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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61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2.01.05 02:42
조회
94
추천
1
글자
10쪽

제 4 부 개화(開花) (42)

DUMMY

긴 침묵에 빠져있던 서산대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극히 작은 일부조차 모르는 네가...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일인지

알리가 없겠지.


그 엄혹하고 무거운 이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해보았다면,


마치 어린아이가 장기를 두듯이

이런 큰일을

이리도 쉽게 벌여대진 않았을 테니..."


"그게 무슨..."


"아이야...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에

손을 뻗은 것이다.


지난 3년간 벌어진

그 수많은 끔찍한 일들이,


너에게는 그저

한없이 신나는 놀이터 같았겠지.


장기판위의 장기 말처럼

네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너에게는

재밌는 장난감에 불과했겠지만....


넌,

아홉 번을 환생해서

속죄를 해도 다 못 씻을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다."


대사의 말에

곽재우의 얼굴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런 말을...

딴 사람은 몰라도

대사께 듣고 싶진 않습니다만..."


대사의 말에

곽재우가 눈을 부라리며

비꼬듯 대들었다.


대사의 옆에 서있던 한용덕이

크게 성을 내며

곽재우에게 소리를 질렀다.


"뭐라?


지금 당장에 쳐 죽이고 싶은 것을

총사님의 만류로 꾹 참고 있거늘...


이 어린 핏덩이가 또 선을 넘는구나."




서릿발 같은 한용덕의 분노에도

곽재우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불가의 도에 몸을 담고

보시를 생업으로 삼아

중생을 구제하셔야하는 분이,


살생을 수단으로 삼아

민초들을 윽박질러 이득을 취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검계들의 총사를 맡고 계신 이 모순을


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


"그런 분께서 저에게

속죄니 이치니 하며

가르치듯 충고하는 것이

애당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적어도 저는,

대두령과 서림이 짠 그 계획에는

훌륭한 대의와 명분이 있다고

믿고 시작한 것입니다.


흩어진 검계들을 하나로 모아

세상의 혼란을 다스리고,


사대부들의 욕심으로부터

민초를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대의 말입니다."


곽재우가 대의와 명분을 논하자

천천히 노기를 다스리며

대사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당돌한 놈이로구나...


타고난 패기만은 정말

인중여포의 호연지기에 뒤쳐지지 않아.


남명선생이

제자의 연을 넘어

가문의 일원으로까지 받아들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구나."


곽재우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존경스러운 존재인

스승의 이름이

대사의 입에서 나오자

그때까지 옹골찼던 기세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대사가 질문을 시작했다.


"너에게 있어 협(俠)이란, 무엇이냐?"


"세상에 널리

의리의 도를 펼치는 것이오."


"그래?


그렇다면 너에게 있어

의리(義理)란 무엇이냐?"


"힘을 길러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빈곤한 자들에게 재물을 베풀며,


세상의 어두움을

밝게 정화하는 것이오."


곽재우가 용기를 내어

또박또박 자신의 의리를 말했다.


곽재우의 대답을 들은 대사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의리란,

옳을 의(義) 이치 리(理)

두 글자를 합친 단어다.


네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옳은 이치라는 뜻이다."


"노승의 말장난 같은

선문답에 놀아날 정도로

내가 그리 어리숙해 보이시오?"


"....그럼 딱 하나만 물어보자.


흑호의 무리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네 명령으로

이들의 동료들과 싸우다 죽어간

보우의 사람들은


네가 네 입으로 금방 말한,

협의 정신으로 보호해줘야 할

약자들이었다.


그건 어찌 생각하느냐?"


대사의 질문에

곽재우의 말문이 막혔다.


쉽게 대답할 성질의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논리의 모순이

바로 드러날 소지가 있었기에

곽재우는 잠시 생각하다

신중하게 답을 골랐다.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소.


그리고 그들은

내 명령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요.


자신의 믿음에 따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 거요."


"믿음? 그건 믿음이 아니다.


애당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속여,


그들을 갈취하고 이용한

혹세무민의 사술에 지나지 않는다.


딱 하나만 묻자.


보우가 설파하고 다닌 미륵의 세상을

넌 진심으로 믿고 있느냐?


아마 아닐 것이다. 내 말이 틀렸느냐?"


"......"




곽재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사의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륵의 세상 따위는

애당초 믿지 않았다.




곽재우의 침묵이 길어지자

대사가 입을 열었다.


"네가 왜 그것을 믿지 않는지

내가 맞춰보랴?


너도 운 좋게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난,

축복받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너에겐 태어날 때부터

그들과 같은 결핍과 가난이 없다.


그래서 절실할 필요도 없지.


미륵을 믿으면,


내세엔 그런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 펼쳐질 거란

환상이라도 가져야,


현재의 굶주림과 추위를

견뎌낼 수 있는 절실함이,


너에겐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넌 보우의 설법을 믿지 않은 거다.


넌 그저

영악하고 가증스러운

위선자에 지나지 않아."


"아, 아니오! 난! 난..."


대사의 뼈아픈 지적에

제대로 급소를 찔렸는지,


곽재우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지며

급박한 마음에 말까지 더듬었다.


