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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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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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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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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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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뭉치면 서고, 흩어지면 넘어진다.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공식행사가 끝이 나고 리셉션이 시작될 즈음 크레티앙 총리가 슬그머니 행사장을 떠났다.


잠시 후.


총리 보좌관이 류지호를 찾아와 말을 전했다.


“총리님이 오타와로 돌아가기 전에 미스터 류와 잠시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 하십니다.”

“나만 따로요?”

“예. 행사 참석 중에 실례인 줄은 알지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


당연히 된다.

캐나다 총리가 따로 좀 보자는데 싫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류지호는 총리 보좌관을 따라서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호텔행사장에서 멀지 않은 카페테리아에서 크레티앙 총리가 차를 마시고 있다.

듣던 대로 소탈한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미스터 류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초대를 하게 됐습니다.”

“실례라니요. 총리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크레티앙 총리와 인사를 나눈 류지호가 보고서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잘 모르는 이들은 영연방국가 캐나다를 미국의 51번 째 주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뚜렷한 행보를 보이지 않는 나라가 캐나다이다.

경제적으로 캐나다 수출의 75%가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

전 총리는 재임 9년 동안 친미일변도의 정책을 펴왔다.

전 총리 집권기 동안 미국의 외교정책이 바로 캐나다의 외교정책일 정도로 미국에 밀착되어 있었다.

미국이 원하는 대로 대책도 없이 덜컥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서명해주기까지 해서 40만 명의 실직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로인해 실업률이 12%로 치솟았다.

전 총리가 경제정책 실패를 책임지고 물러나고, 1993년 총리에 오른 인물이 바로 류지호와 마주하고 있는 크레티앙이다.

가난한 집안의 19형제 중 18번째로 태어난 그는 선천적 장애로 한쪽 귀가 먹고, 안면마비로 입이 비뚤어졌다.

콤플렉스로 인해 어린 시절에는 싸움 같은 말썽을 자주 일으켰다.

 4번이나 퇴학을 당해야 했다.

그러다가 18세 때 현재의 부인을 만나면서 완전 딴 사람이 되었다.

바보 온달이 평강공주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법대에 진학했고, 변호사까지 되었다.

29세라는 어린 나이에 캐나다 의회에 진출했다.

마침내 60세에 캐나다 총리가 되어 9년 째 캐나다 행정부를 책임지고 있다.


‘미국에 고분고분 하던 캐나다를 바꿔서 국제사회에서 자기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지.’


미국의 일제 고급승용차에 대한 일방적 보복관세조치와 관련해서 따끔한 일침을 가할 정도로 미국에 할 말을 하는 총리가 크레티앙이었다.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가 중재에 나서기도 전에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다면서 날 선 비판을 하기도 했다.

이전 총리 시절이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발언들이었다.

또한 멕시코 페소화대폭락사태 이전부터 국제통화기구와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의 개혁을 주장하는 등 미대통령에게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해 해왔다.

국내적으로는 사회간접자본에 60억 달러를 투자,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공약했고 실행 중이다.

총리 당선 후, 각 부처의 예산을 20%씩 일괄적으로 깎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덕분에 캐나다 경제는 살아나고 있고, 실업률도 줄어들었다.

그의 인기는 최근 70%를 웃돌 정도로 캐나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제 친구는 총리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도 퀘벡주 출신이거든요.”


UCLA 기숙사 룸메이트 에이든 해멀스가 퀘벡 출신이다.

크레티앙 총리 역시 인구 2만 명의 퀘벡주 셔위니건 출신이고.


“처음에는 날 좋아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리가 없어요. 난 퀘벡주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소리를 종종 듣거든요.”

“스스로 시골호박이라고 부르신다면서요? 퀘백주 사람들도 총리님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세계 10위 경제국 캐나다 총리임에도 그는 소형차를 타고 다닌다.

밤엔 부인과 함께 인근 피자가게에 불쑥 나타나는 서민형 지도자다.

캐나다 국민들은 그런 서민적인 모습을 무척 좋아했다.

게다가 옹골차게 캐나다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니 국민들이 싫어할 수가 없었다.


“난 퀘벡주 출신이지만, 분리주의운동에는 반대 입장이에요.”

“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


크레티앙 총리가 후보시절 유세에서 한 말이다.

