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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66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2.01.26 02:25
조회
93
추천
1
글자
9쪽

제 4 부 개화(開花) (51)

DUMMY

-7-


그날 저녁부터

이연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오늘 밤은

중궁전으로 건너가

왕비와 합궁(合宮)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중전의 몸을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이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임을

머리로는 잘 알고는 있었지만,


남녀 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애정행위마저

기계적인 절차와 예법을 준수하며

일을 치러야한다는 압박감은,


이미 후궁들과

‘밤일’의 즐거움을 여러 번 경험한

이연의 몸으로서는

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고역이었다.




관상감(觀象監)으로부터

길일(吉日)을 받아

제조상궁(提調尙宮)과의

협의를 거쳐


세 달 만에 찾아온 합궁의 밤,


언짢음이 극에 달한 표정으로

이연이 궁인들과 함께

왕후가 기다리고 있는

교태전(交泰殿)의 동쪽 온돌방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제조상궁인 박상궁이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어

간언을 시작하였다.


“전하,


무릇 합궁이란

밝고 긍정적인 기운을 바탕으로

행하셔야 하옵니다.


국사(國事)를 돌보시느라

심신이 매우 피로하심을

소인 잘 알고 있으나,


부디 웃는 얼굴로

가볍게 걸음을 옮기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궁 안의 살림을 총괄하고 있는

제조상궁의 관록이 느껴지는 말이자,


진심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와

충언을 올리는 것임을

이연도 잘 알고 있었으나


그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했다.


결국 이연은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그대의 간언이

틀린 것이 아니란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자네도 한 번 생각해보라.


저번 달은

중전이 미열이 있다하여 미뤘고,


그 전 달은

인일(寅日)이라서 안 된다 하였고,


세 달 전에는

번개가 치는 날이라 안 된다 하였다.


내가 왕후를 나의 반려로 맞이한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가건만,

합궁을 몇 번이나 치렀는가?


내 기억에

아마 열 번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이런 까다로운 절차와 예법을

일일이 따르다가

과연 국본이 잉태될 수나 있겠는가?


어디 남녀 간의 일이

그런 식의 계산된 행동으로

결실을 볼 수 있는 일이던가?”


이제 갓 약관이 된,

젊은 왕의 패기가 물씬 느껴지는 말에

박상궁이 허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차분하게 답했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합궁에 관한 절차와 법도는

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예법이옵니다.


선대 대왕들께서도 모두,

고됨과 불편함을 감수하시며

절차를 따라 행하셨던

왕실의 중대사이옵니다.


전하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박상궁의 정석적인 답변에

이연이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을 보이며

비꼬듯 말했다.


“알지, 내 아주 잘 알지...


초하루와 보름날 같은

삭망(朔望)은

달의 기운이 떨어진다 하여

제사를 올리느라 안 되고,


그믐날은 달이 사라져서 안 되고...


일진에

뱀(巳)과 호랑이(寅)가 들어온 날은

혹시 모를

살(煞)을 피해야 해서 안 되고,


비오고 바람 불고

천둥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날은

불길하다 하여 안 되고...


그나마 어떻게 운이 닿아 날을 잡으면,


중전의 달거리가 끝난 지

5일째가 아니라하여 또 안 되고...


하하, 참 이젠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전하...어찌 그런 말씀을...


혹시라도 오늘 밤 잉태되실지 모를

귀한 분에게 부정이 탈까


소신 무척이나 두렵사옵니다.”


“뭐라? 이런 불손한 것을 보았나.”




순간

이연의 눈꼬리가

호랑이처럼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박상궁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을 따르는 수하 수십 명이

지금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여기서 젊은 왕에게 굴복하면,


그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아랫것들에게

영(令)이 서지 않을 것이다.


어려워도 지금은

기 싸움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다.


제조상궁에게

가장 큰 책무이자 권력은,


택일(擇日)부터 세부절차까지

합궁에 관한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박상궁이

힘들게 용기를 내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차분하게 간언을 올렸다.


“무릇 합궁이라 함은


전하께서 머무르시는 강녕전과

중전께서 머무르시는 교태전,

평소에는 멀리 떨어진

이 두 개의 궁이


왕실의 신성한 의무를 위해

길일을 택해

하나로 합해진다는 의미이옵니다.


남녀유별이라는

실로 지키기 어려운 인간의 도리를,


이렇게

전하께서 몸소 행하심으로서

만백성에게 큰 귀감이 되시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부디 평정심을 발휘하시어,

성군의 길로 나아가시옵소서.”


그러나 박상궁의 이 말은,

이연의 자존심마저 건드리는

최악의 수가 되었다.


“네가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과인이 아직 젊고 미숙해서,


경험 많은 네 눈에는

과오를 마구 저지르고 다니는

철부지로 보인단 말이지?”




