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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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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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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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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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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53

DUMMY

“어째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는 거죠?!”


악에 받친 듯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차분하기 그지없다.



“반대로 묻습니다만, 왜 제가 도와줘야 하는 거죠?”


당연한 일이라는 양 평온하기 짝이 없는 그녀―― 소베르비아에게 기분이 상하여 재차 소리쳤다.



“소베르비아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녀가 터무니없는 누명을 받고 있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죠.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을 성녀라 지칭한 적이 없으니.”

“그런데!”

“라프리트 양? 그대도 벨루디스의 후작 가에서 태어났다면 아시잖습니까. 교단은 약하지 않아요.”


잘 알고 있다.


국가 간의 이해관계조차 넘어선―― 대륙에서 수많은 신자를 보유하고 압도적으로 지지받는 루시아스 교단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이 어떠한 일인지.


그래서 루 몬테르 공국의 공주인 그녀의 힘을 빌리려 한 것이었다.



“그래도 저는······”

“흠. 이해를 못 하시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니면 받아들이길 거부하시는 건가요? 그대가 저에게 온 것으로 보면 아버님이신 리벨리타스 후작님이나, 벨루디스의 왕가 분들에게도 긍정적인 답변은 듣지 못하셨겠지요.”

“······.”

“하아······. 그대도 보기와는 다르게 고집이 세군요. 어쩔 수 없으니 확실히 말씀해드리죠. 한낱 평민을 도와봐야 우리 공국이나, 이 나라엔 조금의 이득도 없다는 거여요. 제국의 도련님들께 가보셔도 마찬가지겠죠.”


아니다. 그녀는 한낱 평민으로 치부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 나는 그녀를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어찌 안 도울 수 있겠나.


하지만 이때의 라프리트―― 나는 부정하려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수긍했다.


내 친구―― 이스피리아에게는 정치적으로 도와줄 메리트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아니야! 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거기서 돌아서지 마! 어째서 넌 그리 쉽게 포기하는 거야!’


울부짖음과도 같은 외침에도 라프리트――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갈색 머리와 적안인 이스피리아가 연행되어 간다.


평소에도 감정의 기복을 거의 보이지 않는 그녀였지만, 호기심 어린 눈을 감추지 못하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눈조차 빛을 잃고, 마음이 죽은 듯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스피리아 양! 제가―― 저와 학원장님이 반드시 도우러 갈 테니 기다려주세요.”


‘아니야! 지금!! 지금 잡아야 해. 다음은 없단 말이야!!’



“라프리트 님······”


무언가 말을 할 듯했던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대로 돌아 교단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안돼!!!’


절규와도 같은 외침을 뒤로하고 장면이 바뀌었다.



“어머. 오래간만이에요, 리카드 씨. 추방당하고 나선 처음 뵙죠?”


학원에 펼쳐진 결계 건너편에서 백발의 이스피리아가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상당한 미녀인 그녀의 미소는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답게 여겨졌지만―― 타인의 피로 온몸이 범벅되어 머리카락조차 새빨간 그녀의 모습에서는 섬뜩함만이 느껴졌다.



“이스피리아 양······”


떨리는 리카드의 말에도 이스피리아의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지난번엔 신세를 졌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제가 왜 왔는지는 알고 있겠지요?”

“전 학생들을――, 아뇨······ 당신에겐 전부 구차한 변명일 뿐이겠지요.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부디 저의 목 하나로 넘어가 주실 순 없습니까? 이스피리아 양.”


마침내 변함없던 이스피리아의 미소가 무너졌다.



“이······제 와서? 너무 당신 좋을 대로만 넘어가려는 거 아니야?”

“······.”


라프리트가 말리는 안네를 뿌리치고 앞으로 나왔다.



“이스피리아 양.”

“어머나, 라프리트 님. 만나 봬서 정말로 반가워요.”


자신이 가르쳤던 그대로 아름다운 인사를 하는 이스피리아는 조금 전과는 달리 호의밖에 생기지 않는 친근한 미소를 품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회포를 풀고 싶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좋지 못하네요. 금방 정리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다행히도 다들 결계 안에 스스로 감금한 꼴이니 금방 끝날 거예요.”

“······.”


라프리트――나――만을 살려준다는 이야기에 여기저기서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나도 살려달라.”하는 아우성들이 솟아났다.


