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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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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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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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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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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자기 사람은 진짜 잘 챙기는 것 같아.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참 얄궂은 운명이다.

<007> 시리즈와 <REMO> 시리즈를 두고 하는 말이다.

2년 전에 같은 날 개봉해서 맞붙더니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전개됐다.

원래라면 두 시리즈의 성패는 <007>로 기우는 것이 당연했다.

헌데 할리우드 안팎에서는 <REMO>의 완승을 점치는 분위기다.

<007 Die Another Day> 프리미어가 열린 직후부터 거의 대부분의 매체에서 악평이 쏟아졌다.

반면에 <REMO> 후속편은 신선한 액션과 간간이 웃음 짓게 하는 유머는 약화되었지만, 평타 이상은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007 Die Another Day>의 한국에서의 반응은 특히나 최악이었다.

한국의 TV스타가 북한군 배역을 거절했다는 것이 알려지고,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함께 영화의 대부분이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 것이 한국 관객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20번째 <007> 영화는 한반도를 묘사하는 것만 빼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대부분이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 것 자체가 돈을 내고 볼 가치가 없다.]


한국계 배우들의 형편없는 한국어 구사는 한국인 입장에서 도저히 용서가 되질 않았다.

게다가 국군이 미국의 용병 혹은 엑스트라로 묘사된 것도 국민 정서를 건드렸다.

영국 MI6의 최고 스파이가 어떤 연유로 한반도에서 활약하는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고, 어떤 장면에서도 CIA나 NSA가 한국의 군 수뇌부와 의논하는 모습이 없다.

미국의 51번째 주라고 해도 그렇게는 안 한다.

그 외에 설정과 고증 오류는 일일이 세기도 어려울 정도다.

결론을 말하자면, 한국에서 <007 Die Another Day>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게 된다.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수익 4.3억 달러를 기록해 간신히 체면치레는 한다.

<REMO> 후속편이 한국에서는 120만 명으로 승리하지만,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에서는 2.7억 달러를 기록해 <007 Die Another Day>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아무리 욕을 먹어도 007은 007이지.”


11월의 한국 극장가는 한국영화 세편이 선전하고 있다.

선두에 서 있는 영화는 류지호의 <민중의 적>이다.

<해리포터>가 겨울방학을 앞두고 개봉하고, <반지의 제왕>은 봄방학을 맞이해 개봉할 예정이다.

그 전에 최대한 관객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두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는 기간에는 한국영화가 관객을 불러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한국영화는 쪽박 아니면 대박이었다.

서울의 20개관 이상을 확보하지 못한 영화중에서 단 한편도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와이드 릴리스 방식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첫 주 흥행 성적을 위해서 마케팅비를 쏟아 붓고, 모 아니면 도식으로 영화의 운명을 맡기는 분위기다.

첫 주의 흥행 성적이 괜찮다 하더라도, 완성도에 문제가 있어서 입소문이 안 좋게 날 경우는 2주차부터 스크린이 대폭 빠졌다.

참고로 미국은 최소 2주 동안은 스크린 변동이 전혀 없다.

큰 낙차폭으로 인해 요즘 한국영화계에선 1주 버티면 다행, 2주 버티면 롱런, 3주 버티면 대박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 충무로 분위기에 박건호 대표가 일침을 가했다.


“사람들이 우리가 2만 명도 채 볼까 말까 했을지도 모를 영화 <집으로>를 막대한 마케팅 비용으로 400만 명으로 만들어냈다고들 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관객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우리는 <집으로>의 상업적 가능성을 정확히 보고, 한국영화 시장을 분석한 마케팅을 펼쳤다. WaW에게 있어서 제작비를 훨씬 상회하는 마케팅비가 쓰였다는 건 만용이 아닌 의미 있는 용기다. 결국 될 만한 영화였고, 마케팅비의 대부분은 늘어난 극장에 대한 프린트 비용이었을 뿐이다.”


순제작비 14억, 최종 마케팅비용 21억.

<집으로>는 중간 정산 결과 극장 수입으로만 28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개봉 전에는 본전치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아니 돈을 번 셈이 되었다.

제작비를 훌쩍 넘는 마케팅비에 모두가 돈이 남아돌아 만용을 부린다고 수군댔다.

