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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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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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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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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3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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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벨루디스 왕성 내의,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사용하는 옥좌의 방에서는 이른 아침이건만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벨루디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귀족들로, 현재 옥좌의 방에선 그 귀족들 간에 열띤 대화가 오가는 중이었다.



“어디에서 굴러온 지도 모르는 자를 최고 국빈으로 맞이한다니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어떻긴 뭐가 어떻다는 거요.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오.”

“그렇소. 설마 폐하의 뜻을 의심한다는 말인가?”

“누가 의심한다 했나?! 말조심하게!”


이들이 아침부터 이러는 것은 어제 긴급하게 공문이 내려온 까닭이었다.


공문의 내용은 단 하나.


베르다드 고등부의 마법반으로 편입한 학생, 이스피리아와 그녀의 일행을 최고 국빈으로 대한다―― 라는, 짧디짧은 글귀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는 놀랍기만 했다.


타국의 주요인물이 벨루디스의 방문하면 국빈으로 대우하는 건 당연했지만 그렇지 않은 자를 국빈으로, 그것도 신원미상의 일행을 통째로 국빈 대우한다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하니 일부 권력을 가진 자는 이스피리아라는 국빈의 정보를 얻기 위해 손을 쓰려했지만, 그것마저도 아크티알이 금지하여 대놓고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몰래 정보를 얻으려 해도 반나절만으로 이루어질 리도 없어 현재로선 그들에 대한 정보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게 다들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채 아크티알에게 면회를 요청했고, 벨루디스의 중진부터 그에 따르는 귀족들까지 전원 모여, 진실을 듣기 위한 소란은 점차 파벌싸움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아크티알이 작게 손을 올렸다. 그러자 떠들고 있던 모든 자가 즉시 말을 멈췄다.



“경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바를 내 잘 알고 있소.”


아크티알의 말에 벨루디스의 세력 중 왕가 다음으로 거대한 파벌의 장인 알렌나시안 후작이 눈을 빛냈다.



“하오면? 어찌 이러한 공문을 내리신 겁니까, 폐하.”

“그들이 벨루디스의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오, 알렌나시안 후작.”


알렌나시안은 더욱 자세한 내용을 듣기 위해 물으려다, 위엄이 가득한 아크티알의 눈빛에 말을 삼켰다.


반론, 이의는 모두 듣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알렌나시안 후작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아크티알이 이리도 강압적으로 나가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크티알은 나라의 중요 안건을 강압적으로 추진할 때 말고는 이러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더욱.


한낱 개인에게 나라의 안건과 비등한 뭔가가 있다는 건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런 정보 없이 아크티알의 심기는 거스를 순 없었다.



“알겠사옵니다, 폐하.”


알렌나시안 후작이 한 발 빼자,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도 조금 전 소리 지르던 것이 무색하게 다들 얌전했다.


그들을 보며 아크티알은 한 가지 경고를 담아 말했다.



“그들에게 무례를 범할 시······ 어떻게 될지는 모두의 상상에 맡기겠다. 물론, 짐의 이름으로 국빈지정한 자들에게 그러한 일을 저지를 자는 없으리라 믿소.”


현 왕인 아크티알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는 당연히 반역죄에 해당한다. 그러니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의미였다.


이만한 대우를 한다는 것에 모두 놀라면서도 머리를 깊게 숙여 존명을 따르겠다 밝혔다.






기왕 모인 김에 몇 가지 안건을 더 처리한 아크티알은 옥좌에 앉아 신하들이 빠져나간 실내를 둘러봤다.



“하······ 공국이나, 제국만 뭐라 할 게 아니군.”


아크티알의 푸념을 벨페르 공작이 거들었다.



“우리나라도 상당히 평화에 찌들었지요.”

“무리도 아니지. 700여 년 넘게 평화롭다면 누구라도 긴장이 풀리기 마련일 거야.”

“그래도 성국보단 다들 덜 할 겁니다.”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건가. 세인트리안보다 심각했다면 이미 전쟁이 벌어지고도 남았을 텐데? 오히려 그 기생충보다 지독한 놈들과 비교당했다는 것을 알면 공국이나 제국이 바로 전쟁을 선포하지나 않을까 싶군.”

“그 정돈 아니지 않을까요?”

“당연한 걸 뭘 묻고 그러나. 세인트리안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 속으로만 싫어하겠지. 농담은 그만하고, 알렌나시안 후작파벌의 움직임이 예상되는가?”


왕권파나 마찬가지인 벨페르 공작에게 후작파벌의 움직임을 물어본 것은 그가 유능한 것도 있지만, 후작파벌이 지속해서 벨페르 공작을 끌어들이려 하기 때문이다.


파라디우스 가문은 인마대전에서 초대 왕과 함께 벨루디스를 세운 역사 깊은 가문이니 자신들 파벌의 입지를 견고히 하기 위함과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접촉은 당연하다.


물론 벨페르는 언제나 시원찮은 대답만 들려줄 뿐이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도 권유하기에 그도 상당히 귀찮아했다.