뭉치면 서고, 흩어지면 넘어진다는 의미다.

혹시 몰라서 비서실장 제니퍼 허드슨이 일러 준 말이다.


“내가 이솝처럼 못생겼지요?”


류지호는 솔직히 아니라고는 하지 못했다.

이솝우화를 지은 이솝은 재치 있는 입담에 비해 말더듬이에다가 외모까지 추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크레티앙 총리의 안면마비 그리고 어눌한 말, 왜소한 몸집은 정치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이유로 비난하는 이들도 많았다.


“총리님께서는 말은 잘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거짓말도 하지 못하시지요.”


이 말 또한 크레티앙이 총리 후보 유세에서 했던 말이다.

비즈니스맨의 립서비스일수도 있겠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크레티앙 총리가 활짝 웃었다.


“하하하. 저에 대해 정말 많이 알고 있군요.”


갑작스러운 만남임에도 마치 준비했다는 듯 술술 나오는 말들.

정치계 못지않게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 경제계임을 잘 알고 있는 총리로서는 젊은 억만장자의 태도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내 단점들이 결코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외모보다는 내면을 울리는 말 한 마디가 달변 보다는 진심이 통한다고 믿어왔으니까요.”

“GTE의 제이콥 웰치는 어릴 때 키가 작고 말을 더듬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생각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입이 그 속도를 못 따라가기 때문이니까 걱정 말라고, 항상 격려했다고 합니다. 항상 커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고 하지요. 제이콥 웰치는 결국 세계적인 기업의 최연소 CEO까지 오르게 되었잖습니까? 누구나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장점을 명확히 자각할 수 있다면 발전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태도에요. 그런 면에서 미스터 류의 자수성가 스토리는 캐나다 청소년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과찬이십니다.”

“어릴 때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습니까?”


류지호는 자신의 어려웠던 시련의 삶을 진솔하게 이야기 했다.

한때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다는 말에 총리가 맞장구를 치며 껄껄 웃기도 했다.


“미스터 류의 투자가 온타리오주에서 많은 고용을 유발시켰지요.”

“DALLSA Corp. 경영진의 노고 때문이겠죠.”

“이번에 북미 멀티플렉스 사업에 진출한다고요?”

“한국에서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멀티플렉스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캐나다에 직접 진출하는 것은 아니고 미국의 대형 멀티플렉스와 논의 중에 있습니다.”

“Hamels Capital과 함께 한다고 들었는데..... 협상 중인 멀티플렉스 사정이 썩 좋지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국가를 이끄는 최고책임자가 경제문제에서 민감하게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가 실업율이다.

Loews Cineplex는 캐나다에만 900개에 육박하는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는 최대 극장사업자다.

이번 인수합병으로 자칫 대량 해고사태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총리로서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구조조정이 끝난 상태라서 인수 하더라도 대규모 인원감축은 없을 것으로 보고를 받긴 했습니다.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인원감축이 완전히 없다고는 못 박지 않았다.

대규모로 해고를 하지 않겠다고 했지.

대신.


“JHO Company가 온타리오주와 BC주에 투자를 확대할 방침인 것으로 메타보이 CEO에게 들었습니다.”


느긋한 태도를 보이던 크레티앙 총리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혹시 제2 스튜디오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JHO 산하의 영화 제작사들이 캐나다에서 자주 로케이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비록 <X-파일>이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촬영되고 있지만, 많은 시즌을 밴쿠버에서 제작했지요.”


90년대 중후반부터 할리우드 영화나 TV시리즈가 밴쿠버를 중심으로 많이 촬영되고 있다.

캐나다 정부와 관련 주정부에서 관련 산업 육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총리님도 아시다시피 밴쿠버는 경도가 할리우드와 같아서 시차 적응에 애를 먹을 일도 없고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작업하고 주말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습니다.”

“맞아요. 토론토는 할리우드와 3시간의 시차가 있을 정도로 거리가 멀지만 뉴욕과는 매우 가깝다고 볼 수 있지요.”

“매년 제작비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할리우드 환경을 감안했을 때 밴쿠버와 토론토는 매력적인 촬영지입니다. 다만.....”


실제 캐나다 로케이션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제2 스튜디오 설립 계획도 내부에서 활발하게 논의 중이다.


