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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33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1.06.19 04:22
조회
154
추천
0
글자
9쪽

제 3 부 천명 (12)

DUMMY

그해 5월 단오 무렵,


전라 우수영의 순시선들이

왜구의 해적선 한 척을 나포했다.


세 대의 순시선과

전투를 벌이던 해적선은

결국 힘의 차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고,


저항하다 살아남은

왜구 이십여 명은 포로가 되어

해남의 우수영으로 끌려왔다.


나포된 왜구의 해적선에서

노예나 다름없이

가혹하게 노꾼으로 부려지던

조선인과 명나라인 삼십여 명이

오랜 고난 끝에

이렇게 겨우 자유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 풀려난 사람들 중에

삼년 전,

강진에서 출항했다 감쪽같이 사라진

여덟 명의 뱃사람 중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왜구에게 잡혀갔다가

삼년 만에 고향으로 살아서 돌아온

그 뱃사람을 통해,


고을의 사람들은

일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출항한 지 이틀째 되던 날,

왜구들의 습격을 받은 고깃배는

네 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나머지 네 명은 노예로 끌려가

노꾼으로 부려졌던 것이다.


왜구에게 끌려간 사람들도

일 년이 채 못 되어 셋이 죽었고,

오직 그만이 살아남아

질긴 목숨을 부여잡고 있다가

오랜 고난 끝에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민소희는

귀환한 뱃사람의 소식을 듣자마자

큰 기대를 걸고

그의 집으로 숨 가쁘게 달려갔으나,


허무하리만치

가혹한 진실을 전해 들어야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정인이었던 철진은,

습격을 받던 당일 날

거세게 저항하다

왜구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그를 비롯해 그날 죽은 네 명은,

왜구들의 잔인한 장난에 의해

시신이 썰리다 못해 잘게 토막이 나서

고기밥으로 바다에 뿌려졌다고도 했다.


무려 삼년하고도 열 달을

그가 살아있다 믿고

신에게 매일 빌었던 그녀는,


그 무섭도록 단순한 진실을

도대체 어찌 감당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멍하니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녀가 드나들던 당집으로 향했다.


무서운 기세로

무당을 찾아간 그녀는


다짜고짜

당집의 기물들을 마구 부수고,


자신에게 욕을 하는 무당의 머리채를

거세게 잡아 쥐어뜯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놀란 마을 사람들이 급히 달려와

그녀를 겨우 뜯어말리자,

그녀는 몸서리치듯 온몸을 떨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이 끝나버린 것처럼

한참동안 서럽게 오열하던 그녀는,


한 시진 가까이 지나서야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처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허무하고도 잔인하게,

그녀의 오랜 기다림이 끝났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 이상 새벽 기도를 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상의 변화에

며칠간 고민하던 정효상은

민수근에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물었다.


아비의 입을 통해

그녀의 딱한 사연을 전해들은 그는,


어떤 위로를 해줘야 할지

잠을 설치면서

깊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마땅한 말이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아침마다 반갑게 마주치던

그녀의 모습도,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같이 걷던

숲길의 풍경도


그날 이후부터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


그렇게 홀로 새벽수련을 마치고

쓸쓸히 거처로 돌아오면,


밥상만 덩그러니 방안에 놓여 있고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는,

아침밥을 먹으면서

도통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그리도 즐겁던 오랜 습관인,

새벽수련마저도

이젠 귀찮게만 느껴졌다.


한 달 동안 아주 잠깐씩 스쳐지나 듯이

그녀의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으나,


그는 그 어떤 대화도

그녀와 나눌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일부러 피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마치 아예 다른 사람처럼 바뀐

그녀의 태도에

그의 마음은 한없이 쓰려졌다.


하지만 뭘 어쩔 것인가.


임지로 부임한 출신군관이

그곳에서 현지처를 만들고

축첩을 하는 것이

당시 그리 신기한 풍경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관기(官妓)도 아니고 노비도 아니었다.


혼기를 놓치긴 했으나

명백한 양인의 딸이었고,


살림살이가 어려워 딸자식을 팔만큼

가난한 집의 자식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외부적인 요인을 배제하더라도,


죽은 정인의 존재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면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 리가 없음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곳으로 부임하고

22개월이란 시간 동안,


정인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하던 그녀의 뒷모습을

쭉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답답한 시간이 흘러

강진에서의 임기가

어느덧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다음 임지는 어디로 갈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일단 도성의 집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하다 보면

다음 임지가 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정적인 절차가 어떠하든,


무관으로서

자신의 미래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는

강진을 결코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어떤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훌쩍 떠나게 된다면,


아마 그녀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험한 부방(赴防)을 여기저기 떠돌며

언제 전장으로 투입될지 모르는

무관신분인 자신의 입장에서,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나자는

작은 기약조차도

그는 감히 입 밖에 내기 버거웠다.


