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새글

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5.01 00:47
연재수 :
261 회
조회수 :
30,068
추천수 :
315
글자수 :
3,647,771

작성
22.06.27 12:55
조회
85
추천
0
글자
25쪽

59

DUMMY

‘어, 어째서 내가 이 자리에?!’


연무장 한쪽에 마련된 정자에서 필므는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미의 방향은 다르지만, 아름답다는 데에는 부정할 수 없는 두 여성과 훗날 분명 미인이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소녀.


이 3명의 여성과 함께하는 식사에 동석하게 된 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여성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나, 혹은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므의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세 명의 여성은 공국의 공주, 벨루디스의 명문이자 유서 깊은 후작 가의 장녀, 그리고 아크티알 네우라 디안 벨루디스의 왕명으로 지정된 최고 국빈이니 말이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일 날 수준을 넘어섰다.


속이 쓰리기만 했다.



“어쩌다가······”

“뭐가요?”

“아, 아뇨. 아무것도요.”


무심코 말로 나왔나 보다.


긴 은발을 찰랑거리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하는 이스피리아의 모습에 잠시 눈길이 갔지만, 다른 말 없이 넘어가 주는 것에 더욱 크게 마음이 쏠렸다.


그만큼 이 자리는 필므에게 있어선 말도 안 되는, 부담만 되는 곳이었다.


‘용기 내지 말 걸 그랬어! 아무리 궁금했다지만!’


어리석었던 자신의 행동이 후회됐지만 이미 늦었다. 기껏 초대한 이 자리에서 내뺄만한 명분도 용기도 없다.



“루비아 씨는 괜찮아요? 이런 곳에서 식사하셔도.”


‘그렇죠?! 한 나라의 공주가 식사할 만한 자리가 아니죠?!! 그러니 저는 빠져도 되는 거겠죠!’



“이런 곳이라뇨. 이스피리아 양과 라프리트 양이 함께하는 자리이잖아요. 저에겐 매우 훌륭한 장소랍니다.”


마음속 응원과 절망이 가득한 외침에도 이 자리는 쉽게 해산되지 않을 거 같았다.


시무룩해진 필므를 뒤로한 채 리아는 물었다.



“그런데 다들 식사는 어떤 걸 준비하셨나요?”


아마 본인의 것만 있으리라.


곤혹스러워 보이는 리아의 말에 소베르비아는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준비해뒀답니다.”


말을 마친 소베르비아는 바로 뒤에 있던 여성 사용인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고개 숙인 사용인은 손에 낀 반지에 뭐라 작게 말을 하였다.


‘저건······ 통신 마도구인가?’


비록 먼 거리가 아닐지라도 통신이 가능한 마도구의 값어치는 어마어마했다. 언뜻 듣기로는 조그마한 상회 정도라면 살 수 있는 가격이라고 들었었다.


그만큼 들어가는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고급품뿐이고, 만들 수 있는 사람 자체가 한정되어 있었다.


쉽게 만들 수 없으니 비싼 거였다.


그런데 소베르비아의 사용인이 사용한 마도구는 반지 형태로 작기까지 했다. 가격은 미친 듯이 치솟을 거다.


‘여, 역시 공주님.’


새삼 다시 한번 굉장한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게 된 필므는 바들바들 떨려만 왔다.



“여러분 모두 드실 양은 될 거랍니다. 물론 필므 씨의 몫도 있어요.”

“저, 정말 황공합니다. 공주 전하.”

“제가 먼저 초대한 것이니 당연한 일이죠.”


고혹한 미소에 필므는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봤다.



“어······ 제 것도 있나요?”

“그리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이스피리아 양이 준비하신 것을 드시고, 모자라시면 그때 더 드셔요.”

“그런가요. 호의 감사합니다, 루비아 씨.”


