브 혹은 Co- 프로듀서 크레디트를 달았다.

할리우드 프로듀서 조합에서 경력을 인정해 주었기에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릴 수가 있었다.

참고로 배우가 제작에 참여했을 때 받게 되는 크레디트가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다.

실무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직간접적으로 프로듀싱에 공헌했다고 인정하는 타이틀이다.

여담으로 <블레이드Ⅲ>를 계약할 때 웨스 스나입스가 프로듀서 크레디트를 요구했다.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웨스 스나입스의 에이전트는 계약 협상장을 나가자마자 언론에 트라이-스텔라의 태도가 몹시 무례하고 불쾌했다고 떠들어댔다.


“영화 크레디트는 해당 영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헌신과 공헌에 대한 서명이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공헌을 제공한 자에게 주어지는 명예이기도 하다. A-List의 배우라고 해도 동료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할 정도의 과도한 요구를 한다면 우린 받아들일 수 없다. 차라리 돈을 더 주거나, 지분을 양보할 의향은 있다.”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의 공식적인 언론 인터뷰가 나가고 나서, 톰 페이포더 토머스 행스 같이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톱배우들이 모리스 메타보이를 두둔하고 나섰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고 했다.

웨스 스나입스는 그 사건 이후로 메이저 스튜디오 수뇌부들에게 소위 찍혔다.

한때 액션스타로 독보적이었던 웨스 스나입스를 대체할 배우는 차고 넘쳤다.

내려갈 배우는 내려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이 바닥이다.

웨스 스나입스는 입조심과 행실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 인기라도 유지하려면.

어쨌든.


“스튜는 호주로 돌아갔어?”

“오렌지카운티에 머물고 있을 거야.”

“전화 번호 알고 있지?”

“잠시만.”


줄리아가 얼른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뒤져 스튜 비티의 연락처를 찾았다.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옮겨 적은 후 류지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류지호가 줄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겉으로 보면 프로듀서가 폼도 나고 고급전문직처럼 보인다.

실상은 지랄 맞은 감독과 스튜디오 임원 사이에 끼어서 뒤처리를 하다가 수명을 갉아먹는 직업이다.

그런 스트레스를 엉뚱한 곳에 풀다가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도 많고.

특히 온갖 종류의 차별이 만연한 할리우드에서 여성 프로듀서가 일을 해나가기란 여간 가혹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아시아계 배우들보다 훨씬 사정이 낫다.

그녀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 ✻


류지호의 의도대로 <콜래트럴>의 촬영감독이 데온 비베로 교체되었다.

<시카고>로 촬영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디지털 카메라 경험도 있어서 마이크 만 감독도 흔쾌힌 동의했다.


“세 가지 카메라를 모두 테스트 해봤다고요?”

“그래.”


마이크 만 감독은 누가 완벽주의자 아니랄까봐 소닉의 HDW- F-900, 톰슨사의 Viper, DALLSA D-Cinema의 Origin Ⅱ를 모두 테스트하기로 했다.

한 달 동안 LA의 주요 촬영지를 돌며 낮과 밤 장면을 테스트해 봤단다.


“먼저 탈락한 카메라가 HDW-F-900이고요?”

“<스타워즈>에서 사용된 이후로 크게 향상된 것이 없어.”

“괜히 나를 의식해서 Origin을 사용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당연하지.”


크랭크인에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이크 만은 지나치게 신중했다.

류지호는 내년에 열리는 국제방송장비박람회에서 선을 보이게 될 4K 업그레이드 기종 Origin Ⅲ를 추천할까도 염두에 뒀다.

결과적으로 DALLSA D-Cinema 측에서 막았다.

아직은 불완전하다는 이유에서다.

수많은 테스트를 거친 후 내년에 CES, NAB, CinemaCon, CineEurope 등 전자산업의 대표적인 글로벌 박람회에서 대대적으로 공개할 계획이다.

4K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의 첫 등장은 이전 삶보다 무려 3년 앞서게 됐다.

