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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76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2.02.04 06:43
조회
87
추천
1
글자
10쪽

제 4 부 개화(開花) (55)

DUMMY

일각 후,


횃불이 밝혀진 금강굴 안으로

대사가 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곽재우를 찾아왔다.


대사의 뒤에서

경계심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으로

진용과 진영이

오른 팔목과 왼 발목에 사슬이 채워져

평상에 멍하니 앉아있는 곽재우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대사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곽재우에게 말했다.


"아까 의령에서 소식 하나가 당도했다.


너도 곧 아비가 된다는구나.


순산을 빌어주마.


출산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지만,

산모가 젊고 건강하니

아마 잘 될 거다."


말을 마친 서산대사가

편지 한 장을 곽재우에게 내밀었다.


순간,

곽재우의 멍한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하얀 종이에

정갈하게 써내려간 언문은,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아내의 필체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말없이 아내의 편지를 읽어내려 가는

그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신은 그날

두 시진 후 아무 일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같이 있던 수행원들 중에도

다친 사람 하나 없었다는 것.


지아비도 없이

홀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너무 두렵다는 것.


아이가 곧 태어날 것 같으니

제발 살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달라며,


무척이나 당신이 그립다는 것.


그 세 가지 내용이 다였다.




편지를 다 읽고

잠시 고민하던 곽재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내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당신들의 말은 진짜였군요.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대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애초에 네가 그렇게

어리석은 처신만 하지 않았어도

네 안식구가

그런 곤욕조차 치를 일이 없었겠지만...


아이를 가진 여자까지 해하면서

우리의 목적을 이룰 만큼


나는 물론이고, 우리 동료들이

그렇게 도의를 잃진 않았다."


곽재우가 진용과 진영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은 누굽니까?"


대사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두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리석은 네놈이

미리 아버지가 되는 연습 좀 해보라고

일부러 데리고 왔다.


나와 연이 깊은 아이들이다.


적적할 테니 말동무나 하여라.


오늘부터 네가 먹을 밥과 물은

이 아이들이 가져다 줄 것이다."


"저를 그리도 믿으시오?


내가 이 아이들을 인질삼아

당신을 협박하여 탈출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곽재우의 말에

진용과 진영이 깜짝 놀라

겁먹은 표정을 짓자,


대사가 씩 웃으며

바위틈에 단단히 박힌 쇠고리를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자, 진용아. 잘 보아라.


저 바보 같은 아저씨,

아니 형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저 사람의 한쪽 팔목을 묶은 사슬은

저쪽 고리에,


한쪽 발목을 묶은 사슬은

이쪽 고리에 연결되어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딱 여기에 서서

밥과 물이 담긴 소반을

저 막대기로

저 사람에게 밀어주기만 하면


너나 진영이는 안전하다는 뜻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지?"


대사의 설명을 들은 진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대사님.


이 경계선만 넘어가지 않으면,

저나 제 동생이

저 사람에게 위험한 일을 당할 경우는

없다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진용의

명석함이 느껴지는 똑똑한 대답에

대사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빠와 대사의 대화를 듣고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진영이 경계선에 서서

곽재우에게 물었다.


"오빠...


왜 오빠는 이렇게 묶여서

동굴에 갇혀있어요?


무슨 잘못을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나 아빠,

큰아빠들이나 삼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인데...


오빠는 그런 큰 벌을 받을 만큼

나쁜 짓을 많이 했나보지요?"


"아니, 난...그게..."


진영의 해맑은 물음에

무언가 대답하려했던 곽재우가

말끝을 흐렸다.


저 소녀에게 무슨 말로

자신의 지금 처지를 설명하고

이해시킨단 말인가.


그렇게 느낀 곽재우가

허공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아이들과 친해지는 것이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거든,


피 냄새가 나는 위험한 사람과

악의가 느껴지는 나쁜 사람을....


내 뒤에 숨어서 잔뜩 경계하며

지금 네 곁으로

아이들이 다가가지 않는 이 모습이,


그간 네가 걸어온 길이다.


어떠냐?


이런 네가 과연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


곽재우의 침묵이 길어졌다.


딱히 대꾸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를 향해

대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악법을 내세워 대를 이어 약탈하는

관리들이나 양반들 같은 큰 도둑보단,


협(俠)의 도를 지키며

삶에 가끔은 도움 될 때도 있는

검계 같은 작은 도둑이


민초들에겐 더 나은 법이지.


민초들이라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것도 아니다.


약한 존재가 반드시

선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거든.


사람은 살아가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의 피를

자신의 손에 묻혀야해."


"무슨 말씀이 하시고 싶은 것이오."


"너나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다 같이 손에 피를 묻히고

살아가고 있다지만,


그 와중에도

주변의 모두에게 좀 더 좋고

의미 있는 길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여기 이 아이들의 아버지처럼 말이다."