소란스러운 그들을 보더니 이스피리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쾅!!


번쩍하는 빛과 함께 엄청난 굉음이 발생하며 결계가 출렁였다.



“시끄러워. 내가 라프리트 님이랑 대화하는 게 안 보여?! 너랑 너. 먼저 죽고 싶어?”


이스피리아의 말에 혼비백산하여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버섯모양의 뭉게구름과 그 폭발의 여파만으로 인근 민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감히 입을 열 생각을 못 하였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라프리트는 조용히 말을 걸었다.



“이스피리아 양······”

“네! 뭔가요? 라프리트 님.”


해맑기만 한 그녀였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의 정신은 망가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아는 그녀라면, 절대 함부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테니.


잔혹한 소리지만 이해는 됐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누명―― 마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추방당한 것도 모자라 죽이려 들었으니 말이다.


기껏 데려와 놓고 이딴 일을 당한다면 마음에 심한 상처가 될 건 자명한 사실.


우리는―― 이 나라는 스스로의 목줄을 조였다.


‘아니야······ 이 당시의 그녀는 저 때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심한 처사를 당했었어.’


추방당한 그녀를 쫓아, 이미 폐허가 되어있는 그녀의 고향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들어와 30개 가까이 되는 가족의 묘비까지도 전부 무참히 부숴버리는 벨루디스의 군대들······


그리고 틀어져 버리는 그녀.


모든 일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스피리아의 말대로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용서······해 주실 순 없나요?”

“으응? 용서? 제가요??”

“네. 불합리한 처사에 분노하신 건――”

“――지당하다고요? 당연하죠. 누명을 쓰고 죽이려 들어도 반격 하나 안 하고 도망쳤더니, 내 고향까지 따라와서 행패를 부렸는데 화를 안 낼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용서하라고요?”


이스피리아는 리카드를 째려보며 살기를 내비쳤다.


결계가 없었더라면 살기만으로 몇 명은 미쳤거나 죽었을 정도로 농후하기 짝이 없었다.



“······.”


고개를 숙이는 리카드와 말이 없는 라프리트를 밀치고, 벨루디스의 제1 왕자, 레오노반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나, 나는 그대의 고향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니 너, 넘어······ 넘어가 주면 안 되겠나?”


식은땀을 흘리며 딱딱한 미소를 짓는 레오노반.


그런 그를 이스피리아는 조용히 바라봤다.



“너.”

“왜, 왜 그러십니까?”


선민사상이 강한 레오노반이 평민인 그녀의 반말에도 공손히 대답했다.


그만큼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것이었겠지만, 조금 잘못 짚었다. 그는 함부로 나서질 말았어야 했다.



“넌 내가 바보로 보였어?”

“네?”

“음······ 모른 척, 넘어갈 셈이야?”

“무, 무엇을 말입니까?”

“하아······. 포기를 모르는 놈이네. 네가 그 공작을 부추겨서 마녀로 몰아세우게 한 것을 내가 모를 거라 봤냐고.”

“읏.”

“아, 됐다. 기분 나빠졌어. 너―― 먼저 죽어라.”

“컥!”


순간 사라진 이스피리아가 어느새 결계를 뚫고 들어와 레오노반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짧게――


뚜득.


레오노반의 몸이 축 처졌다.



“레, 레오노반님이?!”

“겨, 결계를?!”

“그게 문제가 아니야! 어서! 어서 공격해!”


누가 시작했나. 겁을 먹은 누군가가 공격하자, 동조한 다른 사람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라프리트와 리카드, 안네가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살기 위해 학생들은 멀리서 마법을 쏘거나 무기를 던졌다.



“헤······ 무서워서 다가오지도 못하고 한심하네. 남을 몰아세울 땐 앞장서더니.”


레오노반을 쓰레기 버리듯 집어 던진 이스피리아는 무영창으로 발동한 보호막으로 모든 공격을 막으며――라프리트에게 튀는 공격도 함께―― 학생들을 비웃었다.



“이스피리아 양.”

“아. 잠시만요, 라프리트 님.”


말을 자른 이스피리아는 리카드를 돌아봤다.



“리카드 씨, 당신도 얼른 저쪽으로 가요. 지금 바로 죽고 싶진 않으실 거 아니에요? 저항은 해보셔야죠.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요? 결계 해제도 안 하고 억지로 들어와서 제법 힘에 부치니 가망이 있을지도.”