그런데 최종 서울 157만, 전국 410만이라는 엄청난 대박을 기록했다.

무엇이 한국 영화팬에게 통할 수 있는지 제대로 읽어낸 의미 있는 용기였다.

많은 영화인들이 <집으로>의 성공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투기성 자본 성격의 금융자본들이 한국형 블록버스터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소박하지만 관객과 조응하는 영화를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하반기 기대작 <민중의 적>은 순항 중이다.

2주차에 지방극장 스크린이 50개가 더 늘었고, 3주차에 또 다시 23개가 늘었다.

11월 말 현재, 전국 1,100여개 스크린 가운데 398개를 차지하고 있다.

지방의 단관극장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휩싸였다.

한창 잘 나가는 <민중의 적>를 극장에 걸 것인지, 아니면 손해를 감수하고 기존의 영화를 놔두었다가 12월 개봉하는 대작으로 갈아탈 것인가.

전국 600여 개 극장 가운데 멀티플렉스는 60개가 채 되질 않았다.

500개 이상의 극장들은 한 편의 영화만 걸 수 있는 단관극장이다.

혹은 몇 남지 않은 동시상영관 혹은 변두리 소극장이다.

단관극장의 경우는 흥행작품의 장기상영으로 돈을 버는 구조다.

지방 극장주들은 지방배급업자에 의존하던 과거와 달리 돈 될 만한 영화를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국영화배급에서 장기상영이 사라지는 출발점이다.

한국영화시장에서 초단기 치고 빠지기 배급과 상영이란 적폐가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될지.

합리적이고 최소한의 공정한 배급의 룰이 영화배급시장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변수라고 할 수 있는 류지호와 WaW 엔터테인먼트로 인해 이전 삶과는 완전히 달라진 배급구조가 만들어지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 ❉ ❉


<민중의 적> 프로모션 활동을 마치고, 류지호는 휴식에 들어갔다.

한남동 집에서 빈둥거리며 WaW에서 보내 온 한국영화 시나리오를 읽었다.


“미국에는 언제 돌아갈 거니?”

“연말까지 한국에서 보내려구요.”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놔두세요. 아라랑 전주에 가기로 했어요.”

“갈 거면 저 혼자 가던가, 잘 쉬고 있는 오빠는 왜 데려간다니.”

“원더러스 경기 응원 가기로 했어요.”


류지호는 류아라와 함께 가온 원더러스 아이스하키팀의 한일통합리그 홈 개막 경기를 관람했다.

팀 간 실력차를 고려해 용병 세 명을 영입했다.

그럼에도 일본팀과 실력차이가 드러나는 경기였다.


“오빠! 유명한 선수를 데려오면 안 돼? 미국의 프로선수를 데려오면 일본 팀도 압살하지 않을까?”


류아라는 분함을 숨기지 못했다.

씩씩거리는 여동생에게 류지호가 웃으며 말했다.


“NHL에서 뛰던 유명한 선수가 한국에 와서 선수생활 하고 싶을까?”

“돈 많이 주면 되잖아.”

“모르긴 몰라도. 부상 입은 걸 숨기고 1년 쉬다가 가려고 오는 놈들뿐일걸.”


한국의 아이스하키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다.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려는 선수거나, 본토 리그에서 주전 근처에도 못 가볼 선수들이 올 수밖에 없다.

체코나 슬로바키아처럼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부족한 나라 선수들도 A급은 유럽 리그에서 뛰지 한국에 올 이유가 없다.


“그런 양심 없는 놈들이 있으려고.”

“다른 프로스포츠에서도 그런 식으로 뒤통수 맞은 사례가 꽤 있을 걸.”

“못 됐네! 진짜.”

“북미 아이스하키 선수 중에서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아는 선수가 거의 없을 걸. 선수생활에서 그리 매력적인 리그는 아니야.”

“우승은 무리더라도 플레이오프에는 나갔으면 좋겠는데.”

“5년 안에 그렇게 되겠지.”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고 해도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팀 스포츠는 특정 개인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팀 전반이 함께 폼이 올라오지 않으면 우승이 가능하지 않으니까.

한국 선수 수준보다 너무 월등한 외국인 선수가 오는 것도 문제다.

