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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78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2.01.17 09:44
조회
100
추천
1
글자
8쪽

제 4 부 개화(開花) (47)

DUMMY

-4-


마포나루의 새벽은

그날따라 매우 스산했다.


평상시대로라면,

한강의 강줄기를 타고

외방 각지에서

물건을 잔뜩 싣고 온 황포돛배들로

나루터부근이 북적거리고

상인들과 뱃사공들이

거래를 하느라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따라 너무도 짙은 안개가

모든 것을 잠식해버린 탓인지,


활기로 가득 차야할

마포나루터의 풍경은

적막하고 음산했다.


거기에만 그치지 않고,

가랑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자

가뜩이나 아침 해가 보이지 않는

우울한 새벽이

더더욱 고요하고 쓸쓸해졌다.




그 무거운 안개를 뚫고

누군가가 나루터입구로 들어섰다.


처음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중년의 사내로

허리에 환도를 차고

행전을 단단히 묶은 다리가

무척이나 날래보였다.


사내의 뒤를 따라

검은 장옷으로 전신을 뒤덮은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내의 뒷모습을 이정표삼아

날랜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녀의 가죽신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성큼성큼 앞서 가는 사내에게

여인이 말을 건넸다.


"아직 안보여요? 표식이?"


여인의 질문에

사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커더란 검은 천을 세 줄기 꼬아

깃발처럼 휘날리게 묶어놓은

배라고 했으니...


안개가 심한데다

가랑비까지 내리는 궂은 날씨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것 뿐 일 테니.


해도 보이질 않잖아."


"그래도...

안개가 이리도 자욱하고 비까지 내려서

그나마 다행이어요.


그 덕에 인파도 적고,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잠시 멈춰 서서

대화를 나누는 남녀의 정체는

박술녀와 안현수였다.


형식적인 혼례만 올리지 않았을 뿐

부부나 마찬가지로

오래되고 끈끈한 사이이면서도,


남들의 눈을 피해 밀회를 가지는

조심성 많은 그들이,


이처럼 이른 새벽에

사람들로 북적거릴

마포나루를 찾은 것은,


사흘 전,


'보우의 사람들'로서

같이 비밀결사를 맺었으나

풍파 속에 아득히 잊고 살았던


옛 동지의

갑작스러운 방문 때문이었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5년 만에 느닷없이

박술녀의 집을 찾아온

그 사내의 이름은 임돌석으로,


원래 마포나루를 근거지로 삼아

소금운반을 업으로 하던 운송업자였다.


어린 나이부터 뱃일을 하며

물 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호탕하고 거친 성격에

억센 팔다리를 지닌

전형적인 뱃사람이었다.


서른 즈음에 운이 닿아

풍랑에 파손된 낡은 배를

하나 얻을 수 있었고,


그동안 열심히 모은 재물로

배를 수리하여

드디어 선주가 되었다.


이제 삯을 받고

남의 일을 해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문을

자기가 직접 챙기는 선주가 되자


그는

밥보다 좋아하던 술을 끊고

소처럼 일하여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커더란 황포돛배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인생은 호사다마라는 말을

마치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그토록 소원하던

황포돛배의 주인이 된지

한 달도 못되어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자신을 따라 뱃일을 배우던 아들이

풍랑사고에 휘말려

물고기 밥이 되었다.


한 달이 넘도록

미친 사람처럼

사고현장 주변을 수색하며

아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던 임돌석이

결국 포기하고


오랫동안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대고

석 달쯤 지났을 때,


그는

아들의 명복을 빌러 찾아간 절에서

우연히 보우의 설법을 듣게 되었다.


그는 보우의 설법을 듣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며

큰 위안을 받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는

마치 피부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던

술병을 그 즉시 깨버리고,


보우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으며

제자로 받아 달라 간곡히 부탁했다.




그렇게 임돌석이

보우의 열렬한 신도가 된 것은

자식을 잃은 비극적인 사고가

계기가 되었고,


보우의 소개로

박술녀와 안면을 트고

인연을 맺은 것도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보우의 지시로

자신의 배를 이용해

검계들과 같이 움직이며

충실히 조직에 봉사하던 임돌석은,


보우가 죽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구심점을 어이없이 잃은 후

그 단단했던 조직이

속절없이 부서져 나가면서

수많은 동지들이 흩어지는 과정을

질리도록 봐온 박술녀에게는,


임돌석도

그저 한때의 동지였던

부질없는 인연 중

하나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내가

5년이 훌쩍 지나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집을 불쑥 찾아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날 저녁,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안현수와

오랜만의 밀회를 가지려던 차에

갑작스런 임돌석의 방문은

그녀의 짜증을 치밀게 했지만,


'오랜만이오. 박동지' 하며

그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없이 내민 한 통의 서한은

그녀를 깜짝 놀라

땅에 주저앉게 만들었다.


서한을 보낸 사람이

구월산의 흑호였기 때문이다.