“멈추시진······ 않는 겁니까?”

“응?? 저들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는 멈췄어? 그리고 너도 멈추거나 말리기라도 한 적이 있어? 오히려 너는 날 팔아넘기기까지 했는데?”

“······그렇지요.”

“응. 그러니까 얼른 저쪽으로 가.”


멀어지는 리카드.


이스피리아는 아직도 빗발치고 있는 학생들의 공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라프리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그쪽은 라프리트 님의 시종? 이셨나요? 으음······ 어떡할까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왔지만 작게 떠는 안네를 보며 고민하던 이스피리아는 잠시 후 퐁, 하고 주먹 쥔 손을 다른 손바닥에 내려쳤다.



“라프리트 님의 시중드는 사람이 없으면 안 되니까, 넌 살려주도록 할게.”


말을 마친 이스피리아는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붙잡으려 라프리트가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녀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리고 베르다드에는 비명이 쉼 없이 울려 퍼졌다.



“우악!”

“커, 커억······”

“괴물······”

“사, 살려줘······”

“꺄아아악!”


처음에는 어느 정도 비등한 양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아마 그녀의 말대로 학원의 결계로 인해 상당히 약화하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 익숙해진 듯, 그녀는 공격을 허용하면서 진을 유지하고 있는 학생과 교직원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런 그녀를 막으려 아군이 휘말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대규모 마법도 사용하며 거세게 저항했지만―― 다친 상처를 곧바로 회복하면서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이스피리아를 막을 순 없었다.


곧 진형은 와해하고 바로 유린이 시작되었다.


목이 뽑혀 죽는 자. 심장이 뽑혀 죽는 자. 사지가 찢겨 죽는 자. 주운 무기로 베어져 죽는 자. 돌풍에 찢어발겨 죽는 자. 용암 같은 불꽃에 녹아 죽는 자. 전신이 얼어 유리처럼 깨져 죽는 자. 땅이 송곳처럼 솟아올라 꼬챙이가 되어 죽는 자.


다양한 방식으로 죽는 자들이 모인 이곳은 자신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준 그분이 말하던 지옥이라는 곳을 방불케 했다.


이때의 그녀는 더 편하고 빠르게 이들을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프리트――나――는 이후로 이스피리아를 만날 수 없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인마전쟁 이후로는 처음으로 구축된 3국의 연합과 세인트리안의 가세에도 불구하고, 이를 단신으로 이겼던 그녀의 모습을 보면 결코 허황된 상상은 아닐 거다.


분명 그녀는 최대한 고통스럽게 이들을 죽인 걸 거다.


‘리아 양······’


소리높여 웃는 이스피리아의 목소리와 피투성이의 리카드가 쓰러지는 걸 끝으로 또다시 장면이 전환되었다.



빛나는 전신 갑주를 입은 성스러운 기사―― 크루세이더라 불리는 최강의 성기사가 대륙에서 모인 맹자들을 이끌고 구원자 혹은 심판자라 일컬어지는 최초의 드래곤······


용왕에게 도전했다.


나라도, 종족도 전부 다른 이들이 모인 목적은 단 하나.


미쳐버린 용왕의 타도.


그렇다. 이들은 무분별하게 대륙을 불태우는 용왕을 죽이고자 뜻을 함께한 것이다.


2000년이 넘는 치세를 자랑하는 마왕까지도 합세한 이 토벌대가 가증스러운 용왕을 타도할 거라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륙 간의 분쟁조차도 ‘생존’이라는 두 글자 앞에 사소한 일이 되어 모든 사람이 한마음이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손을 모아 빌었다.


용왕이 쓰러지기를······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그나마 오래 버티며 잘 싸워주던 마왕조차도 쓰러져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눕혔다. 다른 동료들도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진작에 생명의 불씨가 꺼졌었다.


그에 비해 맹자들의 연공에도 용왕의 암흑처럼 깊고 어두운 가죽에는 조금의 상처도 생기지 않았다. 자그마한 생채기가 나더라도 곧바로 치료하기에 입힌 데미지는 전무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홀로 적은 상처만 입고 서 있던 성기사―― 크루세이더는 자신의 투구를 벗어 던졌다.


그 과정에서 묶었던 머리끈이 풀어졌는지 긴 백발이 흩어졌다.


