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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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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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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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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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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가진 것은 없어도 가치 있게 살아라.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오랜 만에 소수 정예로 찍는 단편영화다.

딱히 준비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세트는 어디에 짓는다고요?”


프로듀서를 자처한 프리드먼이 대답했다.


“토론토 북쪽에 본(Vaughan)이라고 있어. 그곳 Cinespace Film Studios에 작은 사운드 스테이지를 렌트했네.”


1988년 개장한 Cinespace Film Studio는 대/중/소 총 다섯 개 사운드 스테이지를 보유하고 있다.

프리드먼은 <Zombie Apocalypse> 촬영을 위해 그 중 가장 작은 규모의 사운드 스테이지를 빌렸다.

캐나다의 토론토와 밴쿠버는 할리우드 영화와 TV시리즈 촬영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나름 촬영 인프라, 인력 모두 잘 갖춰져 있는 편이다.

오죽하면 북쪽 할리우드라고 불릴 정도일까.

3D 영화는 경험이 없으면 쉽게 촬영하지 못하는 분야다.

류지호는 별 걱정이 없어보였다.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정확했다.

프리드먼과 맥길리브레이의 Eye-MAX팀은 현 시점에서 3D 영화 촬영경험이 가장 풍부한 크루다.

류지호가 찍게 될 단편영화는 애들 장난처럼 보일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3D 촬영경험을 수도 없이 경험해 봤다.

3D 전용카메라인 Eye-MAX Solido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세계 유일의 크루일지도 몰랐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상업용 3D 영화는 1922년 작품 <Power of love>다.

이후로 1950년대에는 3D 영화가 꽤나 많이 제작되었다.

한동안 침체기를 겪다가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3D 영화로는 1995년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있다.

한국영화도 일찍이 1963년에 3D로 극장용 상업영화가 제작된 바 있다.

바로 <광야의 독수리>란 영화다.

최초의 3D 상업영화는 1967년 <천하장사 임꺽정>이다.

한국영화역사를 우습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가 그런 영화인 중에 한 명이었다.

일본이나 중국처럼 국가 차원에서 세계 영화계에 적극 알리지 않아서 그렇지 걸작이라 부를 수 있는 한국영화가 흙속에 진주처럼 묻혀있다.

공진형, 박진우 같은 세대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시집가는 날>의 이병일, <오발탄>의 유현목, <만추>의 김수용, <하녀>의 김기영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선배 감독과 영화사적 전통이 있었기에 공진형 감독 세대의 영화감독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검열이 존재했던 엄혹한 시대에도 칭송받을 만한 작품을 다수 만든 한국영화다.

검열이 없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류지호 세대 영화감독은 더욱 분발할 필요가 있다.


❉ ❉ ❉


류지호의 지인들은 집사나 전문 저택관리 매니저를 고용하라고 조언하곤 한다.

사실 따로 집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었다.

JHO Security Service의 부자맞춤 주택관리 서비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도우미들의 리더 샤니스 프레밍이 알아서 잘하는 것도 있고.

집주인 류지호가 몇 달씩 벨에어의 주택을 비워도 잘 관리되고 있다.

류지호가 살고 있는 벨에어의 호화주택은 관리가 보통 일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대청소를 해야 하고, 수영장도 자주 물을 빼서 청소해 주는 것은 물론 시간 날 때마다 집안 곳곳을 보수해야 하며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잔디와 조경수를 손봐야 한다.

벨에어의 어지간한 호화 주택에는 집사, 가정부, 유모, 다수의 요리사, 청소부, 운전기사, 개인비서 등이 24시간 상주하고, 정원사, 플로리스트, 옷장과 구두 정리인, 다수의 보안 요원을 두고 있다.

그런 것에 비해 류지호의 도우미 식구들은 단출한 편이다.

류지호의 LA에서의 생활이 초호화의 끝장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미국 부자들에 비하면 검소한 편이다.

고용인들이 지인들을 초대해 파티를 벌인다는 보고를 들었다.

집주인이 오랜 시간 집을 비우니 벌어지는 일탈이다.