그렇다고 타국에서도 압박이 들어오는 현 벨루디스 상황에선 막대하기도 뭐한―― 솔직히 처치 곤란한 존재들이 알렌나시안의 파벌이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이처럼 대담하게 행동하는 거겠지.


나올 것만 같은 한숨을 참고 벨페르는 예상되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 말했다.



“왕명이니 대놓고 정보를 캐내거나 접촉을 시도하려 하진 않을 겁니다. 그저 본인들의 자제를 접근시켜보는 정도겠지요.”

“흠··· 그들의 파벌 중 학원에 재학 중인 사람은?”

“첫 번째는······ 레오노반 전하가 계십니다.”

“멍청한 놈이. 후우······ 레오노반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일 거 같나?”


벨페르는 아크티알을 한번 살펴보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고했다.



“아직 단정은 못 하겠지만, 전하의 주도로 공국과 제국의 자제들을 이끌고 입학식장에 난입했다 합니다.”

“입학식에? 마력레벨을 측정하러······? 그렇다기엔 레오노반은 이미 측정해서 알고―― 아······”


아크티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만했다.


‘분명 레오노반은 본인의 마력레벨을 과시하러 갔겠지.’


지금은 별로 없다지만 옛날에는 마력레벨을 측정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 리카드가 발견한 세베브리나의 눈 같은 마도구도 상당수 존재하여 평범한 성인은 15 전후라는 것도 대중에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시대에는 그러한 마도구―― 아티팩트나, 사람도 모두 사라져 마력레벨을 측정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물론 아예 사라지진 않았다. 사용의 한계는 있으나, 왕가에는 그 시대의 아티팩트가 몇 개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그 존재를 레오노반에겐 철저히 숨겼다. 거기에 더해 리카드가 마력레벨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것 또한 숨겼다.


아예 마력레벨을 알 기회를 없애려 한 것이다.


――알았다면 레오노반은 반드시 측정하려 들 테니.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나라 전체에서 축복받으며 태어난 레오노반은 제1 왕자로서 주위에서 떠받드는 걸 당연시하는 아이로 자랐다.


그리고 재능이 있었다. 발동어가 없는, 이전 마법체계도 익힐 수 있었던 레오노반은 많은 부분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었다. 분명 마력레벨이 높을 거라 짐작도 가능했다.


그렇기에 안 된다.


이젠 오만해지기까지 한 레오노반이 본인의 마력레벨이 높다는 걸 알게 되면 더욱 하늘 높은 줄 모를 거다.


그랬었는데······ 리카드가 아티팩트를 발견해왔다.


그걸 대대적으로 알린 것이 실수였다. 설마 마력레벨을 측정하는 아티팩트일 줄 알았겠나.


지금도 경솔했다 생각하지만 이미 마차는 떠난 뒤였다.


소식을 들은 레오노반은 곧바로 자신의 마력레벨을 측정했고, 71이라는 상당한 마력레벨이란 것이 밝혀졌다. 베르다드 교직원들의 평균이 90 안팎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훌륭했다. ――리카드를 뺀 평균――


왕자가―― 후계자가 뛰어난 것에 기뻐해야 할 거다. 그러나 더욱 오만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 그럴 수도 없었다.


재차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참고 아크티알은 물었다.



“암만 과시하고 싶었다지만 타국의 자제들까지 데리고 가다니.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일을 했나?”

“그게······ 아무 일도 안 벌어졌습니다.”

“뭐라?”


믿기 힘들다는 아크티알에게 벨페르는 강조하며 다시 말했다.



“아무 일도 안 벌어졌습니다. 인재를 찾기 위해왔다는 말도 한 듯한데, 딱히 큰일은 저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일은 달이 기울기라도 하는 건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용사가 이스피리아 양에게 실례를 저질렀다 하더군요.”

“뭣?! 그 어리광쟁이가 참여했다고?”

“예. 입학식장에는 늦었으니 가지 말라고도 전했는데 말이죠.”

“후······ 무슨 실례를 저질렀는가? 설마, 그가 보는 앞에서 치근거렸다거나?”

“아닙니다.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지만, ‘뭐야, 이 로라 꼬마는? 착각하고 고등부 쪽에 서 있던 거야? 크하핫!’ ――이라며 비웃은 듯합니다.”


웃는 것까지 따라 하는 벨페르.


그 모습을 보던 아크티알은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로리라는 말은 모르겠지만······ 좋은 뜻은 아닐 테지. 그의 반응은······?”

“아무 반응도 없다고 합니다. 그저 이스피리아 양의 뒤에서 사용인 역할에 충실했다 하더군요.”

“하아······ 예의도 배우게 할 겸 베르다드로 보낸 것이 잘못이었나.”

“그래도 아예 성과가 없진 않은 듯합니다.”


아크티알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쳐다봤다.



