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새글

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5.01 00:47
연재수 :
261 회
조회수 :
30,088
추천수 :
315
글자수 :
3,647,771

작성
22.06.29 17:47
조회
80
추천
0
글자
33쪽

66

DUMMY

“하아······”


푹푹.


땅이 꺼질 듯한 하품과 함께 나뭇가지로 땅을 찌르는 사람이 있었다.


쪼그려 앉은 자세와 함께 상당히 궁상맞은 짓을 하는 여성이랄까, 여자아이는 웬일인지 언제나 함께 다니던 아름다운 사용인도 없이 혼자였다.



“크아아······”


귀여운 외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삶의 끝에 다다른 듯한 노인 같은 한숨을 또다시 내뱉었다.



“뭐였을까 정말.”


중얼거리며 여자아이는 여전히 땅을 찌르고 있었다.


그런 때에 푸드득 하는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는 여자아이에게 근처에 내려앉은 하얀 비둘기가 보였다. 날개깃이 땅에 쓸릴 정도로 유독 긴 것 빼고는 이름도 생김새도 지구에 있던 비둘기와 닮아있었다.


밝은 빛을 쐬어 우아하게도 보이는 비둘기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여자아이에게 다가왔다.


쪼그려 앉은 여자아이와 눈높이가 비슷한 비둘기는 잠시 그대로 보더니 ‘우엉우엉’, 리드미컬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어······ 멍청이?”


마수에는 이르지 않는 단순한 동물이었던 비둘기의 말은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도 여자아이는 어느 정도 의사는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대충 번역하자면 《어이, 멍청한 인간.》 정도가 됐다.


놀란 건지 어이가 없는 건지 멍하니 있는 여자아이에게 비둘기가 다시 울었―― 말했다.



“여기가 너의 영역······이라고 하는 거지.”


우어우엉―― 그렇다고 한다.



“그렇구나.”


아무 생각 없이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한 번 더 푹――


동시에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어디선가 뚝,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기도 했다나 뭐라나······


조류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다면 확실할 테지만, 여자아이에겐 그런 진기한 재능 따윈 없었다.


대신 여자아이가 알 수 있는 거라곤 우렁차면서도 박자감이 완벽한 ‘우엉우엉어억’ 이라는 울음과 함께 달려드는 비둘기만이 전부였다.



“꺄악! 자, 잠깐만! 아얏!! 뭐? 자취를 남겨? 도전?! 아, 아니야. 미안, 그런 줄 몰랐엇――?! 앗, 따가!!”


열심히 변명해보지만 돌아오는 거라고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나에 대한 어리석은 도전을 후회하도록 해라, 멍청한 인간.》 ――이라는 문답 무용이라는 듯한 대답과 쪼아대는 부리와 발톱뿐이다.


부리로 머리채까지 쥐어 잡히는 걸 뿌리치고 여자아이는 도망쳤다. 상당한 속도였다.


하지만 분노가 가득해 보이는 비둘기는 끝까지 뒤쫓았고, 여자아이는 어느새 학원의 외벽에 몰렸다. 영역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일부러 막다른 곳으로 여자아이를 유도한 듯했다. 꽤 똑똑한 비둘기다.



“기다려줘!”


당황한 채 손을 내민 여자아이가 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비둘기는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이에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아이는 등지고 있는 벽을 보더니, 마음을 정한 듯 무릎을 굽혔다.


그리곤 점프.


여자아이는 한 번에 40m쯤 되는 벽의 위에 당도했다. 그리고 서 있는 바로 한 걸음 앞에서부터 마력이 느꼈다.



“어라? 결계의 종류인 건가······ 어쩌지.”


고민은 짧았다.


쉐에에엑.


뒤에서 들리는 날갯짓 소리에 여자아이는 밖으로 뛰어내렸다. 결계의 통과는 약간의 조작만으로도 넘을 수 있는 매우 간단한 것이니 전혀 무리도 없었다.


밖은 제법 나무가 있는 공원이었다. 뒤집히는 치마를 잡고 살짝 발목을 구부린 것만으로 착지를 완벽히 해낸 여자아이는 학원이 숲 같은 공원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기억해내고는 좋아했다.


장애물이 많은 여기라면 비행하는데 조금 곤란하리라.


계산을 마친 여자아이는 그대로 내달렸다. 비둘기의 공격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으로 인해 긴 은색의 띠를 남기며, 그렇게 여자아이는 공원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학원의 둘레를 빙 돌 듯 뛰던 은발의 여자아이―― 리아는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리기에 멈춰서고 조심히 주위를 경계했다.


‘비, 비둘기는?!’


나름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살펴보는 걸 잊었지만, 막상 기억을 더듬으니 그 비둘기의 마력이 어떤 건지 금방 떠올리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학원 전체를 넘어, 둘러싸고 있는 공원까지 탐지의 범위에 두니 무수히 많은 마력으로 인해 번잡했으나, 차근차근 짚어나가다 보니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둘기는 영역이라는 곳의 주위를 맴도는 중이다.