공주와는 물론, 후작 가의 장녀와도 애칭으로 부르며 친하게 지내는 이스피리아. 며칠 전에는 기숙사 앞에서 라프리트와 서로 껴안으며 우정을 다졌다는 말도 들렸었다.


그러하건만······ 이스피리아는 자신을 평민이라 말했다.


기품 가득한 자태와 부유해 보이는 모습, 특히 방금 교실에서 인사하며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은 고고한 귀족 그 자체였다.


절대 평민이라 볼 수 없었다.


지금도 소베르비아와 라프리트, 둘과 대화하는 모습에서도 어색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신분을 거짓으로 말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진짜로······ 믿기진 않지만, 정말 평민이신 건가. 저런 사용인까지 두고?’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본인이 대귀족이라 해도 그대로 덥석 믿을 만한 남자를 사용인으로 부리면서 평민이라 주장하는 건 좀 억지 같다.


그만큼 남자는 범상치 않은 기색을 뿜어댔고, 학원 내에 있는 여성들은 저 남자를 보고는 볼을 빨갛게 물들이거나, 안보는 척 몰래 흘깃 쳐다보는 사람도 많았다.


또 들리는 주변 말로는 귀족 여성 중에선 꼭 자신의 사용인으로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덕분에 일면식도 없는데도 이름을 알 정도였다.


의도는 뭐······ 다들 다르겠지만, 너도나도 여성들이 탐내는 남자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이만한 남성이니 어쩌면 다른 데에서―― 왕성이라든가 귀족 집안에서 붙여준 사람이 아닐까도 싶긴 했지만, 강의실에서 보여준 행동으로 판단컨대 의무적인 행동으로 보이진 않았다.


암만 프로의식이 충실한 사람이라도 파견 나온 거라면 저리 모시는 사람을 아끼는 듯한 자세를 보이긴 쉽지 않다. 그러니 저 사용인은 오랫동안 이스피리아를 돌보아 온 것일 거다.


그 정도를 간파할 눈은 있었다.


‘이래선 마치 날 시험하는 거지 않나―― 으응?! 진짜로?’


정말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 만난 순간 조금만 입을 잘못 놀렸으면 이미 큰일 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러한 생각이 떠오자 필므의 머릿속엔 다음날 어디론가 아무도 모르게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그대로 행방불명······



“엇?! 아이리스!”


테이블을 짚고 이스피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히익!!”

“아, 갑자기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아, 아뇨. 괘,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소······송구합니다.”

“그렇게 정중히 대하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사라질 수 있는데.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하고 필므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리스 군이라······ 이스피리아 양의 가족분이시죠?”

“네, 루비아 씨. 그러고 보니······ 소개해드린 적이 없었네요.”


뜬금없이 최고 국빈으로 알려진 화제의 이스피리아 일행 중에서 아이리스라는 남자아이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중등부, 자라나는 새싹이기도 했던데다 아이리스는 일반반이다.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니 후에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328이라는 엄청난 마력레벨을 보유하고 굉장한 마법조차도 무영창으로 해내는 이스피리아. 거기에 마법반이면서도 그 그리모르조차 검으로 때려눕혔다고 전해진다.


주목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친목을 다지고자 한다면 필므로서도 아이리스보단 그녀 쪽에 눈길이 갈 거다.


필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스피리아가 바라보는 방향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그녀의 모습을 어렴풋이 닮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자, 잘생겼네.’


분명 저 아이도 나중엔 미남으로 성장하겠지.


또래보다 작고 듬직하지도 않은 필므는 아이리스의 성장한 모습을 떠올리자 조금 좌절감이 덮쳐왔다.


‘역시 원판―― 핏줄이 중요한 건가.’



“저기 아직 식사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남아있죠? 루비아 씨.”

“그렇긴 합니다만.”

“그, 그럼! 잠시 아이리스 좀 만나고 올게요!”

