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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39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1.06.15 03:26
조회
167
추천
0
글자
7쪽

제 3 부 천명 (10)

DUMMY

매일 같은 시간에

나무 앞에서 기도하는 그녀의 뒷모습과

그녀를 둘러싼 풍경을 바라본지

한 달쯤 지날 무렵,


정효상은

더 이상 궁금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속사정을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도대체

그녀는 무슨 기도를

저리도 간절히

매일 매일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알아야

무언가 이상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지금 마음 상태도,

앞으로의 행동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업무를 마치고 퇴청을 한 후

정효상은

집주인인 민수근과 술자리를 가졌다.


술 몇 잔이 들어가고

취기가 오른 민수근은,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유일한 걱정거리인

막내딸의 이야기를

그에게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혼기가 한참 지난 과년한 처녀를

출가시키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품에 데리고 있는

아비로서의 걱정,


사람의 간절함을 이용하는

무당의 감언이설에 홀려

당집에 드나들며

수시로 재물을 갖다 바치는

딸에 대한 언짢음,


딸의 막무가내 고집으로 인해

계속 깨져나가는 혼담에 대한 울화,


그리고

생사조차 모르는

정인을 잊지 못하고

삼년 넘게 힘들어하는

딸의 신세에 대한 안타까움 등이


민수근의 술주정에 담겼다.




한 시진 가까이 이어진

술자리가 파한 후,


방으로 돌아와 몸을 누인

정효상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녀를 생각하니,

그의 마음 한 구석이

무척이나 아려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울적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속사정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슬픔이라는 감정이 느껴지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기도 했다.


그날 밤,

정효상은 오랜만에 잠을 설쳤다.


그녀에게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고


또 한편으론


무언가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현재 그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봤을 때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그저 바라볼 뿐

결코 다가서지 못하는 그의 연민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석 달 정도 지나 드디어

그녀가 그의 존재를 눈치 챘을 때쯤,

그의 연민은

이미 애모의 마음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와

기도를 마친 그녀는,

바로 뒤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사내를 발견하고

정말 깜짝 놀랐다.


놀란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라

마구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의 눈앞에 내밀어진 것은

여우의 모피로 만들어진 목도리였다.


강진에서 가장 큰 피물전(皮物廛)에도

몇 개 없는,


적어도 쌀 한 가마니는 줘야

구할 수 있는,


부잣집 마님들이나

걸치고 다닐 수 있는

상당히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가 쳐다보자

그가 무심한 태도를 애써 가장하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동료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운 좋게 잡은 놈이오.


이 고을에서 솜씨 좋다고 알려진

갖바치에게 부탁해서

목도리로 만든 것인데,


부담 갖지 마시오.


여우고기하고 내장이

워낙 약재로 효험이 좋다하여

장터의 의원이 후하게 값을 쳐준 덕에,

나에겐 오히려 이득이었소.”


“...이런 귀한 것을 왜 저에게?”


“...낭자가 기도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은, 석 달쯤 전이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내가 새벽수련을 나올 때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기도하러 나오기에

호기심이 좀 생겼소.


낭자의 아버지에게

그쪽의 속사정을 듣고 나니,

많이 안타깝더이다.


뭔가 도와주고는 싶은데

마땅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요즘 날씨도 많이 추워지기에

새벽 기도할 때

조금이라도 따뜻하길 바라고

주는 거요.”


사내가 건넨 의외의 말에

여인의 마음이 문득 미묘해졌다.


뭔가 한 마디로

명확히 정의내릴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리의 배려가...

정말 고마우신 마음이긴 하나...


이런 귀한 것을

함부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저 같은 여자가

이런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

남들에게 괜한 오해를 부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런 선물을 받을 만큼

제가 나리께 잘해드린 것이 없습니다.”


“나에게

매일 맛있는 밥을 해주고,

매일 나의 더러워진 옷을 빨아주고,

매일 내 방을 깨끗하게 청소해주고,

매일 내 이불을 따뜻하게 말려주고,

매일 내 신발을 정성껏 닦아주는 것...


낭자가 이 이상

나에게 잘해줄 것이 뭐가 더 남았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네? 아니, 그건...

그저...제 일인 것뿐인데...”


“낭자는 그리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나의 생활을

편안하게 유지하게 해주는,

당신의 노력에 대한

나의 보답일 뿐이오.


그러니 사양하지 마시오.”


“.......”


사내의 차분한 말에

여인은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선물을 거절할 명분도

더는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부끄러운 듯 고개만 숙이고 있자


그는 성큼 다가와

목도리를 그녀의 목에 둘러주고는,

서둘러 몸을 휙 돌려

빠른 걸음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녀가 자신의 목에 둘러진

목도리를 만져보았다.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아주 오랜만에 그녀는,

타인의 온기로 시린 몸을 녹였다.


무척이나 따뜻한 새벽이었다.




그날 아침의 일 이후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하여,

둘의 관계에

무슨 큰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그저 그녀가 차려오는

그의 아침밥상에

가끔씩 귀한 생선이나

비싼 어물이 올라온다거나,


그녀가 기도하러 나갈 때

그가 시간 맞춰 새벽수련을 나가

간단한 일상의 대화를 한다거나 정도의,


아주 작은 변화였다.


하지만 그 작은 변화가

서서히 둘 사이에 쌓아준 감정은,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서로에 대한 편안한 호감이었다.


그녀는 그와 같이 발맞춰 걸으면서

예전과 달리 자주 웃을 수 있게 되었고,


그에게는

그녀를 연모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아마도 그에게 그녀는,

너무 늦은 나이에 찾아온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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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제 3 부 천명 (18) 21.07.03 170 0 8쪽
75 제 3 부 천명 (17) 21.07.01 160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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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제 3 부 천명 (15) 21.06.26 154 0 7쪽
72 제 3 부 천명 (14) 21.06.24 154 0 7쪽
71 제 3 부 천명 (13) 21.06.22 157 0 7쪽
70 제 3 부 천명 (12) 21.06.19 155 0 9쪽
69 제 3 부 천명 (11) 21.06.17 165 0 7쪽
» 제 3 부 천명 (10) 21.06.15 168 0 7쪽
67 제 3 부 천명 (9) 21.06.12 173 0 7쪽
66 제 3 부 천명 (8) 21.06.10 173 0 7쪽
65 제 3 부 천명 (7) 21.06.08 177 0 8쪽
64 제 3 부 천명 (6) 21.06.05 183 0 8쪽
63 제 3 부 천명 (5) 21.06.03 189 0 9쪽
62 제 3 부 천명 (4) 21.06.01 192 0 6쪽
61 제 3 부 천명 (3) 21.05.29 199 1 8쪽
60 제 3 부 천명 (2) 21.05.27 194 0 9쪽
59 제 3 부 천명 (1) 21.05.25 209 1 9쪽
58 제 2 부 후기 21.05.18 178 1 3쪽
57 제 2 부 꿈 (18) 21.05.15 186 0 7쪽
56 제 2 부 꿈 (17) 21.05.13 183 1 8쪽
55 제 2 부 꿈 (16) 21.05.11 185 1 9쪽
54 제 2 부 꿈 (15) 21.05.08 184 1 8쪽
53 제 2 부 꿈 (14) 21.05.06 206 1 7쪽
52 제 2 부 꿈 (13) 21.05.04 205 2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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