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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60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2.01.28 02:24
조회
88
추천
1
글자
12쪽

제 4 부 개화(開花) (52)

DUMMY

한 시진 후,


기계적이고 차가운 몸짓으로

정사(情事)를 마친 이연이

허공을 향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목소리를 높여

여덟 명의 감시자들에게 말했다.


“다 끝났다. 이제 쉬고 싶구나.”


여덟 명의 숙직상궁 중 최고참인

이상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전하.


이제 따뜻한 차를 준비해 드릴 테니

입을 행구시고 편안히 주무소서.”


모든 것이 귀찮은 듯 보이는 표정으로

이연이 손사래를 치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이상궁에게 명을 내렸다.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고,

제조상궁을 불러라.


긴히 명을 내릴 것이 있다.”


젊은 왕의 느닷없는 명에

무언가 찜찜함을 느낀 듯

잠시 멈칫 하더니

이상궁이 답했다.


“전하,


오늘 밤은

이대로 침소에 드셔야 하옵니다.


부디 기운을 보존하소서.”


이상궁의 대답에

이연이 신경질을 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내가 너희들을 물리고

중전에게

또 달려들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급히 내릴 명이 있다고

박상궁을 부르라 하지 않았느냐.


그런 것 아니니 썩 물러가라.”




평상시답지 않은,

매우 직설적인 이연의 말에

이상궁은 심히 당황했다.


그녀를 비롯한 일곱 명의 상궁들은,

내일 아침 해가 뜨기까지

눈을 부릅뜨고

왕과 왕비의 잠자리를

감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혹시 부정이라도 탈 일이 벌어진다면,


그로인해

왕자든 옹주든

어딘가 이상이 생긴 채 태어난다면,


나중에 자신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까지 엮여서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곤욕을 치르기 때문이었다.




이상궁이 침묵을 지키며

미동도 하지 않자,


이번엔

이연이 큰 목소리로 화를 냈다.


“이 늙은 것들의 무엄함이

실로 도를 넘는구나.


내 말이 우습나?


지금 당장 명에 따르지 않는다면,


너희 모두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연의 서릿발 같은 분노에

그제야 이상궁을 비롯한

숙직상궁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들이

날랜 걸음으로

교태전 온돌방을 나갔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계속 씩씩거리며

거칠게 숨을 내뱉고 있는 이연을 향해,


왕후 박씨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합궁의 법도’상,

촛불도 켜지 못하고

그저 불안한 마음으로

목석처럼 누워만 있었다.




잠시 후,


이연의 부름을 받은 박상궁이

서둘러 방안으로 들어왔다.


“의관을 챙겨라.


오늘 밤의 처소를 옮기겠다.”


긴장한 표정으로 명을 기다리는

박상궁에게 이연이 짧게 말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젊은 왕의 차가운 목소리만 들려오자

박상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박상궁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전하, 오늘은 합궁의 날이옵니다.

그것은 법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너희들이 그토록 얘기하는

절차와 예법에 맞게.”


“하오나...그건...”


“내가, 자네에게 아까 뭐라고 했는지

벌써 잊었는가?”


“.......”


박상궁의 입이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이연이 차갑게 한 마디를 던졌다.


“융통성을 발휘해보라고,

분명히 얘기했을 텐데...”


그제야 박상궁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명에 따랐다.


“예, 전하. 바로 준비하겠사옵니다.”




짧게 답하고,

이연이 처소를 옮길 준비를 도와줄

궁인들을 데리러

박상궁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화가 좀 가라앉았는지,


이연이 씩 웃으며

부싯돌을 찾아 몸소 촛불을 켰다.


갑자기 환해진 방안 풍경에

깜짝 놀란 왕후 박씨가

이불로 앞을 가려

급히 매무새를 추스르며

몸을 일으켰다.


합궁이 끝난 직후였기에,

자신의 속살이 그대로

왕의 눈에 띄었을까 부끄러워

그녀의 얼굴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이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뚝뚝하게 말 한 마디를 던졌다.


“오늘 밤, 고생이 많았소.


난 이제 처소를 옮길 테니,

당신은 편안히 푹 쉬시구려.”


