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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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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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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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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30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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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공국의 자랑이라는 에인샤론드의 비행 능력은 탁월했다.


과연 덩칫값에서 나오는 비행 속도는 어지간한 전투기――반대로 잘도 이 덩치로 이만한 속도로 나는구나 싶기도 하다――, 마하에 달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다. 물리법칙이 지구와는 달라 소닉붐 같은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실제 강함이나 성격은 어떨지 몰라도 겉보기에는 드래곤과 다름없는 에인샤론드다. 감히 덤비려 하는 몬스터도 없으니 공국으로 가는 하늘길은 상당히 쾌적했다.


루비아가 마차 대용이라고 칭한 것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이동 수단이라는 목적에는 어지간한 방편들보다는 뛰어날 듯싶다.


그렇게 아무런 말썽도 없이 대략 1시간 반.


공국에 도착했다.


이동식 집에서 나와 올려다본 공국의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다만 기후는 나트알과 비슷한지 학원에 있을 때보다는 조금 추웠다. 물론 이 정도 추위를 버티지 못할 사람은 일행 중엔 아무도 없었다.



《으······ 춥다.》


아니―― 한 마리만은 조금 쌀쌀한 모양인지 부르르 몸을 떨었었다.


이 정도의 날씨라면 벨루디스의 겨울이 더 추울 텐데······. 저 털 뭉치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건가.


살짝 어처구니없이 쳐다보던 리아는 기분상 찌뿌둥한 어깨를 푸려 기지개를 켜면서 이곳까지 태워다준 그――아마도――에게 감사를 전했었다.


그저 인사였을 뿐이었는데······


그―― 에인샤론드는 페리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몸 떨기를 보여줬다.


덕분에 때마침 이동식 집에서 나오고 있던 라프리트와 안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일이 발생해 루비아의 호된 호령이 나오기도 했다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현재――


심하게 격식을 차린 진중한 마중에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던 리아는 공국 근위대장의 인도 아래 왕성 내를 걷고 있었다.


‘어딜 가고 있는 걸까······’


마치 궁금하다는 양 굴었지만, 솔직히 지금 가는 목적지를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진짜 목적이야 뭐든, 사절단이니 뭐니 나온 시점에서 갈 곳은 하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리아가 이러는 건······


당연히 현실도피를 위함이었다.


시골 촌뜨기가 국빈이라는 것도 적응이 안 되는 판국에, 왜 그 국빈 자격으로 타국에 사절단으로서 향하는 건가.


이해할 수 없었다.


전, 현생을 통틀어 한 나라의 최상위에 있는 사람과 면식을 둬본다는 굉장한 경험을 한 적이 없던 리아로서는 매우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리아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정해져 있고, 지금 더욱 심화하여 깊이 파고들어 나갔다.



『에르. 아까 화장실의 좌변기 봤어요? 느낌이 정화마법이랑 청결마법이 적당히 섞인 마법 같은 게 부여된 마도구 같던데, 에르가 보기에는 어땠어요?』


가끔 루비아를 보며 열렬한 눈길을 보내는 병사들도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공국에도 사절단이 방문한다고 알려줬는지 병사 대부분은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를 유지한 채 도열해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 뜬금없는 [염화]였음에도 에르는 전혀 거리낌도 없이 차분히 생각하더니 대답해줬다.



『음. 내가 볼 때도 그러한 형식의 마도구로 보였어.』

『역시 그런가요.』


이젠 생리현상조차도 전혀 하지 않게 된 리아에게는 좌변기라 불리는 물건은 그리 친숙해질 도구가 아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사용한 일은 전생. 현생에서는 좌변기에 종류 중 하나인, 앉아서 볼일을 보는 양변기의 사용은 전혀 없었다.


나트알에서는 쪼그려 앉는 화변기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산에서 돌아온 쯤을 끝으로 현재까지도 사용한 일이 없다. 또 산속에서의 생활은 강화마법의 영향 탓인지 초월자에 들어서기 전까지의 기억은 그다지 남질 않아서 9년여만이 전부였다.


그런 자신이기에 씻을 때 말고는 화장실을 들를―― 그것도 공중에 떠 있는 집에서 1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을 못 참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만, 부끄러움으로 꼬물꼬물하던 것을 착각, 화장실이 있다고 얼른 다녀오라고 한 루비아 덕택에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양변기 자체를 오엘문리아에서 처음 본 건 아니었다. 기숙사 화장실도 양변기였으니 말이다.


다만 이곳에서의 양변기는 오염물 처리 방식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나트알에서는 볼일을 본 다음 식수마법으로 물을 생성, 청결마법으로 배수관을 통해 내보내는 식이었다.


기숙사에서도 이 일련의 과정은 동일했다만, 양변기에 술식이 새겨진 마광석을 설치하여 마도구로서 마력만 주입하면 되는, 한 번에 모든 일이 처리되도록 조금은 더 간편하게 된 방식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이 두 가지의 방식은 모두 기본적으로 배수관을 통해 다른 곳으로 오염물을 흘려보내는 구조다.