선수들이 배워서 따라잡을만한 수준이 좋다.

외국에서 온 선수가 너무 뛰어난 실력으로 게임을 혼자 지배하고 떠나버리면 팀에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프로농구나 배구가 그래서 미래가 없다.

센터나 공격수 자리를 용병으로 고정하다보니 국내 유망주가 지원을 하지 않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 그 포지션의 씨가 마를 수밖에 없다.

용병제도가 순기능도 많지만 장기적으로 국내 아마추어 판을 망치기도 한다.

그나마 아이스하키는 나은 편이다.

경기 중 언제든지 6명 이내에서 선수 전원을 수시로 자유롭게 교체할 수 있으니까.

선수교체에 제한이 없기에 국내 선수의 기회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진 않는다.

당장은 우승이니 플레이오프니 하는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탄탄한 구단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젊은 선수들을 시합에 꾸준히 내보내면서 실력향상을 도모할 시기다.

플레이오프를 도전할 만 할 때가 오면 아시아리그 몇 수 위 수준의 외국 선수를 데려와 성적을 거두면서 젊은 선수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면 된다.


“이러다 매번 꼴찌만 하는 건 아니겠... 헙!”


류아라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자신의 말로 인해 부정 탈까봐서.


“선수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어. 선배들에게 배우고, 상대팀 선수에게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라고도 했고.”

“꼴찌도 계속되면 버릇이 된다고 하던데. 구단주 맞아?”

“선수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게 뭔 줄 알아?”

“뭔데?”

“가온그룹이 망하지 않는 한, 아니 내가 알거지가 되지 않는 한 원더러스는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

“에이. 그게 뭐야....”

“오너가 안정된 직업을 보장해 주는 것만큼 선수들에게 든든한 것도 없단다. 특히 연봉이 적은 실업팀 선수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선수 생활 마치면 먹고 살길이 막막할 테니.”


비인기 종목이면서 국내 아마추어 팀이 많지 않은 스포츠에서 특히 그렇다.

코치로 가거나 취업에 뜻이 없는 은퇴 선수를 제외하고, 모두를 가온그룹에 받아줄 방침이다.

겨울 스포츠 전공을 살려 무주리조트와 앞으로 건립될 전주 아이스하키 전용 구장 관리직, 또 센텀시티 백화점 아이스링크에서 일 할 수 있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은퇴 선수의 직급은 과장급부터 시작하게 된다.


“자선사업이야?”


절대 아니다.


“반평생을 빙판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잖아. 빙판에 올라서서 잠깐 확인하면 빙질, 빙판의 컨디션을 파악하는데 도사들이겠지.”


거기에 전문교육 과정을 거치면 아이스링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훌륭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따길 원하면 지원할 프로그램도 마련 중이다.

선수 일부는 동계 스포츠 행정전문가로 진로가 바뀔 수도 있다.


“가만 보면, 오빠는 자기 사람은 진짜 잘 챙기는 것 같아.”

“유식한 말로 사람에 투자한다고 하는 거야.”

“핏. 경영학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면서.....”


비즈니스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면서 배우고 있다.

JHO Company Group의 각종 사업보고서, 회계장부, 감사보고서를 자주 보다보니 저절로 경영기업을 터득하게 됐다.


“배고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살 게.”

“또 카드 긁어서 어머니한테 혼나려고?”

“보너스 나왔거든요.”

“가온호텔 레스토랑에서 티본스테이크 먹어도 돼?”

“전주 왔으면 콩나물 해장국이지. 어디서 칼질이야?”

“푸짐한 한 상에 막걸리 한 사발. 콜?”

“콜!”


함께 경기를 관람한 수행원들을 모두 데리고 삼천동으로 향했다.

10년 정도 지나면 전주 곳곳에 막걸리 골목이 생겨난다.

오래전부터 전주 막걸리 집은 12개 반찬이 나오는 것이 기본이었고, 반찬이 떨어지면 새로운 음식이 나오는 것 또한 유명했다.

삼천동은 수라상 부럽지 않은 안주 가짓수를 자랑하는 곳이다.

아직 한옥마을이 유명해지며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들기 전이다.

손님 대부분이 전주 시민이거나 외지에서 온 대학생이 대부분이다.


짠.