"......"


"얼마 후면 너도 아비가 된다 하니,


이제 그만 철없는 행동을 접고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

네가 원래 가야할 길로 걸어가거라.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대사의 말에

곽재우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나한테

왜 이리 잘 해주시는 것이오?


듣자하니,

다들 날 죽이고 싶어 하는데

대사께서 말려서

참고 있다고 들었소."


곽재우의 말에

대사가 다시 한 번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나 이 아이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아직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야말로 파릇파릇한 나이다.


그러나 나나

추설이나 목단설의 두령들은

생각이 다르다.


의미 있게 죽을 자리를 찾는 중이지.


그런데 그건 알고 있느냐?


대두령이 죽은 후부터 흑호도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걸...


그놈에게는 자신만의 미학이 있거든."


"........"


이번에도 곽재우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3년 가까이 흑호를 사부로 모시며

침식을 같이 하면서,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대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아라, 재우야.


너나 이 아이들에게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것이

이 노승의 소원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에서,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하겠소?"




곽재우가

마치 심통이 난 철부지처럼

반항하듯 대꾸하자

대사가 다시 말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 것이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말이다.


도대체 왜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심지어 부처님조차도

그 이유를 모르셨다."


"......."


"왜 살아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삶이 힘든 법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분께서는

인간을 미워하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막막한 시간을

우리 앞에 이렇게 던져놓으셨고,


우리는 그 시간을 메워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통을 받고

끝없이 힘이 들고...


더 이상은 견디기가 어려워

자진(自盡)이라도 해서

그 시간을 끝내보려고 하면,


온몸이 덜덜 떨려

주먹조차 쥐지 못할 정도로

죽음에 대한 강렬한 공포를

본능처럼 심어놓으셨지."


"...."


"애당초 죽음을 전제로 한

인간의 삶이 힘든 것은 그런 이유다.


그 실체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것.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으니...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단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의미 있게 끝나고 싶다고 말이다.


난,

너도 나 같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대사의 긴 설법에

곽재우는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심한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대사는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아이들이

너의 생명줄이자

말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부디

마음을 활짝 열고 친해져 보거라.


그게

내가 지금 너에게 바라는

유일한 것이다."




그제야, 곽재우의 입이 열렸다.


다만 대사가 아닌 아이들에게

그의 입이 열렸다.


"내 이름은 곽재우야.

경상도 의령에 사는...


오늘부터 잘 부탁한다. 얘들아."


자신들에게 먼저 이름을 밝히고

공손하게 부탁하는 곽재우를 보며,

진용이 맑고 당당한 눈빛으로 답했다.


"제 이름은 진용이예요. 김진용.


얘는 제 여동생 진영이구요."


"그래, 반갑다. 진용아."


곽재우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자

이번엔 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잘생긴 오빠,


앞으로 할아버지 말씀

잘 듣는다고 약속하면,


이따가 꿀떡도 같이 가져다줄게요.


현진이 삼촌이 사다준 거여요.

정말 맛있어요."


"그래? 정말 고맙다. 진영아.

기다릴게."




푸근한 기운이 느껴지는

셋의 첫 대화를 보며,

서산대사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금강굴 안으로

시원한 맑은 바람 한 줄기가

불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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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제 4 부 개화(開花) (57) 22.02.09 83 1 5쪽
162 제 4 부 개화(開花) (56) 22.02.07 89 1 8쪽
» 제 4 부 개화(開花) (55) 22.02.04 88 1 10쪽
160 제 4 부 개화(開花) (54) 22.02.02 89 1 6쪽
159 제 4 부 개화(開花) (53) 22.02.02 89 1 7쪽
158 제 4 부 개화(開花) (52) 22.01.28 89 1 12쪽
157 제 4 부 개화(開花) (51) 22.01.26 94 1 9쪽
156 제 4 부 개화(開花) (50) 22.01.24 94 1 9쪽
155 제 4 부 개화(開花) (49) 22.01.21 97 1 7쪽
154 제 4 부 개화(開花) (48) 22.01.19 93 1 7쪽
153 제 4 부 개화(開花) (47) 22.01.17 100 1 8쪽
152 제 4 부 개화(開花) (46) 22.01.14 86 1 7쪽
151 제 4 부 개화(開花) (45) 22.01.12 92 0 7쪽
150 제 4 부 개화(開花) (44) 22.01.10 91 1 10쪽
149 제 4 부 개화(開花) (43) 22.01.07 96 1 10쪽
148 제 4 부 개화(開花) (42) 22.01.05 95 1 10쪽
147 제 4 부 개화(開花) (41) 22.01.03 85 1 7쪽
146 제 4 부 개화(開花) (40) 21.12.31 96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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