그런데 방금 에인샤론드가 메고 있던 집에서는 그러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리아는 순간 하늘에서 그냥 배출하는 것이 아니냐 생각했었다. 전생의 TV 프로그램에서도 비행기는 높은 고도에서 오염물을 그냥 투척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더욱이.


만약 그렇게 되면 지상에 있는 정~말 운이 안 좋은 사람이 재해에 가까운 일을 당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도 싶으나, 의외로 높은 고도의 상공에서는 오염물을 뿌려도 낙하하면서 자연히 분해되어 그럴 일은 없다고 한다. 그게 물리법칙이 조금 다른 오엘문리아에까지 통할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찌 됐든 곧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저 양변기는 마력을 주입하면 즉시 오염물을 아예 없애버리는 구조였기에―― 하늘에서의 투척이라는 방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술식으로 만들기 상당히 애매했던 정화마법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었어.’


차마 볼일을 전혀 안 본다는, 이상한 모습을 보일 순 없기에 얼떨결에 가게 됐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그만큼 [정화]의 술식화에 대해선 상당히 난황이었다.


이전 리카드에게 줬던 [치유]처럼 [정화]도 술식으로 정립하는 것 자체는 가능했다. 그냥 정화마법을 한 번 사용해보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술식을 관찰만 하면 됐으니.


그런데 만들어지는 술식은 그 난이도가 [상급치유]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무엇보다 술식마법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이미지가 없다면 전혀 발동하지 않을 거란 문제점이 존재했다.


이대로라면 널리 배포하여 손쉽게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카드에게도 [정화]의 술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물론 마법에 대해선 박학해 보이는 리카드라면 충분히 보완할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내준 과제도 있고, 학원장으로서도 하는 일이 많다. 만약 가능하더라도 필시 상당한 시간이 요소되리라.


‘그래도 다행이야. 정말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물건에서 힌트를 얻긴 했지만 이제 진척이 있을 거 같아. 그 양변기도 아마 아티팩트겠지? 단순화돼 있긴 하지만 나름 정화마법이 들어갔으니. 루비아 씨도 어딘지 모르게 은근 자랑하는 느낌이기도 했고.’


단순 현실도피에서 시작했을 뿐이었지만, 막상 생각하니 좋은 소식에 리아는 긴장감도 사라져 미소 지으며 라프리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자신의 작은 키를 고려해줬는지 상당히 느린 속도로 나아갔지만, 애써 의식하고 싶지 않았던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그러다 도착했는지 앞에 가던 일행들이 멈춰 섰다.


혼자 허튼 생각을 하고 있던 리아는 순간 멈추는 라프리트에게 부딪칠 뻔했으나, 반사신경과 육체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어찌 잘 넘길 수 있었다.


주변에 도열하고 있는 병사들에게서 어쩐지 따스한 시선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것 또한 애써 의식하지 않았다.



“폐하.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 공주님과 벨루디스의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선두에 섰던 근위대장이 말하니 곧 웅장하게 닫혀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자신이 예상하던 장소 그대로라는 것에 리아는 혹여 실수라도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스멀스멀 다시 긴장감이 올라왔다. 왠지 쓰릴 일도 없는 속이 쓰린 기분이다.


다시 움직이는 앞줄을 따라 리아도 쫓아 들어갔다.


근위대장은 들어가지 않는지 문 앞에 멈춰서서 배웅해줬다.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 공주 전하. 리벨리타스 가의 영애,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 벨루디스의 최고 국빈 이스피리아. 세 분 입장하십니다.”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거창한 소개 문구에 긴장감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대신―― 끝 모를 정도의 창피함과 부끄러움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지만 라프리트나 루비아에게 폐를 끼칠 순 없는 노릇인지라,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는 실패하고, 치유마법을 사용하여 얼굴의 안색을 바꾸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분명 왕좌의 방인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리아는 라프리트의 등 뒤에 숨듯 조용히 따라갔다.


‘으으. 왜, 왠지 날 쳐다보는 시선이 많지 않나? 아니지! 내가 아니야! 다들 에르의 멋진 모습을 보고 있는 걸 거야. 그래, 분명 그럴 거야.’


흘깃 쳐다본 에르는 허리를 쭉 편 당당함과 기품 넘치는 멋진 모습을 보여 사용인이라는 역할임에도 사절단의 핵심 멤버라 칭해도 전혀 이상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암만 아니라 부정하려 해도 왕좌의 방에 모인 시선이 누굴 향하는지는 싫지만 너무나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체로 전원을 둘러보기는 했지만, 에르에게 향하는 시선은 의외로 적은 것이다.


