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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36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1.07.03 05:04
조회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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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8쪽

제 3 부 천명 (18)

DUMMY

“문제는...왜놈들 중에 하나가...

그녀를 강간했던 모양입니다.”


“아...”


민소희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슬픈 표정을 짓자,

정효상이 짧게 탄식하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잊고 싶었으나 여전히 잊혀 지지 않는,

무섭고 아픈 기억이 다시금 떠올라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려왔기 때문이었다.


정효상의 손을 맞잡고

길게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킨

그녀가 다시 힘을 내 말을 이었다.


“그녀를 범한 왜놈이

볼 일이 끝나자마자

칼을 빼서 죽이려 할 때,


소식을 접한 인근 고을의 장정들이

백여 명 넘게 합세하여

무기를 들고 마을로 들어왔답니다.


그 모습을 본 왜구들이 약탈을 멈추고

배에 올라 급히 도망갔고...


여인은

그렇게 겨우 살아남은 것이지요.”


“그랬군...”


“그런데...

집이 불타고 부모까지 잃은

그 여인에게,


다시 돌아온 마을 사람들이

아주 몹쓸 짓을 한 모양입니다.


왜놈에게 더럽혀진 년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마을에서 내쫒았다고 하더군요.


어떤 사람은 돌팔매질까지 하며

심하게 핍박했다 합니다.”


“이런...나쁜...


도와주진 못할망정,

사람으로서 어찌 그런...”


“핍박을 받거나

돌팔매를 맞진 않았지만,


저도 몇 년 전에 일을 당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이웃사람들로부터

그런 불쾌한 시선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참으로 잔인하고 간사한 존재라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지요.”


“세상의 인심이란 것이,

참으로 모질구려...


미안하오.

내가 그때 당신 곁을 지켰더라면...”


“나리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소...

그때의 일을, 그 기분을...”


정효상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리자,

이번엔 민소희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가 얼굴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자,

그런 자책은 하지 말라는 듯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어둡고 답답한 그 침묵을,

빨리 깨버리고 싶었던 민소희가

다시 여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임신한 것도 모른 채,

그렇게 마을에서 쫓겨난 여인은

구걸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았답니다.


그 와중에도

길에서 만난 사내들에게

차마 말로 형용 못할 심한 일을

겪었던 모양입니다.


나리를 바라보던

그 여인의 적의에 찬 눈빛과 경계심은

아마도 그래서였겠지요.”


“........”


“아무튼 그토록 모질게

어찌어찌 목숨을 부지하면서,

여기저기를 방랑하던 여인의 배가

서서히 불러왔고,


다섯 달쯤 지나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여인이

가만히 날짜를 따져보니

달거리가 없어진지

한참이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제야 자신을 범한 왜놈의 씨앗을

자기 뱃속에 품고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군요.”


얘기를 듣던 정효상도,

얘기를 하던 민소희도

이 대목에서는 대화를 멈추고

우울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부모님의 원수이자 자신을 짓밟은,

그 포악한 왜놈의 씨를 임신한 사실을

깨닫게 된 후부터...


그녀의 정신이

마구 흐트러진 모양입니다.


아마 제정신으로는

그 잔혹한 사실을

감당하기 어려웠겠지요.


그래서 아마 그때부턴,

저렇듯 실성한 여인의 모습이 되어

오직 하나 어미의 본능만 남아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이겠지요.”


“......”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방안엔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정효상의 입장에선,


여인의 사연은

무척 안타깝고 애처로우나,


생명의 기원이 그러한 이상

더더욱 자신의 소중한 공간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아이를 놔두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더 강경하게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던 순간,


민소희가

작은 돌이 매달린 목걸이 하나를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기묘한 푸른빛이 나는 그 돌은

가죽으로 된 끈에 매달려 있었고,

옥(玉) 같기도 하고

진주 같기도 했으나

도통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는 정효상에게

민소희가 말했다.


“그 왜놈에게 더럽혀질 때,

무의식중에 그 여인이 잡아당겨

손에 쥔 것이랍니다.


아마도 그 왜놈의 물건이겠지요.


왜 버리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이상하게 버릴 수가 없더랍니다.


어쩌면,

아이의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란 생각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의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하오.