물론 4K 관련 특허는 90년대에 이미 DALLSA가 등록을 해 둔 상황이지만, 실물 기기가 일반 대중에게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DCI의 디지털상영 표준조차 정해지지 않았고, 이제 겨우 2K 인프라 완성단계에 근접한 상황이라서 시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4K 시네마 카메라의 공개는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각종 특허기술 선점이란 의미가 있다.

전 세계 주요 국가가 촬영 장비부터 극장 영사 설비까지 모두 2K 포맷이 갖춰지는 2007년 이후에나 시장성이 생기게 될 터.

그 즈음이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 브랜드들의 경쟁이 본격화될 예정이다.

디지털 영화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신기술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 곁에서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결국 제대로 된 품질의 디지털 영상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더 많이 제작되고 더 많이 극장에서 공개되는 것이 필요했다.

ParaMax Entertainment는 독립영화 제작사들에 디지털 제작을 권장하고 있다.

DALLSA의 Origin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경쟁업체 기종으로 촬영된 영화라도 노출값, 광량, 조리계 수치 등 각종 데이터가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다.

경쟁업체들이 화질 개선에 집중할 때, DALLSA는 촬영 전문가들이 실제 현장에서 느끼는 다양한 문제점과 사용 후기를 차곡차곡 수집해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

이제 막 D-Cinema 시장이 열린 것뿐이다.


‘전통의 명가들은 아직 참전도 안 했지.’


신중하고 꼼꼼하게 테스트 촬영을 진행한 <콜래트럴> 촬영팀이 마침내 카메라를 확정했다.

이미 정해진 결론이었을 수도 있다.

톰슨의 Viper가 탈락하고 최종적으로 Origin Ⅱ가 선정됐다.

류지호가 한국에서 작업한 <민중의 적> 데이터가 큰 도움이 됐다.

이 결과의 나비효과로 인해서 톰슨사의 Viper는 본래보다 이른 시간에 퇴장하게 될지도 몰랐다.

RED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소닉과 경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였지만, 현재 시점의 끝판왕 DALLSA Origin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했다.


“나중에 톰슨사의 디지털 카메라 사업을 인수해야겠어.”


DALLSA D-Cinema가 프랑스 전자기업 톰슨의 방송장비 자회사 Grass Valley를 인수할 수 있다면 방송제품으로 포트폴리오를 더욱 확장할 수가 있게 된다.

또 한가지 이점은 경쟁 제품 하나를 없애버리는 효과다.


“프로덕션까지 잘 부탁해. 줄리아.”


<콜래트럴>의 프로듀서 줄리아 리처드슨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병적으로 디테일에 집착하는 마이크 만 감독에게 벌써부터 진이 다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언제 LA로 돌아오는데?”

“한국 들어가서 <군계> 작가만 결정하면 내 영화는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날 것 같아.”

“빌리 와일더가 되고 싶어?”


빌리 와일더는 할리우드 황금기 시절 많은 걸작들을 남긴 명감독이다.

무려 8번이나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 전설이다.

생애 무려 27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할리우드 황금기 1940~1950년대까지 많은 감독들이 다작을 했다.

그럼에도 빌리 와일더처럼 메이저에서 활동하며 한 해에 세 편의 영화를 내놓은 감독은 없었다.

류지호가 그 길을 가고 있다.


“와일더 감독이 그랬잖아.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선 꿈을 꿀 필요가 있다고. 난 그저 어젯밤에 꾼 꿈을 아침에 일어나서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할 뿐이야.”


최근 들어 SF, 판타지, 저예산 영화 등 다수의 아이디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안타깝지만, 한가하게 시나리오 작업에만 매달릴 수 없는 입장이다.


“지독하네.... 억만장자는 다 Jay 같아?”

“내가 아는 억만장자 중에 게으른 사람은 못 봤어.”


그녀도 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크랭크인 파티 때나 보겠네. 수고해.”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 본사를 빠져나오며 류지호가 중얼거렸다.


“빌리 와일더라....”