‘남들보다 조오오오오금 아, 아담하다는 게 그렇게나 신기한 거야······?’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가는 시선들에 리아는 딱딱하게 굳었다.


‘다들 부정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고 호의적인 시선뿐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사절단의 일행인지라 사용인들도 전원 무사히 들어온 가운데, 왕좌의 방에선 선두로 나아가던 루비아가 멈춰 섰다. 라프리트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왕좌로 여겨지는 데에서 대략 열다섯 걸음은 떨어진 곳이었다.


치마를 잡고 무릎을 꿇어 예를 보이는 루비아를 따라 리아도 라프리트와 함께 벨루디스 식의 예우를 보였다.


다만, 무릎은 꿇지 않은―― 최고 예우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사전에 정해놓은 것으로, 공국과 벨루디스의 사이는 양호하지 않다는 연출의 연장선이라고 한 루비아의 지시였다. 원래는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다면 타국의 왕에게는 자국의 왕가와 비슷하게 예를 표한다고 한다.


심장과 간이 심히 작았던 리아는 당장이라도 넙죽 엎드리고 싶었으나, 루비아가 눈에 불을 키는 모습도 두렵다.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세만은 완벽하게 유지한 채, 아무도 아무라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인사드립니다, 공왕 폐하. 리벨리타스 가의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스라 하옵니다. 그리고 이쪽은······”


분위기와 문맥상으로 자신의 차례를 눈치챈 리아는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왕 폐하. 이스리피아라 합니다.”


떨지도, 더듬지도 않았던 자신을 리아는 마구 칭찬하고 싶었다. 그리고 뒤에 대기하고 있던 에르도 정말 아주 살짝――무례하게 보이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묵례했고, 아이리스는 배운 대로 깔끔하게 귀족식 인사를 보였다.


그런 모두를―― 따라온 아이리스와 안네도 스윽 살펴보는 낌새가 느껴진 후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들라.”


작게 대답한 리아는 말에 따라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옥좌에 앉은 사람을 보고 무언가 반응할 차례지만―― 그런 건 없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신장 차이로 인한 라프리트의 등만이 전부였기에······



“오랜만이로고 라프리트여.”

“7년이나 지났건만 기억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공왕 폐하께서도 무강하셔 기쁘기 그지없사옵니다.”

“기억하고 있다마다. 어리기만 한 아이에게 깃든 빛나던 눈빛은 아직 새록새록 하다. 눈여겨본 그대로 훌륭히 성장한 듯하니 벨루디스엔 축복이겠구려.”

“황공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일면식이 있었어?! 라프리트 씨 대단하셔! 아, 공주님 비슷한 분이셨지 참.’


이미 봤으면서도 새삼 처음 본 것처럼 인사한 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처음이었기에 그랬나 보다.


신분상 당연히 만나봤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리아가 무안해할 때였다. 예를 취하는 라프리트를 뒤로하고 공왕의 시선이 두리번거렸다.


무언갈 찾는 듯한 느낌이다.



“한데······ 잘 보이지 않는다만. 벨루디스의 국빈 이스피리아여, 앞으로 나와 보겠느냐.”


‘아. 날 찾고 있던 거구나.’


사절단 일행에 명시된 둘 중 하나인 자신이 숨어봐야 전혀 의미 없는 헛짓거리지만······ 어쨌든 리아는 학교에서 지목당하는 걸 피하기 위한 느낌으로 숨었었다.


더욱이 일부러 눈에 띄지 않으려 라프리트에 기대 숨으려 했으니 정말 잘 안 보였을 거다.


보통이라면 암만 저래도 위에 자리한 왕좌에서는 보일 법도 하건만, 이쯤 되면 ‘작다’라는 걸 인정할 만도 한데 리아는 철저히 부정하며 앞으로 나왔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다 떨리는 심정을 진정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리아가 예를 갖추고 있으니 공왕은 찬찬히 살펴봤다.



“호오······ 어린 여식이 차분하니 굉장하구나. 벨루디스에서 놓치기 싫어할 만도 하군.”


분명 공왕은 자세라든가를 보고 그리 평가한 것이겠지만―― 그건 틀렸다.


그저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아무런 생각이 없이 머리를 비운 것뿐이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자신은 80여 년간의 인생을 살아온 경험이 있다. 감정만큼은 전혀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어지간한 또래 아이들보다는 분명히 어른스럽게 보일 거다.


――라는 게, 평소 자신에 대해 스스로가 내린 평가다. 과연 그게 반영됐을까는 알 수 없었다.



“풉.”


뒤에 있던 루비아에게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웃음에 공왕은 의아하게 쳐다봤다.


공국의 중진들도 공주의 행동에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따스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이 어딘가 흐뭇해하는 듯 보였다. 딱히 문제로 걸거나 하진 않았다.



“실례했어요. 폐하, 하지만 한 가지 정정해드리자면 이스피리아 양―― 리아 양은 저와 동갑이어요.”