“리카드가 바로 목이 날아갈 수 있는 행동이었다 훈계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상당히 겁을 먹었다는 것으로 보아, 크게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진 않을 겁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건 정말 다행이군······. 레오노반은? 문제는 저지르지 않았다지만, 과시하러는 갔을 텐데?”

“그렇습니다만. 소베르비아 공주가 114나 되어, 도리어 체면만 구겼다고 합니다.”

“굉장하군. 과연 공국의 빛이라는 건가.”

“하지만 더욱 굉장한 것은 다음입니다.”

“다음? 다음은······ 이스피리아인가?”

“맞습니다. 그녀의 마력레벨은 328이라 하더군요.”

“사, 삼백?! 정말인가?”

“리카드와 세리오 리벨리타스를 믿으신다면. 그런데다가 레오노반 전하를 비롯해 함께한 각국의 자제들도 같이 봤다더군요.”

“그······러면, 그는 정말 그 존재라는 건가.”

“확정은 아닙니다. 다만 이로써 최고 국빈으로 지정한 정당성은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16살에 300이라니. 앞으로 더 성장하면――”

“――벨루디스말고도 다른 나라가 눈독을 들일만한 인재라는 거지요.”

“리카드의 대항책으로도 내세울 수 있고 말이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누구의 편도 되지 말고 원래 있던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싶다만······ 힘들겠지.”

“그에게 명령 따윈 감히 내릴 수 없으니. 더불어 현시점만으로도 다들 군침이 돌 테니 쉽게 놓을리가 없겠죠.”


벨페르의 말대로다.


각 나라 간의 평평했던 균형이 이스피리아와 함께 온 존재들로 인해 단번에 기울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벨루디스는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도 손해는 전혀 없지만 다른 나라들은 아니다. 한 번에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인 거다.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베르다드 학원에 불어닥칠 무언가를 느끼며 아크티알은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부디―― 그들의 헛짓으로 벨루디스에까지 피해가 닿지 않기를.


그 외 벨페르에게 라프리트가 이스피리아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듣고 아크티알은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본인도 모르게 아크티알의 근심을 제조하고 있던 리아는 기합을 단단히 넣고, 오늘도 아침부터 라프리트를 만나 함께 1학년 마법반의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다만 라프리트는 평소와는 다르게 제법 기죽은 모습이었다.



“리아 양, 어제는 정말 죄송했어요. 설마 달걀이 들어간 음식을 못 드실 줄은······”

“아니에요! 제가 말해주지 않은 게 잘못이죠! 어제도 계속 사과만 하셨는데, 전 진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네? 라프리트 씨.”

“······.”

“그, 그리고! 라프리트 씨 덕분에 우유는 괜찮다는 걸 알게 돼서 오히려 제가 고마워요!”

“으으······ 그럼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게 못 드시는 걸 알려주세요!”

“――아가씨, 잠시 말씀드려도?”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안네가 말을 걸었다.



“안네?”

“껴들어 죄송합니다만, 어제 찬크에르 씨에게 이스피리아 님이 못 드시는 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게 뭔가요?!”

“아, 아가씨?”


상대가 불편할 수 있으니 더 캐묻지 말고, 나중에 알려주겠다는 뜻이었다만······ 평상시라면 이를 알아들었을 라프리트는 리아가 연관되어 있어 다급하기만 했다.


그런 둘을 보던 리아는 자신이 대신 말해줬다.



“그게······ 고기가 들어간 음식은 잘 못 먹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프리트의 고개가 정말 빠른 속도로 돌아왔다. 정말 너무나 빨라, 목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이 든 리아가 슬쩍 [치유]를 걸어줬을 정도였다.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 채 라프리트는 진지한 눈빛이 되었다.



“아······ 그렇군요.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찬······크에르 씨도. 대신 다과를 준비해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초대했건만······.”


찬크에르는 다른 말 없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던 여학생들 몇 명이 찬크에르를 보고 얼굴을 붉혔지만, 라프리트는 바로 앞에서 목격하고도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이리스는 못 드시는 게 있나요?”

“저는 다 잘 먹으니 괜찮아요, 라프리트 씨.”

“그런가요. 그럼, 리아 양! 만회할 기회를 주실 수 있나요? 이번에야말로 리아 양이 만족할 만한 다과를 준비할게요!”

“초대해주신다면 저야 좋죠. 그런데······ 별로 준비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처음으로 친구의 방에 놀러 가본걸요. 어제도 저는 정말 즐거웠어요.”

“치, 친구······ 읏.”


라프리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제 같은 추태는 사양이었다.



“아! 다음에는 라프리트 씨가 또 놀러 오실래요? 몇 번 왔었지만, 그건 저와 아이리스의 공부를 봐주신 거라 아무래도 같이 논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죠?”


바로 리아의 추가타가 들어왔다.


라프리트는 어질해졌지만, 그녀를 잘 알고 있던 안네가 재빠르게 다가가 등을 쿡 찔러 위험한 순간을 넘길 수 있었다.



