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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37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1.06.29 06:11
조회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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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제 3 부 천명 (16)

DUMMY

휘인이 태어나던 해 9월에

열두 살의 나이로 국본이 승하하는

나라의 큰 변고가 있었다.


그가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나랏님께서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에 빠졌다.


자식을 잃은 상의 마음이 오죽하실까


같은 아비의 입장에서

실로 안타깝긴 했으나,


그가

망가져가는 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조정백관을 비롯한

모든 궁인들이 상복을 입고

순회세자 이부(順懷世子 李暊)의

장례를 치르며 명복을 빌 때,


그는

이미 죽어버린 세자의 명복보다는

살아있는 딸의 건강을 하늘에 빌며

자신을 비롯한 가족의 평안을

간절히 기원하였다.




국본이 승하하고 2년 후,


이번엔 권력의 정점에서

나랏님마저도 손에 쥐고

자신의 뜻대로 마구 흔들던

대왕대비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눈을 감았다.


온 궁궐을 꽉 채웠던

막강했던 힘의 갑작스러운 공백에

정국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정효상은 기이한 인연으로 인해

정창수에게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오랫동안 신세를 진 벗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는

위험한 배에 벗과 함께 몸을 실었다.




그해 겨울의 별가에서는,

사랑스러운 딸의 재롱마저도

그의 심난한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그것도 죽여야 할 대상도 아니었던

어린 처녀의 목숨을

자신의 실수로 끊은 탓에

정효상의 마음은 한없이 괴로웠다.


오랫동안 지녀온

무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무너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무마저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다는

불편함에

식욕까지 사라졌다.


조운영이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후로는

향후의 대책도

제대로 세울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직면해

오랜만에 찾은 별가에서

그는 최대한 티를 안내려 노력했지만,

영 쉽지가 않았다.


매일 저녁

밥상 대신 주안상을 차려오는

민소희의 얼굴이 날로 어두워졌으나,


그는 밥을 먹기보다는 술을 마시며

자신에게 닥친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던 그 밤에

마구간에서 갑자기

흑염이 구슬프게 울었다.


처음엔

뭔가 스쳐지나가는

들짐승이라도 본 듯하여

무시하고 말았지만,


흑염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나중엔 시끄러울 정도로

그의 신경을 긁었다.


결국 잠자리에서 일어난 정효상에게

민소희가 물었다.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흑염이 우는 소리가

영 심상치 않아서...


잠깐 나갔다 오겠소.”


정효상은

문 앞에 놓인 작은 섶에 불을 붙여

마구간 안을 살펴보았다.


안을 천천히 살피던 정효상은

그야말로 귀신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흑염의 바로 옆,

짚단이 쌓여있는 곳에서

어떤 여인이

혼자서 아기를 낳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여인의 아랫도리엔

이미 아기의 머리가 반쯤 나와 있었다.


여인의 거세어지는 신음 탓인지

마음이 불안해진 흑염이 심난하게 울며

발굽을 마구 구르고 있었고,


자칫하면 말발굽에 밟혀

여인과 아기 모두

끔찍한 죽음을 맞기 직전이었다.


놀란 가슴을 재빨리 진정시킨 후,

정효상은

일단 흑염부터 조심스럽게 달래

마구간 밖으로 천천히 끌고 나왔다.


좀 떨어진 곳에 단단히 말을 묶은 그는

방으로 급히 뛰어 들어가

민소희를 데리고 나왔다.


얼떨결에 마구간으로 끌려나온 그녀도

그 무서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는 정효상에게

그녀가 말했다.


“나리, 잠깐만 여기 계셔요.


이모하고 상의해서

산파(産婆)를 데려오겠습니다.”


“...아...알았소. 서두르시오.”


“휘인이가 깰지도 모르니,

방 쪽에 신경을 좀 써주세요.”


말을 마친 민소희가 서둘러 집을 나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민소희의 이모와 동네의 산파할멈이

황망한 표정을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마구간으로 뛰어와

여인의 상태를 확인한 산파할멈이

산모를 따뜻한 방안으로 옮겨주기를

정효상에게 부탁했다.


정효상은 영 내키질 않았으나

그렇다고 모른 채 할 수도 없어서,


민소희와 함께 마구간으로 들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

여인의 몸을 조심스럽게 들어

작은 방으로 옮겼다.


민소희가

작은 방의 구들에 온기를 넣기 위해

아궁이에 급히 불을 지피며

솥에 물을 끓였고,


산파할멈과 민소희의 이모가

여인의 출산을 돕기 시작했다.


한밤중의 시끄러운 소리에

자다가 깨서 짜증이 난 휘인을

안아 달래주며,


정효상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 황당한 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 시진쯤 지났을까.


작은 방에서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내아이입니다.


아무 이상 없이,

다행히 아주 건강하네요.”