“응? 성인?”


상당히 느슨해지는 분위기에 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봤다. 그리고 드디어 공왕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앞에는 루비아와 생김새가 조금 닮았으면서도 인상만큼은 완전히 다른, 너무나 순박한 인상의 아저씨가 금과 은으로 치장된 중후한 옥좌에 앉아있었다.


나이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기엔 별 의미가 없어 예상하길 그만뒀다. 그래도 풍겨오는 위압감만은 과연 왕이라는―― 무지하게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순박한 인상 그대로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말을 들었는지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작은 소음이 발생했다.


리아의 지각 능력이라면 뭐라 떠드는지 듣는 건 쉬웠다.


그런데 본능이랄까, 리아는 주워듣기를 거부하고 관심 두지 않으려 했다.


하나 확실한 건, 자기방어 기재 같은 게 저절로 작동한 건 아니었고, 분명 뭐라 대화하고 있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응. 절대 아니야.’



“성인이라고······? 헛, 흠. 그, 그렇군. 추후 협의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하도록 하고. 우선, 연회를 즐기도록 하세나. 짐과 공국은 벨루디스의 사절단을 환영하네.”


자신의 낯빛이 칙칙해져 갔기 때문일까, 조금 눈빛이 사나워지는 라프리트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드는 에르 때문일까――


공왕―― 그란 페이보 루 몬테르는 황급히 대충 면회를 끝마쳤다. 모여있는 공국의 중진들에게서도 다른 말은 나오지 않고 어색한 신음만을 흘렸다.


그런 사람들을 스윽 둘러본 루비아는 빙긋 미소 지으면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다른 장소―― 아마 연회장으로 예상되는 장소로 안내되었다.


일련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던 리아는 멍하니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겨버렸다.


그렇게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간 연회장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간단한 요리들이 깔린, 흔히 만화에서 보던 장면이 펼쳐졌다.


굉장히 판타지다운 광경에 리아는 낯빛이 급변해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와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악단의 능숙한 연주실력과 향긋한 냄새의 음식들은 확실히 상상하던 상류층의 무도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데······


느껴지는 냄새로 보건대 자신이 먹을, 육류가 안 들어간 음식이 별로―― 아니, 하나도 없어 보인다.


확실한 건 직접 앞에 둬봐야 알겠지만, 일단 그런 음식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충격적이다······.


‘이, 이럴 수가. 그럼 난 오늘 아무것도 못 먹는 거야?’


이전에는 생각이 나면 음식을 먹는 수준이었지만, 그날―― ‘엉덩이팡팡’이라는 무시무시한 처벌을 받은 후에는 꼬박꼬박 식사를 챙겨 먹게 되었다.


여전히 안 먹어도 아무 지장이 없고, 먹은 건 또 어디로 배출되는 거냐는 물음은 남아있다만, 꼭 먹어야 할 이유는 존재하는 것이다. 단 것의 맛을 알아서인지 요즘은 스스로 먼저 찾긴 하지만.


뭐. 어찌 됐든, 없는 건 없는 거다.


포기하고 리아는 촌놈처럼 연회장을 둘러봤다. 그래도 아쉽기는 한지 눈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흐음. 레딧츠, 우리는 저쪽이야?”

“예.”


본인도 지금 막 왔건만 레딧츠는 묻는 말에 막힘없이 즉시 대답했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비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

“흐엇, 네네.”

“우리는 저쪽인가 봐.”


아직 악단과 서빙을 도와주는 사용인들 말고는 아무도 없어 조금 긴장이 풀리긴 했지만 익숙해지기엔 멀었다. 레딧츠의 인도하에 리아는 딱딱한 걸음걸이로 아무도 없는 연회장을 가로질러 지정석인 듯한 상석으로 갔다.


옆에 아이리스까지 앉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은 즉시 마실 것을 가져다줬다.



“고, 고마워요.”


직접 가져다주는 건 암살이라든가 여러 위험이 있기에 도중 에르가 받아서 건네줬다.


라프리트에게 받았던 강습내용에서는 자국 내라면 상대를 신뢰한다는 의미와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초대한 사람이 책임을 지기에 중간에 받아 감식하는 일은 생략한다고 했다. 반대로 이따금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계략을 저지르는 자도 있다고.


이는 타국이라고 그리 다르진 않다.


오히려 이 경우에는 국제적 문제가 되기에 서로가 조심하며, 어지간해서는 타국이 보이는 반응에 신경 쓰지 않는 게 관례라 한다.


그리고 이 또한 루비아가 요청한 지시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딱딱하게 착석하고 있던 리아는 꾸벅, 고개를 숙여 버렸다.


서빙한 사용인은 설마 리아가 굳이 자신에게 감사를 전할지는 몰랐는지 순간 눈이 커졌으나, 바로 침착히 묵례로 답하였다.


과연 프로다.


