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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40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1.06.12 01:49
조회
173
추천
0
글자
7쪽

제 3 부 천명 (9)

DUMMY

딸에게 매질까지 하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민수근은

자신의 딸이

왜 그리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웠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꽤나 오랫동안 몰래,


양가 부모들도 모르게

서로 연분이 통했던


딸과 미래를 약속한

또래의 사내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강진에서 가장 많은 어선을 보유한

좌수 오용구의 밑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철진이라는

건장하고 성실한 청년이었다.


동네의 소꿉친구나 마찬가지였던

둘은


남녀가 서로를 의식할만한 나이부터

교제를 시작하여


근 십여 년이 넘게

몰래 사귀고 있었고,


아주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혼인에 대한 계획을 세워

둘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 년 전,


고기잡이를 하러

근처 바다로 나간

철진이 탔던 배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폭풍을 만난 것인지,

암초에 걸려 좌초를 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왜구들에게 잡혀

어딘가로 끌려간 것인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철진과 같이 그날 배를 타고 나갔던

마을의 사내 일곱 명까지 포함하여

총 여덟 명의 뱃사람들은


그렇게,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실종’되고 말았다.


관에서 꽤 오랫동안

사람과 배를 동원해

근해는 물론이고 먼 바다까지 나가

열심히 수색을 했으나


배의 잔해도,

그들의 시체도 발견하지 못했다.


일말의 작은 단서조차도

건지지 못하고,


석 달 동안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아무 소득 없이

그렇게 수색은 종료되었다.




그야말로 날벼락처럼,


오랜 정인을 기약도 없이 잃어버린

소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빌며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새벽이면

그녀는 서낭당에 나가

빌고 또 빌었다.


해마다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별신굿이 열리는 날이면,


그녀는

비싼 공물들을 제사상에 바치며

그저 살아서 돌아만 와 달라

간절히 빌었다.




삼년은, 아주 긴 시간이었다.


그것도

바다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삼년이란,


시신만 발견되지 않았을 뿐

사실 죽었다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실종자들의 가족들도,

철진의 부모도


일 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자

떠난 이를 가슴에 묻고 체념해버렸다.


하지만

소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단 하루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용신(龍神)은

그녀의 기도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간절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삼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바다의 신에게서는

어떠한 보답도 없었다.


그저 무심한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딸의 애틋한 속사정을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

민수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애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


딸의 신세가

한편으론 언짢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여


매일 새벽이면

서낭당에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그저 안타깝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날 아침도 정효상은

새벽수련을 위해 하숙집을 나섰다.


아침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는 운기 수련을,


그는

15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일상적인 행동으로

그의 몸에 밴 오랜 습관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 때문에


그는

강진에 와서도

매일 새벽이면 산책을 겸해

복식 호흡 수련을 하였다.


비가 오면

비의 냄새가 섞인 공기를 마시며,


눈이 내리면

아름다운 설경을 바라보면서


호흡을 가다듬는 운기수련은

하루 일과의 시작이자

그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강진으로 온 지 달포쯤 지나

이제 주변의 지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그는,


그날 아침엔

좀 새로운 길을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바다로부터 서서히 밀려드는 해무가

주변의 풍경을 희미하게 만들던 새벽,


그는

어제까지 걷던

평상시의 산책로와 다르게

숲 쪽으로 난

조그마한 샛길로 빠져보았다.


약간 가파른 느낌의 샛길은

숲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숲은

계절의 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기분 좋게 숲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걷던 정효상이


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자,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담기는

탁 트인 풍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가까운 곳에 이런 절경이 숨어있었나.

정말 아름다운 땅이로군...


그렇게 감탄을 하며

언덕 주변을 돌아보던 그에게


형형색색의 빛바랜 천들로 휘감긴

크고 오래된 나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당집에서 관리하는

이 고을의 서낭신인가...


주변의 풍경에 비해

다소 이질적인 그 나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던 그는,


어딘가 낯이 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 뒷모습은 민소희였다.


바로 뒤에까지 다가온

그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그녀는 나무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무엇을 저리 열심히 빌고 있는 걸까...


순간적으로 발동한 강한 호기심이

정효상의 머릿속을 휘어잡았다.


그는

그녀의 기도에 방해되지 않도록,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자신의 기척을 지웠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동안 그는,


자신의 오랜 습관인

호흡 수련도 잊은 채

그녀의 기도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비한 느낌의 나무와

간절히 기도하는 여인,


그리고

그 두 개의 이질적인 생명을 둘러싼

녹색의 숲과 새벽공기,


그 앞으로 광대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바다와

옅게 깔린 잔잔한 해무.


그는

그 조용하고 독특한 풍경이 주는

기묘한 매력에 사로잡혀

한동안 멍하니, 그저 서있었다.




한참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던 여인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정효상은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재빨리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내가 왜 숨는 거지? 하는 생각이

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미 그의 몸은

숲의 그늘에 가려

그녀에게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이

바다를 향해 한껏 기지개를 켜며

굳었던 몸을 풀고,


‘오늘도 힘내자.’ 하며

자신에게 다짐하듯

혼잣말을 내뱉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녀의 떠나는 뒷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그의 마음에

아주 살짝,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습관처럼 굳어진 수련과

정해진 일과에만 맞춰

매일을 보내던

바위 같던 사내가,


처음으로 느낀 묘한 설렘이었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새벽 수련을 망쳤지만,

그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무척 좋은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평상시보다 한 시진 정도 일찍,

해도 뜨지 않은

깜깜한 시간에 눈을 떠서


서둘러 새벽 수련을 마치고

그 장소로 갔다.


미리 봐둔 은밀한 장소에

몸을 숨기고,


그는

그녀의 기도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을 몰래,

그것도 매일 아침마다 지켜보고 있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도대체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지만,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의 몸은,

그렇게 새로운 습관을

하나 더 추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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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제 3 부 천명 (14) 21.06.24 154 0 7쪽
71 제 3 부 천명 (13) 21.06.22 157 0 7쪽
70 제 3 부 천명 (12) 21.06.19 155 0 9쪽
69 제 3 부 천명 (11) 21.06.17 165 0 7쪽
68 제 3 부 천명 (10) 21.06.15 168 0 7쪽
» 제 3 부 천명 (9) 21.06.12 174 0 7쪽
66 제 3 부 천명 (8) 21.06.10 173 0 7쪽
65 제 3 부 천명 (7) 21.06.08 177 0 8쪽
64 제 3 부 천명 (6) 21.06.05 183 0 8쪽
63 제 3 부 천명 (5) 21.06.03 189 0 9쪽
62 제 3 부 천명 (4) 21.06.01 192 0 6쪽
61 제 3 부 천명 (3) 21.05.29 199 1 8쪽
60 제 3 부 천명 (2) 21.05.27 194 0 9쪽
59 제 3 부 천명 (1) 21.05.25 209 1 9쪽
58 제 2 부 후기 21.05.18 178 1 3쪽
57 제 2 부 꿈 (18) 21.05.15 186 0 7쪽
56 제 2 부 꿈 (17) 21.05.13 183 1 8쪽
55 제 2 부 꿈 (16) 21.05.11 185 1 9쪽
54 제 2 부 꿈 (15) 21.05.08 184 1 8쪽
53 제 2 부 꿈 (14) 21.05.06 206 1 7쪽
52 제 2 부 꿈 (13) 21.05.04 205 2 4쪽
51 제 2 부 꿈 (12) 21.05.01 202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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