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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29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1.06.17 04:33
조회
164
추천
0
글자
7쪽

제 3 부 천명 (11)

DUMMY

그렇게 서로 서서히 친해지면서

두 달쯤 지나,

해가 바뀌어 이듬해 정월이 되었다.


해마다 정월이면

고을의 가장 큰 행사인

별신굿이 열렸다.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별신굿은

근동의 무당들이 모두 모이는

아주 큰 행사로,


굿거리 장소 주변엔

난전(亂廛)이 들어서고,


흥겨운 농악(農樂)이

하루 종일 울려 퍼지며,


씨름과 그네를 비롯한

놀이마당이 펼쳐져

온 고을 사람들이

기분 좋게 축제를 즐겼다.


정월에 열흘 가까이 이어지는

이 큰 행사는,


밤이면 도박판이 벌어지고


유랑하는 들병이들이

술 취한 사내들을 상대로

색주가까지 영업할 정도로


고을 토박이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장사꾼들과

구경꾼들까지 몰려드는

일종의 ‘축제’였다.




그해의 별신굿을 하루 앞두고,

민수근의 집에서는 큰 사달이 났다.


소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던

당집의 무당이,


그녀에게

‘올해 괘가 아주 좋다’며 꼬드겨

이번 별신굿에 바칠 재물을

과도하게 요구한 것이다.


자신이 해마다 준비했던 공물보다

두 배 이상 되는 무당의 요구에,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렸다.


가게의 물건을 건드린 것이다.




며칠 전부터 딸의 태도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민수근은,


별신굿 즈음하여

매년 재물을 준비하던 딸과

만류하는 자신 사이에서

항상 다툼이 일어났던 것을

그해 정월에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날따라 행동 하나하나가

상당히 조심스럽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민수근은

매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하면서도,

그날 밤 창고에 들어가

상품들을 점검하던 그의 눈에

결국 그녀의 범행이 드러났다.


모레 관아에 납품할

고가의 물목 몇 개가

비어있었던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민수근은,

딸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마당으로 나와

매섭게 회초리를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사정없이 매질을 당하면서도

결코 대들거나 부인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통을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한밤중에 벌어진 이 사달에,

자려고 누웠던 정효상이

안채의 마당으로 서둘러 나왔다.


민수근이

거센 매질에 심한 욕설까지 하며

딸에게

다시 물건을 찾아오라고

마구 고함을 질렀다.


정효상이 얼른 뛰어가

흥분한 민수근을 말렸다.


억센 군관의 악력에

늙은 장사꾼은

결국 매질을 멈춰야만 했다.


고초를 겪는 내내 그녀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을 본

정효상의 가슴은

그야말로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무력함은,

사내의 마음을 더욱 더 괴롭혔다.


결국 힘이 다한 민수근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별신굿 기간 동안

단 한 발짝도

집밖으로 못나갈 줄 알아라.’


아버지의 차가운 말에,

매질과 욕설까지

꾹 참고 있던 그녀가

그제야 비 오듯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녀의

눈물이라도 닦아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다가설 수 없었다.


한참동안 마당에 주저앉아

서럽게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매질을 당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그와 그녀 모두에게

지옥 같던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음 날 새벽,

그녀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기도를 하러 나섰다.


그가 대문 앞에서 무거운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몸을 부축해주었다.


그녀도 별다른 말없이

그의 도움을 받아들여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그녀가 나무 앞으로 가

무릎을 꿇을 때까지,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기도하는 뒷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보며,

그가 하늘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오후,


별신굿 덕분에

업무가 일찍 끝난 정효상은

평상시보다 두 시진가까이

일찍 퇴청해 거처로 돌아왔다.


딸이 무당에게 빼돌린 물목들을

아침부터 거래처 여기저기를 바삐 돌아

겨우 맞춰놓은 민수근이

평상에 걸터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민수근에게


정효상이 천천히 다가가

넌지시 부탁을 했다.




부탁의 내용은 간단했다.


