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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70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2.01.10 02:30
조회
90
추천
1
글자
10쪽

제 4 부 개화(開花) (44)

DUMMY

사흘 후,


이규용에게

새로운 거래처를 소개받고

아주 큰 물량을 납품하게 되어

기분이 한껏 좋아진 박달서는


운종가에 들어

비싼 비녀와 가죽신, 노리개 같은

처자식을 위한 선물을 한아름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박달서의 집에서는

화목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기뻐하는 모습과

아내의 뿌듯한 미소에

박달서의 마음은

행복의 극의를 경험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바로 오늘의 이 풍경과 기분을

만끽하기 위함이었나 생각할 정도로,


그는 그날 저녁,

삶속에서 정말 흔치않은

‘절정의 순간’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


복면을 한 사내들 셋이

박달서의 집 담을 넘어 들어왔다.


마치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가뿐하게

담을 넘은 사내들은,


박달서 부부와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 잠든

안채 큰방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한 시진 전,

가족의 행복을

극한까지 경험했던 여파였을까.


박달서의 품에는 다섯 살 딸이,

그의 아내 품에는 일곱 살 아들이

포근히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꼭...

저 어린 것들까지 처리해야 하는가?”


그러자

또 한 명의 사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흑랑(黑狼)의 살수다.


하달된 임무에

의문이나 연민을 갖지 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중앙의 사내가 말했다.


“조장님의 지시네.


흔적이 남아선 안 되니 독침을 쓰게.


그게 저들에게도 좋을 거야.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을 테니.”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이후,


사내들 셋은 각자의 품에서

조그만 침통을 꺼내어들고

편안하게 잠들어있는

박달서의 가족에게 다가갔다.




일각 후,


세 사내는

무언가가 담긴 커더란 쌀가마 세 개를

각자 하나씩 들쳐 메고

재빨리 대문 밖으로 옮겼다.


대문 밖에는

미리 세워둔 우마차가 있었다.


셋은 쌀가마 세 개를 우마차에 싣고

복면을 벗었다.


달빛에 희미하게 드러난 그 얼굴들은

정은호, 이구철, 오기명이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치 싸전으로

쌀을 옮기는 일꾼들처럼

천천히 광흥창을 벗어났다.


그들이 떠나고,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화목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박달서의 집은


갑자기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처럼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박달서의 가족이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고

일주일이 흘렀다.


양재역참(驛站) 근처의 주막에는

그날따라 유독 손님이 많았다.


평상시 같으면

일을 받으러 온 보발꾼들이

간단하게 국밥으로 요기를 하거나,


일을 마친 보발꾼들이

탁주 한 사발을 들이키며

지친 다리를 쉬게 하는 정도의

소소한 번잡함이 다였다.


아주 가끔

공문서를 전달하러

외방(外方)으로 가는 파발들이

말을 공출하러 올 때나,


높은 관리들이

아전들을 대동하고

순시를 나오는 경우를 제하면,


그리 크게 바쁠 것이 없는

주막이었던 것이다.




양재천 근처에서

동네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집에서 돌보는 말에게

풀과 물을 먹이는 평화로운 풍경이나,


마의(馬醫)들이 말을 살피는 것을

신기하게 구경하는 타지사람들과

말에게 먹일 죽을 쑤는 역참사람들이

한데 섞여 돌아다니는,

한가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


'말죽거리'라 불리는

양재역말의 평상시 모습이었다.


가끔씩 여각이나 객주사람들이

외방에서 온 상단의 행렬을 붙잡고

부산스럽게 호객을 하거나,


거래가 틀어져 드잡이를 하다

결국 주먹질까지 가는

상인들의 모습 같은

소란스러운 풍경은


마을사람들에게도

흔치않은 모습이어서,


오늘 양재주막이

쉬지 않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혼잡한 것은

아주 이색적인 일이었다.




양재주막의 주인이자

홍방의 남쪽 연락소 책임자인

김기훈은,


번잡함을 넘어

어느새

혼란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계속 밀려드는

대낮부터의 술손님들에게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주안상을 마련하며


마음속으로는

강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오늘 무슨 날인가.


아무리 봐도

상단 사람들이나

다른 지역의 보발꾼들도 아니고,


농군처럼 변장하고 암행을 하러 온

관리나 아전들도 아니고...


요 근동에 장시가 서거나

난전이 열리는 날도 아니고...


굳이 끼워 맞추자면,

살던 곳을 버리고 떠도는

유민(流民)들 같은 행색인데...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대낮부터 삼삼오오 밀려와

술과 밥을 동 낸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이상함을 느끼며

주막의 부뚜막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던 김기훈의 뒤로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


"김동지, 오늘 무슨 날이오?


아니, 대낮부터 웬 손님들이 이렇게..."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잠시 일손을 멈추고 돌아선

김기훈의 눈에


홍방의 접주 중 하나인

이규용의 웃는 얼굴이 들어왔다.


김기훈이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오, 이동지.

그간 잘 지내셨소."


김기훈의 인사를 받은 이규용이

답례를 겸해 근황을 전했다.