“그러면 저도 같이 가봐도 되겠습니까. 소개도 받고 싶습――”


하지만 소베르비아의 말은 끝맺지 못하고 전해져야 할 사람에게 도달하지도 못했다. 그저 황량이 퍼졌을 뿐이다.


전해져야 할 사람―― 이스피리아가 듣다 말고 황급히 뛰어갔기 때문이었다.


공주님의 말을 듣지도 않고 멋대로 떠나갈 수 있다니······


필므는 더욱더 이스피리아가 평민이 아니라는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역시 자신은 큰 위험을 건널 뻔한 것이다.


‘그런데······ 빠르다?!’


치마차림으로 정자의 담을 훌쩍 뛰쳐나간 이스피리아는 속도를 냈다.


귀한 신분임에도 자유분방한 그녀의 모습에 필므는 신사로서 잠시 눈을 돌렸다만――사실은 보지 말아야 할 곳을 직시하고 곤욕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다시 쳐다본 그녀는 몸이 길게 늘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연무장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모르 교수님을 손도 못 쓸 정도로 흠씬 뚜들겨 패 눕혔다는 게 정말이었구나···’


목격한 사람이 워낙 많아 사실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솔직히 그다지 믿진 않았었다.


그렇지 않은가. 가녀린 소녀가 근육이 울긋불긋한 마초적인 남성을 질질 짜도록 때려눕혔다는 장면이 잘 떠오르겠나.


하지만 마법반에 있는 사람이 저만한 속도로―― 나는 듯이, 땅에 발이 닿지도 않고 뛸 수는 없을 것이다. 무성하기만 한 소문은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굉장하네······’


사는 세계가 다른 것만 같은 사람이다.



“이스피리아 양도 참 급하시네요.”


무시당한 소베르비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재미있어하는 느낌이었다.



“흐음. 잠시 시간이 났으니 이야기해 보도록 할까요?”


필므는 저 멀리―― 주위에 있는 여자아이들이 노려보는지도 모른 채, 화색이 돌아 아이리스를 껴안고 기뻐하는 이스피리아에게서 시선을 뗐다.



“어, 어떤 걸 말씀입니까······? 공주 전하.”

“당신의 용무 말이에요, 필므 씨. 아 참.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도 아직이군요. 저는 루 몬테르 공국의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여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필므 멜리다 씨.”


화려한 공국식 귀족 인사에 필므는 굳었다. 하지만 인사를 안 할 순 없으니 필므는 배운대로 머리를 숙였다.



“자, 자, 잘 부탁드립니다! 벼, 별······ 별 볼 일 없는 작은 상회의 필므 멜리다입니다.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 공주 전하.”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학우가 된 인연이니 편히 소베르비아라 불러주세요. 그리고 이쪽은······”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에요. 잘 부탁해요, 필므 씨.”

“예에······ 잘 부탁드립니다. 라,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 님.”

“저도 편하게 라프리트로 불러주세요.”

“하, 하······”


이름을 불러도 될 것을 허락한 건 어떻게든 받아들일 순 있었다. 그렇지만 공주와 후작 가의 장녀를 진짜로 이름으로만 친근히 부른다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뭔 일을 당할 줄 알고.


억지로 웃고 있는 필므의 얼굴 근육엔 쥐가 날 것만 같았고 속은 더욱 쓰려만 왔다.



“상회 소속이셨나요?”


웃음으로 때워 넘긴 점을 지적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필므는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라프리트 님. 하, 하지만 그리 큰 상회는 아닙니다. 작은 점포 같은 겁니다.”

“그리 자신의 상회를 낮게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필므 씨도 이 베르다드에 입학한 우수한 사람이 아닙니까. 앞으로 상회는 더욱 번창하겠지요.”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장사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일이다.


우수한 자라도 상인으로서는 대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확률은 굉장히 높다.


그런데 그걸 말할 수 있을까?


기껏 높으신 분이 칭찬해주는 것이다. 감사히 여길 수밖에.