“음음. 네, 초대 정말 고마워요. 반드시! 찾아갈게요. 귀찮은······ 흐흠. 예정돼있는 일만 끝내면 바로 찾아뵐게요.”

“네. 기다릴게요.”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라프리트와 리아는 사이좋게 함께 교실로 향했다.


다만, 둘이 함께 걷는 모습은 동급생이라 보기는 조금 힘들었다. 차라리 아이리스와 동급생이라면 모를까.


리아가 알면 좌절할 상황이지만, 다시 머릿속이 시뮬레이션으로 가득했기에 리아가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중등부인 아이리스와 도중에 헤어지고, 리아는 라프리트와 교실에 들어갔다.


교실은 계단처럼 단이 쌓아 올려진 강당 형식이었는데, 한꺼번에 400여 명이 넘는 마법반 신입생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넓이였다.


참고로 마법반은 3반으로 분활 되어 있었는데, 다른 곳의 교실도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든다.


리아는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과연 리카드 씨가 자랑할만했네.’


전생에 대학교는 다녀본 적은 없었으나, TV에서 보던 것과 분위기 자체는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넓이는 이곳이 한참 넓어 보였지만.



“라프리트 씨, 어디에 앉을까요? 아, 혹시 자리가 정해져 있나요?”

“아뇨. 자리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고 들었어요. 그, 그런데······ 제가 리아 양의 옆자리인 건가요?”


교실의 책상은 도합 200여 개가 넘는 많은 수가 준비되어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2인용으로, 먼저 와있는 사람 중에는 저마다 그룹을 지어 구석에 뭉쳐있는 사람도 있었다.



“앗! 다른 분과 선약이 있으신가요······”


리아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럴 리가요! 제 옆자리는 언제나 리아 양을 위해 비워둘 겁니다.”

“정말요?!”


뭔가 프러포즈 같은 엄청난 대사 같긴 했지만, 기분이 좋았던 리아는 그리 신경 쓰지 않고 라프리트와 사이좋게 앉을 자리를 물색하였다.



“저기는 어때요?”


리아가 가리키는 곳은 중간 줄의 창가.


줄곧 호의적이었던 라프리트에게서 반대의 의견이 나올 리는 없었고, 즉시 좋다고 하는 그녀와 함께 리아는 그 자리에 앉았다. 사용인인 안네와 에르는 조용히 옆에서 대기했다.


그런데······


‘어. 왠지 다른 분들이 쳐다보는 거 같지 않나?’


분명 먼저 와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수군거리면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뭔가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느낌이었다.


‘라프리트 씨가 이뻐서 그런가 보네.’


라임 계통의 연한 연둣빛이 예쁜 긴 생머리와 눈, 거기에 리아가 봐도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라프리트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눈길을 사로잡을 것 같았다. 일단 전생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힐끗힐끗 쳐다봤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여자가 되어보니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구에서도 마찬가지겠지······.’


먼 과거를―― 저들과 비슷한 행위를 한 자신을 떠올린 리아는 조금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리, 리아 양?”


안절부절못하는 라프리트의 모습에 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송해요. 라프리트 씨가 예뻐서 저도 모르게 보고 있었어요.”

“제가요?! 아뇨. 리아 양이야 말로 윤기 넘치는 머릿결이며, 탱글탱글한 피부. 무엇 하나 빠지지 않아요.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관리요······? 딱히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네?! ······잘 들으세요, 리아 양. 아무리 지금은 젊고 탱탱할지라도 꽃이 지는 건 한순간이에요. 지금부터라도 잘 관리해야 해요.”


뭔가 무게감이 절절히 느껴지는 라프리트다. 어딘가에서 견본이라도 본 듯하다.


그렇지만 이쪽을 신경 써주는 그녀의 마음은 고마우나, 이번에 한해서는 별 소용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관리를 안 해도 크게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모른다. 에르에게 물어보면 정확할 테지만, 그는 이 주제만 되면 말을 흐리며 급격히 어두워졌기에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되도록 나 스스로 알아가기를 바라는 에르라도 부탁하면 어느 정도 알려줬었는데, 아예 피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 주제는 분명 내 예상대로일 거다.


‘아마······ 내 성장은 여기까지겠지.’



“리아 양?”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런데 라프리트 씨가 관리하는 방법은 뭐예요? 알려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걱정스레 바라보던 라프리트는 금세 활기를 되찾고 리아에게 이것저것 피부에 좋다는 것과 관리하는 여러 노하우를 알려줬다.


단순 취미 영역을 벗어난 듯한 그녀의 설명은 무척이나 상세하여, 다른 귀족들이 들었다면 아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별 관심이 없었던 리아는 그저 그렇구나, 하는 정도로 들었지만.


그러나 친구와 별것 아닌 주제로 대화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던 리아에겐 꽤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이 순간을 깨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 아침부터 사이가 좋으시네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라프리트와는 다른, 화사한 느낌의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제법 낯이 익은 그 여성의 등장에 라프리트는 즉각 일어나 사뿐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녀를 따라 리아도 뒤늦게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 공주님.”