만약 류지호가 지내는 마스터 에어리어를 함부로 들락거렸다면 당연히 해고다.

주말에 주택 별관과 수영장에서 놀고 해가 지기 전에 깨끗이 정리하고 간다고 한다.

수 십 명의 사람들을 불러 난잡하게 파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자녀들과 형제들만 데리고 와서 노는 걸 가지고 류지호는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런 고용인들은 너그러운 집주인 류지호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벨에어는 아무나 출입하지 못한다.

신분이 확인된 저택 고용인들만 자유롭게 벨에어에 들어갈 수 있다.


끼익.


고급 세단이 대문을 통과해 주차장에 멈췄다.

현관 앞에 마중 나와 있던 고용인들이 모습을 드러낸 류지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류지호가 밝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다들 잘 지냈어요?”


가사도우미들을 인솔하는 샤니스 프레밍이 대표로 인사를 받았다.


“어서 오세요. 마스터.”


샤니스를 시작으로 고용인 한명 한명과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눴다.

캐나다에서 단편영화를 준비하는 사이 잠시 LA에서 볼 일이 있어 돌아왔다.

류지호가 보안요원이 열어준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자...


“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레오나 파커가 류지호를 맞이했다.


“먼저 와 있었어?”


레오나가 한복의 치맛자락을 살포시 잡고 한 바퀴 돌아보였다.


“나 어때?”

“잘 어울려. 예뻐.”


쪽.


류지호가 레오나를 가볍게 안아주며 볼 키스를 나눴다.


“어른들은?”

“한인타운에.”

“.....?”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해주시겠다고, 마켓에 가셨어.”


류지호가 마스터 룸에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왔다.

외출했던 부모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레오나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둘 다 재미없는 생활을 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저녁식사는 푸짐하다 못해 널따란 식탁에 반찬 놓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차려졌다.


“잘 먹겠습니다!”


집밥이 별 건가.

어머니의 손맛이 들어간 음식이 집밥이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정성이 듬뿍 배어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아들, 한복 한 번 입어보겠니?”

“뭘 새삼스럽..."


류지호는 어머니의 눈과 마주치고는 차마 귀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입어 볼게요.”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한복집에서 맞춰왔다는 한복은 은은하면서 고상한 느낌을 자아냈다.

연한 베이지색 저고리와 보라색 바지에 위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조끼 형태의 청색 쾌자를 받쳐 입었다.


“레오나, 오빠 옆에 한 번 서보겠니?”


어느새 한복으로 갈아입은 레오나가 얼른 류지호의 옆에 서서 팔짱을 꼈다.


“여보, 어때요?”

“둘이 잘 어울리는구만.”

“천생배필이라니까. 호호호.”


객관적으로 보면 레오나의 우월한 미모로 인해 류지호가 묻히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부모 눈에는 세상에서 제 자식이 제일 잘나 보이는 법니다.

샤니스와 가사도우미들도 모두 몰려와 한복 입은 커플을 구경하기 바빴다.


“뷰티풀!”

“원더풀!”


이런 표현들이 가정부들의 입에서 연신 흘러나왔다.


“....!”


눈치가 백단인 샤니스다.

류지호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 ✻ ✻


부모님이 벨에어에 와 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LA 한인축제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활발한 자선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다울재단이다.

이사장인 류민상은 개막식 축사까지 할 예정이다.


“그랜드마샬인가를 제안 받았다고?”

“예. 아버지. 마지막 날 올림픽가에서 퍼레이드가 있는데 맨 앞에서 행진을 지휘.. 리드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역할이에요.”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면서?”


지금까지 LA한인축제 퍼레이드 그랜드마샬(Grand Marshal)은 LA시장 같은 남가주 유력인사부터 성공한 한인 사업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맡아왔다.


“LA시장과 공동으로 할 거래요.”

“허허. 대단한 영예로구나.”


류지호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제안을 받긴 했어요. 원래가 LA시장이나 지역사회 유력 정치인들이 도맡아 하던 역할이라 부담스러워서 고사했는데, 작년부터 마냥 사양만 할 수 없게 됐더라구요.”


