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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662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2.01.07 03:52
조회
95
추천
1
글자
10쪽

제 4 부 개화(開花) (43)

DUMMY

-3-


광흥창 주변의 싸전 골목 안쪽에

꽤나 큰 규모의 밀주제조창이 있었다.


말이 좋아 비밀리에 운영되는 곳이지,


사실 그곳과 거래하는 기루나 색줏집,

인근의 주막을 비롯하여

밀주(密酒)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매달 일정한 재물을

후전(後錢)으로 받아가는

말단 관리들까지 친다면,


그 동네에 사는 모두가

이곳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나라에서

흉년을 대비해 곡식을 아끼라며

술을 만들지 말라고 금한다고 하여,

어디 사람들이 술을 끊겠는가.


관리들의 녹봉부터

비상시에 쓰일 비축미까지

언제나 쌀이 가득 쌓여 있는

광흥창 주변에

술도가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비상식적이리라.


나라에서 허가한

양조업자들의 생산량으로는

도성술꾼들의 입가심도 안 되었다.


독점에 대한 의무로

세금도 꼬박꼬박 내건만,


궁에서 제례에 써야 하니

언제까지 청주(淸酒)를 납기 하라느니


나라에 축하할 일이 있어

큰 잔치를 열어야하니

소주를 이만큼 만들어 오라느니 하는,


높은 양반들의 억지 요구도

울며 겨자 먹기로 꾹 참으며

종종 들어주어야 했다.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업자들의 사정이 그러하니

당연히

밀주업자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단속을 피해

주야장천 열심히 술을 만들었고

열심히 팔았다.


밀주업자들은 세금을 피하는 대신

아전과 별감들에게 인정을 바쳤으며,


양반들이 주로 찾는

고급술을 만드는 대신

민초들이 쉽게 마실 수 있는

저렴한 술을 만들어

박리다매로 이문을 남겼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식으로 허가받은 양조업자들과

이들 밀주업자들은

서로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공생관계로


실상은

모두 한통속이었다는 점이리라.




이곳의 주인인

밀주제조업자인 박달서는,


맛있는 술을 빚는

탁월한 솜씨도 솜씨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아주 잘 다뤘다.


그는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항상 웃는 낯으로 사람을 대하는

좋은 탈을 가진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현명한 처세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제조창에서 일을 하는

숙련된 기술자부터

심부름을 하는 말단 일꾼들까지,


모두에게

하나하나 살 곳을 마련해 주었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히 챙겨 주었으며,


품삯도 다른 곳보다 두 배 이상 주었다.


그의 평소 신념은 이러했다.


나라에서 금한 일을 하면

이문은 아주 크나 위험도 그만큼 크다.


그러나 세상사의 핵심은,

더하기나 곱하기보다

빼기와 나누기를 잘해야

주변과 척을 지지 않고 안전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이권으로 벌어들이는 재물을

주변과 골고루 잘 나눴던 것이다.


이것이

광흥창 주변에서

가장 큰 밀주제조업자인

박달서의 양조장을


그 동네의 모두가 알고 있으나,

비밀이 유지되는 이유이기도 했고


그의 술이

맛과 값을 떠나

계속해서 거래처를 늘려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아침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과 딸의 재롱을 보며


음식 솜씨뿐만 아니라 금슬까지 좋은

아내가 차려주는 맛있는 밥상을

거하게 먹고 나온 행복한 날이었다.


싸전으로 위장한 점포의 뒷문을 지나

양조장으로 들어서니

술을 빚는 냄새가 그윽한 것이

이번 통은

꽤나 발효가 잘 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양조장의 관리를 맡고 있는

오랜 충복 이영감이

박달서에게 다가와

세 명의 청년들을 소개시켰다.


“열흘 전에 지시하신

새로 일할 일꾼들 셋을

어젯밤에야 겨우 맞췄습니다요.”


이영감의 말을 들은 박달서는

얼굴에 푸근한 미소를 띠우며

세 명의 청년들을 쭉 훑어보았다.


체격도 건장하고

무엇보다 인상이 무척 선하여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박달서가

이영감의 인선에 만족한다는 뜻으로

청년들에게 말했다.


“거처랑 품삯은

이영감에게 이미 얘기 들었을 것이고,


내가 얘기해 놓을 테니

이따가 요 앞에 김가네 포목점에 가서

옷이나 한 벌씩 맞춰 입게나.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이.”


청년들은

박달서의 호의에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전했고,


박달서는

여전히 선한 웃음을 지으며

양조장 곳곳을 돌아다녔다.


구석구석 빠짐없이 잘 돌아가는지

점검을 끝내고,


이십 명도 넘는 일꾼들과

기분 좋은 인사를 나눈 그는,


새로운 거래처를 소개시켜주기로 한

연풍관의 총관 이규용을 만나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추설의 조원들이

원각사 주변에서

박자흥 패거리를 괴멸시킨 이후로,


연풍관은

자연스럽게

추설의 영업장으로 편입되었다.


지금은

추설 산하의 홍방 접장 중 하나인

이규용이 총관을 맡아


기생들의 수급부터 부엌살림까지

모두 관리하고 있었다.


