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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23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1.06.03 03:07
조회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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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9쪽

제 3 부 천명 (5)

DUMMY

제2장 회상, 세 번째


-1-


온양에서의 일 이후로,

부하들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매일 술로 밤을 지새우던

정효상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그를 아는 모두가 그의 안색을 보고

괜찮으냐고 물어올 정도로,


그의 심력과 기력은

단기간에 급속도로 소모되어

정상적인 업무를

소화해내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온양에서의 실패 이후

서로에게 머쓱하고 서먹해진 관계로,

오랜 우정에도 불구하고

정효상에게

잠시 발길을 끊었던 정창수는


더 이상 놔두면 큰일 치루겠다 싶어

결국 한 달 만에

정효상의 집으로 먼저 찾아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내일이라도 휴직을 신청하고

몸을 좀 추스르게.”


“...미안하네.


내가 못나고 미련한 탓에,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망가트리고 말았어.”


찻잔을 앞에 두고

둘은 오랜만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정효상이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민망한 표정으로 사과를 전하자


정창수가

자상한 말투로 위로를 건넸다.


“이제 괜찮네.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현수가 수단 좋게

일의 수습을 잘 해줬어.


사흘 전에

호환(虎患)으로 사건을 잘 정리한

온양수령의 장계까지

도성에 올라왔으니,


더 이상 그 일로

누군가가 힘들어 질 일도 없어.


죽은 애들도

명예롭게 순직으로 잘 처리 되었으니,


이제 그만 자책을 멈추게.


이미 지나버린 일을 가지고

스스로를 괴롭혀봐야 건강만 상할 뿐,

얻어지거나 나아지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


“...그래,

그렇게라도 마무리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날 현수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을 때는

화가 너무 치밀어서

칼까지 뽑았었지만,

사실 그 놈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겠나.


다 내가 지휘관으로서 모자란 탓이지.


절차와 계통을 무시하고

직접 도정궁까지 찾아가

일을 수습한 것이 언짢긴 하지만,


만약 현수가

그런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나뿐만 아니라

자네나 군부인 마님에게까지

화가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정말 아찔하더군.”


“이번 일을 계기로

현수는 이제 군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정궁에서 직접 쓰기로 했네.


혹시 자네 마음에 아직도

현수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는가?”


“아니, 앙금은 무슨...

오히려 고마울 지경일세.


저번에 운재가 죽었을 때도 그렇고,

이번 일처리도 그렇고...


현수 덕에

모두가 이나마 편안한 것인데,

나한테 그런 마음이

남아 있을 리가 있겠나.


조만간 기회를 봐서,

내가 따로 둘이서 만나 사과도 하고

화해도 할 것이네.”


“그래.

그렇게 마음먹고 있다니 다행일세.


나나 도정궁의 입장에서는

현수 같은 음지의 사람도

가끔 필요하지만,


아무리 뭐라 해도 대업을 위해선

자네의 힘이 꼭 필요하네.


지금 이 살얼음판 같은 정국이

어디서 어떻게 깨져나갈지 몰라

정말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중이야.”


“이해하네.

당사자의 그 심정이 얼마나 힘들지

조력자인 나로선

감히 짐작도 못하겠어.”


“아무튼 무슨 일을 하려해도

건강해야 할 수 있는 법.


내가 아까 선전관청에 들러서

휴직절차를 안배해놓고 왔으니,

딱 한 달만 쉬었다 오게.


어디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맛난 것도 많이 먹고

정양을 좀 하고 와.


자네가 다시 예전의 힘을 되찾아

빨리 돌아와야 나도 안심이 되지.”


“신경 써줘서 정말 고맙네.


자네의 기대와 마음에

더 이상 누가 되지 않도록,

대업에 힘을 보탤 수 있도록

얼른 기운차려서 돌아옴세.”


“그리 말해주니 정말 기쁘군.

당분간 술은 입에도 대지 말고...”


“알겠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래, 휴가는 어디로 갈 생각인가?”


“...소희에게 갈 생각이네.”


“소희라면...


호남에 있는

자네의 별가(別家) 말인가?”


“...응, 들른 지가 오래되기도 했고...


사실 소희도 소희지만,

그 아이가 너무 보고 싶군.”


“아...그래. 딸이 생겼다고 했지?


그 소식을 자네에게 들은 지가

몇 년 지난 거 같은데,

그 애가 올해 몇 살이나 됐나?”


“벌써 세 살이 되었네.


여섯 달 전에 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또 훌쩍 커있겠지.”


“세 살 박이 딸이라...

한참 귀여울 나이지.


이름을 뭐라고 지었다고 했지?”


“휘인. 정휘인 일세...


빛날 휘(輝) 자에

사람 인(人) 자를 썼다네.”


“아주 좋은 이름이구만...