“안녕하세요.”


여성―― 소베르비아는 마주 웃으며 인사를 받아줬다.



“예. 반가워요, 여러분. 그런데······ 두 분이 같이 앉으시는 건가요?”

“그게――”

“――네!”


떠보는 듯한 소베르비아의 눈빛에 라프리트는 흠칫했으나, 리아는 밝기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뿌듯하기만 하였다.


이 모습에 소베르비아는 조금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양 턱을 쓸었다.



“흐음. 그런가요? 상당히 친하신 듯한데, 두 분의 관계는 어찌 되시는지요?”

“친구예요.”

“친구라······ 좋은 분과 만나셨군요.”

“네. 저도 라프리트 씨가 첫 친구가 되어주셔서 정말 기뻐요.”


소베르비아는 가지고 온 화려한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그 일련의 동작에 리아는 감탄했다.



“무척 부러운 자리로군요. 그럼 저는 늦었지만, 이스피리아 양의 두 번째 친구로 입후보해도 되겠나요?”


뜬금없는 소베르비아의 제안에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 친구요···?”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실례는 아닌데······”


······선뜻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그렇다. 싫은 것이다.


딱히 소베르비아의 성품이 나빠 보이지도 않는데, 어째서인지 그녀와 친구가 되는 것이 꺼려졌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리아는 당혹스러웠다.


‘아니야······ 몇 번 느껴봤던 술렁거림과 비슷해.’


내키진 않았지만, 일국의 공주에게 창피를 주는 일은 더 내키지 않았다.


반대의 상황이 되어 자신이 친구가 되어달라 했는데 거절당한다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으로 하루는 방에 틀어박힐 거다.


마음을 정한 리아는 벨루디스 귀족의 예법에 따라 윗사람에게 보이는 자세로 답했다.



“저로 괜찮다면 부디.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 공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어 영광이에요.”

“저야말로 무척이나 기쁘답니다. 하지만······ 모처럼 친구가 되었는데, 딱딱한 체면치레는 괜찮아요. 루비아로 편히 불러주시겠나요? 이스피리아 양.”


흐름에 따라 자신도 애칭으로 불러 달라는 게 예의였고, 소베르비아도 일부러 이름을 끊어 강조하는 듯했다.



“네. 말씀에 따를게요, 루비아 씨.”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리아’라는 애칭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불러줬으면 했으니.


무려 공주님을 상대로 보인 이러한 행보―― 이쪽만 애칭으로 부르는 대담함에 주위의 학생들이 수군거린다.


그렇지만 철회는 없다.


리아는 미안하게 여기면서도 미소로 꿋꿋이 버텼다.



“······고마워요, 이스피리아 양. 여기 비어있는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네. 부디.”


당사자들은 어쩔지 몰라도 주위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소베르비아는 한 칸 떨어진 옆자리에 앉았다.


거기에 조금 시간이 지나니 제국에서 온 레스와 헤라드도 교실로 들어와 인사하더니, 둘은 소베르비아의 바로 옆 칸에 자리 잡았다.


화제의 중심인 인물이 한곳에 모여있으니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물론 대놓고 볼 순 없는지 힐끔 쳐다보는 수준에 그쳤지만, 리아는 그 시선들 때문에 조금 근질거렸다. 저질러 놓은 일로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기에 더더욱.


드르륵.


제법 뻘쭘했는데 드디어 시간이 되었나 보다. 교단 쪽에 있던 여닫이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남성으로 상당히 거친 일을 했는지 여기저기 흉터가 많았다. 분위기도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어 경시하기 어렵게 했다.


그러한 남자는 교단 앞에 서자마자 외쳤다. 확성기 마도구가 있었으나 사용하진 않았고, 본인의 육성만으로 넓은 교실 전체에 울려 퍼지게 했다. 참으로 목청이 좋다.



“만나서 반갑다. 올해 마법반을 담당하게 된 그리모르다. 아아, 미리 말해둔다만 전직 모험가 출신이라 귀족의 예법 따위는 전혀 모르니 바라지마라.”


평민과 자주 접했던 귀족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귀족들은 딱 봐도 평민인 그리모르의 당당하기만 한 태도에 당황했다.



“그리모르······? 이봐, 그리모르라면 ‘폭주하는 폴코’ 아냐?”

“어이! 아직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어 기분이 좋다만, 난 그 별명을 아주 싫어해. 다시는 입 밖으로 꺼내지 마. 혼나는 수가 있어?”


그리모르를 알아보고 소리를 낸 사람은 평민들과 접할 기회가 있었던 하위 귀족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위라도 엄연히 귀족. 그는 아무리 선생이라지만, 자신에게 저런 태도를 취한다는 게 용납할 수 없었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모르! 네놈이 아무리 전 길드 마스터였다지만 감히 귀족에게······”


따지던 귀족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애송이. 귀족이 뭐? 넌 이 학원의 설립된 이념도 모르고 온 거냐. 귀찮지만 말해주마. 신분, 직업 귀천에 상관없이 배우고자 하는 자를 가르친다. 그 유명한 벨루디스의 건국왕이 한 말인데······ 어쨌든 알겠지? 여기선 신분 따윈 무의미해. 네놈은 한낱 학생이고, 난 네놈들을 가르치는 선생, 그것뿐이야. 불만이 있다면 서둘러 짐 싸고 나가.”