하지만...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찝찝한 판에,


하물며 왜놈의 씨앗이라니...


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구려.”


“부탁드립니다.”


“임자...”


“제가 지금 저 아이를 저버리면,


저는

저에게 흉터처럼 각인된 그때의 상처를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그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드릴 수도 없지만...


만약 제가

저 아이를 제 자식처럼 잘 키워낸다면,


비로소 전

그 지옥 같은 기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


“그러니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려요.

제가 키울 수 있도록,

제발 허락해주세요. 나리.”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정효상은 두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해야만 했다.


사실 저 어린 생명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저 아이의 어미에게도 아무 죄가 없다.


그저 불운에 불운이 겹쳐

이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것 일뿐.


그날 밤

자기가 왜 죽는지 연유조차 모른 채,

자신의 칼에 숨이 끊어진

죄 없는 처녀의 얼굴이

정효상의 머릿속에 다시금 떠올랐다.


후우...

어쩌면 이것은,

내가 범한 죄를

그녀에게 대신 갚으라고

하늘에서 내려준 악연 같은 것인가.


그럼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나의 부주의한 실수로

얼마 전 일면식도 없던

젊은 처자의 생명을 끊었다.


지금 벌어진 이 일이

내가 만든 업보이든,

하늘에서 내려준 속죄의 기회이든 간에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죽인 하나의 생명대신

다른 생명을 하나 살린다면,

적어도 마음만큼은 지금보다

어느 정도 가벼워질 거라는 것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결국 말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뛸 듯이 기뻐하는 민소희를 뒤로 한 채,

마음이 착잡해진 정효상은

밖으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분명 매서운 겨울바람임에도

왠지 모르게 따뜻함이 느껴졌다.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새롭게 그의 식구가 된 아이의 이름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지어지게 되었다.


‘바다 해(海), 사람 인(人)’


정효상은

아이의 이름을

‘바다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인이라 지었다.






“아버님! 아버님!”


딸의 커더란 부름에 깜짝 놀라,

아주 길었던 회상에서 빠져나온

정효상이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휘인이 호들갑을 떨며

마구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민소희도 환한 얼굴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휘인이 그를 향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큰 소리를 질렀다.


“아버님! 해인이가 혼자 걸었어요!

드디어 걸음마를 뗐어요!”


그는 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효상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혼자만의 힘으로

드디어 세상에 첫 걸음을 내딛는

사내아이의 굳센 모습이 보였다.


생명이 주는 그 신비함을,

그는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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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제 3 부 천명 (19) 21.07.06 158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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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제 3 부 천명 (14) 21.06.24 154 0 7쪽
71 제 3 부 천명 (13) 21.06.22 157 0 7쪽
70 제 3 부 천명 (12) 21.06.19 155 0 9쪽
69 제 3 부 천명 (11) 21.06.17 165 0 7쪽
68 제 3 부 천명 (10) 21.06.15 167 0 7쪽
67 제 3 부 천명 (9) 21.06.12 173 0 7쪽
66 제 3 부 천명 (8) 21.06.10 173 0 7쪽
65 제 3 부 천명 (7) 21.06.08 177 0 8쪽
64 제 3 부 천명 (6) 21.06.05 183 0 8쪽
63 제 3 부 천명 (5) 21.06.03 189 0 9쪽
62 제 3 부 천명 (4) 21.06.01 192 0 6쪽
61 제 3 부 천명 (3) 21.05.29 199 1 8쪽
60 제 3 부 천명 (2) 21.05.27 194 0 9쪽
59 제 3 부 천명 (1) 21.05.25 209 1 9쪽
58 제 2 부 후기 21.05.18 178 1 3쪽
57 제 2 부 꿈 (18) 21.05.15 186 0 7쪽
56 제 2 부 꿈 (17) 21.05.13 183 1 8쪽
55 제 2 부 꿈 (16) 21.05.11 185 1 9쪽
54 제 2 부 꿈 (15) 21.05.08 184 1 8쪽
53 제 2 부 꿈 (14) 21.05.06 205 1 7쪽
52 제 2 부 꿈 (13) 21.05.04 205 2 4쪽
51 제 2 부 꿈 (12) 21.05.01 202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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