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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44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1.06.24 00:30
조회
154
추천
0
글자
7쪽

제 3 부 천명 (14)

DUMMY

밤새워 말을 달려

강진에 도착한 그의 눈에,

처참한 폐허로 변한

고을의 모습이 들어왔다.


왜구들의 약탈과 방화로 인해,

그와 그녀의

소중한 추억이 서려있는

강진장터는

아예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그는 일단

민수근의 집으로 급히 가보았다.


그러나 민수근의 집은 물론이고,

동네 자체가 불에 타

멀쩡한 가옥이

하나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는 다시

강진장터 쪽으로 말을 달려

복구공사에 투입된

고을사람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민수근 가족의 소식을 물었다.


스무 번째 사람의 차례가 되어서야

겨우 그가 애타게 원했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너무나 절망적인 소식에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민수근 노모의 생신을 맞아

한 자리에 모였던 그의 가족들은

그날 밤에 자행된

왜구들의 습격에 휘말려

단 둘만을 빼고 모조리 도륙 당해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고 했다.


그의 가족 중에

겨우 목숨을 건진 둘은

어린 아이와 그 애의 엄마이며,


그들은

지금 관아에서 임시로 설치한

보호소에 머물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연인을 잃었다는 깊은 슬픔과 함께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무력함은,

그에게 심한 자괴감을 불러일으켰다.


절망에 빠진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두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러내려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으나,

그는 눈시울을 훔칠 생각도 못한 채

한손에 말고삐를 잡고

그저 앞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관아의 보호소에 도착한 정효상은

다시 사람들에게 물어

민수근의 살아남은 가족을 찾아보았다.


하다못해 그녀의 유해라도 수습해

자신의 손으로

장례라도 치러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한 번 더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한 시진 쯤 전에,

심한 화상을 입어

며칠 동안 고통스러워하던 아이가

결국 숨이 끊어졌고,


자식의 주검을 끌어안고

한참을 오열하던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묻으러 가겠다며

보호소를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녀와 관계된

마지막 접점마저 끊어지자,


정효상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가슴 안쪽 깊은 곳에서

뜨겁게 들끓는 울분이 치솟아 올랐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신을 원망하듯

하늘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처음엔 비명처럼 터져 나오던

그의 소리가

어느 순간 거친 욕설로 바뀌었다.


마치 광인(狂人)처럼

허공에 대고

한참 동안 욕설을 내뱉던

그의 두 다리에서

마지막 힘마저 빠져나간 듯,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만나게 된

첫사랑이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이후부터,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괴로울 때면


그는

그날의 입맞춤을 떠올리며

힘을 얻었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던

그의 몸의 떨림이 서서히 멎어갔다.


붉게 충혈된 두 눈을

거칠게 부빈 후,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그는 다시 말의 등에 올랐다.


다시 영암의 병영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추억의 장소에 들려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녀가 기도했던

서낭당 나무가 있는 언덕으로

방향을 잡았다.


잠시 후 도착한 그곳은,

왜구들의 습격으로

많은 이들이 죽고

마을이 모두 불탔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천천히 말을 몰아

언덕에 오른 그가

회한에 젖을 틈도 없이,


급박한 상황 하나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서낭당 나무의 큰 가지에

누군가가 목을 매어

죽으려 하고 있었다.


발을 받치고 있는

지지대를 걷어차기만 하면,

목에 걸린 줄이 조여질 참이었다.




그는 급히 말을 몰아

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지지대를 막 걷어찬 그 사람의 목을,

가지에 묶여있던 줄이

팽팽하게 조여 왔다.


정효상은

말에서 내릴 틈도 없이 그대로,

허공을 향해 떨어지는

그 사람의 몸을 받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는, 정말 깜짝 놀랐다.




자살을 하려 했던 사람은, 민소희였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매우 놀란 그가,

다시 한 번

자신의 품에 안은 여인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 얼굴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녀가 맞았다.