아마 자신을 기다리거나 다른 침입자가 없는지 감시하는 모양이지 않을까.


어쨌든 안전하다는 걸 안 리아는 긴장이 풀려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나뭇가지에 올라가 앉았다. 혹시 몰라 재습격 당하지 않도록 나름 은폐를 한 것이었다.


‘좋네······.’


안도의 숨과 함께 둘러본 공원은 고향인 나트알을 떠올리게 했다.


선선한 바람과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공기. 실로 괜찮은 순간이었다.



“당신도 그렇죠?”


리아는 같은 나뭇가지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하는 고양이에게 말했다. 이마부터 등까지 길게 이어지는 검은 털과 두 개의 꼬리가 인상적인 고양이다.


크아아앙.


울림통이 큰 것인지 맹수 쪽에 가까운 울음소리였다.


이쪽도 비둘기와 마찬가지로 아직 동물인지라 명확한 의사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파악하기로는 《뭐라는 거냐. 멍청아.》······라고 하는 듯했다.


‘또 멍청이라고······’


모두 명확하게 들린 것이 아니니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땅에 바짝 닿을 만큼 낮게 부르고 있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너무해······ 아니! 다짜고짜 멍청이라고 하는 쪽이 멍청해······ 응? 저 고양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으응?!’


리아는 벌떡 나는 듯이 나뭇가지 끝 쪽으로 이동했다. 재주 좋게도 네발로 걷는 짐승 같은 자세였다. 만약 리아에게 털이 있었으면 곤두서있지 않았을까.


끝 쪽 얇아진 나뭇가지 위에 리아가 있으니 출렁출렁 움직였지만,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다.


그런 상태로 리아는 다급히 외쳤다.



“여기가 고양이 씨의 영역인 거죠?! 모르고 왔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 공격만은······”이라며, 두려움에 떨던 리아는 아무런 말이 없자 고양이 쪽을 힐끔 쳐다봤다.


고양이는······ 쭈욱, 빼낸 손톱을 핥고 있었다.


길이는 한 10cm 이상은 되어 보이지 않을까······. 고양이의 덩치 자체도 1m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크기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어어어엉말 어쩌면, 저 고양이는 육식을 즐기는 진짜 맹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힛!! 저, 저저저저는 맛이 없어요. 채, 채식만 하거든요. 단백질이 아주 많이 부족할 거예요.”


혼자 떠들며 이리저리 호들갑을 떠는,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리아의 행동을 무시하고 고양이는 자신의 할 일만을 했다.


그렇게 한동안 정성스럽게 손톱을 단장하던 고양이가 리아를 무심히 쳐다봤다.


사냥의 시간이다!


리아는 얼른 도망치려 준비했다.


――흐아앙.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고양이는 나무에서 훌쩍 내려가더니 따라오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


사뿐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던 고양이는 멈춰서더니 멍하게 있는 리아를 올려다봤다.


――뭐하냐, 안 따라오고.


그리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놀란 리아는 허겁지겁 땅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고양이는 몸을 돌려 다시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10분여를 천천히 걸었다.


‘서, 설마······ 사냥물을 가지고 가기 귀찮아서 보금자리 앞에서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 아니야?!’


물론 사냥감은 자신이다.


기묘한 동행이 불안해진 리아.


그러기를 또 5분여······


거무죽죽해진 리아가 마음 아프지만 귀엽디귀여운 고양이를 재우고 도망갈까를 고민할 때였다. 고양이는 60m쯤 되어 보이는 나무 앞에 멈춰 섰다.


근처에 있는 나무들보다는 2~4배는 높아 보였는데, 이 근방이 자생지인지 같은 나무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보금자리는 아니지?’


암만 야생이라도 이런 곳에 집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나요?”


사람의 말 정돈 알아듣는지 고양이는 나무의 위쪽―― 꼭대기 쪽을 봤다.


리아도 따라서 올려다봤지만, 잎사귀에 가려 딱히 보이는 건 없었다.



“음, 뭐가 있나······. 아! 혹시나 저에게 부탁하려고 데려온 건가요?”


――하앙.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울음소리는 여전히 맹수 같았지만, 어쨌거나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건 아닌 듯하다.


표정이 밝아진 리아는 고양이가 원하는 게 뭔지 듣지도 않고 바로 도약, 꼭대기 근처에서 [발판]을 만들어 그곳에 서서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뭘 찾는 건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지만······ 기세 좋게 왔는데 다시 내려가서 물어보기엔 영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속 편한 리아는 눈에 띄는 게 있을 거라며, 자세히 살펴보려 좀 더 근처로 다가갔다. 타이밍 맞게 [발판]을 만드는 건 이제 완벽했으니 거침이 없었다.