왕후가 잠시 망설이다

큰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투엔

살짝 원망이 섞여있었다.


“오늘 같은 합궁의 날마저,


그 아이의 거처로

가시려 하시 옵니까.”


평상시답지 않은 왕후의 말투에

의아함을 느낀 이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답지 않구려.

지금 질투를 하는 것이오?”


‘질투’라는 단어에

왕후가 잠시 숨을 고르고,

차분히 말했다.


“상께서...

아무리 숙의(淑儀)를 총애하시고,


저와의 관계는

공무(公務)처럼 대하신다 하더라도...


궁인들의 눈에

너무 표시가 날 정도로 움직이시면,


혹여 상에게

좋지 않은 구설들이 돌까 하여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그건 그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왕후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심은

이연에게 닿지 않았다.


“그럴듯하게 예의와 법도를 논하며


마치 나와 그 애를

걱정해주는 듯 말하지만,


실상 당신의 속내는

나를 붙잡으려는 것 아니오?


그것이 시기와 질투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이오?”


“.......”


“거짓과 위선으로 속내를 감추고,


듣기에만 좋은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자들을

만나는 것은,


조정의 일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런 자들의 구역질나는 얼굴을

매일매일 봐야만 하는 것도

이젠 아주 지긋지긋하단 말이지.


적어도 그들이 없는 밤만큼은,

솔직하게 살고 싶구려.”


“전하...”


"난 당신과의 혼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하오.


우리가 부부가 된 의미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소.


아들을 낳는 것.


그러니 서로가 서로의 의무를

성실히 다할 뿐,


서로가 지켜야 할 선 만큼은

절대 넘지 않도록 합시다."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이연의 차가운 말을 들은

왕후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관의 하례를 받으며

중전의 자리에 오른 지

2년이 다 되어가건만,


그녀는 아직도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각 후,


왕후의 방을 나와

숙의 김씨의 거처로 향하는

이연의 곁으로


내시부의 호위무사 기동민이

조용히 다가와

귓속말을 하듯 속삭였다.


“선전관 정창수가

급히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기동민의 말에

이연의 얼굴이 살짝 굳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르던 상궁들과 내시들도

따라서 멈추었다.


잠시 멈추어 서서

하늘을 바라보던 이연이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숙의 김씨의 처소에 당도하여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연이 궁인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밤은 여기서 머물 것이니

모두 물러가고,


동민만 남아 문 앞을 지키라.”


이연이 짧게 명하고

숙의의 처소로 들어가자,


박상궁이 이번엔

눈치 빠른 행보를 보였다.


왕의 명에 거스르거나 간언하지 않고

신속히 처리한 것이다.


박상궁의 인솔 하에

문밖에서 안부의 인사를 마친 궁인들이

서둘러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방안에는,


갑작스런 왕의 행차를 통보받아

서둘러 몸단장을 하고

간단한 주안상을 준비한


숙의 김씨가

불안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왕에게 총애를 받는 후궁의 위치란,

끝없이 펼쳐진 살얼음 위를 걷는

여행자나 마찬가지다.


내명부의 그 누구도

자신에게 호의를 보내지 않는다.


아니,

호의는커녕

저주나 보내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대가랄까.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장 높은 자’와의 밤은

행복하고 든든하지만,


그 밤이 지나면

차갑고 날카로운 질시의 시선과

끝없는 구설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찾아온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간택후궁의 신분으로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정해진

자신의 운명인 것을.


그런 불안과 외로움에 힘겨울 때마다

그녀는 아버지의 충고를 떠올렸다.


‘참고, 침묵하고, 아무도 믿지 마라.


다른 모두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상에게마저도 그런 태도를 보여야한다.


그것이

네가 그 안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태도를 잘 견지하였기 때문일까.


이연은 그녀 앞에서만큼은

아주 자유롭고 편안하게 행동하였다.




이연이 편안한 옷으로 환복을 하고

상석에 자리를 잡자,

그녀가 주안상을 챙겨 앞으로 왔다.


그녀가 술시중을 들으려 하자

이연이 짧게 제지하였다.


“아니, 오늘은 아직 아니다.

잠시 기다려라.”