“JHO Company 계열사들이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Playa Vista로 이전하게 됩니다.”

“......”

“스튜디오는 당초 계획보다 시설을 축소했습니다. 백랏도 짓지 않기로 했죠.”

“혹시 BC주에.... 제2 스튜디오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JHO 계열의 독립영화배급사 ParaMax는 지금까지 자체 스튜디오를 보유하지 않았습니다.”


ParaMax Studios를 세울 수도 있다는 뉘앙스다.

영화 종합촬영소 하나 들어선다고 얼마나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고 고용효과를 거둘까 싶지만, LA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영화·방송인만 대략 30~50만 명이다.

뉴욕주에는 방송·공연계 사람들을 포함해서 그 정도 되고.

소닉-콜롬비아스 스튜디오급 종합촬영소가 밴쿠버에 들어서면 1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미국에서 일하러 온 할리우드 사람들이 지역에 뿌리는 돈까지 감안하면 경제유발효과는 몇 배가 껑충 뛴다.


“만약 미국의 여러 주들이 제시하는 혜택과 동일한 수준으로 주정부가 제공한다면 제2 스튜디오나 ParaMax Studios 건립문제에 있어서 미국만 고집할 이유는 없겠죠.”

“....음. BC주는 경제 사정이 썩 좋지 못합니다. 원하는 수준의 세금혜택에 부담을 느낄 겁니다.”


그쪽 사정이고.


“ParaMax의 <굿 윌 헌팅>을 캐나다에서 로케이션할 때 800명의 고용효과가 있었다고 보고 받은 적이 있습니다. <X-파일>은 4시즌 동안 평균 300여 명의 캐나다 배우와 스태프가 고용되었지요. 블록버스터의 경우는 2,000명 이상의 고용효과가 발생하고 각종 비용을 캐나다에서 쓰고 돌아갈 겁니다. 세금감면 이상의 효과를 보게 됩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흑자를 내는 조직이 아니다.

직접적인 세금수입이 줄더라도 시민들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지역의 경기가 활성화 되는 것만으로 정책이나 행정이 성공한 것이다.

정치인이나 주민들은 투자유치 성과보다 실업률 감소를 더 환영한다.


“주정부 당국자들과 논의를 해보았습니까?”

“아직까지 구체적인 접촉은 없는 걸로 압니다. 다른 메이저 스튜디오 역시 알지 못합니다.”


크레티앙 총리가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보좌관이 다가와 뭔가 말을 건넸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언제든 불러주시면 한 걸음에 달려오겠습니다.”

“다음에 볼 때는 의회에서 보길 기대하겠습니다.”

“....의회요?”


크레티앙 총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30분의 짧은 만남을 마무리했다.

이번 행사에 총리가 참석하도록 한 것이 해멀스 가문이란 걸 류지호는 알지 못했다.

멀지 않은 때 캐나다 의회에서 다시 한 번 총리를 보게 된다는 것도.

총리가 떠난 카페테리아에서 류지호가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토론토의 금융거리를 눈에 담았다.

이 거리는 뉴욕의 맨해튼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뉴욕의 교통체증, 비싼 길거리나 건물 렌트비용, 경찰의 통제 등을 고려하면 물가도 싸고, 쾌적한(?) 환경의 토론토에서 촬영하는 편이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좋다.

따라서 5년 정도가 지나면 할리우드 영화의 뉴욕 배경은 거의 토론토 금융거리에서 촬영하게 된다.

밴쿠버도 마찬가지다.

거의 매주 밴쿠버 외곽에서 할리우드 영화와 TV시리즈가 촬영되는 풍경을 볼 수 있게 된다.

JHO Company Group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는 Playa Vista에 조성 중인 최신식 종합촬영소로 이주를 할 예정이다.

선셋가의 옛 Gower Studios와 Bronson Studios는 각각 Timely Studios, ParaMax, 트라이-스텔라TV와 IVE 엔터테인먼트 산하 프로덕션이 사용하기로 했다.

향후 StreamFlicks를 위한 자체 스튜디오 확보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미국 중부와 남부의 몇 개 주에서 캘리포니아 수준 이상의 각종 혜택을 제시하며 메이저 스튜디오의 이전을 유혹하고 있다.