자신이 이 고을에 와서

처음으로 별신굿 행사를 맞는데,

길잡이로 민소희를

좀 붙여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부터

굿판이 벌어지는 장터의 경비에

각별히 신경 쓰라는

상관의 명령이 내려왔는데,


동네 지리에 어두워서

자신이 지금 많이 난감하다는

거짓말도 능숙하게 덧붙였다.




관아에 납품할 물목도

어찌어찌 맞춰놓아 한시름 덜었고,


어제 정효상 앞에서

심히 민망한 꼴을 보인 것도 있었고,


딸에게 너무 심한 짓을 한 건 아닌가

하는 미안함도 있었던 민수근은,


잠시 고민하다가

흔쾌히 그러시라 말하고

방안에 갇혀있던 딸의 운신을

못이기는 척 해금해주었다.




일각 정도 지나,

나갈 채비를 마친 그녀가

아주 기쁜 얼굴로 그의 앞에 섰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리.

나리덕분에 이렇게

굿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소희가 다리를 살짝 절뚝거리며

정효상에게 말했다.


정효상은 아까부터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걸으며

그녀의 힘겨운 발걸음에

보조를 맞춰주고 있었다.


정효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무척이나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맞은 곳은...좀 나아졌소?”


“...네, 견딜만합니다...


어제 민망한 꼴을 보여드려,

사실 지금 너무 부끄럽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오.

그 마음이 어땠을지 다 이해하니...”


“......”


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

굿판 앞에 당도한 둘은,

흥겹고 화려한 축제의 분위기에

잠시 몸을 맡긴 채

서로의 눈길을 피했다.


굿판 앞에 차려진 제사상에

도둑질까지 해서 힘들게 마련한

자신의 공물이 올라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두 손 모아 합장하며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는 그녀의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칼에 베인 것처럼,

그의 마음이 너무 아파왔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병영으로 나가려던 그에게

그녀가 다가와 물건 하나를 건넸다.


사내들의 장신구로 만들어진,

작고 멋진 향낭(香囊)이었다.


그녀가 내민 향낭에선

아주 좋은 향기가 났다.


은은하게 자신의 코를 자극하는

향낭을 받아들고

그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부끄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돌아오는 길에

방물장수에게 산 것입니다.


나리께 받은 따뜻한 마음에

어떻게 보답해 드려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하다못해 작은 선물이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아...


나리께서 주신 여우목도리에 비하면

보잘 것 없고 하찮은 물건이지만,

부디 받아주셔요.”


“정말...정말 고맙소.

소중히 간직하리다.”


그는 매우 감격한 표정으로

자신의 허리춤에 깊숙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히,

그녀에게 받은 향낭을 단단히 채웠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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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제 3 부 천명 (13) 21.06.22 157 0 7쪽
70 제 3 부 천명 (12) 21.06.19 154 0 9쪽
» 제 3 부 천명 (11) 21.06.17 165 0 7쪽
68 제 3 부 천명 (10) 21.06.15 167 0 7쪽
67 제 3 부 천명 (9) 21.06.12 173 0 7쪽
66 제 3 부 천명 (8) 21.06.10 173 0 7쪽
65 제 3 부 천명 (7) 21.06.08 177 0 8쪽
64 제 3 부 천명 (6) 21.06.05 183 0 8쪽
63 제 3 부 천명 (5) 21.06.03 189 0 9쪽
62 제 3 부 천명 (4) 21.06.01 192 0 6쪽
61 제 3 부 천명 (3) 21.05.29 199 1 8쪽
60 제 3 부 천명 (2) 21.05.27 193 0 9쪽
59 제 3 부 천명 (1) 21.05.25 209 1 9쪽
58 제 2 부 후기 21.05.18 178 1 3쪽
57 제 2 부 꿈 (18) 21.05.15 186 0 7쪽
56 제 2 부 꿈 (17) 21.05.13 183 1 8쪽
55 제 2 부 꿈 (16) 21.05.11 185 1 9쪽
54 제 2 부 꿈 (15) 21.05.08 184 1 8쪽
53 제 2 부 꿈 (14) 21.05.06 205 1 7쪽
52 제 2 부 꿈 (13) 21.05.04 205 2 4쪽
51 제 2 부 꿈 (12) 21.05.01 202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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