그럴싸한 게 보이면 닥치는 대로 가져가 보기로 한 리아는 하늘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잠시 후에 계단을 타고 오는 것처럼 내려왔다.


다만 내려온 리아의 표정은 다소 시무룩했다.


이를 대변하듯 손에 쥐고 있는 것도 큰 나뭇잎 몇 개와 송곳처럼 날카로운 나뭇가지 하나, 그리고 검은색의 핸드볼 공만 한 울퉁불퉁 곰보 같은 뭔가를 안고 있을 뿐이다.


기죽을 만했다. 기껏 이야기도 안 듣고 갔건만 소득이 이게 끝이라면······


고양이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왠지 한심한 누군가에게 혀를 차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벌떡 일어선 고양이는 갑자기 리아에게 덤벼들 듯한 기세로 뛰어왔다.


딱 봐도 흥분한 것이 제대로 찾은 게 있는 모양이다.



“찾는 게 이거였나요!! 다행이다, 무사히 찾을 수 있었네요.”


모처럼 해낸 일에 흥분한 리아는 가지고 온 나뭇잎 중에서 제일 큰 걸 내밀었다. 1m는 되어 보이는 굉장한 녀석이었다.


‘음음. 덮고 자려고 찾았나 보네. 내가 봐도 굉장한 크기야.’


――촤악~!


찢겨버렸다. 고양이에 의해서······


굉장했던 녀석은 이제 없다. 두 동강이 난 꼴은 이전의 위용은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에 빛을 잃은 리아는 무의식적으로 다음 굉장한 녀석을 내밀었다. 이 녀석도 첫 번째 못지않은 크기를 자랑했다.


――촥촥~!


······다음 굉장했던 녀석도 이제는 없다. 오히려 이번엔 양 발톱으로 찢어버려 더욱 처참한 골이 되었다.


다음은······


――촥!!


내밀기도 전에 지니고 있던 모든 굉장한 녀석들이 전부 사라졌다. 나뭇가지조차도······. 어지간해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일자로 쭉 뻗은 녀석이었건만.


안타까움에 넋이 빠진 리아를 고양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시선이 곰보 같은 뭔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리아가 가만히 있자 고양이는 참을 수 없었는지, 두 발로 일어서서 앞발로 안고 있던 것을 짚어 억지로 강탈해갔다. 행동 자체는 거칠었지만, 곰보 같은 게 다치지 않게 조심히 다루는 모습이 역력했다.


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인 고양이는 리아에게서 조금 떨어져 한쪽 앞발로는 고정하고, 다른 쪽은 발톱을 세워 곰보 같은 것을 까기 시작했다.


삭삭. 서걱서걱.


사람으로 치자면 섬세한 작업을 하는 장인 같달까.


고양이가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가운데, 리아가 현실로 되돌아오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아직 손에 들고 있던 굉장했던 녀석들의 유해를 어렵사리 놓은 리아는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는 귀에―― 할짝할짝, 딱 고양이가 물 같은 걸 마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지척에서 들리는 소리 쪽으로 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정말로 고양이가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 어쩐지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뭐에요, 그건?”


움찔――


살짝 몸을 떤 고양이는 감추듯 몸을 90도 돌렸지만, 이내 다시 돌아서고는 슬쩍 보여줬다. 젠장이라고 말할 것 같은 분위기다.


의아한 리아는 고개를 내밀어 살펴봤다.


고양이가 마시던 건 뽀얀 그릇에 담긴 물이었다.


‘언제 저런 걸 가져온 거지?’


신기하지만 별 건 아니기에 리아는 쪼그려 앉아 고양이가 마시는 모습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땅을 탁탁 두드리며 가까이 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리아는 시키는 대로 다가갔다.



“응?”


다가가자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났다. 무척 맛있을 거 같다.


출처는 방금까지 고양이가 마시던 물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 고양이가 나눠준다고 한다. 인심―― 냥심 쓰듯 베푸는 모양새였지만, 매우 아까워하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따온 사람은 자신이니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지만······ 고양이에게 그런 걸 따지기는 뭐 하지.


그래도 기껏 권해주니 조금 마셔보자.


물론 저리 아쉬워하는 데다, 사람이 고양이 걸 뺏어 먹는 모양새도 좋지 못하니 한 모금만 마실 거다.


리아는 뽀얀 그릇을 들었다.


표면이 울퉁불퉁했다. 그리고 가까이서 보니 뽀얀 건 과육이었다. 거기다가 테두리가 검은색으로 둘려있었다.


······아까 곰보 같은 뭔가였다.


‘야, 약간 마시기 두려운걸······’


하지만 고양이의 반응―― 지금도 침이 흐를 듯한 모습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로 봐서는 괜찮을 거다. 심해 봐야 복통 정도겠지. 그 정도라면 치유마법으로 바로 완쾌다.