이왕 스튜디오를 새로 만든다면 캘리포니아와 가까운 캐나다 밴쿠버나 뉴욕과 가까운 토론토가 유리했다.

어쨌든 이번 캐나다 총리와의 짧은 미팅을 계기로 밴쿠버의 영화촬영에 대한 세금혜택이 이전 삶보다 2년 일찍 시작된다.


✻ ✻ ✻


캐나다 토론토 총영사관 주최 행사 외에도 박건호 대표는 캐나다 교민회행사도 두 군데 더 참석했다.

류지호는 숙소를 Eye-MAX 본사가 위치한 미시소거로 옮겼다.

비즈니스 활동에서 신경을 끄고 단편영화 준비에 들어갔다.

다소 충동적인 면이 없진 않지만, 영화 짬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라 전화 몇 통만으로 얼추 기본 세팅이 끝났다.

가장 먼저 한 일은 Eye-MAX 영화의 대부 조지 맥길리브레이에게 3D Eye-MAX 영화에 대한 도움을 청했다.

전화를 받은 조지 맥길리브레이가 한달음에 미시소거로 달려왔다.


“3D 단편영화를 찍겠다고?”

“직접 해봐야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자네는 장편영화를 찍을 수도 있지 않나?”

“얼간이처럼 디렉터 체어에 앉아서 크루들이 일하는 모습을 멍청하게 지켜보고 싶진 않네요.”


맥길리브레이의 친구이자 영화사 공동 대표인 프리드먼까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류지호를 돕기 위해 나섰다.

따로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프로듀서 타이틀을 달고 크루를 모았다.

심지어 조감독처럼 배우 오디션까지 본인이 직접 챙겼다.


“우리에게 이런 방식은 일상이야.”


10명 미만의 인원이 게릴라처럼 촬영을 하던 습성이 있어서 그런지 내 일 네 일 없이 프리드먼 혼자 많은 일을 처리했다.

류지호라서 해서 뒷짐만 지고 있지 않았다.

캐나다 현지 실정을 몰라 업체선정이나 행정업무는 볼 수 없었지만, 조감독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은 손수 처리했다.

사실 스토리도 별 것 없고, 콘티도 복잡할 것이 없다.

오로지 3D에 특화된 화면이 연출될 수 있도록 콘티를 했다.

이번 영화는 작품적으로 공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3D Eye-MAX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찍기로 했다.

다만 좀비소재라는 점에서 애로사항이 조금 있었다.

토론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수많은 배우와 스턴트맨 오디션을 봤지만 마음에 드는 좀비 연기를 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미국 컬버시티 Vic & Jay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좀비 연기를 해줄 여성 스턴트 한 명만 토론토로 보내줘.”


빅키 햄휴즈가 흥미를 보였다.


- 뭔데? 캐나다에서 뭐 해?

“단편영화 한 편 찍어보려고. 여기 배우들로는 마음에 드는 연기가 나오지 않아서.”

- 그런 영화를 찍는데 우릴 안 불렀단 말이야?

“별 거 아니야.”

- 토론토란 말이지?


전화 통화를 한 후로 삼일이 흘렀다.

빅키 햄휴즈가 자신의 팀원들을 데리고 미시소거로 날아왔다.

대뜸 맡겨놓은 물건을 달라고 하듯 당당하게 말했다.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일단 스크립트 줘봐.”


류지호는 순순히 스크립트를 전해줬다.


“뭐야? 달랑 다섯 페이지?”

“별 거 아니라고 했잖아.”


5페이지짜리 대본 표지에는 <Zombie Apocalypse>라는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스몰 옥토퍼스(낙지)처럼 꿈틀거려? 좀비가 모리스 그린처럼 달린다고?”


모리스 그린은 단거리 육상선수의 이름이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육상 단거리 기록 9.84를 0.05초를 앞 당겨 인간의 한계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육상스타다.


“달리는 좀비는 아주 짧게 보일 거고, 여주인공 집 안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가 메인 스토리라고 할 수 있어.”

“실내에서 벌어지는 액션 시퀀스는 몇 분인데?”

“3분은 넘지 않을 거야.”

“남자가 집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좀비로 변한 여자 친구에게 물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네?”