조금 감탄하고 있으니 맞은편에 앉은 루비아가 눈을 가늘게 했다.



“리아······”


흠칫.



“아, 알고 있어요. 그, 그래도······”


필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설정이다.


우물거리는 리아를 보며 루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어차피 네가 그럴 거라고는 계산에 들어가 있긴 하니까.”


‘어? 그러면 계속 편한 대로 해도――’



“――그건 안 되고. 적당히 신경은 쓰면서 조심하도록 해.”

“윽······ 네.”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정말 날카로운 감이다.


리아는 속으로 조금 툴툴대면서 건네준 맑은 노란빛의 음료를 마셨다.


그리고 눈을 번쩍!


평소의 느낌대로 “맛있어!!”라고 외칠 대목이었다만······


그러진 않았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참은 게 아니라, 의외로 평범했던 거다.


역시 왕궁이라는 것인지 투명하고, 표면에 날아오르는 새의 조각이 있는 잔은 값비싸 보인다. 담겨있는 음료도 감귤과 오렌지, 라임이 적당히 섞인 맛으로 잔에 뒤쳐지지 않게 나름 괜찮긴 했다.


하지만 곰보 코코넛에 비하면 단맛도 부족하고 깊고도 깊은 풍미가 부족한데다, 목 넘김도 이래저래 조금 미묘하게 달라붙듯 내려갔다.


‘너무 빨리 종결 과일을 알아버린 걸지도······’


――어쩌면 앞으로 맛보는 모든 과일은 곰보 코코넛과 비교하는 게 아닐까.


뭔갈 마시니 조금은 긴장이 풀린 리아가 그렇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면서 속 편히 있을 때였다.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은 공왕과―― 루비아와 같은 주황빛 머리칼의 예쁜 여성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서 함께 들어왔고, 뒤에는 처음 안내해줬던 강직해 보이는 근위대장이 따르고 있었다.


상황적으로 보면―― 아니, 그냥 생김새만으로도 저 처음 보는 여성이 누구인지는 뻔하다.


저리도 닮았으니······


더불어 오엘문리아의 불편한 점을 여실 없이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부모와 자식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저리도 나이 차가 없어 보일 수가 있냐. 진짜로······’


공왕비는 루비아의 언니라 소개해도 충분히 믿을 만큼 젊어 보였다.


왕비라는 직책이니 관리를 잘 받아서, 혹은 좋은 시술을 받았기에 그렇다고―― 지구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할만한 일일지도 모르나, 아니다. 아마 자연산일 거다. 어느 정도는 꽤 관리하고 있겠지만.


더 놀라운 건 이 또한 그리 드물지 않은,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라는 거다.


필리아만 따져봐도 멀쩡히 성장했더라면 외모만은 자신과 큰 차이가 없어 언니라 부를 만한 수준일 거다. 지금도 딱히 언니라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찾아보면 부모가 자식보다 어린 경우, 혹은 반대로 자식이 부모보다 많이 겉늙어 보이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한참 어려 보이는 사람을 부모라고 하는 우겨대기식의 현상이 자연스럽게 널린 오엘문리아다. 물론 만화처럼 대놓고 유치원생을 그려 놓고는 부모나 언니라고 할 정도로 심하진 않겠지만.


아니. 세상은 넓으니 혹시 있을지도?


‘정말 이상한 곳이야.’


오늘도 허튼 생각을 하면서 리아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공왕 부부 내외를 맞이했다.


다가온 공왕비가 우아하게―― 루비아가 좀 더 성숙해지면 딱 저러지 않을까 싶은 모습으로 인사했다.



“만나 봬서 반가워요. 레이니 델리안 루 몬테르여요. 이제야 인사드리는 것에 실례했어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공왕비 전하.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이옵니다. 며칠 신세를 지겠습니다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네. 편히 지내셨으면 좋겠네요.”


공왕비―― 레이니 델리안 루 몬테르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분이 루비아가 말했던?”


‘우······와. 이게 상류층 사람들의 담화라는 건가. 드레스를 놓는 손동작까지도 우아하시네.’



“홈홈.”


일부러 내는 작은 기침 소리――


이건 정해놓았던 신호였다. 평소 맹한 자신이 실수하지 않도록 필요한 순간에 원래 상태로 돌아오라는 지시다.


이 신호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던――루비아가 무서워서―― 리아는 순식간에 각성 상태로 돌입해 맑아진 머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차례임을 인지하고는 바로 정중히 인사했다.



“실례했사옵니다. 꼭 본받고 싶은 공왕비 전하의 아름다운 자태에 잠시 넋을 놓았습니다. 저는 이스피리아. 분에 넘치는 국빈의 신분으로 사절단에 임명된 자이옵니다.”


‘돼, 됐어! 이 정도라면 조금 딴청 피우고 있던 건 넘어갈 수 있겠지?’