그렇게 상징과도 같은 백발을 흩날리며 최강의 기사인 그녀,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는 자신의 검―― 벨루디스에서 증정한, 신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신검을 들었다.


그녀는 함께 한 동료들이 쓰러졌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마왕과도 어깨를 견준다는 실력자답게 그녀는 신검을 아름답고, 빠르게 휘둘렀다.


그런데도 미쳐버린 용왕――


――암룡왕은 건재했다.


오히려 암룡왕은 하늘을 날며 가지고 놀 듯 크루세이더의 공격을 가볍게 흘려 넘겼다.


마치 우롱하듯 했다. 겉으로 볼 때는······


하지만 실은 신검을 두려워한 게 아니었을까.


변변찮은 공격만을 하는 암룡왕을 봤을 때 그리 생각했었다.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준 그분께서 말씀해주시기 전까진.


그렇지만――


아니다.


암룡왕은 단지 크루세이더를 공격하는 게 껄끄러웠을 뿐이었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아직 서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암룡왕이 무의식중에 공격하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유 따윈 상관없었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다.


최강이라고까지 칭송받는 그녀의 맹공이었기 때문일까, 분노로 흐려졌던 암룡왕의 눈에 이성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룡왕은 자신의 정신을 차리게 만든 그녀, 이스피리아를 바라봤다.


이제는 눈물을 흘리며 덤벼드는 그녀가 외쳤다.


친구의 원수라고······


그 말을 듣자 무슨 생각인지 암룡왕은 땅으로 내려왔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이스피리아가 달려들었고――


암룡왕은 얌전히 그녀의 공격을 받았다.


여태까지 그 어떤 공격에도 생채기 하나 만들기 어려웠던 암룡왕의 목이 스르르 떨어져 작은 진동을 만들어냈다.



“············.”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지 이스피리아는 깔끔하게 잘린 암룡왕의 목을 멍하니 쳐다봤다.



“······왜?”


목이 떨어졌음에도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은 암룡왕이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감사한다, 용감한 전사여. 그 아일 아직도 기억하고 화내주어······ 정말 고맙다.》


당최 무슨 이야기인지 의아한 암룡왕의 말을 곱씹던 이스피리아의 눈이 이내 크게 떠졌다.



“너는······”


크게 뜬 이스피리아의 눈에서 또륵······ 물방울이 떨어졌다.



《······슬퍼할 거 없다. 그대는 옳은 일을 했을 뿐이고, 나는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은 것이다. 오히려 그대의 손에 죽게 되어 감사할 뿐이다.》


전과는 달리 슬픔이 가득한 이스피리아의 눈물을 암룡왕이 마법으로 닦아냈다.



《그 아이의 친구임에도 그대의 이름을 듣지 못했군. 괜찮다면 알려주겠나?》

“······이스피리아. 이스카르와 필리아의 딸인 이스피리아야. 너는······ 이름이 뭐야?”

《나는 찬크에르레이······ 아니군. 그냥 찬크에르라 불러다오.》

“레이는 너희를 지칭하는 말이잖아. 왜 빼는 건데?”

《사명을 저버린 내가 그 이름을 대는 건 옳지 못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친구이니 편하게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웃는······ 거야?”

《미안하다. 오래전······ 동포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랬다.》

“뭐라고 했길래?”

《자식이 친구를 데려오면 절대 으스대지 말고 친근하게 대하라고 하더군. 미움을 받는다고.》

“···제법 인간을 잘 아는 형제네.”

《그렇다. 그는 인간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

“또······ 다른 형제들에게 들었던 말은 없어?”

《있다. 저 멀리 다른 대륙에 나간 다른 동포가 말했다만, 그곳에선 친구들끼리 모이면 언제나 지식에 관한 토론 같은 걸 한다는 모양이더군.》

“엑. 괜히 모여서 그런 일을 한다는 거야?”

《그렇다고 한다. 나도 잘 이해는 안 되지만.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지내는 게 무척이나 즐겁다고 하더군.》

“그, 그래? 조금 이상한 형제네······. 또 다른 형제는 어때?”

《다른 동포는······》


이스피리아와 찬크에르는 이후로도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성기사와 목이 잘린 용왕.