필므는 높게 평가해준 소베르비아에게 감사를 전했다.



“상회 이름은 무엇인가요?”

“멜리다······ 상회입니다.”


귀족에게 눈도장 찍는 건 상회로서는 이득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상당히 안 좋은 처지에 놓일 수도 있었다.


멜리다 상회는 아버지 대에 문을 연 정말 작은 상회였고, 귀족이 원하는 물건을 반입할 만한 몸짓이 큰 곳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공주나 후작 가가 원할만한 물건을 들일 수도 없었다.


그러하니 만약 무언가 요청하기라도 한다면 거절할 도리가 없기에, 필므는 혹여 잘못되지나 않을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괜히 상회 소속을 밝혔나.’


하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런 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또다시 지나간 일에 후회됐지만, 이번에도 너무 늦었다.



“어머, 본인들의 이름을 그대로 쓴 상회로군요. 그만큼 책임감과 자부심이 있다는 거겠지요. 저는 그러한 곳을 좋아한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 정말 별거 없는······ 서민들이 살만한 생필품 정도만을 취급하는 작은 상회입니다, 소베르비아 공주 님.”


그러니 공주님이 원하는 어지간한 물건들은 전부 구할 수 없습니다―― 를 에둘러 표현해봤지만······ 알아들은 건지.


웃는 소베르비아의 모습으로는 정확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인사는 이 정도로 해두죠. 천천히 서로 알아가면 되니까요. 자, 그러면 여기 필므 씨의 볼일인 손전등이 여기 있습니다만······”


그녀는 테이블 위, 이스피리아가 놓고 간 손전등을 가리켰다.



“소베르비아 님······”


함부로 남의 물건을 건드리는 건 잘못되지 않았느냐는, 라프리트의 질책 어린 부름에도 소베르비아의 미소는 여전했다.



“흠. 라프리트 양. 그대도 알지 않습니까? 이 물건이 어떤 건지.”

“읏······”

“그러니 이스피리아양이 안 계실 때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번잡할 필요도 없고요.”


무얼? 생긴 건 특이하지만 겨우 [광구]가 새겨진 마도구가 아닌가.


왠지 모르게 심각해진 듯한 분위기에 필므는 당황했다.



“먼저, 필므 씨?”

“네넵!”

“우선 한 가지 약조해주실 수 있습니까?”


공주와의 약속이라는―― 어지간하면 벌어지지 않을 상황에 필므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무, 무엇입니까?”

“그리 긴장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아니······ 이러한 분위기라면 어려운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필므는 살짝 배어 나오는 식은땀을 느끼며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당신이 보고 느낀 것을 그 누구에게도―― 상회의 주인인 당신의 아버님은 물론 어느 사람이 와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을 부탁드려요.”

“엥?”


그런데 생각하던 것보다 정말 별거 아닌 부탁이었다.


상인으로서 기밀 엄수는 필수이기도 하고, 이런 높은 사람과의 약속을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목숨 아까운지 모르는 바보도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쉬운 일이었다.


근데 어찌 된 건지······ 마주 보며 앉아 있던 라프리트가 놀라워했다. 놀란 방향성이 이쪽과는 조금 달라 보였지만.



“물론입니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아뇨. 당신의 생각처럼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하세요.”


마치 마음을 읽은 듯 말하는 소베르비아.


필므는 움찔했다.


잠시 그런 필므를 보고 있던 소베르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상인으로서의 눈썰미는 인정하죠. 이 손전등, 분명 잘 팔리겠지요?”


필므는 또다시 작게 움찔했다.


소베르비아의 말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노교수는 불편할 거라며 좋지 못한 평가를 했다만, 그건 그가 부유한 사람이었기에―― 마력량이 충분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평가였다.


반대로 부유하지 못한――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많은 기능이 들어가면 물론 좋다. 하지만 그만큼 만들기 어려워지며, 단가가 올라간다. 그리고 사용되는 마력도 많아진다.