비록 측실(側室)과의 사이에서 본

서녀(庶女)이긴 하나,


자네 부인과의 사이에선

불혹이 넘도록 자식을 보지 못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겠나.


정말 예쁘겠어.”


“품에 안고 있으면

언제 하루가 갔는지도 모르겠더군.

진짜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래,

지금 자네에겐

그것보다 좋은 휴식이 없겠군.


한 달 동안 예쁜 딸이랑

행복한 시간 보내고 오게.


거기서 그렇게 잘 지내고 잘 먹다보면

자연스럽게 건강도 회복되겠지.”


“다시 한 번 정말 고맙네.


자네의 이 마음 씀씀이를,

벗으로서 결코 잊지 않겠네.”


정효상이 진심을 담아

한 번 더 감사인사를 전하자,

정창수가 빙긋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오랜만의 훈훈한 공기가

둘 사이를 가득 메웠다.







-2-


실로 오랜만의 원행이었다.


날씨는 맑고 하늘은 푸르렀다.


한 달의 휴가를 얻어

사랑하는 여인과 자식이 있는

호남 땅으로 말을 달리는,

정효상의 마음은 한껏 들떠있었다.


그의 애마인 흑염(黑炎)이

그런 주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힘차게 땅을 박차며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많이 서두른 탓인지

도성을 떠나고 사흘 만에

정효상은

서해안의 아름다운 바닷가에 도착했다.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중국의 풍경과 흡사하다 하여

그곳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채석강’이라는 아름다운 해변에

그의 안식처가 있었다.


전라도 부안의

변산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그의 별가에

정효상이 흑염과 함께 도착했을 때는,


막 그날의 해가

지평선 너머로 지려하는

낙조의 시간이었다.


세상 그 어떤 것이

이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라져가는 태양이 내뿜는

아련한 붉은 빛으로

푸르른 바다가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현실적인 풍경 한가운데에,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이

그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저 멀리서 그와 그의 말을 발견한

세 살 박이 딸이

‘아빠~~’하며 크게 소리를 내었다.


작고 귀여운 손을 하늘 높이 뻗쳐

마구 흔들고,

앙증맞은 두 발을 쿵쿵 구르며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난 반가움을

온몸으로 한껏 표현하고 있었다.


아이의 바로 뒤에선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여인

소희가

얼굴 가득 미소를 품은 채로

조용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잘 있었느냐?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목적지인 민소희의 집에 도착한

정효상이

말에서 내려 그간의 안부를 묻자마자,


아이가 대답대신 펄쩍 뛰어

아비의 품에 안기며

마구 어리광을 부렸다.


아비의 볼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며

한참동안 애교를 부린 휘인이

그의 품에서

갑자기 점잖게 태도를 바꿔,

아마 꽤나 오랫동안 연습했을법한

어른스러운 안부 인사를 시작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아버님.

그동안...그동안...기체..음...후 일향...


에잇, 모르겠다!”


세 살 박이의 철없는 모습다운,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했으나

결국 제대로 끝맺지 못한

딸의 안부인사에

정효상의 얼굴에서

행복한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세상에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가

또 있을까...


근 한 달 동안 도성에서

매일 밤 혼자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 바보 같고 비참하다 느껴져

큰 후회가 밀려왔다.


진즉에 휴가를 낼 것을...




“몇 개월 사이에

많이 수척해지신 것 같습니다.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신지요.”


육 개월만의 부녀상봉을

자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민소희가,

조용히 입을 열어

사랑하는 사내의 안부를 물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정효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그리움과 반가움이 가득 했다.


그는 대답 대신 천천히 다가가

비어있는 한쪽 팔로

그녀를 꼭 껴안았다.


정효상의 넓은 가슴에

그가 사랑하는 두 여인의 몸이

파묻히듯 깊숙이 안겼다.


오른쪽 팔로는 사랑하는 여인을,

왼쪽 팔로는 사랑하는 딸을

껴안은 그가

묵직한 목소리로

재회의 인사를 전했다.


“보고 싶었소. 정말 보고 싶었다오.”


사내의 짧은 인사엔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담겨있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어린 딸은

다시 한 번 아비의 목을 꼭 껴안았고,

여인은 두 팔을 뻗어

사내의 허리를 감으며

오랜만에 느끼는 정인(情人)의 온기를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마치 원래부터

하나의 덩어리였던 것처럼,


서로를 꼭 껴안은 그들의 등을

채석강의 석양이

붉게 물들여주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위해

사흘을 내리 달린 흑염이,


물을 한껏 마셔 갈증을 없애고

기분이 좋아진 듯,

바다를 바라보며 크게 한 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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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제 3 부 천명 (3) 21.05.29 198 1 8쪽
60 제 3 부 천명 (2) 21.05.27 193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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