‘고양이가 배려해준다는 신비로운 상황인데 응하지 않으면 여자가 아니지.’


절대 맛있을 거 같아서가 아니다. 전부 고양이를 위해서다.


기대와 불안감을 동시에 품고 리아는 물이라 생각했던 과즙을 조심스럽게 입에 머금어 목 뒤로 넘겼다.


끈적함 하나 없이 정말 깔끔하게 넘어갔다.


그리고――


맛있다.


외견으로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절묘하기 짝이 없는 적절한 단맛과 물릴 때쯤 들어오는 새콤함이 일품이었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알코올은 없지만, 보석의 이름이 들어가던 칵테일과 상당히 유사했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 더 좋냐고 하면 리아로서는 요 곰보 같은 과일이었다.


인위적인 것 하나 첨가되지 않은 쪽이 당연히 더 좋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 맛! 훌륭했다.


벌컥벌컥 들이마신 리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과육이 깍둑 네모난 모양으로 썰려 껍질에 담겼다.


예상컨대 이건 코코넛이랑 비슷한 부류의 과일이다. 그렇다면 과육도 맛있을 거다.


이제는 기대감밖에 생기지 않았다.


리아는 얼른 제일 큰 과육 조각을 하나 짚어 냉큼 먹어봤다.


사과 같이 아삭거리는 식감은 아니고 물렁한 식감이다. 하지만 이건 속까지 꽉꽉 들어찬 과즙으로 인한 것이다. 씹을 때마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과즙은 물처럼 맑았던 처음의 과즙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진한 풍미를 느끼게 했다.


이래저래 설명이 많았지만, 과즙도 과육도 전부 맛있다는 거다.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는 리아는 행복에 겨웠다.


‘맛있졍······ 아, 맞다. 고양이 씨도 나눠줘야지.’


리아는 하나 남은 마지막 과육을 짚었다.



“자, 고양이 씨도 먹어봐요!”


그런데 고양이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었다.


‘먹여달라는 건가?’


리아는 부동으로 굳어있는 고양이의 입에 과육을 넣어줬다. 그러자 연료가 공급된 듯 고양이의 입이 천천히 움직여 씹기 시작했다.


근데······ 영혼은 어딘가로 멀리 가출하고 몸만 따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부족한가? 그러면 하나 더······ 아, 끝이었구나――앗?!!”


리아는 눈치챘다. 아니, 이제야 눈치챘다.


――혼자 다 먹었다는 걸.


고양이의 것을 전부 먹어 치운 글러 먹은 여성이 탄생했다. 리아가 느끼기에는 인류인가, 아닌가를 따질 수준이지 않을까 싶었다.


엄밀히 따지면 어느 정도는 고양이가 먹었으니 전부는 아니다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건 고양이였다.


세상 다 잃은 듯한 저 표정――리아가 그렇게 느낄 뿐이다――을 봐라.



“더, 더 있었어요! 고양이 씨. 그, 금방 따올 테니까, 자······잠시만 기다려요!"


빈 껍질을 내려놓은 리아는 서둘러 나무의 꼭대기로 뛰어올랐다.


올라간 리아가 내려온 시간은 어디에 곰보 같은 과일이 있는지 기억해뒀었기에 짧았다.


내려온 리아는 교복 재킷의 단추를 풀고, 블라우스를 치마에서 빼내 끝을 잡고는 바구니처럼 만들어 배를 훤히 드러낸 모습이었다.


그 안에는 5개의 곰보 과일이 담겨있었다. 이는 미안해서 많이 따온 것이기도 했지만······ 본인의 몫도 챙긴 것이기도 하다. 급한 와중에도 본능에 충실하달까, 이런 부분에서는 의외로 철저한 리아다.


아직도 혼이 가출 중인 고양이를 보며 리아는 몸을 숙여 과일들을 모두 땅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마법을 사용했다. 리카드의 안경을 고쳐줄 때도 사용한 마법이었다.


생각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딱, 이거다 이름을 붙이긴 애매했지만, 편의상 [성형] 마법이라 명명했다. 당연히 원작자는 리아가 아니고 에이브안이다. 리아는 그가 사용하던 것을 보고 비슷하게 따라 한 것뿐이다.


술식마법과 달리 심상마법――이것도 리아가 구분하기 위해 부르는 것――은 이미지와 마력조작이 전부라 할 정도로 심플한 마법이다.


그만큼 조금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마법을 전혀 사용할 수 없으니 어렵다고도 할 수 있으나, 이미지와 마력조작, 이 두 가지의 조건만 충족하면 마법의 발동 자체는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 같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발동한 마법은 근방에 있던 흙을 끌어모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망치로 분쇄하고 물을 뿌려 뭉치거나, 불로 지져 달궈야지만 가능할 법한 변형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것이 마법이랄까,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흙은 변모를 마쳤다.