일반 시민은 마력도 많지 않을뿐더러 물과 청소 등, 기본적으로 여기저기 많은 곳에 마력을 사용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등불 같은 마도구를 사용할 여력이나 있겠는가.


돈도 없는데 마력까지······


마력고갈로 빈혈증세를 겪기보단 조금 어두울 뿐인데 그냥 불편함을 참고 말지. 아니면 횃불을 만들어 쓰거나. 실제로 일반 횃불도 꽤나 잘 팔리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이스피리아가 설명해준―― 사용된 술식은 보지 못했지만, 듣기론 여기저기 술식을 뜯어고쳐 상당히 간략화한 모양이었다.


거기다 소모되는 마력도 기존의 것보다 절반 이상은 절약할 수 있다고 한다. 설치형에서 절반이라고 하니, 어쩌면 저 손전등은 마력의 소모가 더 적을 가능성조차 있었다.


물론 초급 마도구 제작 수업에서는커녕, 상급반이라도 시도 할 수나 있나 의문이 드는 일이었지만, 뭐가 됐든 그녀는 그것을 해냈다.


노교수에게서도 잘못됐다는 지적은 전혀 없었다. 고로 술식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필므가 볼 때는 획기적이기만 했다.


끄지 못하는 불편함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사용하는 데 익숙해지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밝기도 적당히 주변을 잘 비춰줬었다.


솔직히 밝기 조절은 몇몇 군데에서나 필요로하지 실질적으론 거의 쓸모없는 기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민들에게는 금전의 압박과 마력량의 한계가 훨씬 중요한 문제였으니 말이다.



“예. 서민들에겐 확실히 잘 팔릴 겁니다.”


긍정하는 필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라프리트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


그에 비해 먼저 말을 꺼낸 소베르비아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야 그렇겠지요. 없으면 불편하고 못 지낼 정도는 아니지만, 막상 손쉽게 사용 가능한 물건이 있으면 지갑을 열고 싶어지겠지요. 가격도 쌀 테니 더욱이요.”

“그것마저······. 대단하십니다, 소베르비아 공주님.”


어째서 공주가 이런 서민들의 생각을 저리 잘 아나 궁금했지만, 이것 또한 공주가 가져야 할 덕목이라 생각하면 수긍이 가긴 했다.



“솔직하게 추켜세워주는 당신의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들어간 술식이 이리 간단하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술식을 보셨습니까?!”


알고 싶었던 것이기에 필므는 지금 누구와 있는지도 잊고 소리를 높였다.



“예에. 바로 곁에서 지켜봤으니까요. 라프리트 양과 함께. 그렇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전 소베르비아 님처럼 자세히 알진 못했습니다.”


창피한 듯 작게 고개를 숙이는 라프리트. 그런 그녀에게 소베르비아는 미소 짓고 위로해줬다.



“조금만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면 보이는 법이랍니다. 라프리트 양이시라면 금세 저 같은 건 따라잡으시겠지요.”

“······그렇습니까.”


여성들끼리의 따뜻한 모습으로 보이건만······ 라프리트는 조금 분한 듯했다.


아마 자신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겠지.


필므는 빠르게 의문을 집어넣었다. 모르는 게 상책인 것도 있는 법이다.


더 이상 이런 높은 분들의 사정 따위는 알고 싶지도, 발을 디디고 싶지 않았던 필므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저······ 죄송합니다만, 약속과는 어떤······?”

“그렇죠.”


정말 까먹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를 보인 소베르비아는 부채를 우아하게 펼쳐 입가를 가렸다.



“당신이 이스피리아 양을······ 조금 속된 말로 하자면, 등쳐먹진 않을까? 조금 확인을 해봤습니다만, 문제는 없어 보이는군요. 입도 나름 무거워 보이시기도 하고요.”


지금까지의 대화 중 어느 부분에서 자신을 평가했단 말인가.


