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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51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1.06.01 02:49
조회
192
추천
0
글자
6쪽

제 3 부 천명 (4)

DUMMY

호롱불의 기름이 거의 다 됐는지

불꽃이 흔들리자

박술녀가 몸을 일으켜 기름을 채우고

다시 말했다.


“덕흥군이나 도정궁 부인 사주에 보면

그렇게 흉한 일만 있는 게 아니에요.


평생 동안 큰 고생 없이

부귀영화를 누릴 복도 있고,


엄청난 권세를 가질 귀인이

자식으로 태어날 운도 있어요.


집터도 아주 좋고...


뭐, 물론 왕실의 종친이니까

당연한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런 아쉬울 것 없는

고고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내가 그 여자 태몽을 듣고

자식이 태어나면

‘천하의 주인이 되실 분’이라고

허황된 말을 해줘도

철썩 같이 믿는 거예요.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까.”


“그건 그 사람들 사주나

환경 때문이라기 보단,

교동마님 같은 권세 있으신 분들이

일을 꾸몄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 아닌가?


솔직히 왕실종친들이 한둘도 아니고,


마님이

도정궁 쪽을 선택한 거나 마찬가진데.


뭐, 물론

상께서 그 집 아들들을

무척이나 귀여워하시긴 했지만.”


“그런 것이 바로 타고난 운이에요.


핏줄이나 가문 같은 것.


그런 것들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런 기회라도 생기는 거고,


또 한편으론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그런 흉한 일도 겪는 거예요.”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안현수는

입을 닫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 때문에

안현수의 기분이 혹시라도 상했을까

세심히 눈치를 살피던 박술녀가

달래주듯 말했다.





-7-


“우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만

잘 알고 잘 하면 되는 거예요.


첫째,

우리가 맡은 일을 잘 마무리해서

도정궁 쪽 일을 끝낸다.


둘째,

얼마 후에 상이 죽으면

새 길이 열릴 테니

음험한 양반님들께

토사구팽 당하지 않도록

미리 계획한 대로 잘 대비를 한다.


셋째,

우리를 지켜줄 새로운 용께서

확실히 힘을 쓰실 수 있도록

음지에서 최대한 노력한다.


넷째,

이건 내 개인적인 소원이지만...

우리가 힘을 얻으면

제주목사 변협을 죽여

선사님의 원수를 갚는다.”


“마지막 소원은...

내가 직접 나서서라도

언젠가 꼭 이뤄줄게.


너무 조급해하지마. 임자.”


안현수의 다정한 말에

박술녀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박술녀는 안현수의 볼을 쓰다듬으며

다시 한 번 다짐하듯,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아무튼, 지금은...


실수를 없애고

차분하고 신중하게

일을 마무리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에요.


선사님의 유지(遺旨)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 자신이나

우리 동지들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요.


일이 무탈하게 진행돼서

도정궁 도련님이 용상에 오르면

저 시커먼 양반님들이

입을 막으려고

우리부터 죽일지도 몰라요.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당신도.”


“당분간은, 나보다야 당신이 바쁘지.

나야 당장엔 할 일이 없으니...


그날 조운용한테 잘못되고,

정효상한테도 죽을 뻔 했을 땐

진짜 어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는데...


당신이 생각을 내주고

힘써준 덕분에


이렇게 다시

쓸모 있는 놈으로 인정도 받고

앞날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네.


도정궁에 직접 찾아가라고 한

당신의 조언은

정말 기가 막힌 한 수였어.


고마워. 임자.”


안현수가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자

박술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긴요. 우리 사이에...


그리고 아마

그자의 동료가 거둬갔을 테니,

그 젖먹이는 죽지 않았을 거고...


그것이 우리에겐 더 잘 된 일이예요.


그 애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앞으로도 계속

당신의 쓰임새가 생기는 거니까요.


도정궁 도련님이

용상에 앉게 되더라도 계속...”


“그러게...


그 때의 실패가

어찌 보면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니었어...


그 곰 같은 무시무시한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재환이를 박살낼 때만 해도

진짜 겁나더라고...


절간 대들보만한 바위를

혼자서 집어던지다니,


아직도 그게

진짜 사람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실로 간담이 서늘했던,

자칫했으면

목숨이 날아갔을지도 모를

그날의 일을

안현수가 회상하자

박술녀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찌 보면,

그 애가 진짜 검은 용일수도 있어요.


그냥 그 당시엔

내가 제멋대로 지어낸 말이지만,


그렇게 누군가가 자꾸 나타나서

명을 이어주는 거 보면,


걔도 평범한 운을 타고난 애는

아닐 거예요.


그런 귀인들이

주변에 붙어있다는 것 자체가

범상한 일은 절대 아니죠.”


진짜 검은 용이라...


박술녀의 말을 들은 안현수가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그 애가 검은 용이든 아니든

이젠 상관없어.


당신 말대로

그 애의 존재가

우리를 쓸모 있게 만들어주고

우리에게 계속 일거리를 줄 테니까...


높은 분들이 눈치만 못 채도록,

성실히 하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되겠지 뭐.


그 곰 같은 놈한테는 한 번 당해봤으니,

다음에 만나게 되더라도

잘 조심만 하면

설마 내가 죽기야하겠어.”


“일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나한테는,


당신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것이

제일 기뻐요.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러니 마지막까지 부디 몸조심해요.


평소에는 내가

내색을 잘 안 해서 그렇지,

사실...많이 겁이 나요.”


처음 인연을 맺고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녀가 보여주었던

굳세고 영민한 모습이 아닌,


나약하고 여린데다

살짝 겁까지 먹은 생소한 모습을

박술녀가 보여주자,


안현수는

갑자기 그녀가 더욱 사랑스러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안현수가 손을 뻗어

박술녀를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박술녀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자

안현수는 그녀의 온몸을 감싸듯

포근히 안아주었다.


안현수가 격려하듯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주며

자상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다 잘 될 거야.”


박술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품에서 눈을 감은 채

그저 가만히 있었다.


어디선가 부엉이가 처량하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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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제 3 부 천명 (10) 21.06.15 168 0 7쪽
67 제 3 부 천명 (9) 21.06.12 174 0 7쪽
66 제 3 부 천명 (8) 21.06.10 174 0 7쪽
65 제 3 부 천명 (7) 21.06.08 177 0 8쪽
64 제 3 부 천명 (6) 21.06.05 183 0 8쪽
63 제 3 부 천명 (5) 21.06.03 189 0 9쪽
» 제 3 부 천명 (4) 21.06.01 193 0 6쪽
61 제 3 부 천명 (3) 21.05.29 199 1 8쪽
60 제 3 부 천명 (2) 21.05.27 194 0 9쪽
59 제 3 부 천명 (1) 21.05.25 209 1 9쪽
58 제 2 부 후기 21.05.18 179 1 3쪽
57 제 2 부 꿈 (18) 21.05.15 187 0 7쪽
56 제 2 부 꿈 (17) 21.05.13 184 1 8쪽
55 제 2 부 꿈 (16) 21.05.11 185 1 9쪽
54 제 2 부 꿈 (15) 21.05.08 185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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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 2 부 꿈 (13) 21.05.04 206 2 4쪽
51 제 2 부 꿈 (12) 21.05.01 203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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