“여자 친구는 연약해서는 안 돼. 괴력을 발휘해야지. 도저히 남자가 이길 수 없는 상황까지 몰아 붙였다가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진짜 죽음을 맞이해야 하지.”

“슬랩스틱?”

“맥락없이 우스꽝스러운 건 싫어.”

“처절한 사투가 되어야겠구나?”

“3D 영화니까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느낌도 중요하고. 프롭이 입체적으로 보이게 날아다녀도 되고... 제일 중요한 건 공간감이야. 3D 영화는 관객이 그 공간 안에 함께 들어가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중요하거든.”

“3D 영화 찍어 봤어?”

“아니, 처음.”


그럼에도 콘티가 예사롭지 않았다.


“연구를 많이 했어. 실제 해보면 상상한 대로 나오나 한 번 해보려는 거야.”

“혹시...?”

“생각하는 게 맞을 걸?”

“진짜 <REMO>를 3D Eye-MAX로 만들어 보게?”

“이번에 3D 영화의 이해를 완벽하게 한다면.”

“가볍게 임하면 안 되겠군.”

“함께 온 릴리가 여자 좀비 역할을 하겠대?”

“영국에서 <28일 후>라는 좀비 영화에 참여했거든.”


<28일 후>는 21세기 좀비 장르영화의 교재 같은 영화다.

현대 좀비 영화의 아버지이자 호러 영화의 거장 로메로 감독에 대한 오마주를 통해 고전 좀비영화 전통에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좀비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수작이다.

이전 삶과 달라진 점도 있었다.

류지호의 단편영화 <Help Me, Please>의 유명한 시퀀스 ‘물 좀 주소’ 장면을 패러디했다.

<28일 후>에서 군인들이 실험하던 감염자 군인 메일러 일병이 깜짝 등장하는 장면에서 <Help Me, Please> 패러디 장면이 나온다.


“민첩한 좀비에 거부감은 없겠네.”

“열심히 뛰어다녔다더라.”

“그 정도까지는 아닐걸?”


이번에 찍을 <Zombie Apocalypse>에서는 좀비의 속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풍자도 메타포도 메시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주택 내부라는 한정된 장소와 반대로 주택가의 탁 트인 공간에서의 3D 효과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으면 만족할 수 있는 작업이다.


“다들 날 따라와.”

“어디 가는데?”


류지호가 빅키팀을 데리고 미시소거와 오크빌 경계의 외곽지역으로 데리고 갔다.


“태권도센터잖아?”

“한국인 사범이 운영하는 체육관이야.”

“오디션이라도 보려고?”

“응.”


<28일 후>에서 좀비 연기를 해봤다고 해서 무턱대로 캐스팅할 순 없다.

오디션은 당연한 거다.

류지호는 한인 태권도 사범에게 양해를 구했다.

한 시간을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체육관을 사용할 수 있었다.


“릴리부터 해 봐.”


릴리 보웬(Lily Bowen)은 <매트릭스>를 비록해 빅키 햄휴즈가 참여한 다수의 작품에서 스턴트를 한 베테랑 스턴트우먼이다.

류지호의 친구 앨리나 와츠의 지정 스턴트 더블이다.

최근에는 <28일 후> 외에도 앨리나 와츠가 출연한 미국판 <링>에서 대역을 수행한 바 있다.


“오오. 제법인데~”

“굿잡.“


<28일 후>에서 했던 좀비 연기를 선보이는 내내 빅키팀원들이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보내고 난리도 아니었다.

반면에 류지호는 시큰둥했다.

한국, 미국, 일본, 태국, 영국 등 온갖 나라에서 만든 좀비영화를 꿰고 있다.

어지간한 좀비 연기로는 류지호를 감동시킬 수는 없다.

배우에게 감독인 자신이 실연해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있는 좀비의 행동을 릴리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좀비 연기를 실연해 보였다.


“스몰 옥토퍼스라고 한 게 그거였어요?”


류지호가 바닥에서 요동치고 때로는 몸부림쳤다.

마치 산낙지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일본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요괴를 흉내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은 2010년대 이후로 좀비장르 영화에서 등장하는 좀비의 일반적인 모습들을 따라해 본 것이다.

<부산행>, <아이 엠 어 히어로>, <월드워 Z>. <워킹 데드>, <좀비랜드>, <아미 오브 더 데드> 등.