필므는 경악했다만――


아니다.


중요한 건 소베르비아의 평가 기준을 통과했다는 거였다.


‘만약······ 통과하지 못했다면······?’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자신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라프리트라면 어찌저찌 알고 싶었던 내용은 듣지 못하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소베르비아라면 힘들지 않을까 하는―― 내일 자기는 학원에 있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이 감싸올 뿐이었다.


생존본능이라고 할까. 저 공주님은 눈 밖에 난 사람에게는 자비 따윈 일절 베풀 거 같지 않았다.


작게 오들오들 떨던 필므는 황급히 자리를 뜨려 입을 열려 했다.


대 유행할 돈벌이?


상인으로서는 실격이었지만,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한창 젊은 자신의 인생을 이리 빨리 막을 내릴 순 없었다.


그렇지만 예리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소베르비아가 막아섰다.



“이제 와서 자리를 뜨는 건 무리입니다.”


여전히 마음을 읽는 듯한 지적에 필므는 입을 벌린 채로 멈칫했다.



“이미 이스피리아 양이 보여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녀라면 이제 와 당신이 거절하더라도 분명 마음에 둘 겁니다. 결국 이래저래 보시게 될 건데, 전 번잡한 건 딱 질색입니다. 그러니 그만 단념하시지요.”


어찌 공주에게 토를 달 수 있을까.


후회는 되지만 먼저 자신이 발을 들였다. 그렇게까지 불합리한 처사는 아니었고, 그 정도로 간덩이가 붓지도 않았다. 얌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도저히 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 마도구에 뭐가 있기에?”

“흠. 괜찮겠지요? 라프리트 양.”


잠시 생각하던 라프리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소베르비아는 뒤에 대기하던 사용인에게 눈짓했다.


조용히 다가와 사용인이 정중히 내미는 손전등이라는 물건을 필므는 바라보다 마음을 정하고 받아들었다.


어차피 거부할 수도 없다.



“자, 이제 사용해보시면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작게 융기된 부분에 손을 올리고 머릿속으로 킨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강의실에서는 없던 스위치 기능이 추가된 간단한 사용법의 손전등이라는 마도구.


필므는 설명대로 작동시켜봤다.


그리고 경악했다.


평범해서······


아무런, 특별한 것 없는 단순한 마도구였기 때문이었다.


사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어색했다만, 마력의 소비가 정말 적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구석이 하나 없었다.


‘어째서 겨우 이런 물건에 그리 겁을 주신 거지?’


물론 뜯어고친 술식 자체가 대단한 부분이지만, 일국의 공주나 후작 가의 영애가 조심스러워하며 겁줄 정도는 아니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 껐다 켜보세요.”


이번에도 적절히――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듯한 소베르비아가 말했다.


그녀의 지시대로 필므는 몇 차례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소베르비아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것은?”


필시 본인이 원하던 의미의 경악한 얼굴이 되었겠지. 만족스럽게 보던 소베르비아가 긍정했다.


“예. 당신이 생각하는 물건입니다.”

“이, 이건 이스피리아 양께서 만드신 것이······”

“맞습니다. 저희의 눈앞에서 만드셨죠.”

“그런데 어떻게―― 이건 ‘아티팩트’가 아닙니까?!”

“정확히는 유사 아티팩트 정도라고 할 수 있겠죠. 중심인 핵심 기술은 평범하고, 켜고 끄는 기능만 아티팩트이니.”


‘말도 안 돼······.’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니.


왜 아티팩트가 특별한가. 그건 현존하는 기술로는 더는 만들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만들 수 있는 시점에서 더 이상 아티팩트라 부를 수 없는 거였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으로 널리 제작할 수 있을 때나 이야기.


아티팩트에서 일반 마도구의 위치로 끌어내린 위대한 장인들도 있긴 했다. 극히 드물긴 했지만.