"네가 지금 네 앞에서

억지로 부인한다고 애써봐야,


이미 죽어버린

그들의 혼과 생명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네놈은 아마,


그들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사지로 내몰았겠지.


애당초

생명의 무거움을 모르는 놈이니

그런 잔인한 일을

그리 쉽게 벌이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희생시키다니...


너 같은 놈들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금강역사들을 보내서라도

반드시 척결해야할

세상을 좀먹는 악마다."


"......."


대사의 꾸짖음에 고개를 푹 숙인

곽재우의 침묵이 길어졌다.


숙여진 그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대사가 다시 한 번 뼈아픈 말을 던졌다.


"내가 왜 피까지 보며

임두령과 갈라서게 됐는지,


왜 서림이 임두령과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


왜 보우가 그들과 뒤에서 손을 잡고

역모를 꾸미려 했는지...


네놈은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지 아느냐?


네놈도

그들에게는 척결해야할 대상인,

양반의 핏줄이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없이 듣기만하고 있었다.




대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왕조나

가장 밑바닥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는 똑같았다.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피 흘리고...


네놈이 아까 나에게 말했지?


불가에 몸을 담은 승려가

어째서 검계들과 어울리며

때론 살생까지도 용인하느냐고."


"...그렇소.

그것만큼은 난 아직 의문이오.


결국은 대사님도

나 같은 위선자 아니오."


곽재우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대사가 그런 그를 향해

마지막 설법을 행했다.


"금강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불성(佛性)이 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도

아직 발현되지 않은 불성이 있으니

세상 모든 것을 귀히 여기라는

부처님 말씀이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필요가 있고 쓰임이 있다는

아주 크고 중요한 말씀이시지.


미륵의 세상 같은

혹세무민이 아니라..."


"......"


"난 그래서,


의와 협과 불(佛)이

다 하나라고 생각한다.


힘없는 자들을 약탈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똑같은 나쁜 놈들이라도,


나라를 다스린답시고

법으로 대대손손 고혈을 짜내는

양반들보다,


그래도 제 식구만큼은 살갑게 챙기는

왈짜들이 더 낫다.


그래서 총사를 맡았다.


하다못해 나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그들의 마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율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고,


설령 한줌의 의와 협이라도

불심으로 바꾸게 되길 바라면서,


그렇게 바닥부터 변해가면


세상도

조금씩은 나아질 거라 믿으면서...."


대사의 설법에

곽재우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마음의 동요가

그 자리의 모두에게도 읽힐 정도였다.




대사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자, 곽재우, 이제 너에게 다시 묻자.


넌 도대체 왜,

흑호를 부추겨

이런 분란을 만들었느냐?


너에게도

나와 같은 신념과 대의가 있느냐?


아니면,

단순히 너의 그 얄팍한 허세와

호승심을 채우기 위해


그 불쌍한 이들을 도구삼아

네 여흥거리로 만들어

죽인 것은 아니냐?"


대사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곽재우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번 그의 침묵은 매우 길었다.


그의 얼굴에

확연히 붉은 빛이 드러났다.


부끄러움 또는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그 모습을 본 대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너에게 던진 질문에 대해

솔직하고 무거운 답을

네 스스로 찾아낼 때까지,


넌 여기에서 나갈 수 없다.


그것이 너에게 내리는

우리들의 첫 번째 형벌이다."


“......”




대사는 그 말과 함께

곽재우를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을

모두 이끌고 동굴을 떠났다.


사슬에 묶인 채로

다시 암흑 속에 혼자 남겨진

곽재우의 두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며

그의 등이 살짝 떨렸다.


그의 눈물은 어째서 흘러나왔을까.


적들의 소굴에 잡혀와 묶여있는

자신의 막막한 처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대사의 말 때문에 무언가를 깨달은

자신의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렇게

그의 입에서 나온 가녀린 흐느낌이

동굴 안에 서서히 퍼져나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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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제 4 부 개화(開花) (57) 22.02.09 83 1 5쪽
162 제 4 부 개화(開花) (56) 22.02.07 88 1 8쪽
161 제 4 부 개화(開花) (55) 22.02.04 87 1 10쪽
160 제 4 부 개화(開花) (54) 22.02.02 89 1 6쪽
159 제 4 부 개화(開花) (53) 22.02.02 89 1 7쪽
158 제 4 부 개화(開花) (52) 22.01.28 89 1 12쪽
157 제 4 부 개화(開花) (51) 22.01.26 93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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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제 4 부 개화(開花) (49) 22.01.21 97 1 7쪽
154 제 4 부 개화(開花) (48) 22.01.19 93 1 7쪽
153 제 4 부 개화(開花) (47) 22.01.17 100 1 8쪽
152 제 4 부 개화(開花) (46) 22.01.14 85 1 7쪽
151 제 4 부 개화(開花) (45) 22.01.12 91 0 7쪽
150 제 4 부 개화(開花) (44) 22.01.10 90 1 10쪽
149 제 4 부 개화(開花) (43) 22.01.07 95 1 10쪽
» 제 4 부 개화(開花) (42) 22.01.05 95 1 10쪽
147 제 4 부 개화(開花) (41) 22.01.03 84 1 7쪽
146 제 4 부 개화(開花) (40) 21.12.31 96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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