둘이 대화하는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지만, 허허벌판인 황야에서 이스피리아와 찬크에르는 웃기까지 하면서 즐거이 대화를 나눴다. 마치 절친한 친구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잠시······


찬크에르의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됐다. 죄를 지은 나에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이스피리아.》

“리아······. 리아라고 불러줘, 찬크에르.”

《친한 존재끼리는 애칭으로 부른다고 하는 것인가?》

“그것도 형제에게 들었나 보네. 맞아, 편하게 불러줬으면 해. 친구의 부모에게는 그 친구도 편하게 불리고 싶은 법이거든.”

《그런가. 알았다, 리아.》

“응······”


이스피리아는 천천히 다가가 찬크에르를 쓰다듬었다.



“잘자, 찬크에르.”


눈에 새겨두려는 요량인지, 찬크에르는 한동안 잠자코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 작게 말하였다.



《······만약···》

“응?”

《만약, 다시 그 아이와 만난다면······ 또다시 친하게 지내주지 않겠나?》

“으음······ 극성맞은 부모가 난리 치지 않는다면 고려해볼게.”

《후후. 그땐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꼭 지켜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당신도 나랑 함께 그 아이와 놀아보는 건 어때? 괜찮아 보이지 않아?”

《그렇군. 그러한 날이 온다면······ 그러도록 하지.》

“그 말도 꼭 지키도록 해. 거절하거나 내뺀다면 붙잡을 테니까 도망칠 생각하지 말라고.”

《······.》


대답 대신 미소를 짓는 듯한 찬크에르가 눈을 감았다. 그러고도 계속 쓰다듬던 이스피리아는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그 아이의 부모······였구나······. 나는――”


무슨 일을 벌일지 알고 있기에 그녀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은 꿈······


단순한 꿈이었다.


말릴 수도 없고, 눈을 감아 시선을 돌리고 싶어도 이스피리아가 검을 드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촤악.


살을 베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절규했다.


라프리트――나――인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준 그분······ 세린 님의 절규일까.


그렇지만 뭐가 됐든 이 불합리함은 참을 수 없었다.


왜 그녀의 끝은 전부 이런 것인가. 어째서 그녀를······ 내 친구를 도와주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인가.


울분이 가득 찬 라프리트의 외침 꿈속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그런데 그때――


어느 때에도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를 짓는 친구와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마주 보는 남성이 스쳐 지나갔다.


‘아아······ 다행이야.’


무심코 미소를 지을 정도로 라프리트는 큰 안도감에 휩싸였다.


‘드디어 그녀에게도――’



“아가씨! 라프리트 아가씨!”


몸을 흔들며 애타게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라프리트는 눈을 떴다.



“아······안네?”

“아가씨! 괜찮으세요?”

“우응? 뭐가――”


말하고 있는 도중 손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안네가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눈가를 닦아줬다. 그것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그래······ 그 꿈을 꿨군요.’



“아가씨, 괜찮으신 겁니까······?”

“응 괜찮아. 고마워, 안네.”


아직도 걱정스러운 얼굴인 안네에게 라프리트는 웃어 보였다.



“자, 빨리 준비해야지. 리아 양을 기다리게 할 순 없어.”


잠시 라프리트를 보던 안네는 고개를 숙이고 등교 준비를 하러 갔다.


라프리트는 계속 자신을 신경 쓰는 안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하며 태연하게 행동하려 했다. 심란한 심정도 이제 리아를 만나러 가야 하니 굳세게 마음을 먹어 다잡았다.


똑똑.


리아의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자 곧바로 열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본인이 직접 문을 열며, 너무나 밝은―― 꿈속에서의 그녀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빛나는 듯한 미소가 반겨줬다.



“좋은 아침이에요, 리아 양. 잘 주무셨나요?”

“네. 저야 맨날 잘 자죠. 라프리트 씨도 잘 주무셨어요?”

“그럼요. 저도······ 예. 저도 물론 잘 잤답니다.”

“응?”

“리, 리아 양. 어, 어서 가보도록 하죠.”

“네에······”


고개를 갸웃하는 리아의 손을 덥석 잡은 라프리트는 얼버무리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후로도 조금 마음이 다른 곳으로 떠났던 터라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분가의 세리오의 수업을 들음에도 멍하니 넋이 나간 듯 시간을 보냈다.



“저기······ 라프리트 씨.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수업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리아가 물었다.