한인사회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 LA시장이 당선되면서 LA 부시장에 한인이 최초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LA 부시장 도니 우가 류지호에게 그랜드마샬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당선된 LA 시장.

미국에서 누구보다 크게 성공한 한인 사업가 류지호.

두 사람이 한인축제 퍼레이드의 그랜드마샬을 수행하는 모습이 매스컴을 탄다면, LA지역에서 한인들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지금 LA 부시장 중에 한인 2세가 있거든요. 도니 우라고 UCLA 선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양반이 하도 틈만 나면 간청을 해대서 모른 척 할 수도 없겠더라구요.”

“네가 그랜드마샬인가 행진의 맨 앞에 서면 교포들도 많이 자랑스러워 할 거다.”


도니 우는 연방하원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발을 내딛은 이후로 현 LA시장 지미 한의 핵심 참모로 부시장에 임명되었다.

LA 시장은 4명의 부시장을 임명할 수 있는데, 도니 우는 수도와 전력, 공원, 교통 등 시민생활과 밀접한 분야의 관리·감독을 맡게 됐다.

그렇게 LA 한인축제 첫날 열린 개막식에 참석한 류지호는 수많은 사람과 악수를 나눴다.


“지겹네....”


사진이 찍히는 것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또 만날 일이 있을까 싶은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하는 것은 언제나 곤혹이다.

그렇다고 모른척할 수도 없다.

이런 일 하나하나가 평판에 영향을 미치니까.

어쨌든 한인타운내 올림픽가 서울국제공원에서 진행된 축제는 20여 만 명이 참가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축제에 빠질 수 없는 민속음식 부스부터, 장터 곳곳에서 여러 한국업체들이 부스를 열어 신제품을 소개했다.

금요일에는 한국에서 류아라가 오고 류순호도 합류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서 축제를 즐겼다.


“Jay!"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류지호 가족의 보호하는 대형을 갖췄다.

190cm가 넘는 장신의 흑인 청년이 아는 체를 해왔기 때문이다.

인상 또한 너무 더럽게 생겨서 저절로 갱단을 연상시켰다.


“......!”


흑인청년이 경호원들과 한판 붙기라도 할 듯 기싸움을 벌였다.


“물러서요. 아는 녀석이니까.”


흑인청년의 건들거리는 모습에 경호원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이곳에 왜 있어? 벌써 졸업한 거야?”


흑인청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학교에서 쫓겨났어.”


류지호가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제이 T 테일러(Jay T Taylor).

UCLA에 입학하기 전 슬럼가 콤프턴 청소년 센터에서 인연을 맺은 녀석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갱단의 마약심부름이나 하던 소년이었다.

농구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 JHO 자선재단에서 지원을 시작했다.

바람대로 큰 신장과 흑인 특유의 탄성과 유연성으로 고등학교 시절 농구에 두각을 드러냈다.

JHO자선재단은 녀석의 워싱턴 대학 체육특기생 입학을 지원했고, 잠시 육상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콤프턴으로 돌아오지 않고 적당한 직업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꼴을 보니 다시 갱단 멤버가 된 것 같았다.


“무슨 사고 쳤는데?”

“마약 소지. 맹세코 내가 하지는 않았어. 돈이 궁해서 팔려고 가지고 있었던 거지.”


뻔뻔하게 대답하는 녀석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류지호다.


“진형이형도 아냐?”

“모를 걸?”

“블러즈에 다시 입단하기라도 한거야?”

“말하자면 길어. 라이벌 갱단에게 총알 다섯 발 맞고 병원 신세를 오래 졌지.”

“살아있는 게 용하다. 자식아!”

“그딴 눈으로 보지 마. 이제 갱 단원 생활 안 하니까.”

“그럼 뭐 먹고 사는데?”

“래퍼로 활동하고 있어.”


슬럼가 청소년들 선망의 대상은 농구선수 아니면 래퍼다.

류지호가 ‘네 주제에‘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녀석이 발끈했다.


“이래 보여도, 내가 N.W.A의 적자야!”


콤프턴의 청소년 센터에서 들은 말로는 성질머리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다혈질이라고 했다.