느와르 장르의 뼈대를 만든 장본인이다.

영화감독이 되려는 자 혹은 영화감독으로써 연출의 갈피를 못 잡고 있다면,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 <선셋 대로>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감독이다.

혹자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코미디 영화에 사회적 메시지가 없다고 한다.

굳이 영화에 메시지를 담지 않아도 풍자와 해학 속에서 저절로 메시지가 만들어지는 경지를 보여준 위대한 감독이다.

류지호 역시 UCLA 재학 시 수업 혹은 과제 때문에 빌리 와일더 감독 영화를 열심히 봤다.


[Nobody's Perfect.....]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남긴 명대사다.

일상에서도 정말 많이 쓰는 표현인데, 영화학도라면 저 말을 듣게 되는 순간 빌리 와일더 감독이 떠오르고 빌리 와일더 감독을 떠올릴 때면 저 말부터 떠올릴 명대사다.

할리우드 황금기에 미친 듯한 창작력을 보이며 생애를 통틀어 30편에 가까운 작품활동을 했지만, 70년대 이후로는 내놓은 영화마다 흥행과 평단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은퇴 후 평온한 말년을 보내다 작년에 향년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차피 더 나이가 들면 영화를 연출하는 횟수가 줄어들게 되어 있다.

건강과 열정이 꺾여서가 아니다.

영화를 접근하는 태도나 이야기와 캐릭터를 담아내는 방식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사유하는 시간이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류지호는 장식적인 스타일과 지나친 기술숭배가 팽배한 현대 미국영화에서도 특히나 도드라지는 스타일리스트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체로 플롯보다는 분위기 혹은 미장센으로 관객의 기선을 제압하는 스타일이다.

류지호가 쉬지 않고 연달아서 영화를 연출하는 것은 지난 삶에서의 한(恨)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교가 깊어질수록 그 이상의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 때문이다.

류지호는 <민중의 적>의 국내 박스오피스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전 삶보다 미학적으로 또 연출적으로도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자부했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치고 370만 명이라는 매우 훌륭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그런데 업계 관계자나 평론 쪽에서 조금만 힘을 뺐으면 500만도 가능했다는 분석들이 쏟아졌다.

한국영화 감독의 계보에서 가장 뛰어난 세부묘사와 시각 표현력을 지닌 감독으로 평가 받지만, 그것이 오히려 대중들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 매 장면 숨 막힐 것 같은 밀도와 미장센이 영화적으로 칭찬 받아 마땅하지만, 대중적인 눈높이에서 보면 부담스러워.

- 너무나 영화적인 표현법 때문에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

- 나 예술영화 좀 하는 감독이야.... 너무 내세운 거 같아. 부담스러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할리우드식의 장르영화를 보러갔는데 극장을 나설 때는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을 본 것 같은 찜찜한(?) 여운을 호소하는 일반 관객도 의외로 많았다는 WaW 기획실 관람후기조사결과도 있었다.

물론 류지호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을 좋아하는 관객도 많았기에 400만 가까운 흥행을 기록할 수 있었다.

다만 한국영화 특유의 여백이 있었다면 더 좋은 흥행 성적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았다.

한국영화 특유의 여백이란 일종의 제작비 부족의 핑계로 발생하는 허술함이나 스타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해 특정 감정(신파 같은)을 유도하는 걸 의미했다.

그런 걸 하려고 했다면 류지호가 굳이 <민중의 적>을 할 이유가 없었다.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현대 한국의 장르영화 중에서 영화적·미학적·예술적 경지를 보여준 작품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살인의 추억>, <헤어진 결심> 정도 꼽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빈약한 노릇일까.

류지호는 <민중의 적>이 <투캅스>와 <범죄도시>를 이어주는 중간 단계의 형사물이 아니라 한국판 <고독한 늑대의 피>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영감을 주는 영화가 되길 바랐다.

소위 대중적 작자주의 영화라고 할까.