어느새 컸다고 오빠와 대작을 하는 여동생.

심장 한쪽이 간질간질 대는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여동생과 막걸리를 마셨다.

남자친구와의 문제부터 다울재단 업무, 뚜쟁이들의 성화, 결혼 시기, 출산까지.

류아라는 부모님에게 하지 못한 속내를 오빠에게 털어놓았다.

류지호는 충고나 조언을 삼갔다.

주의 깊게 들어주기만 했다.

조언을 바란다기보다 마음 한 구석에 쌓아놓고 있던 걸 그저 큰오빠에게 털어놓고 싶어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덤으로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기도 했고.

삼천동에서 막걸리를 마신 후, 남매는 한적한 전주 시내를 걸었다.


“근데, 레오나는 어떻게 할 거야?”

“뭘?”

“강화도 할머니나 뉴욕의 할아버지나 두 분 연세가 있으시잖아.”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졸업하면 약혼식부터 할까 생각 중이야.”

“오~”

“어른들에게는 설레발치지 말고. 너만 알고 있어.”

“레오나도 그렇게 하재?”

“적당한 시점을 봐서 프러포즈 해야지.”

“할아버지·할머니가 장거리 여행을 못하시니까 한국과 미국에서 두 번 해야겠다, 그치?”

“아마도.”

“어휴! 오빠가 약혼한 거 알려지면 난리 나겠다.”

“뭔 난리?”

“인터넷도 안 봐?”

“봐.”

“나중에 한 번 봐봐. 무슨 일이 벌어지나.”


류지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신이 욘사마나 뵨사마도 아니고.

억만장자의 연애는 대중들의 큰 관심사이긴 했다.

미국에서는 류지호의 데이트 모습 파파라치 사진이 매우 비싼 가격에 팔린다.

안타깝지만 가격 책정만 되어 있다.

실제 막대한 금액을 받아간 파파라치는 없었다.

한국인들은 유명인에 대해 과몰입 하는 풍조가 심한 편이다.

자신의 성취에 쉽게 만족하지 않고 타인과 비교하며 스스로 채찍질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한국인은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한 비교대상을 찾아 동경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다‘라는 담론까지 만들어졌을까.

류지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평가에는 귀를 기울이지만, 그 외의 가십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진 않는다.

자신의 결혼과 관련해서도 인터넷 댓글 놀이나 신나게 하다 시들해 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국인들이 본인에게 거는 기대(?)를 몰라서 하는 생각이다.


❉ ❉ ❉


제 16대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둔 시점.

찢어진 청바지 차림에 가죽 재킷을 걸친 류지호 대학로에 나타났다.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오늘 대학로의 한 호프집에서 대통령 후보와 문화예술인 간담회가 열렸다.

문화예술계 중에서도 고유현 후보 열성 지지자를 자처하며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분야가 영화계다.

보수정당 후보는 대중문화계가 자신을 지지할리 없음을 잘 안다.

따라서 영화계와 간담회 같은 행사를 열지 않는다.


“......?”


호프집을 가득 채운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류지호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네가 왜 왔냐?’


마치 오지 않아야 할 곳에 온 것 같은 시선들이다.

부자는 보수주의자라는 등식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 영국의 샴페인 사회주의자, 프랑스의 캐비어 좌파, 캐나다의 구찌 사회주의자, 오스트레일리아의 샤르도네 사회주의자 등

자본주의 체제의 최대 수혜자이지만 자본주의를 적대시하는 고학력 고수익자들을 비꼬는 용어다.

그에 상응하는 한국식 표현이 바로 강남좌파다.

아직은 강남좌파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전이긴 하지만, 유럽의 일부 급진 우파 언론에서는 류지호를 가르켜 ‘리무진 리버럴‘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엄청나게 값비싼 리무진이나 자가용 제트기를 타고 다니며 권력과 부를 향유하면서 영화에서는 약자의 편을 드는 듯 쇼를 하며 위선적 행동을 한다면서.

서구권에서는 정치 용어와 관련해서 진보주의(Progressivism)란 말 자체가 없다.

정치색이 듬뿍 담겨 있는 진보주의나 진보 성향이란 표현은 한국에서만 통용된다.

류지호는 진보주의자(progressive)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자유주의자(liberal)에 가깝다.