흑호가 누구던가,


조선팔도의 양반님네들은 물론이오,

나랏님마저 벌벌 떨게 만들었던

대두령 임꺽정의 칼이 아닌가.


박술녀가 알기로

보우와 임꺽정의 인연은

아주 오래되고 깊었으며,


임꺽정을 통해

보우와 연을 맺은 흑호 또한

그에게 큰 위안을 얻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였다.




서한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사흘 뒤 묘시(卯時) 마포나루,

황포돛배 위에서.


접선방법은 그에게 듣도록'


허공을 향해 길게 심호흡을 하고

어느 정도 진정을 한 박술녀가

다시 몸을 일으켜

툇마루로 임돌석을 안내하자,


임돌석은 손을 내저으며 사양하고

간단한 용건만을 서둘러 말했다.


"박동지, 회포는 사흘 뒤에 풉시다.


시각에 맞춰 약속장소로 나오면

우리 배가 보일 것이오.


커더란 검은 천을 세 줄기 꼬아

깃발처럼 휘날리게 묶어놓을 테니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외다."


접선방법을 전하고

바로 몸을 돌려 돌아가려는 임돌석에게

박술녀가 서둘러 물었다.


"누구를 좀 데리고

같이 나가도 되겠지요?"


임돌석이 몸을 돌려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되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긴장한 박술녀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임동지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겸사복 안현수,

지금은 나와 같이 움직인다오."


임돌석이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안동지는 나도 잘 알지만,

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소."


임돌석의 딱딱한 대답에

박술녀가 작심한 듯

비밀을 털어놓았다.


"아뇨,

난 그 사람과 꼭 같이 가야겠어요.


혼례만 올리지 않았을 뿐,

안동지와 나는 지금

부부의 연을 맺은 사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분께도 그렇게 말씀드려주세요."


박술녀의 단호한 말에

임돌석의 눈에 고민의 빛이 떠올랐다.


잠시 후, 임돌석이 입을 열었다.


"조장님께 여쭤보고

바로 답을 주겠소."


짧은 대답을 남기고

몸을 돌려 떠난 임돌석은,


그날 밤 다시 찾아와

‘허락이 떨어졌다’는 말만을 남기고

다시 서둘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흘 후,


약속된 시간에 마포에 나타난

박술녀와 안현수는

안개와 비를 뚫고

표식이 걸린 배를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찾아 헤맨 지 일각쯤 지났을까.


드디어 그들의 눈에

검은 천 세 줄기가 휘날리는

황포돛배 하나가 보였다.


그들은 그 자리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하며

요동치는 마음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는지

박술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안현수의 손을 잡았다.


안현수가

박술녀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손을 꼭 맞잡은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결심을 다지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현수가 입을 열었다.


"갑시다. 임자.


너무 걱정 마오. 내가 있으니...

꼭 지켜 주리다."


박술녀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잠시 후,


비스듬히 놓인 사다리를 밟고

둘은 배의 갑판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안개는 무겁도록 자욱했고

빗줄기는 조금씩 거세지고 있었다.


마포의 아침은 어두웠다.


어느덧 진시(辰時)로 접어들었건만,

여전히 해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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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제 4 부 개화(開花) (57) 22.02.09 83 1 5쪽
162 제 4 부 개화(開花) (56) 22.02.07 89 1 8쪽
161 제 4 부 개화(開花) (55) 22.02.04 88 1 10쪽
160 제 4 부 개화(開花) (54) 22.02.02 89 1 6쪽
159 제 4 부 개화(開花) (53) 22.02.02 89 1 7쪽
158 제 4 부 개화(開花) (52) 22.01.28 89 1 12쪽
157 제 4 부 개화(開花) (51) 22.01.26 94 1 9쪽
156 제 4 부 개화(開花) (50) 22.01.24 94 1 9쪽
155 제 4 부 개화(開花) (49) 22.01.21 97 1 7쪽
154 제 4 부 개화(開花) (48) 22.01.19 93 1 7쪽
» 제 4 부 개화(開花) (47) 22.01.17 101 1 8쪽
152 제 4 부 개화(開花) (46) 22.01.14 86 1 7쪽
151 제 4 부 개화(開花) (45) 22.01.12 92 0 7쪽
150 제 4 부 개화(開花) (44) 22.01.10 91 1 10쪽
149 제 4 부 개화(開花) (43) 22.01.07 96 1 10쪽
148 제 4 부 개화(開花) (42) 22.01.05 95 1 10쪽
147 제 4 부 개화(開花) (41) 22.01.03 85 1 7쪽
146 제 4 부 개화(開花) (40) 21.12.31 96 1 8쪽
145 제 4 부 개화(開花) (39) 21.12.29 86 1 11쪽
144 제 4 부 개화(開花) (38) 21.12.27 88 1 7쪽
143 제 4 부 개화(開花) (37) 21.12.24 88 1 7쪽
142 제 4 부 개화(開花) (36) 21.12.22 88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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