죽으려고 목을 맸던 그녀도,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구한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효상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뀌며

소스라칠 듯 온몸을 떨었다.


이 기가 막힌 우연과

천운에 감사하듯,

그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체온도 느껴지고 숨결도 느껴지는

그녀의 얼굴에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생기가

여전히 그녀의 몸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격스러워,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꽉 껴안았다.


그렇게 극적으로 재회한 둘은,

흑염의 등 위에서

한참동안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그렇게

일각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서럽게 울먹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심한 화상을 입어

어젯밤까지 고통에 시달리던

세 살짜리 조카애가


아까 결국

제 품에서 숨이 끊어졌습니다.


저와 그 아이 빼고,

가족 모두가

왜놈들의 칼에 난자당해

끔찍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저는...저는...수치스럽게도

왜놈 하나에게 더럽혀지느라

칼부림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아까 나무 옆에

그 아이의 주검을 묻고...

저도 뒤따라 죽으려 했습니다...”


그녀가 슬픈 목소리로

그간의 사정을 전했으나,

그는 그녀를 꼭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왜놈들에게 짓밟힌

이 더러운 몸으로...

저만 운 좋게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나...


차마 나리를

다시 뵐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그런데...이렇게...”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더 이상 이야기를 잇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사랑이 담뿍 담긴 옅은 미소가

아주 편안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살아있으니 되었다.”


“...나리...”


“이렇게, 이렇게 살아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너무 고맙다.


정말 고맙다. 살아 있어줘서.”


짧게 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다시금 꽉 껴안았다.


다시는 자신의 품에서

놔주지 않겠다는 듯이

억세게 힘을 주어,


그는 그녀를 껴안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녀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그녀의 흐느낌이

서서히 허공으로 퍼져나가

파란 바다를 향해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갔다.


자신의 등에 얹어진 두 사람이

무겁지도 않은지,

힘든 기색도 없이

흑염이 한가로이 풀을 뜯었다.




그렇게 그들은 재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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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제 3 부 천명 (19) 21.07.06 158 0 7쪽
76 제 3 부 천명 (18) 21.07.03 170 0 8쪽
75 제 3 부 천명 (17) 21.07.01 160 0 8쪽
74 제 3 부 천명 (16) 21.06.29 161 0 9쪽
73 제 3 부 천명 (15) 21.06.26 154 0 7쪽
» 제 3 부 천명 (14) 21.06.24 155 0 7쪽
71 제 3 부 천명 (13) 21.06.22 157 0 7쪽
70 제 3 부 천명 (12) 21.06.19 155 0 9쪽
69 제 3 부 천명 (11) 21.06.17 165 0 7쪽
68 제 3 부 천명 (10) 21.06.15 168 0 7쪽
67 제 3 부 천명 (9) 21.06.12 174 0 7쪽
66 제 3 부 천명 (8) 21.06.10 173 0 7쪽
65 제 3 부 천명 (7) 21.06.08 177 0 8쪽
64 제 3 부 천명 (6) 21.06.05 183 0 8쪽
63 제 3 부 천명 (5) 21.06.03 189 0 9쪽
62 제 3 부 천명 (4) 21.06.01 192 0 6쪽
61 제 3 부 천명 (3) 21.05.29 199 1 8쪽
60 제 3 부 천명 (2) 21.05.27 194 0 9쪽
59 제 3 부 천명 (1) 21.05.25 209 1 9쪽
58 제 2 부 후기 21.05.18 179 1 3쪽
57 제 2 부 꿈 (18) 21.05.15 187 0 7쪽
56 제 2 부 꿈 (17) 21.05.13 183 1 8쪽
55 제 2 부 꿈 (16) 21.05.11 185 1 9쪽
54 제 2 부 꿈 (15) 21.05.08 184 1 8쪽
53 제 2 부 꿈 (14) 21.05.06 206 1 7쪽
52 제 2 부 꿈 (13) 21.05.04 205 2 4쪽
51 제 2 부 꿈 (12) 21.05.01 202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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