“어. 아뇨. 아무런 고민도 없답니다, 리아 양.”


최대한 태연한 척 꾸며 대답하였으나, 리아는 말없이 자신을 쳐다볼 뿐이었다.


‘역시 리아 양은······’


이런 착한 자신의 친구이기에 그러한 미래는 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리아에게 다가올 수백만 가지나 되는 미래―― ‘엔딩’이라는 것을 제법 잊게 되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어느 하나라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끝이었다고.


그래도······ 이번만큼은 다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약간 마음이 홀가분해져 조금은 더 자연스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후훗······. 사실 약간 고민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요.”

“그······런가요? 만약 힘드시다면 언제든지 저에게 상담해주세요. 이번엔 제가 힘이 되어 드릴게요.”


이번이라니――


알고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저 오늘 꿈을 꿔서 그리 생각하는 것뿐일 거다. 분명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닐 것이다.


그런데다 이쪽은 그녀를 도왔다고 할 수도 없었다.


언제나―― 언제나 중요한 순간마다 물러섰으니까.


‘한심하게 말이죠.’


꼴사나운 이전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지만, 여전히 멋진 미소를 보여주는 리아를 바라보니 라프리트도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올랐다.



“예. 그럼, 호의에 기대어 한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어떤 건가요? 맡겨주세요.”

“내일 주말이기도 하니 저와 함께 이곳, 수도 아네픽시르를 관광하러 가실래요?”

“관광이요?! 당연히 좋아요! 꼭 가고 싶어요.”


벌써 놀러 가는 것이 기대되는지 리아는 굉장히 기분 좋은 듯했다. 그렇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리아와 함께 놀러 다닌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후작 가의 장녀인 자신과 함께 다니면 리아에게 폐를 끼친다는, 자신을 향해오는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한 주제에 전부 그녀를 위한 것이라며 변명한 저주스러운 자신 때문에······


그러니 이번엔 용기를 내보았다. 그때와 같은 허무함과 후회로 물들고 건 두 번 다시 사양이다.


굳은 다짐과 함께 도착한 서쪽 기숙사 앞에서 라프리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리아 양. 전 이만 여기서 헤어져야 할 거 같아요.”

“아. 오늘 집에 돌아가 보신다고 하셨죠. 어?! 그러면 혹시 저 바래다주러 일부러 같이 오신 건가요?”

“아니에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제가 리아 양과 함께 가고 싶었을 뿐이에요.”

“우으······”


우물쭈물하던 리아가 눈에 힘을 주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라프리트에게 달려들어 껴안았다.



“리, 리아 양?!”


안네와 찬크에르, 아이리스도 놀라는 가운데, 리아는 배시시 웃었다.



“예의 없이 미안해요. 그래도 라프리트 씨가 제 친구인 게 고맙고, 행복한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헤헷······”

“리아 양······”


라프리트는 고개를 내려 머리하나 밑에서 올려다보는 리아를 마주 봤다.


이전―― 꿈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많이 작은 내 친구, 이스피리아. 그리고 알고 있던 것보다 더욱 연해진―― 새하얗다 못해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와 연한 적색이 아닌, 분홍빛으로 변한 눈.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벨루디스의 건국왕조차 넘어선 초월자에 당도했다는 증표였다.


생물의 한계를 벗어나 그로 인해 성장도 느려진 리아지만, 그 당시와 비교해도 전혀 변함없이 순수한――


‘아니죠. 그때보다도 훨씬 맑디맑은 눈이에요. 분명······ 그와 저 아이가 있어서겠지요.’


게다가 원래의 갈색의 머릿결과 적색의 눈을 한 리아나, 현재의 색이 연해진 리아나 똑같이 자신의 친구였다. 그건 변함이 없었다.


찬크에르와 아이리스를 한 번씩 바라본 라프리트는 자신도 리아를 포근히 안아줬다.


이전이라면. 아니, 지금이라도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는 기숙사 입구 앞에서 귀족의 체면을 버리는 이러한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남들의 시선보다 친구의 이 마음에 답하지 않는 것이 훨씬 두려운데.


‘이번만큼은······’


라프리트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앞으로는 절대로 변명하면서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리아 양.’


맹세와도 같은 각오를 하며 라프리트는 얼굴도 파묻으면서 조금 힘을 주어 리아를 껴안았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이게 진짜 오늘 마지막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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