시비가 붙으면 바로 주먹다짐을 벌이거나 총부터 뽑는 성격이라고 했던가.


“갱스터 래퍼입내 껍죽거리다가 총 맞아 죽고 싶냐?“

“나도 꽤 유명한 래퍼라고. 아무도 못 건드려.”

“어련하겠냐.....”


류지호가 빈민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저 공부할 의지가 있는 청소년들이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 정도다.

낙오하는 아이들까지 모두 챙겨줄 수는 없다.


“유명해지면, 네가 태어나고 자란 곳의 이웃들 잊지 말고 살아.”

“걱정 마. 난 다른 놈들하고 다르니까.”

“잘도 그러겠다.”

“가진 것은 없어도 가치 있게 살아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진형과 네가 자주 했던 말이야. 난 이제 어른이야. 나도 내 삶이 소중한 걸 알아.”


류지호는 그러려니 했다.


“페스티벌 즐기려고 온 거라면 재밌게 놀다가. 사고치지 말고.”


류지호는 제이 T 테일러와 힙합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때만 해도 녀석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질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

몇 년 후, 녀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류지호 앞에 나타나게 된다.


축제의 마지막 날.

온가족이 어머니 심영숙이 한국에서 가져온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류지호 가족이 올림픽대로에서 거행된 대규모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행렬의 선두에는 한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류지호와 지미 한 시장이 섰다.

심영숙은 아들과 며느리(?)가 입을 한복 외에도 LA시장 내외에게 줄 것까지 함께 준비해 왔다.

나름 유명한 한복 디자이너가 손수 만든 한복이다.

개막식에 앞 서 선물을 받은 시장 부부는 무척 기뻐했다.

단순한 선물일 뿐이다.

그런데 언론에 알려지는 순간 가공된다.

퍼레이드 그랜드마셜에 시장이 한복을 입고 함께 나서면서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다.

그래서 부시장인 도니 우가 류지호를 몇 년 간 집요하게 설득한 것이고.


큭.


퍼레이드 내내 류지호는 실소가 터졌다.

공동 그랜드마셜에 선 본인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퍼레이드에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한일월드컵 4강 주역인 축구국가대표 최고참 선수가 주인공이었다.

퍼레이드에서 오픈카를 타고 손을 흔들어준 국가대표 최고참 선수가 한인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류지호는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뿐.

한인 교포들에게 류지호는 다시 보기 힘든 유명인이 아니라 친숙한 이웃이었던 모양이었다.


❉ ❉ ❉


류지호가 가족과 함께 LA한인타운 퍼레이드에 참석한 사이.

뉴욕의 GARAM Invest는 전쟁을 앞 둔 것처럼 긴장감에 휩싸였다.

오랜만에 보유하고 있는 자금을 대량으로 풀 예정이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는 2001년 3월부로 공식적인 침체에 들어갔다.

주식시장까지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기업 고위직들은 스톡옵션으로 받은 재산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부자거래, 회계장부 조작, 탈세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신용의 위기가 불어 닥쳤다.

투자자들은 기업을 불신하며 주식을 던져버렸다.

뉴욕 증시는 연일 폭락장세를 연출했다.

9·11 테러가 발생한지 1년 후인 2002년 9~10월, 뉴욕증권거래소 주가는 테러 직후의 폭락 지점 아래로 떨어졌다.

테러에 의한 심리적 패닉이 여전해서가 아니다.

뉴욕 증시의 거품이 비로소 빠진 것이다.


“이젠 주식에 진절머리가 난다!”


미국 성년의 절반이 주식투자자라는 통계가 있다.

그들이 주식시장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미국 주식투자자들이 선호했던 엔론 월드컴 기타 기업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사기행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뉴욕주식시장의 젖줄이었던 소액투자자들의 엑소더스가 벌어졌다.


“먼저 빠져나가면 덜 손해를 보고, 뒤쳐지면 이리에 잡아먹힌다!”


그 같은 심리적 패닉현상이 형성됐다.

뉴욕증시가 가장 불안했던 9월 11~17일 사이.

그 일주일 동안 증권펀드에서 빠져나간 자금이 무려 114억 달러다.