리아는 이미지대로 완성된 물건을 들어 살펴봤다.


매끈하고 넓적한 것이 잘 만들어진 거 같다. 땅땅 두드려봐도 매우 단단한 소리를 내며 쇠가 울리는 듯했다.


‘좋아! 이 정도라면 물도 안 새겠지?’


숨구멍 같은 조금의 틈도 없는 것에 만족한 리아는 완성한 자기그릇을 청결마법으로 깨끗이 닦아냈다. 그리고 마저 손가락을 튕겨 곰보 과일의 껍질을 깎아 과육을 한입 크기로 썰고 과즙도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릇에 담았다.



“고, 고양이 씨. 여기 더 있어요. 먹어보세요.”


그릇을 고양이 앞에 내려줬다. 굉장히 미안했기에 리아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벌렁벌렁.


고양이의 코가 움찔움찔 반응했다. 하지만 무조건반사 같은 행동으로 고양이의 영혼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리아는 과육을 하나 들어 고양이의 코에 들이댔다.


킁킁.


달달한 향에 코의 움직임이 좀 더 격렬해졌다.



“자, 아~ 해봐요.”


리아는 슬며시 고양이의 턱을 잡아 벌렸다. 말만 자율 의사에 맡긴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살짝 움찔하기도 했지만, 리아는 무사히 입 안에 과육을 투척할 수 있었다.


천천히 기계적으로 씹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다 먹어 움직임이 멈추면 그때마다 턱을 벌려 넣기를 반복―― 10개째의 과육을 넣어줄 때였다.


‘돌아왔다.’


흐리멍덩한 눈에 활기가 돌아온 고양이는 잠시 리아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릇을 발견했다.


――이게 코박죽이란 건가.


흐엉흐엉 소리를 내며 고양이는 게걸스럽게 과육과 과즙을 먹어 치웠다. 마치 나쁜 악몽에서 깬 듯한 모습이다.


‘어쩐지 눈물이 맺혀있는 듯 보이기도 하고.’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든 리아는 얌전히 쪼그려 앉아 먹는 모습을 보다가, 그릇이 비어 갈 때쯤 하나 더 깎아서 줬다.


덩치에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직 꿈이라 생각하는 건가. 고양이가 그르렁거리면서 만족했을 때는 곰보 과일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다 드셨나요?”


리아는 빈 그릇을 흙으로 되돌리려 손을 뻗었다.



“······.”


크르르릉――


아, 화내고 있다.


기지개를 켜고 있던 고양이가 헐레벌떡 순식간에 그릇을 물어가더니 노려본다.



“어······ 마, 마음에 드셨나요? 그럼 깨끗하게 닦아 드릴······”


고양이에게서 마력이 새어 나왔다. 청결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마법도 사용할 수 있네······? ――으응? 손톱은 왜 핥아서 깨끗이 한 거야?’


그거 때문에 잔뜩 쫄았는데 황당하다.


뭐가 됐든 고양이는 저 그릇에 상당히 꽂힌 모양이다. 언제든지 만들 수 있고 어차피 흙으로 되돌리려 했으니 줘도 문제는 없었다.


덤벼들기라도 하면 무섭기도 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뺐거나 하지 않아요. 가져도 괜찮아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전혀 신뢰하지 않는 모습에 리아는 조금 좌절했지만, 혼자 과일을 몽땅 먹어 치운 전적이 있으니 이해는 갔다.


어색한 기분으로 리아는 일어섰다.



“좋은 과일을 알려줘서 고마워요. 전 이만 돌아갈게요.”


볼일은 끝났다는 생각에 리아는 몸을 돌려 걸어가는데······ 뒤에서 그릇을 물고 있는 고양이가 따라온다.


‘곤란하네······’


고향인 나트알이었으면 냉큼 데리고 갔을 테지만, 여기는 학원이다.


애완동물이 허용되는지도 모르거니와 생각보다 고양이의 덩치는 컸다. 무서워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터. 리아에게는 꽤 귀여운 축에 들어갔다만.


몰래 데리고 가기에도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다.


물론 데리고 들어가는 거 자체는 벽을 넘어가면 되니 별로 힘들지 않다. 그렇지만 키우는 거 아닌가. 이야기가 다르다. 데리고 간다고 해서 끝이 아닌 거다.


‘덩치는 조금 크지만, 근본은 고양이니 여기저기 긁어 놓을 테고 말이지.’


온종일 방에만 가두더라도 문제는 필연적으로 생기며, 거기에 라프리트와 루비아가 놀러 오기도 한다.


둘은 부탁하면 비밀로 해줄 거 같지만, 이미 비밀로 해주는 것도 많은데다 너무 부탁만 하는 느낌이다. 끝까지 몰래 키울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 루비아 같은 경우에는 이것을 빌미로 공국으로 오라 할까 겁난다.