이규용은


밀주업자 치고는

매우 성실하고 가정적이며

무엇보다 주색잡기를 하지 않는

박달서를


무척이나 맘에 들어 하여,


자신의 선이 닿는 기루나 색줏집,

주막 같은 곳에 그를 연결시켜주고

뒤에서 점포 주인들에게

은근한 압력을 행사했다.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새로운 거래가 성사되면,


박달서는 자신의 특기인 ‘나누기’를

상대의 기대보다 더 후하게 실행했고,


이규용은 그런 그에게

점점 더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거리로 나선 박달서가

어물전을 하는 장씨와

시시한 농담을 하며 일각쯤 지났을까.


이규용이

수하 하나를 대동하고

싸전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규용의 모습을 확인한 박달서가

장씨 곁을 떠나

얼른 뛰어가 그를 맞았다.


기분 좋은 푸근한 웃음으로

허리를 살짝 숙인 박달서가

이규용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반갑게 인사를 전했다.


“이접장님, 열흘 만인가요?

그간 무탈하신 것 같아 기쁩니다.”


이규용도 웃으며 답례했다.


“다 박형 덕분이지요.

별일 없으셨지요?”


“아이고, 저야 무슨 일 있겠습니까.

그저 매일 매일이 행복합니다.”


“하하, 그렇죠.


이 동네 최고의 인덕을 가진 분이시니.”


“어이구, 부끄럽습니다.


자자, 길에서 이러지 마시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지요.”




박달서의 뒤를 따라

이규용과 그의 수하가

양조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영감이 이규용을 보고

얼른 뛰어와 인사를 하고

간단히 먹을 것과 차를 내왔다.


이규용이

마치 자신의 양조장인양

주변을 쭉 훑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시선이 멈췄다.


잠시 무언가를 주시하던 이규용이

박달서에게 물었다.


“못 보던 얼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박달서가 크게 웃으며 답했다.


“이접장님 눈썰미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매일 오시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달라진 것을 딱 집으시는지...


오늘부터 새로 일하게 된

일꾼들입니다.”


“아, 그랬군요.”


“어쨌든 인사는 받으셔야죠.


이제 제 식구들이니

얼굴도 익히실 겸...


이영감!

새로 온 친구들 좀 데려와서

접장님께 인사시키게.”


박달서의 명을 받은 이영감이

쌀가마니를 열심히 나르고 있던

세 명의 청년들을 데려와

이규용의 앞에 세웠다.


박달서가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 양조장을 먹여 살리시는

아주 중요한 분이시니,

정중히 인사 올려라.”


박달서의 명을 받은 세 명의 청년들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이규용에게 인사를 했다.


이규용이 조용히 말했다.


“홍방의 접장 이규용이라 하네.


자네들은

고향이 어디고 이름은 뭔가?”


이규용의 질문에

세 명의 청년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저희는 모두,

제 친척 어르신의 소개로

황해도에서 일을 찾아 왔습니다.


셋 다 어릴 적부터 한 고을에서 자란

동갑내기 동무들이고요.


제 이름은 오기명입니다.”


그러자 뒤의 두 청년도

각자의 이름을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구철이라고 합니다.”


“정은호입니다.”


청년들의 공손한 인사를 받은

이규용이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래...황해도에서 왔군...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네.


앞으로 혹시 힘든 일이 생기거나 하면

이영감한테 상의하게.


박형 식구들 일이면

내 일이나 다름없으니.”


“감사합니다. 접장님.”


이규용의 말에

세 명의 청년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박달서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이규용이

자신의 체면을

아랫사람들에게 한껏 세워준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양조장 옆 골목에 있는

일꾼들의 거처에서

세 명의 청년들이 은밀히 빠져나왔다.


그들은 오기명, 이구철, 정은호였다.


셋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어

사거리 모퉁이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운이 좋았습니다.

오늘 바로 만났습니다.”


오기명이 검은 옷의 사내에게 말했다.


“홍방의 이규용이라고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더군요.


박달서가 소개한 것이니

틀림없습니다.”


옆에 서있던 이구철도 말을 보탰다.


그러자

검은 옷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은호를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바로 움직이면 의심받을 수 있으니

실행은 사흘 후,


칼은 안 된다. 독을 써라.”


정은호가 진중하게 물었다.


“누구까지 처리해야 할까요?”


검은 옷의 사내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다 죽여라.


다만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하니

독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준비는 우리 쪽에서 해줄 테니

너희들은 실행만 해라.


원래 너희의 특기니,

걱정 안 해도 되겠지?”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조장님의 특별지시다.


흔적을 남기지 말고

감쪽같이 처리해서

저놈들이 이상함을 느끼게 만들어라.


실수해선 안 된다.”


“넷!”


세 청년이 다시 짧게 답하자,

검은 옷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홀연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틀 후, 자시(子時), 이곳에서 보자.”


사내가 사라진 후,

세 청년은 다시 조용히 거처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잠자는 일꾼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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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제 4 부 개화(開花) (52) 22.01.28 89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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