하물며

이미 다른 여인과 혼인까지 한 자신이

그녀에게 뭐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걸 버리고 자신에게 오면

평생 동안 애첩으로 사랑해주겠다

할 것인가?


처가의 살림에 기대어 과거를 보고,


아직 말단이라

녹봉조차도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건 그야말로 염치없는 얘기였다.


아니 그 모든 것의 이전에,

그녀가 나를 사내로 생각하기는 하나?


강진을 떠날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그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일 밤마다

그리도 수많은 잡념과 번민이

그의 머릿속을 한없이 떠돌았을 뿐,


정작 그의 입 밖으로는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안타까운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결국 강진을 떠나는 전날까지

그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동료들이 열어준 송별회 자리에서

평상시와 다르게 과음을 한 그는,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만취해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숙취로 심한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잠이 들지 못하고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열흘 전에

미리 본가로 짐을 보내놓은 덕에,

강진을 떠나는 그의 행장은 단출했다.


그는 민수근을 비롯한 집안사람들과

간단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그간 정들었던 하숙집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그는

그녀의 모습을 열심히 찾았으나,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가 선물로 준

향낭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터벅터벅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장인이 급제를 축하하며 선물해준,

자신의 애마 흑염이 묶여있는

병영의 마구간을 향해 걷던 그는


그녀와의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서낭당 나무에

마지막으로 들려보자고 마음먹고

언덕을 올랐다.


마음도 몸도

그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언덕을 오르자,

그야말로 거짓말 같은 풍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나무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몰라

머리를 마구 흔들어보고,

이 상황이 현실임을 확인한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기도를 멈추고 일어나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그를 돌아보았다.


아직 추운 날씨가 아닌데도,

그녀는

그가 선물한 여우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두 달만의 재회에

그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가

자신의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추자,


이번엔 그녀 쪽에서 발을 내딛어

그에게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지척에 서서,

둘은 천천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갑자기 그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이런 순간조차도

그녀에게 그 어떤 말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원망스러워,

무척이나 서러웠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본 그녀가

살며시 손을 뻗어

그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저에겐 아주 익숙합니다.”




그녀의 입술에서

조용히 흘러나온 그 말은,

세상의 그 어떤 밀어(蜜語)보다도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으스러지도록 강하게 그녀를 껴안으며

그녀의 입에 거칠게 입맞춤을 했다.


그녀도 그의 품에 꼭 안겨,

자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사내의 강렬한 열기를 느끼며

그의 애절한 마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 어떤 고백보다도 간절하고 무거운,

무언(無言)의 고백이었다.


둘은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입을 맞췄다.


따뜻하고 충만한 감정이

둘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바다 저편에서 서서히 밀려온 해무가

그들을 격려하듯,

둘의 몸을 살포시 감싸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을 시작했고,

사랑을 시작하자마자

이별을 경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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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제 3 부 천명 (14) 21.06.24 154 0 7쪽
71 제 3 부 천명 (13) 21.06.22 157 0 7쪽
» 제 3 부 천명 (12) 21.06.19 154 0 9쪽
69 제 3 부 천명 (11) 21.06.17 165 0 7쪽
68 제 3 부 천명 (10) 21.06.15 167 0 7쪽
67 제 3 부 천명 (9) 21.06.12 173 0 7쪽
66 제 3 부 천명 (8) 21.06.10 173 0 7쪽
65 제 3 부 천명 (7) 21.06.08 177 0 8쪽
64 제 3 부 천명 (6) 21.06.05 183 0 8쪽
63 제 3 부 천명 (5) 21.06.03 189 0 9쪽
62 제 3 부 천명 (4) 21.06.01 192 0 6쪽
61 제 3 부 천명 (3) 21.05.29 199 1 8쪽
60 제 3 부 천명 (2) 21.05.27 193 0 9쪽
59 제 3 부 천명 (1) 21.05.25 209 1 9쪽
58 제 2 부 후기 21.05.18 178 1 3쪽
57 제 2 부 꿈 (18) 21.05.15 186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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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제 2 부 꿈 (16) 21.05.11 185 1 9쪽
54 제 2 부 꿈 (15) 21.05.08 184 1 8쪽
53 제 2 부 꿈 (14) 21.05.06 205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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