‘일단 의사를 물어보는 게 먼저겠지? 내 착각일 수도 있고.’


리아는 그저 우연히 가는 방향이 같은 것이기를 바라며 물었다.



“고양이 씨, 혹시 집이 이쪽이신가요?”


절래절래.


그릇 때문에 대답은 못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어디를 가는 건가요?”


고양이는 코로 리아를 가리켰다.


‘오오, 귀엽네······’


덩치에 안 맞는 동작과 초롱초롱해 보이는 눈이 언밸런스한 귀여움을 선사했다. 이미 귀엽게 보고 있던 리아에게는 더욱이나.


다만 이러한 생각이 현실도피라는 게 문제다.


그런데 리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고양이에게 다가가 머리와 볼 주변을 쓰다듬었다.


고양이도 처음 느껴보는 사람의 손길이 좋았는지 잔뜩 비비며 고개를 내밀어왔다.――이 와중에도 그릇은 절대 놓지 않았다――



“와 부드럽네. 관리를 잘했나 봐요. 그다지 때 탄 느낌도 없고요.”


의외로 더럽지 않다는 듯한 뉘앙스에 고양이가 잠깐 눈을 흘겼지만, 만지고 있는 손길이 강력했는지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르르렁,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야외에서 생활하는 고양이 같은 느낌이 들지 않네······ 오! 어쩌면 학원에서 키우는 게 가능하려나?!’


리아는 손을 멈추고는 고양이의 눈을 쳐다봤다.



“고양이 씨, 따라오고 싶으신 거죠?”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그건 괜찮아요. 하지만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여러 귀찮은 규칙이 있어요. 그걸······ 감당할 수 있겠나요?”


자못 무겁고 진지한 말에 고양이는 그릇을 내려놓고는 물었다.


무슨 규칙이 있냐고.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리아는 설명했다.


――첫 번째는 인간을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


물론 목숨의 위협을 한다면 반격 정도야 괜찮겠지만, 먹잇감으로 생각해 먼저 공격하는 건 절대 금지다. 어지간히 화나더라도 되도록 상처 입히는 것만은 하면 안 됐다.


같이 살려면 이것이 가장 중요했다. 사람을 공격하는 시점에서 이미 애완동물이 아니니.


하지만 자연 생태계에서 최상위에 있는 고양잇과다. 본능을 잘 억제할 수 있으려나 싶은 어려운 규칙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걱정이 무색하게 고양이는 듣자마자 너무나도 쉽게 알았다고 했다. 오히려 사람은 냄새만으로도 맛없다는 걸 알아서 입에 댈 생각조차 없다고 한다.


‘그, 그러고 보니――’


곰보 과일도 엄청나게 맛있었다. 지난번에 사 온 사과나 배, 별과 와는 급을 달리하는 고오오급진 과일의 맛이었다.


‘이 고양이 미식가 일지도······’


걱정은 덜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게 있으니 리아는 이어서 다음 규칙을 말했다.



“두, 두 번째는 배변 활동이에요. 실내에서 안 돼요. 추운 겨울에도 밖에서 볼일을 봐야 해요.”


집이었다면 어디 한쪽에 따로 화장실을 만들어주거나, 원래 있던 화장실을 같이 사용하면 됐지만, 학원에서는 힘들다.


키우는 것조차도 반 억지를 부릴 건데, 졸업 후에는 다른 사람이 써야 한다. 되도록 다음 입주자가 기분 나쁜 사태에 처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흐응흐엉.


이번에도 집 근처에서는 배변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여태까지와 다를 바 없다며 쉽게 수긍했다.



“까, 깔끔하시네요. 확실히 털도 깨끗하고 부드러웠고······”


원래 야생에서 살았던 고양이에게 추운 겨울이 무슨 상관이랴.


말하고 보니 상당히 바보 같은 규칙이었다. 그런데다가 여기는 겨울에도 따듯하다고 한다. 지금도 봄철이지만 나트알에 비하면 너무나 따듯했다.


고양이가 단언한 대로 조금 귀찮지만 그다지 어려운 규칙은 아닐 거다.



“다, 다음은······ 어디 멋대로 가거나 하면 안 되고 제 말에도 잘 따라줘야 하는데. ······이건 어렵겠죠?”

《그게 제일 쉬워.》


――라고 말했다. 정확히는 이런 느낌으로 들린 거다.


‘먹을 게 떨어지니까 가 붙어있는 듯한 건······ 기분 탓이겠지?’


상당히 속물적인 고양이가 아닐지―― 조금 의심해 본다.



“그리고 또 말이죠――”


없다······


준비한 규칙들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사실 고양이가 선뜻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들을 말한 거였다. 따라오는 걸 막기 위해서.