6월 한 달 동안의 이탈 자금 111억 달러를 단 일주일 만에 넘어섰다.

9·11테러 직후 뉴욕 증시가 극도로 불안할 때 일주일에 50억~60억 달러가 빠져나가던 것보다 두 배 이상의 물량이다.

관련 통계를 낸 이래 최고의 수위이기도 했다.

1987년 10월의 블랙먼데이, 또는 1929년 10월의 대폭락이 재현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가 월가에 팽배했다.

나스닥 지수는 10월초 1,100 포인트대로 떨어져 6년 만에 최저치로 꺾어졌다.

한때 5,000 포인트까지 치솟았던 나스닥 지수가 2년 반 만에 5분의1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1990년대에 형성된 통신·PC와 반도체 분야의 엄청난 과잉 설비가 해소되지 않았고,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지 않았으며, 정부 대책이란 것도 실효성이 의문인 상황이다.

월가에서 곡소리가 나는 것과 반대로.

GARAM Invest는 그간 비축하고 있던 자금을 풀기 시작했다.

최저점이라고 생각되는 주식들을 다시 사들이기 시작한 것.

10월 중순의 일주일 간 주식시장에 풀린 GARAM Invest 자금만 23억 달러가 넘었다.

한국의 상황도 최악이었다.

2002년 서울에는 주식시장이 없었다.

투자자들의 눈에서 시장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때 코스닥은 광란의 투기장이었다.

최근에는 시장 기능을 상실한 채 무너졌다.

한국의 주식시장은 월드컵 축구에 미쳐 6월 한 달을 고스란히 날려 버렸다.

넘치는 유동성은 부동산에 잠겨 있다.

많은 사람이 빚으로 흥청거리며 살아왔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목숨을 건 진영 갈등과 대결이 한국 사회를 덮고 있다.

경제와 정치를 혼동하는 대통령 후보들.

그들의 지키지 못할 약속들이 난무하고 있다.

한때 설로만 나돌던 각종 의혹들이 점차 구체화되면서 파괴력을 키워갔다. 경기부양을 위해 풀린 돈이 저금리를 피해 잠시 주식시장으로 집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4월 말부터 주식시장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연초 724.95로 출발했던 종합주가지수는 4월 중순까지 가파른 상승랠리를 펼치며 대망의 1000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500선으로 폭락했다.

6월에 800이 무너졌고, 7월에는 700이 몇 번이나 위협을 받았으며, 8월 말에 잠시 반등하여 800을 되찾기도 했으나 다시 하락하여 10월10일에는 공황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대폭락해 600마저 내주고 말았다.

570까지 하락했던 지수는 반도체 가격의 상승과 미국 주식시장의 안정에 힘입어 다시 상승하여 추상처럼 아득해진 700을 바라보고 있다.

증시의 행보는 여전히 불안했다. 4/4분기 730선까지 반등한 뒤에도 미국·이라크 전쟁위기, 북한 핵문제 등 대외변수에 발목 잡혀 연초 수준으로 되밀렸다.

코스닥의 사정은 더 안 좋았다.

IT 업계 불황, 대주주 주가조작 등 각종 악재에 파묻혀 허둥댔다.

코스닥지수는 사상 최저치(43.67 10월11일)를 경신하는 등 50언저리에서 맴돌았다. 한편 투전판을 꼭 빼닮은 선물시장에서 돈이 몰려 살벌한 제로섬 게임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주식시장마저 흔들었다.

빈사지경에 있는 하이닉스가 시장을 대표하는 어처구니 상황도 연출됐다.

잇따른 비리에 연루돼 고객의 신뢰를 잃어버린 증권회사 리서치는 침묵하고, 자칭 재야의 고수들이 오만한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미국만 쳐다봤다.

뉴욕 주식시장은 어찌되었든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서울 증시는 사라져 버렸다.

대유증권을 비롯해 가온그룹 계열 금융사들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간 쟁여놓고 있던 1.5조 원에 가까운 자금을 주식 매입에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금융사업 부문만 분주한 것이 아니었다.