뜨끔한 리아는 떨리는 심정으로 주위를 살펴봤다.



“어, 어······ 반가워요, 이스피리아 양. 그리고 칭찬 고마워요.”


왠지 레이니 공왕비가 조금 놀라며 얼떨떨해하는 듯하나, 어쨌든 무사히 넘길 것 같은 기분에 신이 난 리아는 더욱 밝게 이어받았다.


한편에선 즐거운 기색의 루비아가 눈에 띄기도 했지만 큰 문젯거리는 아닐 거다. 실수했다면 그녀는 눈을 부라렸을 테니.



“솔직한 제 맘을 말한 것이니 감사하실 필요는 전혀 없사옵니다, 공왕비 전하.”

“그, 그런가요······.”

“예. 정말 무척 아름다우셨습니다. 평소 루비아 씨의 우아한 행동거지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출처를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또――”

“――마, 말씀하시는 바를 잘 알겠어요. 소베르비아 공주와 함께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역시 공왕비 전하. 모든 걸 듣지 않으셔도 헤아려 주시다니, 탄복했사옵니다.”

“······.”


······뭔가 조금 이상하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어쩐 일인지 레이니 공왕비의 눈동자 초점이 약간 흐릿해진 것 같았다.


‘아, 너무 아부가 짙었나. 그, 그래도 솔직하게 말한 건데.’


그래도 아마 문제는 없을 거다.


필리아의 기분을 푸려 한 일이 많았던 탓인지 아부성 발언만큼은 나름대로 자신 있었다. 필시 어색하게 비치진 않았을 터.


레이니 공왕비는 분명 너무나 좋게 봐주는 것에 조금 당황했을 뿐일 것이다.



“정말 자연스럽네. 리아, 너 그런 아부 짓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암만 봐도 혼자 익혔을 리는 없어 보이는데 말야. 어떤 본보기가 있었던 거야?”


‘어떻게?!’


얄팍한 근거로 가득 차 있던 리아의 자신감은 곧바로 무너졌다. 그렇지만 감히 ‘왕비’라는 신분의 사람에게 실례를 저지를 순 없었다. 이내 당황하면서도 황급히 입을 열어 변명하려 했다.



“아, 아···부라뇨. 전 진심으로――”

“지도 아부라 인식했으면서 무슨. 됐고―― 어머님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리 나쁜 뜻이 있거나 한 건 아니니까. 그냥 생긴 그대로의 얘야.”


이런 아이와 딸이 친해진 게 염려스러운 것인가.


한눈에 보기에도 걱정하는 기색이 다분해진 레이니 공왕비는 아직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가 아니고 자, 작지도 않은데······’


불만스럽지만 차마 말로는 하지 못했다.


게다가 몇 시간 전,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장면이 있었기에 더 대꾸할 맘은 들지 않았다.



“조금 놔두려고 했는데 내가 도저히 못 보고 있겠네. 그래도 나름 놀래주는 건 성공했으니 괜찮은 점수를 줘도 되려나. 일부러 원 상태로 돌아오라 한 보람은 있었네. 그보다······ 아버님. 언제까지 놀라고 있을 거야? 그만 놀라.”

“응? 아아, 그렇구나.”


대답은 했지만, 흥미를 지울 수 없었는지 그란 공왕은 지긋이 리아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러고 있던 공왕은 어째서인지 피식 웃더니 기분 좋은 듯한 얼굴이 되어 옆에 마련된 자리로 가 앉았다.


‘뭐······뭔진 모르겠지만, 자, 잘 끝난 거겠지?’


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아쉽게도 연회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열린 문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입장한 사람들은 일직선으로 공왕 부부 내외 앞에 와 곧바로 예를 올린 뒤 리아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모든 인생을 통틀어 이러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리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답례했다.


하지만 사람은 상황에 금방 익숙해지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몇 사람을 거쳐 가니 어느새 거래처 사원들과 인사하는 느낌이 된 리아는 의외로 편안한 기분이 되어 익숙하게 차례차례 인사하러 오는 공국의 귀족들을 맞이했다.


처음 입장하고 나서의 인사는 말 그대로 안면을 트는 의미만 있는지 자기소개 정도로 간략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 길지 않은 대화였지만, 그래도 제법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시간이 걸렸다.


무지하게 긴 이름을 기억하는 건 전혀 문제없지만, 잘못 들을 수 있으니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유의하며 듣던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의아하다고 해야하나.


귀족 계급의 사람부터 기사 계급의 사람들, 조련사라는―― 공국에만 있다는 특이계급의 사람들까지. 신기하게도 찾아오는 사람들의 구성이 상당히 특이했던 거다. 왕좌의 방에 있었던 중진들도 대다수 있었지만.


이렇게 단독, 혹은 부부가 함께 온 참석자들의 신분은 들쭉날쭉했고, 각각 직책에 맞는 복장을 하고 있어 꽤 색다른 연회장의 모습이었다.