리아도 동물은 좋아했다. 푹신하고 쫄쫄 따라오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가. 아이리스가 드래곤일 때의 모습도 생각나고.


하지만 어떠한 것이든 키운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는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거였다. 그래서 뜨끔거리는 아픔을 참고 고양이 스스로가 포기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근데 막상 이야기를 꺼내니 1분도 안 됐는데 벌써 모든 걸 오케이. 고민이라도 했다면 그 점을 파고들 셈이었지만, 그딴 건 없었다.


자잘한 몇 가지 규칙 정돈 남아있지만, 앞엣것들만치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고양이도 아는 듯했다.


득의양양한 저 표정을 봐라. 이미 이긴 듯하지 않은가. 따라올 생각 만만이다.――물론 리아에게 이리 보일 뿐이다――


‘진짜 속물인 거 아니야?’


의심은 가지만 어쨌든 고양이는 약속한 거다. 문제를 벌이고 나서라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믿는 수밖에.



“알았어요.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그리고 고양이 씨가 같이 살 수 있을지 어떨지 저도 장담은 하지 못하니까 그 점은 이해해줘요.”


최대한 노력은 할 테지만, 애완동물 반입이 안 될 수 있다.


그건 고양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듯 얌전히 알았다고 했다.



“그러면 가보도록 하죠. 이건 제가 들고 갈게요······”


이번엔 경계 당하지 않고 그릇을 든 리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고양이 씨. 혹시 이름이 있어요? 계속 고양이 씨라고 부르기도 뭐 한데······ 아, 저는 이스피리아라고 해요.”


――흐어엉.


없다고 한다. 다만 이름의 개념은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설명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지만―― 네? 이름이요? 제 어머니랑 아버지의 이름을 나눠 받은 거예요. 이쁘죠? ············.”


누가 이름을 지어줬냐는 물음에 기껏 대답해줬더니 고양이는 주제에 안 맞을 정도로 거창해 보인다고 한다.


나름 칭찬일 테고, 부모님에게 받은 이름을 좋게 봐주는 거니 그리 달갑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기분은 묘했다.


‘고양이가 듣기엔 거창할 수도 있지. 그래, 그런 거야! 왠지 멍청한 주제에 라고 한 거 같기도 하지만 잘못 들은 거겠지.’


내심 툴툴거리던 리아에게 고양이가 말을 걸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어······ 제가요? 정말 그래도 돼요?”


끄덕.



“네. 알겠어요······.”


기왕 이름을 짓는 거다. 멋지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이름을 생각해내 저 속물 고양이가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테다.


‘더는 멍청하다고 찍소리도 안 나오게 만들어 줄 거야.’


리아는 잔뜩 고민했다.


그리고 거듭하여 추리고 추린 최고의 작명을 입에 올렸다.



“랑이 어떤가요?! 제가 아는 동물 중 가장 무서운 녀석의 이름을 딴 건데, 부르기도 귀엽고 하니 괜찮지 않―― 꾸헥!!”


······뺨따귀가 날아왔다.


발톱도 안 새웠고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다. 하지만 굉장히 자신 있던 네이밍이었던 만큼 이런 반응은 충격이었다.


‘어, 어머니한테도 이렇게 맞은 적이 없는데. 귀엽기만 하구먼.’



“꾸꾸나 뭉이······ 같은 건······ 네. 별로군요.”


치켜드는 발을 보고 리아는 빠르게 포기했다.


‘무지하게 따져 쌌네. 정말 괜찮아 보이는데.’


평생 불릴 이름이니 신중히 고르는 건 알겠지만, 이 고양이 너무 깐깐했다.


‘응? 깐깐하다고 하니까······’



“페일테스는 어떤가요? 애칭은 페리요. 아아, 이번엔 제대로 멋지고 이쁜 거예요. 뭘 뜻하냐고요? 으음······ 아, 아마 가장 강하고 멋진 고양잇과의 왕인가, 신인가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던가 그럴 거예요.”


처음은 아리송한 표정을 보이던 고양이가 ‘왕’과 ‘신’이 나오자 급격하게 밝은 빛을 띠었다.


――아마도.


그래도 느낌만은 아닌지 고양이도 마음에 들었다며 페일테스, 이 이름으로 정하겠다고 한다.


뭐, 좋아하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 그럼 다시 인사해요. 전 이스피리아라고 해요. 리아로 불러줘요.”


리아는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도 난 페일테스다 라며 의사를 전함과 동시에 손을 올렸다.


영락없이 애완동물에게 자주 하는 그거―― ‘손~’이라고 부를 듯한 모습이다. 이후 잘했다고 간식을 주는 것까지 하면 완벽했다.


겉에서 볼 때는 어떻든 간에 둘은 악수를 하며 진지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다만, 만족스러운 고양이와는 달리 리아는 다른 의미로 진지했다.