대단한 업적이고 칭송해 마지않을 그런 사람들이지만, 그들 또한 이건 절대 만들 수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었다.


마력의 소모 따윈 일절 존재하지 않는―― 그저 생각한 것만으로 동작하는 마도구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이걸 가능케 하는 인물은 현시대에선 이스피리아만이 유일할 거라 필므는 확신했다.


그만큼 혁신······이랄까. 애초에 기술인지 뭔지도 모르겠다. 제작하는 과정이 전혀 상상되질 않았다.



“마력을 소비하여 마도구가 작동한다······ 당연한 상식이지 않습니까?”


필므는 쇠 막대기 같은 손전등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은 다가와 회수해갔다.



“그렇죠.”

“그럼 이 물건은······”

“저희의 상식밖에 물건이란 거죠. 그리고 이스피리아 양은 그걸 쉽게 만드실 수 있으시고요.”

“그렇군요······”


잠시 침묵을 일관하던 필므는 고개를 들어 소베르비아와 라프리트를 바라봤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무것도요. 필므 씨는 약속을 지키시면 됩니다.”

“조용히 모른 척 넘어가라는 거군요.”


소베르비아는 말없이 미소로 답했다.



“필므 씨가 개인적으로 이스피리아 양과 계약하여 이득을 취하시는 건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말하지 않으셔도 아시겠지요?”

“예. 일방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불공정한 계약 따윈 하지 않을 겁니다. 상품에 대해서도 처음 만드셨던, 마력만 주입하면 작동했던 평범한 마도구로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신뢰합니다.”


어떻게 자신에 대해 그리 잘 파악할 수 있는 걸까?


의문이 든다만, 이만한 사실을 알고도 멀쩡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소베르비아의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이라면 또 어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자신에게 했던 말은 지킬 거 같았다. 그러니 입만 함부로 놀리지 않는다면 무사할 거다.


조금 안도감이 들자 이 상황은 상인으로서 상당히······ 아니, 더는 없을 정도로 매우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이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언제 점포 수준인 멜리다 상회가 이러한 신분의 사람들과 안면을 틀 수 있겠는가.


거대 상회라도 얻기 힘든 기회였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 인맥은 얻어가니 필므로서도 손해만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라는 것으로,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필므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전히 속은 쓰리고, 이제는 위장에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지만.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죠. 슬슬 돌아오실 겁니다.”


작가의말

오늘의 2번째 화입니다!


3번째도... 아마 올라갈 거 같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만렙 히로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2 80 22.07.01 54 0 28쪽
81 79 22.07.01 51 1 40쪽
80 78 22.07.01 58 0 39쪽
79 77 22.06.30 58 0 39쪽
78 76 22.06.30 55 0 14쪽
77 75 22.06.30 63 0 27쪽
76 74 22.06.30 66 1 37쪽
75 73 22.06.30 58 0 19쪽
74 72 22.06.30 65 0 39쪽
73 71 22.06.30 68 1 38쪽
72 70 22.06.30 82 0 40쪽
71 69 22.06.29 72 1 40쪽
70 68 22.06.29 72 0 24쪽
69 67 22.06.29 112 1 36쪽
68 66 22.06.29 80 0 33쪽
67 65 22.06.29 82 0 21쪽
66 64 22.06.29 81 0 38쪽
65 63 22.06.29 84 0 38쪽
64 62 22.06.29 78 2 39쪽
63 61 22.06.28 77 1 23쪽
62 60 22.06.27 84 1 33쪽
» 59 22.06.27 86 0 25쪽
60 58 22.06.27 87 0 26쪽
59 57 22.06.26 99 0 35쪽
58 56 22.06.25 93 1 12쪽
57 55 22.06.25 113 1 18쪽
56 54 22.06.25 103 1 33쪽
55 53 22.06.23 102 1 26쪽
54 52 22.06.23 112 0 42쪽
53 51 22.06.23 106 0 3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