분명한 건 하늘하늘한 드레스와 나풀거리는 정장 차림의 우아한 연회―― 상상하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는 것이다.


‘오오―― 판타지!’


그래도 리아는 그저 눈을 빛내며 좋아했을 뿐이지만.


이윽고 모든 사람이 입장했는지 슬슬 찾아오는 사람이 적어지더니 연회장의 문이 닫혔다.


대략 100여 명쯤 모인 연회장을 한번 둘러본 그란 공왕은 일어섰다.


상석이기에 안 보이는 사람은 없었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던 참석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걸 확인한 그란 공왕은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해준 모든 이들이여 짐은 감사하고 있다네.”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 그란 공왕은 좌중을 주욱 둘러봤다.



“――라며 벨루디스와 루 몬테르 공국과의 우호 증진 같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생략하도록 하겠다네.”


‘응······?’



“우리 루 몬테르 공국은 지금 이 순간부터 벨루디스를 도와 저 지긋지긋한 해충들―― 세인트리안의 침략을 저지하도록 한다!”

“명을 받듭니다!”


갑작스러운 선언에도 일말의 이견 따위―― 반발 하나 없었다.


왕명에 즉시 무릎 꿇고 외치는 자들의 눈은 조용하면서도 뜨거운 열기를 담아갔다. 몇 명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흥분 가득한 눈빛을 루비아에게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루, 루비아 님?! 이, 이건······”


눈을 동그랗게 뜬 라프리트. 정말 놀랐는지 그녀는 공식 석상임에도 이런저런 예의도 차리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리아도 놀란 기색 그대로 루비아를 쳐다봤다.



“뭘 또 물어? 보면 알잖아.”

“그게 아니에요! 이, 이런 곳에서 갑자기 저런 말씀을 하셔도······”


여유롭기만 한 루비아의 모습에 라프리트는 소리를 높였다가 장소를 깨닫고는 작게 말을 흐렸다.


하지만 여전히 루비아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당당할 뿐이었다.



“여기 있는 자들은 전원 공왕가―― 루 몬테르 공국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야. 말이 새 나간다, 같은 쓸데없는 걱정은 불필요해.”

“그, 그래도······ 아!”

“――그래. 방금 인사하러 왔을 때도 변함없는지 확인해뒀어.”

“역시나 그랬군요. ――어? 그러면 설마······”

“또 뭔데?”


대놓고 귀찮아하는 루비아에게 살짝 욱한 표정을 지은 라프리트였지만, 진정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상위자가 모두를 맞이해야 규범이 선다며 공국의 예식이 바뀐 건······”

“아하~ 그거? 번거롭지 않게 바꿔버렸지. 이 내가 일일이 확인하러 돌아다니는 것도 웃기잖아? 뭐, 당시에는 전통이 어쩌구 말이 많긴 했지만.”

“······네?”


상당히 믿기 힘든 말이었는지 멍해진 라프리트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렇지만 오래가진 않았고, 곧 고개를 흔들더니 몸도 살짝 앞으로 내밀고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분명 공국의 예식이 바뀐 건 13년 전이 아닌가요?”

“음······ 그쯤 됐으려나? 시간 참 빠르네.”

“이제 막 성인이시면서 무슨······ 노년처럼 말씀하시는 건 그만두시고. 루비아 님은 정계에서 활동하신 건 9년쯤 되셨던 게 아니었습니까?”


루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 정말 어디서 그런 정보를 구하는 걸까나? 평범하게 알려진 건 5년쯤일 텐데 말이지.”

“······.”

“9년 전이라면 한창 해충과 기생충들을 걸러내던 시기인가? 그땐 아무리 이 나라도 신중해야만 했던 터라 절대 배후엔 도달하지 못하게 조심했는데. 실제로 해충들도 전혀 알아내지 못한 그걸 알고 있다라······ 굉장한 걸 넘어섰는데?”


아차 싶은 표정으로 아무런 말이 없는 라프리트.


그런 그녀를 날카로운 눈으로 보고 있는 루비아.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리아는 조마조마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이리스나 안네, 레딧츠도 긴장하며 신중한 눈으로 사태를 지켜봤다.


에르만은――


아니, 무표정인 에르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눈만은 여태 한 번도 못 본―― 살이 찌릿찌릿 떨리는 듯한 무서운 빛을 담고 있었다.


시뮬레이션하고 있는 평소의 멍한 상태였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테지만, 아직 머리를 맑게 한 채인 지금이라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어째서 라프리트 씨에게······’


리아는 즉시 마법을 사용했다.



『에······르?』

『응? 왜 그래, 리아.』

『어, 아뇨······. 뭔가 고민이 있어 보여서······』

『그래 보였어? 흠. 신경 써줘서 고마워, 리아. 그저 라프리트의 정보력에 감탄했을 뿐이니까 걱정해주지 않아도 돼.』

『그, 그런가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은 잘 모를 때가 많지만, 에르만은 아니다.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


‘착···각 했나?’