"나야 뭐, 특별할 게 있겠소.


요즘은

나랏님이 바뀌셔서 그런가...


높은 양반들이 눈치를 보는지,

연풍관이 한가하다오.


매일 기생들과 쌍륙 노름이나 하면서

시간만 보내고 있으니 걱정이오.


김동지네 주막처럼

이렇게 장사가 잘되어야 되는데...


아이고, 부러워라."


김기훈이 이규용을 향해 농을 날렸다.


"그렇게도 내 신세가 부러우면

나랑 서로 바꿉시다.


나도 아낙네들 분 냄새나 맡으면서

쌍륙이나 치고 싶네. 하하하."


이규용이 김기훈의 농을 받아

마무리하듯 말했다.


"아이고, 싫소이다.


내가 밥은 굶어도

분 냄새만큼은 못 끊지. 크크...


그건 그렇고,

잠시 짬 좀 낼 수 있겠소?


본진에 보낼

급한 통문이 있어서 말이오."


‘급한 통문’이라는 말에

김기훈이 얼른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아무리 손님이 많아도

당연히 짬을 내야지요.


다른 것도 아니고 산채의 일인데...


여긴 너무 번잡하니

저쪽으로 자리를 옮깁시다."


김기훈은

옆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찬모에게

금방 돌아오겠다며,

국을 끓이고 있는 솥을

잘 살피라 당부하고


이규용과 함께

주막의 뒤편으로 향했다.




잠시 후,


주막 뒤편 공터에 놓인 평상에 앉아

둘은

산채로 보낼 통문에 대해 논의했다.


이규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엿새 전에,


연풍관에 술을 대는 밀주업자가

감쪽같이 사라졌소.


물건을 가져올 날에서 하루가 지나도

아무런 기별이 없기에

애들을 데리고 내가 직접 가본 결과,


그자도 그자의 가족들도

행방이 묘연하더이다.


말 그대로 집이 텅 비었는데,


이상한 것은

세간살이나 옷 같은 것도 그대로 있고


무엇보다

아궁이의 불씨가 아직 살아있었소.


그렇다는 건...


아마도

갑작스런 변고가 난 것이겠지요."


이규용의 말을 들은

김기훈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내비쳤다.


김기훈이 몇 가지 경우를 들어

사정을 짚어보았다.


"그자가...


혹시 노름빚이 있다거나,

원한을 산 일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오?"


김기훈의 질문에

이규용도 신중히 답했다.


"나하고는 아주 오래된 사이요.


노름하고는 아예 연이 없는 사람이고


동네에서 원한을 살만큼

강퍅하게 살지는 않았소.


그자의 술 담그는 솜씨가 아주 좋아서


우리말고도

금강산 식구들의 묵향루나

유명한 일패 기생들이 있는

운종가의 기루에도 술을 댔다오.


그러니

주변에 베풀고 살면 살았지

살림이 쪼들릴 일은 전혀 없었을 거요.


그리고

우리 같은 이들하고

오랫동안 안면을 튼 자가

노름방을 기웃거린다면


우리가 어찌 모를 수가 있겠소."




이규용의 말은

지극히 순리에 들어맞았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

사고밖엔 없는 것이다.


김기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지자

이규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작 밀주업자 하나 사라졌다고

호들갑을 피우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김동지도 알다시피,

우리가 금강산 식구들하고 손을 잡고

구월산 잔당들과 피를 본지도

어언 삼년이 넘어가지 않소.


요즘은 좀 뜸해졌지만,


여전히 그놈들과는

언제 또 칼을 맞댈지

모르는 상황이고..."


김기훈이 이규용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받았다.


"네. 그렇지요.


그래서 노사장께서도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평소와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으면

반드시 보고하라고

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김기훈의 말에

이규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무척이나 사소한 일이긴 해도,


무언가 미심쩍고 찝찝한 기분만은

떨쳐낼 수가 없소.


그러니 김동지가

이 내용을 통문으로 써서

최대한 빨리

본진에 보고해 주길 바라오."


김기훈이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시간이 늦어

이미 우리 식구들은 다들 일에 들어가

역참이 텅 비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제일 날랜 보발꾼에게 맡겨

묘향산으로 보내겠습니다."


묘향산이라는 말에

이규용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리산이 아니고 묘향산이요?"


"네,

중요한 회합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무실 예정이니


모든 통문은

당분간 그쪽으로 보내라 하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알겠소.


아무튼 지금 많이 바쁘신 것 같으니

얼른 돌아가 보시오.


나도 다음 나룻배를 타고

바로 두모포로 넘어가겠소."


"그러시지요.


다음엔 꼭 같이

밤새워 술 한 잔 나눕시다. 이동지."


"그럽시다.

내가 조만간 때를 봐서 다시 오리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킨 이규용이

걸음을 서둘러 주막을 떠났다.


우면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나루터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김기훈은,


얼른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솥에서 국을 퍼 담으며

열심히 국밥을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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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제 4 부 개화(開花) (42) 22.01.05 95 1 10쪽
147 제 4 부 개화(開花) (41) 22.01.03 84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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