이연의 냉기가 느껴지는 서늘한 말에


박상궁은

마치 심장이 두 개로 쪼개지듯

크게 놀라고 말았다.


아,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뒤늦게 깨달은 그녀가

급히 수습할 방도를 찾아보려 애썼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아예 대놓고 작심한 듯,


이연이 차분한 말투로

그러나 매우 날카롭게

박상궁에게 쏘아붙였다.


“자네가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만 지내서


세상물정은 물론이고

남녀 간의 일을 잘 몰라

그러는 것 같네.


무릇 인간사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은밀한 일이

부부간의 동침일 것인데,


중전과 내가 합궁하는 모든 과정을

숙직상궁 여덟 명이

우리를 둘러싸고 지켜보고 있네.


어디 지켜보다 뿐인가?


숨소리가 거칠어지니

옥체를 생각하시라는 둥,


그런 식으로 방향을 바꾸시면

안 된다는 둥...


내가 그 늙은이들에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자네가 알기나 하나?”


“전하...듣는 귀가 많사옵니다.


어찌 이러시나이까.

부디 화를 거두어주소서.”




박상궁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이연이 몸까지 돌려

자신의 뒤를 따르는 내시와 궁녀,

호위들을 바라보며

서릿발 같은 분노를 표출하였다.


“너희들에게

지금 이 순간 눈과 귀가 있느냐?”


젊은 왕의 매서운 추궁에

뒤를 따르던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없사옵니다. 전하.”


이연이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에게

지금 이 순간 입이 있느냐?”


입이 달려있긴 하나

지금 이 순간

입이 있어서는 안 되므로,


그들은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모두의 얼굴에

실로 난감한 표정이 떠오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초조해 했다.




“전하,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보다 못한 박상궁이

모두를 대표하여

간곡하게 이연을 말렸다.


궁인들의 난감함을 보며

자신의 권위가

어느 정도 세워졌다 생각했는지,


이연도

허공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뒤틀린 심기를 바로 잡으려

애쓰기 시작했다.


“박상궁.”


“네, 전하.”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이연이

목소리를 낮춰 차분하게

박상궁을 향해 말했다.


“눈을 떠서 내 몸을 봐서도 안 되고,


소리를 내서도 안 되고,


몸을 떨거나 흔들어서도 안 되고...


모든 불을 끄고

내 몸의 왼쪽에 누워 있어야 하며,


절대로

내 몸 위로 올라가서도 안 되는 것이...


중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합궁의 금기다.


맞는가?”


“네...전하. 그렇사옵니다.”


“이렇게 절차와 예법을 지켜

왕자를 낳는 것이,


아무리 나와 중전의 의무라 하나...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세상의 이치로만 봐도,

부부 간의 금슬이 좋아야

회임도 잘 되는 것일 텐데...


이것이 과연

순리를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부부가 아이를 잉태한다는 것은,

농밀한 사랑의 결실이거늘...


가장 은밀하고 정다워야 할

이런 순간에,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듯

일을 치러서야


과인과 중전 사이에

어디 도타운 애정이 생기겠는가?


어디 그것뿐인가?


욕심에 눈이 벌게진 마름이

소작꾼들을 감시하는 것처럼,


늙은 상궁들이

한둘도 아니고 무려 여덟이나

우리를 둘러싸고서

새어나오는 숨소리까지 관여하고 있네.


상황이 이럴 진데,


애정은커녕

어디 사소한 온기조차

우리 사이에 들어설 틈이나 있겠는가?”


“........”


박상궁도 이번엔 말을 아꼈다.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이연이 체념한 듯 보이는 말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과인의 숨겨진 복심까지

이리도 솔직하게

자네에게 가감 없이 내비쳤으니,


앞으로는 이 일에 관해서

융통성을 좀 발휘해보게.


하루라도 빨리 적자(嫡子)를 보아

왕실의 평안함과 굳건함을 이뤄야지...


자네 입장에서도

그게 가장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제야 박상궁도

젊은 왕의 진심과 의도를

잘 파악했다는 느낌으로 대답하였다.


“네. 전하...오늘은 이미 늦었사오나,


향후의 일에 관해서는

충분히 심사숙고 하겠나이다.”


박상궁이 한 발 물러서자

이연도 한 발 물러서 주었다.


“그래, 앞으로 기대하겠네.


자, 좀 지체되었으니...서둘러보세.”


말을 마친 이연이

크게 한 걸음 내딛어

교태전을 향해 나아갔다.


박상궁을 필두로

수십의 궁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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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제 4 부 개화(開花) (52) 22.01.28 89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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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제 4 부 개화(開花) (45) 22.01.12 91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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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제 4 부 개화(開花) (42) 22.01.05 95 1 10쪽
147 제 4 부 개화(開花) (41) 22.01.03 84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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