“삼류 축에도 끼지 못했던 감독따리가 꿈도 야무지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경호원 티노 곤잘레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린 류지호가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애너하임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애너하임의 저렴한 단기임대 숙소에 머물고 있는 시나리오 작가 스튜 베티를 만나서 <The Punisher> 실사화 각색을 제안했다.

<콜래트럴>에 그린라이트가 켜지고, LOG 픽처스의 <캐리비안의 해적>의 작업도 일찌감치 끝이 났고, 당장은 할 일이 없어 호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스튜 베티였다.

류지호의 제안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각 승낙했다.

Timely 실사화를 책임지고 있는 개빈 페이지와 JHO Pictures의 프로덕션 헤드 앨런 포스터에게 스튜 베티를 소개했다.

두 사람이 보기에 류지호와 일하기에는 경력이 미천했다.

그렇다고 반대하진 않았다.

어차피 류지호가 모든 걸 통제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고 괜찮은 프로젝트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사장될 가능성이 높다.

쇠뿔도 단 김에 빼라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며 인간은 어떤 생각을 결심한 뒤 24시간 안에 그 아이디어를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에서 결과물이 도출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고 한다.

부자들이 유난히 결단과 행동력이 빠른 것은 망설이며 발생하는 비용보다 막상 저지르고 본 후에 보게 된 손해가 적기 때문이며 비용이나 손해를 빠르게 복구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류지호는 무척 신중한 편이지만, 결심이 서면 바로 행동하는 타입이다.

특히 한 단계 도약할 타이밍이라고 생각되면 거침이 없다.

망설이는 순간 다른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들이 그 자리를 채우기에.


‘아끼다 똥 되는 게 한 두 개여야지.....!’


류지호는 미국에서 결정해야 할 것들을 빠르게 처리했다.

각오하긴 했지만, <The Punisher> 촬영을 마칠 때까지 제대로 된 휴식은 꿈도 꾸지 못할 것 같았다.


작가의말

민중의 적2를 다른 아이디어로 교체하려고 해봤습니다만... 주인공이 아무리 충무로 인프라를 잘 깔아놨다고 해도 SF나 블록버스터 역사물은 이 시점에 무리인 것 같아서 2010년대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주인공이 제작비를 무한정 쓸 수 있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제반 여건과 인력의 수준이 받쳐주지 않으면 완성도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없겠죠. 빌리 와일더 감독을 언급한 것은 주인공이 다작감독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멜로영화 빼고 온갖 종류를 다 찍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이 다 소설에 담길지는 현재로서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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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84 검대검
    작성일
    23.06.20 09:31
    No. 1

    지호가 영화를 더 많이 찍게되면 레오나와 결혼할 때 류지호는 파커가의 재산 보존을 위한 얼굴마담이라는 음모론이 더 힘을 받겠군요.
    저렇게 영화를 찍어대면서 경영까지 한다고? 거짓말이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4 D.E.N.T
    작성일
    23.06.20 09:39
    No. 2

    지호는 빌리 와일더와 하워드 혹스의 계보를 잇는 감독으로서 이름을 남기지 않을까 합니다. 두 사람 다 다작+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 많은 걸작을 남겼으니깐요. 여기에 류지호 본인의 스타일리스트한 성향이 첨가되면서 독창적인 특징이 나타나겠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6 도뮤
    작성일
    23.06.20 09:43
    No. 3

    재밌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8 ki******
    작성일
    23.06.20 12:25
    No. 4

    범죄도시를어케할지궁금해지내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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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하얀유니콘
    작성일
    23.06.20 14:58
    No. 5

    SF 를 좋아하면서도 국내에서 만든건
    솔직히 잘 안보게 됩니다.
    한국 영화를 많이 보지만 실험작들은
    너무 유치한것 같아서요.
    이것도 이중 작대 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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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2 책읽남
    작성일
    23.06.20 22:17
    No. 6

    감독이 직접 뒤에 직접이 중복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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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43 트뤼포
    작성일
    23.06.21 13:05
    No. 7

    수정/보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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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3.06.22 23:56
    No. 8

    잘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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