위선이든 뭐든지 간에, 억만장자가 가난한자 또는 약자에 대한 관심으로 사회가 조금이라도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발언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뭐가 나쁜가.

세계적인 부자가 되면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들은 중요하지도 않다.

졸부들이나 그런 것들 따진다.

암튼 그 같은 위선을 활용해서 사익을 추구하며 진보라 주장하는 지식인도 많다.

한국보다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미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류지호가 보기에 정치는 좌·우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기득권 엘리트들끼리 보다 나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그들만의 싸움이다.


‘진영과 이념은 구호일 뿐이지.’


정의국의 서울시장 당선으로 한국 정치지형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될 줄 알았다.

류지호가 모르는 내부에서는 변화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흘러가는 꼴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류지호가 기억하는 것보다 고유현 후보 팬덤의 결속력과 절박함이 더 치열해진 것 같았다.

고유현 후보가 무대에 올라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다.

고유현이 1절만 부르고 쑥스럽게 웃었다.


“2절을 까먹었습니다. 미안합니다.”


하하하.

참석자들이 웃었다.

이전 삶의 류지호였다면 함께 웃었을 것이지만, 이번에 차분하고 냉정했다.

전혀 감정이입이 되질 않았으니까.

이전 삶에서는 이런 자리에 낄 주제가 못 됐다.

막상 낄 주제가 되었지만, 류지호는 왠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경계인 같았다.


“제가 80년대 노래를 얼추 다 압니다. 그렇게 노래하면서 용기도 났고, 길거리에 나가 최루탄에 맞서고 했습니다. 제가 다른 변호사나 어른들하고 좀 다르게 직접 길거리에 나갔던 것은 노래를 배웠기 때문에 아마 길거리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웃음을 터트렸고, 또 누군가를 박수를 쳤다.

류지호에게 이 간담회가 마치 팬클럽 행사처럼 느껴졌다.


“좀 센 그러니까, 과격한 이미지를 우려한 보좌관이 저더러 ‘사랑으로’를 부르라고 했습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노래는요.”


띠리링.


고유현 후보가 기타 줄을 튕겼다.

그리고 민중가요 ‘어머니’를 열창했다.

간담회를 빙자한 팬미팅을 지켜보는 류지호는 담담했다.

고등학교로 돌아와 인천상륙작전기념식 같은 대형 이벤트에 참석할 때면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고 있는 기분을 만끽하곤 했다.

언젠가부터 어떤 대단한 역사의 현장에 있어도 방관자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 삼봉백화점 붕괴 사건부터 9·11 테러까지 충격적인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그렇게 변하게 된 것 같았다.


짝짝짝.


간담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각 예술분야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영화계 측 참석자들의 의견은 매우 직설적이다.


“어디에도 우리 충무로판 스태프와 배우 같은 사람들이 일하는 현장은 없을 겁니다. 이렇게 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지적인 배우로 알려진 한 중견배우가 말을 받았다.


“프랑스가 WTO라는 새로운 국제화 무역환경 속에서도 무역 자유화 대상에서 시청각 부문을 제외하도록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이유는 프랑스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는 한편 문화상품 시장의 상실이 곧 국가경쟁력의 손실을 의미한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프랑스는 할리우드영화의 무차별적 유입을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영상정책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90년 이후부터 보조금과 무이자 융자 등을 통해 매년 10억 프랑을 영화제작비로 지원하고 있다.

또한 TV사업자들이 총수입의 3%를 의무적으로 영화제작에 투자하도록 법으로 정했다.

그밖에 다른 선진국들에서도 이미 영화, 비디오, TV 등의 영상프로그램을 단지 오락이나 예술작품으로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자원의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


“중국의 국가주석은 몇 년 전 <타이타닉>의 베이징 개봉에 때맞춰 지피지기(知被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면서 정치국원들에게 이 영화를 보고 중국의 영상산업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미국의 영상산업을 공부할 것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말을 하는 무비서비스 CEO가 중간에 류지호를 힐끗 의식했다.


“베이징에서 이 영화 입장료가 무려 8달러로 중국인 평균월급의 10%에 해당하지만, 왜 중국 주석이 이 영화를 보라고 권장했을까요. 영화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섭니다.”