특히 독일의 웰메이드 좀비영화 <베를린 언데드>에서 감독이 보여줬던 좁은 공간을 활용한 좀비 서스펜스는 류지호가 준비 중인 3D 단편 <Zombie Apocalypse>의 훌륭한 레퍼런스였다.


“디렉터, 내가 다시 한 번 해 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빅키와 제이크는 날 좀 도와줘.”


릴리는 즉석에서 빅키와 제이크에게 위치를 잡아줬다.

그런 후, 대본에서 묘사한 상황을 몸으로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몸은 뻣뻣한데 괴력을 보인다거나,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방바닥에서 경련을 일으킨다거나, 휘두른 팔이 벽으로 설정한 빅키의 몸에 끼어서 빠지지 않는다거나, 본능대로 움직이다보니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또 뒹굴었다가 발딱 일어서고....

릴리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모든 걸 류지호 앞에서 선보였다.


“거기까지!”


릴리가 좀비연기를 멈췄다.

겨우 10여 분 몸을 움직였을 뿐이다.

릴리는 물에 빠졌다 방금 나온 사람처럼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릴리, 오늘은 이 정도만 하는 걸로 하자.”

“괜찮았어요?”

“함께 아이디어를 정리해 보자고.”

“옛!”


류지호는 수행비서에게 빅키팀이 머물 수 있는 숙소를 잡아주라고 지시했다.

태권도장에는 단편영화 촬영이 끝날 때까지 사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인 태권도 사범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돈을 주겠다는 류지호의 제안을 거절했다.

류지호의 영화 준비를 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기념사진만 걸어놔도 엄청난 홍보가 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같은 태권도인이기도 하고, 한국인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도울 수밖에 없다.

주요 매스컴을 통해 캐나다 사람들도 류지호에 대한 기사를 자주 접할 수 있다.

그로 인해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조금은 좋아진 것이 사실이다.

사범입장에서는 체육관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며칠 훈련장으로 쓰겠다는데 못 내줄 것도 없다.

류지호 입장은 달랐다.

맨입으로 태권도장을 쓸 순 없었다.


“의장비서실 연락해서 태권도 보호구와 미트 같은 기구들을 기증하라고 하세요.”


류지호의 지시가 웨스트우드 헤드쿼터로 전달되고 빅키팀이 훈련을 모두 마치고 떠난 후에 엄청난 양의 태권도 용품이 오크빌 태권도센터에 배달된다.

캐나다에서 최대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일간지 글로브 앤 메일에 그 같은 미담이 소개되기도 한다.

당연히 태권도장이 유명해져서 기존 회원들의 자랑거리가 생기고 신규 회원도 폭증하게 된다.


작가의말

좀비영화 마니아라면 안 보신 분이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독일 좀비영화 ‘람보크 베를린 언데드’ 조심스럽게 추천해 봅니다. 러닝타임도 60분 정도로 짧고 개인적으로 꽤 훌륭한 좀비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화끈하고 고어한 좀비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에게는 비추입니다. 아기자기(?)한 서스펜스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꽤 볼 만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십시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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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자기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야 하는 법. (2) +3 23.06.09 2,969 112 24쪽
522 자기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야 하는 법. (1) +2 23.06.08 2,967 109 23쪽
521 Zombie Apocalypse. (2) +4 23.06.07 2,903 110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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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가진 것은 없어도 가치 있게 살아라. +10 23.06.05 2,977 107 24쪽
» 뭉치면 서고, 흩어지면 넘어진다. (2) +5 23.06.03 3,011 113 24쪽
517 뭉치면 서고, 흩어지면 넘어진다. (1) +4 23.06.02 3,040 105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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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동해 바다에 빠져 죽을 각오로... (2) +4 23.05.31 3,128 110 25쪽
514 동해 바다에 빠져 죽을 각오로... (1) +5 23.05.30 3,173 109 23쪽
513 잘 참으셨습니다. +6 23.05.29 3,172 123 25쪽
512 맹수가 얌전하도록 가만 놔둬라. (2) +5 23.05.27 3,249 119 24쪽
511 맹수가 얌전하도록 가만 놔둬라. (1) +7 23.05.26 3,187 116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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