신랄하기 짝이 없는 그리모르의 말에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다시 따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이들도 같은 귀족으로서 창피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본인들도 따질 엄두가 나질 않았던 거다.


오히려 잘도 대들었다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숨쉬기도 힘들 정도의 짙은 살기를 흩뿌리던 그리모르는 살짝 콧방귀를 끼고는 주위를 둘러보다 살기를 거뒀다.



“헷. 올해는 제법 쓸만한 놈들이 몇 있네. 마법반은 맨날 근성이 없어서 겨우 이 정도에도 다 쫄기만 했는데······ 리카드 형씨가 부탁하기에 맡았건만 이번엔 재밌겠군.”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 그리모르는 재차 자기소개를 했다.



“다시 한번, 이 반을 맡게 된 그리모르다. 전 모험가 길드의 마스터로 사무 일을 좀 했지.”


사무 일을 했다고? 삥 뜯은게 아니라?!


대충 막 자른 듯한 짧은 머리와 근육이 꿈틀할 것만 같은 험상궂은 인상의 그리모르를 보면 확실히 믿기 어려웠다. 이는 모두와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으나······ 그럴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표정엔 다 드러났는지 그리모르 혀를 찼다. 그와는 반대로, “거짓말······”이라며 중얼거리고 있던 리아는 뒤늦게 어느 단어에 흥분하여 눈을 빛냈다.



“오오! 모험가! 길드 마스터!!”


‘판타지의 로망이 또다시 등장했다!’



“뭐야, 아가씨. 모험가에 관심 있어?”

“아······”


‘입으로 말했구나······’


말을 거는 그리모르와 쳐다보는 시선들에 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뇨! 그게······ 모험가라는 직업을 처음 들어봐서 흥분했어요. 죄송해요, 방해해서.”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관심이 있다면 나중에 찾아와라. 학생의 진로를 같이 고민하는 것도 선생의 역할이니.”

“네. 관심이 생기면 찾아뵐게요.”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리아는 서둘러 말을 끝마치려 했다.


다행히 그리모르도 길게 이야기할 모양은 아닌지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우선 내가 이 반을 담당하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교양수업이 아니면 그다지 만날 일도 없을 거야. 난 일반반이 많이 수강하는 격투술 쪽 수업을 진행하니 더욱이나. 하지만 상담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와라. 맹세코 성심성의껏 응할 테니.”


교양??? 성심성의껏? 두들겨 패는 게 아니라?


여러 의문과 불안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다들 아무런 말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그렇게 말을 마친 그리모르는 “그럼 이상으로 끝. 각자 수업 열심히 들어라”란, 짤막하게 말을 남기고 교실을 나갔다.


············.


황당함에 다들 말을 잃었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을 뿐, 내심 긴장했던 이들은 매우 허망하지 않을까 싶다. 곳곳에선 이를 증명하듯 “이런 게 명성 자자한 베르다드의 첫 등교라니······”라며,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리아도 비슷했다. 상당히 당황하여 눈알을 돌릴 뿐이었다.


‘아니. 이게 대학이란 건가?! 그래. 아들 녀석도 대학은 자유분방한 곳이라고 했었어. 그렇다면 이것이 자연스러운 거겠네. 과연 대학이야. 쿨하구먼!’


문득 깨달음을 얻어 나름 이 상황을 즐기고 있으니 라프리트가 말을 걸어왔다.



“리아 양. 아직 시간은 있지만, 슬슬 둘러보면서 이동할까요?”

“아, 네! 좋아요.”


다음 수업은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하며 리아는 일어섰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소베르비아가 다가와 물었다.



“두 분은 다음에 어떤 수업을 듣나요?”

“저희는 마법 실기에요.”

“호······ 우연이어요. 저도 마침 마법 실기 수업을 수강했는데. 폐가 아니라면 함께 가도 될는지요?”

“저는 괜찮은데······”


리아는 살짝 라프리트의 눈치를 살폈다.



“저도 괜찮답니다, 공주님.”

“라프리트 양, 전 당신과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 공주님 말고 루비아, 힘드시다면 소베르비아로 불러주시길 바라요.”

“말씀, 삼가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딱딱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죠······ 뭐, 차차 친해지면서 해결해나가도록 할까요?”


고개를 숙여 답하는 라프리트와 부채로 입가를 가리는 소베르비아.


상당히 묘한 그룹이 형성된 리아는 이 둘과 함께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마법 실습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너무 조용한 게 아닌가 싶다.