밖으로 나온 민소희가

휘인을 안고 서성거리는

정효상에게 말했다.


정효상의 품에 안겨있던

휘인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지며

마구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

우리 집에서 아기가 태어났어요?


우와...보러가요.

휘인이는 아기 볼래요...”


막 출산을 마친

낯선 여인이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이

여간 찝찝하지 않았지만,


딸의 보챔 탓에

그는 휘인을 안은 채

민소희와 함께

작은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탯줄을 끊어낸 산파할멈이

심각한 얼굴로 산모를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고,


민소희의 이모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갓 태어난 아이를 안아 올려

막 어미의 품에 건네주던 참이었다.


그의 품에 안긴 휘인이 매우 신기한 듯,

작은 두 눈을 여기저기 돌리며

방안의 생경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실...

저 여인이 이 고을에 나타난 건,

보름쯤 전입니다.


정식이네 집 부뚜막에 숨어들어

밥을 훔쳐 먹다가 걸린 것이

시작이었지요.


온 동네에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지꼴을 한 만삭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숨어들어왔으니

모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민소희가 정효상에게

여인의 내력에 관해

차분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저 여인은,

정식엄마에게 들키자마자

겁에 질린 고양이처럼 도망쳐

인근의 산 속으로 숨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섶까지 챙겨 들고 산을 올라가

저 여인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끝내 발견하지를 못했습니다.


아마 많이 겁을 먹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찾은 것은,

혼을 내거나

벌을 주려 했던 것이 아니었는데...”


“......”


“저 무거운 몸으로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산을 해매다

혹시라도 잘못될까 걱정되어,


모두가 그리도 열심히

산을 뒤졌던 것인데...


아무튼 그날 이후로 서너 번 더

저 여인이

마을에 몰래 숨어들었습니다.


두 번째 나타난 곳은

저희 집 부뚜막이었는데,

제가 미리 준비해놓은 주먹밥을

깨끗이 비우고 다시 도망갔더군요.”


“내가 없을 때

집에 그런 일이 있었소?”


“네.


요즘 나리가

고민이 무척 많으신 것 같아

굳이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날 수색에 실패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결정하기를,


아마 뱃속의 아이 때문에라도

다시 마을로 내려올 테니

끼니라도 챙겨먹을 수 있도록

각자 여분의 밥을 부뚜막에 놔두고,


밥이 없어지거나

혹시 눈에 띄더라도

그냥 모른 척 해주자고

상의를 마쳤거든요.”


“그랬구려...거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저희 집에서 밥을 먹고 간 것이 두 번,

명진이네 집에서 먹고 간 것이 한 번,


어제는 정식이네 집에 들렀다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오늘,

이런 일이 벌어졌군요.”


그간의 사정을 설명한 민소희가

안타까운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정효상도 눈을 돌려 여인을 보았다.


탯줄을 끊어내고 우렁차게 울던 아이가

어미의 품에서

본능에 따라 젖을 찾고 있었다.


아이의 입에 젖을 물릴 수 있도록,

지칠 대로 지친 산모를

민소희의 이모가 돕고 있었다.


결국 산파할멈까지 나서

첫 수유를 도와주자


얼마 후

드디어 아이가 어미의 젖을 물고

열심히 빨기 시작했다.


겨우 살 길을 찾은

아이의 울음이 멈추고,


기진맥진한 어미의 얼굴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표정이 나타났다.


바로 전까지

아이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던,

소란스러웠던 방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무척이나 신비하고 거룩한 광경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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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제 3 부 천명 (17) 21.07.01 160 0 8쪽
» 제 3 부 천명 (16) 21.06.29 161 0 9쪽
73 제 3 부 천명 (15) 21.06.26 154 0 7쪽
72 제 3 부 천명 (14) 21.06.24 154 0 7쪽
71 제 3 부 천명 (13) 21.06.22 157 0 7쪽
70 제 3 부 천명 (12) 21.06.19 155 0 9쪽
69 제 3 부 천명 (11) 21.06.17 165 0 7쪽
68 제 3 부 천명 (10) 21.06.15 167 0 7쪽
67 제 3 부 천명 (9) 21.06.12 173 0 7쪽
66 제 3 부 천명 (8) 21.06.10 173 0 7쪽
65 제 3 부 천명 (7) 21.06.08 177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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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제 3 부 천명 (5) 21.06.03 189 0 9쪽
62 제 3 부 천명 (4) 21.06.01 192 0 6쪽
61 제 3 부 천명 (3) 21.05.29 199 1 8쪽
60 제 3 부 천명 (2) 21.05.27 194 0 9쪽
59 제 3 부 천명 (1) 21.05.25 209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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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제 2 부 꿈 (18) 21.05.15 186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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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제 2 부 꿈 (15) 21.05.08 184 1 8쪽
53 제 2 부 꿈 (14) 21.05.06 205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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