백화점 사업 부문은 매물로 나온 미도파백화점 인수전에 뛰어 들었다.

가온그룹을 포함해 7개 업체가 입찰의향서를 접수했다.

최종적으로 광성백화점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되었다.

당초 업계에서는 미도파백화점의 입찰가를 3~4천억 수준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광성그룹은 무려 5,000억 원대의 인수자금을 써냈다.

직원 전원의 고용승계도 보장하는 등 경쟁사들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가온백화점도 유력한 후보였지만, 무려 500억 원 이상 응찰가에서 차이가 났다.


“백화점 업계가 법정관리 중인 채권단에 놀아 난 꼴입니다.”

“맞습니다. 광성이 써낸 응찰가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자산부채 실사가 끝나면 협상과정에서 응찰가의 5% 범위 안에서 가격 조정이 가능하니 이자는 건지겠지요.”


광성그룹이 미도파를 인수하면 뉴월드, 경일, 가온 등 2위 그룹과의 격차를 벌리고 유통업계 리더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광성그룹은 한해 매출이 10조원에 달하는 유통업계 공룡이지만 그동안 할인점을 앞세워 추격해오는 뉴월드와 서울에서 세력을 강화해가는 경일의 협공을 받아왔다.

게다가 뒤늦게 유통업계에 발을 디딘 가온그룹의 공격적인 경영도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미도파의 자산 중 상계점은 누구나 탐낼 만한 매물로 꼽혔다.


“대규모 주거단지를 배후로 독점적 상권을 확보하고 있는 상계점을 확보했다면 가온백화점에 날개를 달아주는 건데 말입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지. 광성의 입맛에 딱 맞는 매물이기도 해. 서울 동북부상권에 매장이 없어 미아리에 점포를 개설하려고 준비 중이었지만, 최근 용적률이 400%로 묶이는 바람에 오픈 여부가 불투명했잖아.”


미도파는 점포가 3개에 불과했다.

3년여에 걸친 법정관리로 매출채권문제도 잘 정리된 편이다.

가온그룹이 인수할 수 있었다면, 신촌, 목동과 함께 삼각 구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입찰에 실패함으로써 그 자금을 주식시장에 투입할 수 있었단 점이다.

그에 따라 우량기업들의 지분율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언제든 현금화 할 수 있는 유동성자산을 사내유보금이 아니라 현금성자산으로 전환한 효과가 있었다.

이런 일련의 투자들은 한국과 미국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그리고 유럽에서, 주요 국가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일부 주식매입은 적대적 인수합병을 위한 사전조치 성격도 띠었다.

당연히 류지호의 개인 자금도 운용됐다.

7개 이상 금융사에 분산해서 운용중인 류지호 자금은 복잡하면서 안정적인 포트폴리오 전략에 따라서 다양한 종목에 투자되었다.

현대의 부자들은 스스로 돈을 굴리고 벌어들이지 않는다.

유능한 투자전문가들을 고용해 그들로 하여금 돈을 벌게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투자자는 각기 성격에 맞는 여러 개의 투자회사를 거느리고 있고, 회사 마다 수백 명의 전문가들이 매우 양질의 분석자료와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보내준다.

류지호라고 다르지 않다.

한국과 미국의 자신 소유 투자회사 직원 중에 일부는 연말에 수억 원을 보너스로 챙기고 있다.

그래도 손해가 절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져가는 돈의 몇 배를 벌어주고 있으니까.

이 시대 억만장자는 귀족이다.

계급으로서도 그렇지만 과거 귀족들처럼 돈이 절대 줄지 않는다.

도리어 돈이 늘어난다.

어떤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아도.


작가의말

소설 속 제이 테일러는 서부 힙합을 상징하는 래퍼 더 게임입니다. 주인공과 중요하게 엮이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밝혀둡니다. 주인공이 LA폭동 전후로 우범지역에 청소년센터를 만들어 지원하면서 맺은 인연 중에 이런 친구도 있다는 걸 상기시킬 겸 출연시켰습니다. 몇 번 더 나오긴 합니다만 그리 중요한 에피소드는 아닐 것으로 예상됩니다.

활기찬 한 주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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