그렇게 느낄 정도로 지금 에르는 은은한 미소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방금 그 무서운 눈빛은 전혀 남아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뭔가 고민이 있다면 말해줘야 해요? 우리는······』

『부부는 서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거지? 알았어. 그럼 그때가 오면 부탁할게.』

『맡겨줘요! 절대 혼자 끙끙 싸매고 있지는 마요?』

『응.』


리아는 에르의 손을 잡았다.


특별히 의식한 건 아니고 무심코 한 행동이었는데, 언제나 그렇지만 크고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그의 손은 큰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에르도 덥석 잡는 손을 마주 잡으며 애정 가득한 눈을 보여줬다.


‘으헤헤······ 좋다.’



“어, 어머니?”

“리아 양······?”


부르는 말에 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우응?”

“우응이 아니에요, 리아 양. 여기에서는 그, 그런 일은 좀 참으셔야죠. 갑자기 뒤를 돌아서 그러시면······”

“바보 아빠, 정신 똑바로 안 차릴 거야?! 어머니에게 창피를 줄 셈이냐고?”

“······.”

“아······.”


작게 나무라는 라프리트와 아이리스에게 뭐라 반박할 말은 없었다.


에르도 할 말이 없었는지 무표정으로 돌아와 모르쇠 고개를 돌렸다.


‘나, 나도 모르게······’


부부간 사이좋은―― 애정행각을 벌였는지 자각조차 못 했다.


――어쩌면 나는 깨 볶는 짓이 좀 심한 게 아닌가.


여태 그런 적이 없건만,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요즘 주의를 자주 받는 거 같다.


‘어······ 설마 집에서도 그랬었나?’


혼잣말이라는 묘한 버릇조차 성인이 될 때까지 그 누구도 어색하게 굴지 않은 착한 가족들만 있는 마을이다.


가능성은 매우 크지 않을까.


정답이라는 진실에 리아가 도달할 무렵이었다. 숨을 참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됐어, 정말······. 진짜 남의 눈이 보이지도 않나 봐, 둘 다. 크큭. 잘도 이런 열기 넘치는 현장 속에서 말이야.”

“루비아 씨. 에헤헤······ 그게 말이죠······”

“됐어됐어~ 웃음으로 때우려 하지 않아도 돼. 이게 홀딱 반했다는 건가. 진짜 대단하긴 하나 보네. 너는 그렇다 치더라도 저만한 남자가 냉큼 저러는 걸 보니.”

“치, 칭찬은······ 아니죠?”

“아냐. 나름 좋게 본 거야.”


정말 즐겁다는 듯 루비아는 좀 더 킥킥거리며 웃었다.



“하······ 웃다가 배가 아프긴 처음―― 두 번째네. 이야~ 리아 너도 참 대단해 두 번이나 이 나를 이리 웃기다니.”

“마, 만족해하시니 소생도 무척이나――”


찌릿.


눈을 부릅떠 날카롭게 쏘아보는 라프리트의 시선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주 잡으려던 손을 멈췄다.



“아하하······ 정말 재밌어. 진짜 베르다드에 간 건 좋은 한 수였어. 그렇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좀만 더 집중하고 있어. 둘이서 그렇고 그런 건 나중에 방에서 하도록 해. ――아! 아이리스가 있으면 어색할 수 있으니 방을 따로 배정해야 하나.”

“루, 루비아 님!”

“농담이야. 킥킥.”


좀 전의 무거운 분위기는 말끔히 사라져 화기애애해졌다.


나름 다행스러운 마음이기도 했지만, 루비아의 말대로 연회장―― 공왕의 연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계속 떠들고 있기에는 무례했다. 얌전히 있자.


루비아도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는지 라프리트에게 신경을 거두고 자신을 바라보는 신하들에게 미소 지어주며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라프리트도 이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작게 숨을 토해내고는 벨루디스의 사절단으로 돌아와 진지하게 앞을 바라봤다.


무거웠던 분위기를 한순간에 잠재운 리아도 입을 다물고 세인트리안에게 억압에 가까운 짓을 당하며 조종당하고 있던 공국의 자긍심을 회복해야 할 때라며, 사기를 북돋는 공왕의 말에 집중했다.


다시 시뮬레이션―― 멍한 상태로 돌아와서는 얼굴도 빨간 채로.


‘에, 에르랑 그, 그렇고 그런 걸―― 으히히······ 아, 아냐! 지, 집중해. 왕님이 말씀하시는데 집중해야지 이스리피아! 불경죄라고!’


리아의 마음속, 천사와 악마의 싸움과 같은 불꽃 튄 혈전의 승부를 이어가며 연회장은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작가의말

오늘의 3번째 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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