‘거······짓말은 아니야. 페일테스는 정말 고양이의 신인가 뭔가라고 했는걸.’


――게임에서.


실은 페일테스라는 이름은 아들이 하던 RPG 게임에서 나온 중간보스였다.


그리 어려운 게임은 아니었건만 페일테스라는 얍삽한 보스 하나 때문에 공략 난이도가 대폭 상승한, 명백하게 레벨 디자인에 실패한 게임이었다.


세계의 위협을 가져왔다는 최종 보스인 대악마조차도 저 페일테스와 붙는다면 화병으로 죽는다는 말이 있었다. 혹자는 부하를 잘 뒀다든가, 사실 페일테스가 반란군이고 주인공 파티를 강하게 키우려 그랬다는 둥.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의 패드를 부숴버렸다고 전해지는 페일테스의 전투법은 간단했다.


카운팅 된 몬스터와 싸우고 있으면 난입, 온갖 디버프를 걸어대고 몬스터에게는 버프를 주고는 조롱으로 도발한 다음 지켜만 본다.


무려 최종 보스 직전까지······


괴랄한 성능의 디버프로 약해진 주인공 파티와 마찬가지로 괴랄한 성능의 버프로 막강해진 몬스터와의 전투를 게임의 중반부터 끝까지 지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에 아들은 포기하고 온갖 육두문자를 남발하며 개발자를 욕하고는 패드를 집어 던지는 과격함을 보였었다. ――물론 소파에다 던졌다. 아들은 전자제품을 좋아했으니 그런 부분은 무척이나 아까워했다.


그런 모습에 리아는 좀 나무랐으나, “그러면 아빠가 해봐.”라는 아들의 말에 플레이해 보게 되었고······


중반 이후로는 아들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독하게도 주인공을 따라와 괴롭히는 페일테스로 인해 쌍화차를 사발째로 들이키는 수준이었다.


마지막에 본인이 직접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싸워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 마지막조차도 주인공 파티의 물건을 훔쳐서 사용하는 등 정말 화가 치밀었다. 특히 아끼고 아껴놨던 비싼 아이템을 훔쳐 사용할 땐 몇 번이나 패드를 던질 뻔한 걸 참아냈다.


아들이 보고 있었기에,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였기에, 지킬 체통이 있었기에 다행이었지 그 패드는 그날 명을 달리할 뻔했다.


‘성우는 또 어찌나 잘 캐스팅했는지, 정말 울화가 치밀게 잘도 연기를 했었지.’


당시를 떠올려보면 지금에 와서는 추억이지만, 고양이를 골려줄 겸 가볍게 말을 꺼낸 게 실수였다.


아니, 애당초 고양이를 상대로 농담을 하려던 것 자체가 실수였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출발하고 탑승자인 고양이, 페일테스는 승차감을 매우 만족한 상태다.


인제 와서 별명이 ‘파리테스’라든가 ‘모기테스’라든가, 애칭은 ‘파리’와 ‘모기’라든가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평생 지고 가야 하는 비밀이 생겨버렸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무섭도록 많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리아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서둘러 일어섰다. 더 있다가는 표정으로 드러날 거 같았다.



“그, 그만 가볼까요? 파······ 페리.”


흐어어엉~!


띠로로링~~! 페일테스 이(가) 합류했습니다.


――라는 문자와 배경음악이 깔리는 듯한 기분이다.


작가의말

오늘의 3번째 화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만렙 히로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2 80 22.07.01 54 0 28쪽
81 79 22.07.01 51 1 40쪽
80 78 22.07.01 58 0 39쪽
79 77 22.06.30 59 0 39쪽
78 76 22.06.30 55 0 14쪽
77 75 22.06.30 63 0 27쪽
76 74 22.06.30 66 1 37쪽
75 73 22.06.30 59 0 19쪽
74 72 22.06.30 66 0 39쪽
73 71 22.06.30 68 1 38쪽
72 70 22.06.30 82 0 40쪽
71 69 22.06.29 72 1 40쪽
70 68 22.06.29 72 0 24쪽
69 67 22.06.29 112 1 36쪽
» 66 22.06.29 81 0 33쪽
67 65 22.06.29 82 0 21쪽
66 64 22.06.29 81 0 38쪽
65 63 22.06.29 85 0 38쪽
64 62 22.06.29 79 2 39쪽
63 61 22.06.28 77 1 23쪽
62 60 22.06.27 84 1 33쪽
61 59 22.06.27 86 0 25쪽
60 58 22.06.27 87 0 26쪽
59 57 22.06.26 100 0 35쪽
58 56 22.06.25 93 1 12쪽
57 55 22.06.25 114 1 18쪽
56 54 22.06.25 104 1 33쪽
55 53 22.06.23 103 1 26쪽
54 52 22.06.23 112 0 42쪽
53 51 22.06.23 106 0 3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