결국 말없이 걷기만 하는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던 리아는 침묵을 깨고 소베르비아에게 먼저 말을 걸어봤다.



“저기, 루비아 씨는 뭔가 마법 훈련을 하셨나요? ――아. 공주님이시니 배우셨겠구나. 마력레벨도 높으셨고······”


급하게 말을 거느라 준비할 만한 화젯거리가 없어 자문자답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소베르비아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웃는 얼굴로 친절히 대답해줬다.



“예. 기본 소양으로 배워뒀긴 했어요. 그러나 베르다드만 한 교육은 아니겠죠. 마력레벨도 이스피리아 양에 비하면 별 볼 일 없고요.”

“벼, 별 볼 일 없다뇨! 충분히 대단하세요. 분명 열심히 노력하신 거겠죠.”

“후훗. 고마워요. 하지만 그러는 이스피리아 양이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노력을 하셨겠죠. 같은 나이임에도 그와 같은 경지인 것에 절로 겸손해질 정도여요.”

“저, 저요······? 노력하긴 했는데······”


분명 노력하긴 했다. 죽을 뻔한 것도 한두 번―― 아니. 세기도 번거로울 정도로 많긴 했었다.


그런데 조금 애매한 게······ 마법으로 인한 도핑과도 같은 상태를 과연 노력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그것도 자신의 능력으로 한 것이니 괜찮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평범히 노력하는 사람들과는 비교하는 건 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성장할 수 있으니 더욱 비교하긴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노력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무슨 소릴 들어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다.


치사하다 하더라도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인데 뭐 어떤가.


오히려 이거저거 따지다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어이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어물쩍거리고 있으니 소베르비아는 더 따져 들지 않고 다른 걸 물어봤다.



“좋은 선생님이라도 계셨나요? 아무리 굉장한 능력을 갖췄다 하더라도 뒷받침해줄 사람이 없다면 굉장히 힘드셨을 텐데.”

“선생님이요? 음······”


고향―― 나트알의 마을 사람과 가족들을 떠올린 리아의 입가엔 자연스러운 미소가 매달렸다.



“네. 지금의 제가 있는 건 여러 가족과도 같은 분들 덕분이에요.”

“호오······ 그분들 중에 혹, 사모하시는 분이라도 있으신지?”

“네엣?!”

“실례했어요.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을 하시기에 그만.”

“아. 그러셨구나. 사실 말씀대로 제가 조, 좋아하는 분이 있긴 해요······”


이 말에 소베르비아뿐만이 아니라, 경청만 하던 라프리트도 상당히 관심이 생겼는지 바짝 다가왔다.



“그분과는 어떻게 되셨는지? 제대로 말씀은 하셨나요?”

“말은 전했지만······ 이젠 괜찮아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시겠나요, 이스피리아 양? 여자는 남자를 쟁취하는 겁니다. 그렇게 어물쩍거리다간 다른 계집―― 여성이 채갈 거라고요.”


제법 기묘한 열기를 띤 소베르비아의 말에 리아와 라프리트, 둘 다 눈을 똥그랗게 떴다.



“흠흠. 미안해요, 갑자기. 노파심에 그만.”

“아뇨. 괜찮은데······ 노파심이요?”

“네. 이스피리아 양이 반하신 분이니 분명 멋진 분이실 거잖아요? 그런데 세상에 있는 여성들은 그런 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법이랍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 부분입니다.”

“그렇겠죠······? 그는 멋지고 상냥하니. 그런데 제가 괜찮다 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그럼 어떤?”

“그게······ 실은 저는 그와 맺어졌어요. 헤헤.”

“에······?”

“넷?!”


소베르비아가 어울리지 않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있던 라프리트마저 눈을 부릅뜨며 놀라고 있었다.


헤실헤실 웃는 자신을 포함. 각자 다른 표정을 짓는 이들은 상당히 우스웠으나, 다행히도 주변엔 안네나 에르들이 가림막처럼 버티고 있기에 다른 이들에겐 목격되진 않았다. 평판이 떨어진다든지 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머리 한구석에서 그런 생각을 했던 리아는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니 앞으론 내조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려고요.”

“그, 그런가요······ 벌써 내조를 신경 쓰시다니 마음가짐이 훌륭하네요.”

“아, 아뇨. 벌써가 아니에요. 이미 늦었어요. 전 아직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도움을 받기만 하는걸요.”

“응? 뭔가 이야기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라프리트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리, 리아 양?? ――아. 시, 실례했습니다, 소베르비아 님.”

“전 괜찮아요. 말씀하시어요.”

“그, 그럼······ 리아 양. 죄송하지만, 그분과 맺어졌다는 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그건······”


직접 에르와의 관계를 말해야 하는 상황에 리아는 부끄러움이 몰려와 슬그머니 몸을 비비 꼬았다. 뒤에서 에르가 흠칫하는 게 느껴져 바로 그만뒀지만.


‘그보다 어서 대답이나 하자. 내가 창피해서 못 밝히는 거라 에르가 착각하면 안 되니까. 좋아! 기합을 넣고 가자!’