평상시와는 다른 왕의 태도에

그녀의 표정에

다시 불안함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불안함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이연은

문밖의 소리를 살피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바깥에서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이연이 몸을 일으켜 살짝 방문을 열고

밖의 풍경을 살폈다.


궁인들은 모두 물러가 아무도 없었고,

기동민만 홀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이연이 작은 목소리로

기동민을 부르자,


기동민이 서둘러 나아가 몸을 숙였다.


이연이 조용히 말했다.


“이곳으로 데려오라.

은밀히...조심스럽게...”


이연의 명을 받은 기동민이

재빨리 몸을 움직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일각 후,


내시의 복장으로 환복한 정창수가

기동민과 함께

숙의 김씨의 처소 앞에 당도하였다.


기동민이

주변을 살피러 자리를 피하자


정창수가 문 안에 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전관 정창수 당도하였나이다.”


그러자

문이 조금 열리며

이연이 얼굴을 드러내고

한껏 반가운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정창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품안에서 문기 하나를 꺼내어

이연에게 바쳤다.


오랜만의 만남이건만,

간단한 안부 인사조차 없이

난데없는 문기만 내미는

외삼촌의 모습에

이연의 눈에서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정창수의 입에서 나온 짧은 말에,


이연의 얼굴은

단번에 여유를 잃은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검은 용의 단서가 잡혔나이다.


금군을 움직일 수 있도록

허 해주소서.”




놀란 이연이 서둘러 문기를 보았다.


정창수가 내민 문기엔

딱 세 줄의 문장이 쓰여 있었다.


‘보름 후, 묘향산, 금군 삼십.’


이연이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서둘러 말했다.


“선발은 선전관이 알아서 잘 할 테니,


내일까지 명분을 잘 찾아

정식으로 장계를 올리라.


승정원에 얘기해놓겠다.

최대한 빨리 처리될 수 있도록.”


정창수가 지체 없이 허리를 숙이며

짧게 답했다.


“예, 전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정창수가 서둘러 사라지자,


주변을 살피던 기동민이

문 앞으로 돌아와 다시 보고를 했다.


“주변에 인기척은 없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이연은 다시 방문을 닫았다.




방안에는


그런 이연의 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숙의 김씨가

촛불 앞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이연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술잔을 들어

그녀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술을 따르려하자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이연이 술잔을 내려놓고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이연은

정창수에게 받은 문기를 꺼내

불을 붙여 태웠다.


그의 행동에 그녀가 깜짝 놀라

당황하여 허둥대자,


이연이

술이 담긴 주전자의 뚜껑을

집어 올려 뒤집어

그 안에 불타는 문기를 올려놓았다.


문기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재가 된 문기를 바라보며

이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다시 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며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술이 무척 달듯 하구나.


따라 보아라.”


그녀는

뚜껑이 없어진 주전자를 들어

조심스럽게

이연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녀의 불안한 눈빛과 상관없이,

술 한 잔을 맛있게 비운 이연이

자상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상시와는 아주 달랐던 합궁의 밤은,


그렇게

조용하고 은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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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제 4 부 개화(開花) (60) 22.02.16 80 1 6쪽
165 제 4 부 개화(開花) (59) 22.02.14 80 1 7쪽
164 제 4 부 개화(開花) (58) 22.02.11 80 1 7쪽
163 제 4 부 개화(開花) (57) 22.02.09 83 1 5쪽
162 제 4 부 개화(開花) (56) 22.02.07 88 1 8쪽
161 제 4 부 개화(開花) (55) 22.02.04 87 1 10쪽
160 제 4 부 개화(開花) (54) 22.02.02 89 1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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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제 4 부 개화(開花) (49) 22.01.21 97 1 7쪽
154 제 4 부 개화(開花) (48) 22.01.19 93 1 7쪽
153 제 4 부 개화(開花) (47) 22.01.17 100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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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제 4 부 개화(開花) (44) 22.01.10 90 1 10쪽
149 제 4 부 개화(開花) (43) 22.01.07 95 1 10쪽
148 제 4 부 개화(開花) (42) 22.01.05 94 1 10쪽
147 제 4 부 개화(開花) (41) 22.01.03 84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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