<오아시스>를 연출한 감독이 입을 열었다.


“우리 정부도 최근 문화산업, 특히 영상산업의 중요성에 눈을 돌리고는 있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미미한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정부 전체 예산 중 문화체육관광의 예산은 1% 겨우 넘어서고 있고, 문화부문만을 따지면 0.62%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고유현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이기도 한 중견 배우가 입을 열었다.


“경제대통령을 자부하는 현 대통령께서 취임연설에서 관광산업, 영상산업, 문화특산품은 모두 국가 부의 보고라면서 영상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지요. 21세기 정보화시대에 들어서서 앞으로 산업자본시대는 뒤로하고 지식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산업형태인 영상산업발전은 국가 경쟁력향상을 위한 핵심과제로 대두되고 있고요.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저 중국마저도 정보화시대를 맞아 중국이 성공적으로 현대화를 달성하려면 공업화위주에서 지식화 위주로 전환해야 한다면서 지식경제와 문화산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영화배급협회 회장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일본영화 또 홍콩영화가 아시아에서 예전만큼의 성세를 보이지 않는 지금 한국영화의 산업화를 완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문화창작활동 지원, 중단기 문화산업 발전계획 수립, 문화상품 수출지원, 문화관련 예산확대 등의 조치들을 진취적으로 취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와 함께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는 CG,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등 최첨단 영상기술과 같은 획기적인 기술발전 방안도 마련돼야 합니다. 하이테크 기술은 영상문화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려놓고 있으며 향후 획기적인 문화산업 발전을 위한 기폭제가 될 전망입니다.”


영진위 위원이 마이크를 전달 받았다.


“제작기법 등 영상문화 생산방식에서 뿐만 아니라 DVD, VOD 방식의 발전과 같이 영상물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유통방식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발전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종래와 전혀 다른 차원의 산업형태가 정착되고 있어 영상산업 발전을 위한 종합적인 대책이 요구됩니다. 현재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디지털 영화에 대한 표준화에 있어서도 한국은 한참 뒤쳐져 있습니다. 물론 영화계 일부에서 활발하게 이와 관련된 테스트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통합적인 관리와 연구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스크린쿼터 행동본부장은 한미외교통상과 관련해 피를 끓이는 심정으로 열변을 토했다.

너무나 간절하고 간곡하게 의견을 피력해서 좌중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말미에 덧붙인 말은 꽤나 의미심장했다.


“영화산업제작 및 유통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봅니다. 투자사 위주의 기획영화 제작구조는 단기적으로는 흥행영화를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제작 및 배급구조를 왜곡시켜 영화산업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자본의 수직계열화 역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대기업에서 지방극장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 것 역시 향후 지방자치 경제에 심각한 위해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봅니다.”


의도적인지 몰라도 마지막 차례가 류지호였다.

그가 마이크에 입을 가져가자, 참석한 영화계 인사들 모두가 바짝 집중했다.


“제가 어릴 때, 아니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원하던 극장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쥐가 돌아다니지 않는 쾌적한 환경, 저렴한 티켓값, 편리한 예매와 좌석. 그리고 좋은 영화. 특히 괴롭웠던 것이 필름을 하도 오래 돌리다 보니 떼깔 좋은 할리우드 영화조차 어두침침하고 소리는 뭉개지고.... 밝고 선명한 스크린과 쨍쨍한 사운드는 극장이 고객에게 제공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서비스입니다. 예전에는 관객들이 알아서 극장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극장이 관객을 모셔야 합니다. 극장끼리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고 극장은 테마파크나 프로야구 어쩌면 E-스포츠와도 관객 유치 경쟁을 벌여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을지 모릅니다. 정부 관료든 영화인이든 한국인의 가장 일반적인 여가활동이 영화관람이라는 생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걸음하신 많은 대중문화예술계분들 모두가 따지고 보면 관객 유치를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문화의 산업화라는 용어가 예술 창작활동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에게 저항감을 준다고 합니다. 솔직히 그런 저항감이야말로 문화산업 발전에 가장 큰 장애요인입니다.”


예술지상주의자인지 몰라도 몇몇 예술인이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다는 태를 풀풀 풍겼다.

문화와 산업을 연결 지으면 과도하게 화를 내는 이들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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