잔뜩 기합을 넣은 리아는 당당히 밝혔다.



“저는······ 그분과 결혼했거든요.”

“크흡!”

“······네에?!”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사레를 참는 소베르비아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라프리트.


예상했던 반응과는 달라 리아는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어디의, 어느 부분이 이상했던 걸까?


의문이 가득했으나 리아는 일단 둘부터 진정시키기로 하였다.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생각보다도 길게 간다.



“괘, 괜찮으세요? 두 분?”

“크흠. 시, 실례. 전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아요, 리아 양.”

“······.”


둘 다 괜찮다면서 더 말이 없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잘 보니 소베르비아와 라프리트는 서로 바라보며 눈으로 무언가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윽고 만족할만한 답이 나왔는지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딱히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리아는 얌전히 그녀들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도중 심심했던 리아는 눈치를 보며 스리슬쩍 아까의 이야기를 마저 했다. 그리고 베르다드에 오기 며칠 전에 결혼했다는 말을 들은 그녀들은 또 한 번 거세게 기침을 토해냈다.


이후 진정한 소베르비아는 정치적, 혹은 압력에 의해 억지로 결혼하게 된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워하며 물었다.


당연히 에르와의 결혼에 그런 건 없다. 순수한 본인들의 의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대답을 들은 라프리트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기뻐해 줬다. 마치 본인의 일처럼.


제법 쑥스럽기도 하고, 할 말도 다 했던지라 리아는 이것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조용히―― 둘과 제법 친해졌다는 기분을 느끼며 마법 실습장에 도착했다.


이번 수업인 마법 실기의 담당 선생님은 다크서클을 비롯하여 인상이 처지는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그는 힘없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하였다.



“마법 실기는 배운 것들을 실제 연습하며 숙달해나가는 시간입니다.”


이 간략하기 그지없는 한마디를 끝으로 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첫날은 당연히 배운 것이 없으니 각자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선보이는 것으로 됐다.


공격 마법이 주특기인 사람은 준비되어있는 허수아비를――풀 플레이트 아머에 잔뜩 방어마법이 걸려있는―― 대상으로 시전. 그 외 강화, 방어 등 보조 계통의 마법이 주특기인 사람은 지원자를 대상으로 선보이거나, 자신을 표적으로 공격마법을 받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일종의 자기소개와도 같은 시간이 되었는데, 마법반으로 분류된 사람들인 만큼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차분히 자신의 마법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번 생에 처음으로 생긴 친구들―― 라프리트는 허수아비를 감싸는 불기둥을 보여 감탄 어린 찬사를 받았고, 소베르비아는 반대로 허수아비를 통째로 얼려 사람들의 뜨거운 열기를 잠재우는 듯했다.


화려한 그녀들의 마법은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당겼다.


그런데――


보고 있던 리아의 얼굴은 점차 빨개져만 갔다.


‘[불기둥], [얼어라]라니······ 다들 저 발동어 같은 걸 외치는 거야?! 창피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렇게 딴지를 거는 자신도 전생의 젊었던 시절에는 뭐······ 나름 저렇게 외치며 마법을 쓰는 것에 로망을 갖고 있긴 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성인들이 저러고 있는 모습은······ 실로 안쓰러웠다.


진심으로 눈을 돌리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당최 저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리 된 건가 싶기까지 하였다.


그나마 바지탄스들이 마법을 쓰는 걸 본 적이 있었기에 조금 익숙해져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지금 당장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진지한 사람들에게 제법 무례한 감상평을 늘어놨던 리아의 차례가 왔다.


리아는 떨리는 기분으로 그나마 평범해 보이는 공격 마법 쪽 자리에 섰다.


――후딱 끝내버리자.


그리 마음먹음과 동시에 리아는 손가락을 튕겼고, 고밀도로 응축된 바람이 머리 앞에서 발사되어 허수아비의 중앙을 꿰뚫었다.


‘도, 도저히 발동어는 못하겠어!’


조용해진 사람들을 뒤로하고, 리아는 창피함에 서둘러 라프리트의 옆으로 피신했다.



“괴, 굉장하네요. 역시.”


칭찬의 말에도 리아는 최대한 사람들의 눈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르까지 동원하여 몸을 감추기 급급했다.


이후로도 학생들이 마법을 선보이던 가운데, 어떠한 말이 들려왔다.


마력레벨이 300이나 되는 은발의 꼬마가 엄청난 마법을 사용한다고······.


꼬마란 말에 잠깐 발끈했던 리아였으나, 이번만큼은 창피함이 앞섰다. 불평하나 투덜거리지도 못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숨기에 바빴다.


그리고 빌었다.


제발 좀 빨리 끝나달라고.


그러한 간절함과 함께 리아의 학원에서의 첫 수업이 막을 내렸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흑. 치과 다녀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무시무시한 드릴 고문이 제법 후유증을 남기더군요.


다들 이 건강 관리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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