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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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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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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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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3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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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DUMMY

“으허······ 지, 지쳤다.”


연회가 끝나고,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참석자들이 모두가 나간 실내에서 리아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 숨을 토해냈다.


그렇지만 노인네처럼 보이는 행동은 조금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왕이 남아있는데 말이지. 외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괜찮나요?”

“아, 네. 그냥 정신적으로 피곤한 거예요. 몸은 팔팔해요.”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미소 짓는 리아는 확실히 지쳐 보이긴 하지만, 말대로 낯빛만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생생해 보였다.



“어쩔 수 없어. 리아, 너는 앞으로 이런 일들이 많이 생길 거 같으니까 귀족식 연회에 조금 익숙해지도록 해.”

“넵······”


풀이 죽어 질색하면서도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보통 귀족들의 연회라는 것은 허례허식으로 가득한―― 겉만 번지르르하고 자신의 심중을 숨기며 상대의 속은 떠보는, 무기 없는 전쟁터 같은 곳이니까.


그런 곳에 익숙해지기란 여간 쉽진 않겠지. 충분히 질색할 만하다. 거기에 리아는 꼬마처럼 딱딱한 분위기를 싫어하기도 하니 더욱 그러했을 거다.


‘그래도 이번에 준비한 연회는 그러한 암약이 활보하는―― 적어도 벨루디스에서 열리는 연회 보단 꽤 편한 자리였겠지.’


추린 사람들로만 구성하긴 했지만, 이곳에 온 참가자들은 이상하리만치 리아에게 호의적이었으니까.


우르르 몰려와 리아에게 학원 생활은 어떠냐, 공주님과는 평소 어찌 지내시나, 즐거워하시나 등을 묻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또 열성적인 그들에게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그걸 일일이 대답해주던 리아도 참 좋은 구경거리였다.


‘도대체 뭐라 설명해 놓은 거야. ······대충 예상은 가지만.’


어찌 됐든 준비한 것들은 완벽히 잘 끝났다. 현재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은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다.


‘아! 자기 먹을 게 없는 줄 알고 애처롭게 사람들을 둘러보던 모습은 좀 웃겼지. 아~ 정말 따로 준비해두길 잘했어. 매번 그런 재미난 반응을 보이니 장난을 치게 된다니까.’


육류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줬을 때 리아의 반응――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감동하면서도 침을 질질 흘릴 거 같은, 동시에 여러 감정을 보여주는 진귀한 재주는 진짜 각별했다.


떠올리니 웃음이 나올 뻔한 걸 참고 루비아는 말했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니까 방에서 쉬고 있도록 해.”

“네?!”


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 수 있어 다시 한번 나올 뻔한 웃음을 참아냈다.



“불만이라면 리카드 놈에게 해. 그 녀석 덕분에 늦게 왔으니까.”

“어······ 그래도 아직 밝은데요······”


의외로 이 아이도 고집이 세다.


‘아니, 그냥 보이는 그대로인가.’


떼쓰는 아이만큼 다루기 귀찮은 것도 없다. 말도 안 되는 걸 우기기만 하고 이성적인 대화 따윈 불가능하니까.


정말 질색하는 분류 중에 하나다.


이런 애들의 대응법은 대충 만족할 만한 거리를 던져주는 게 최고다. 그럼 또 알아서 대충 만족하고 잠잠해진다.


‘뭐······ 리아는 그 정도까진 애가 아니지만.’


루비아는 대기하고 있는 사용인을 쳐다봤다.



“성의 안내를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공주 전하.”


무시했다고 생각했나, 불만이 가득해져서 입을 살짝 삐쭉이는 리아다.


그런 모습에 루비아는 슬쩍 고개를 내려 리아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자 리아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불만 같은 건 완전히 사라졌다.


쉬운 아이다.


‘정말 사람 웃기는 재주 하난 탁월하네. 이 내가 입가의 움직임을 계속 예의주시하게 만들다니.’


어느 귀족도 해내지 못한 일을 손쉽게 해내는―― 정말 무시무시하고 두려운 꼬마다.



“푸흡.”


주위에서 의아하게 쳐다본다.


빠르게 부채를 펼치긴 했지만 가리는 게 조금 늦었다. 거기에 감정이 새어 나오기까지.


이딴 기초적인 실수는 2살 이후로는 그다지 한 적이 없었건만, 리아와 관련되면 이러한 상황이 자주 연출 됐다.


‘건방진. 리아 주제에 말이야.’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무것도 아냐. 라프리트, 너도 같이 다녀와. 생각보단 꽤 재밌을걸?”

“루비아 씨는요?”

“난 아직 이야기할 게 남아있어서. 내일 합류할게, 리아.”

“음······ 알겠어요.”


아버님과 어머님을 번갈아 보는 것으로 보아 리아는 오랜만에 만난 부모와 이야기 좀 하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름 맞긴 하지만······


자신은 배려할 줄 아는 여성이라는 듯 저 혼자 뿌듯해하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냥 알아볼 정도로 표정 관리하나 제대로 못 하는 리아를 보면 가당찮다.


움찔――


‘음음. 조심해야지.’


루비아는 멋대로 움직이는 입가를 자제했다. 저 리아와 같은 수준이 될 순 없지 않은가.



“먼저 실례하겠사옵니다.”

“네. 잘 쉬시고 내일마저 대화하도록 하죠.”


과연 영애의 모범이라는 명성대로 깔끔하게 라프리트가 인사하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곁에서 완벽한 듯 보이면서도 어딘가 조금 어색한 리아가 따라 하고는 그대로 퇴석하였다.


사이좋게 대화하며 나가는 둘을 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자신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여기선 양보해주기로 했다.


――할 일이 있으니.


내일 잔뜩 보충하면 될 거다.


문이 닫히고 루비아는 뒤를 돌았다. 돌아본 시선에는 물어볼 게 많다는 듯한 표정의 공왕과 공왕비―― 부모님들이 있었다.



“자,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알았다.”


이야기야 집무실 쪽이 보안도 잘 되어 있고 좋았지만, 왕이란 자리는 그다지 시간이 남아도는 직책이 아니다.


나라 안에서 흐르는 모든 일을 처리―― 도와주는 사람은 있지만, 결정은 왕이 하는 것이다.


한두 가지 사안도 아니고, 각 지방에서도 올라오는 안건을―― 그것도 추린 것인데도 하루에 수십 건이 올라와서 씨름해야 하니 바쁜 거야 당연했다. 그렇다고 후일로 미룰 수도 없고.


미루면······ 미룬 만큼 나라 꼴이 엉망이 될 거다.


가까운 곳에 반면교사인 벨루디스도 있다.


아무리 놀려고 꾀를 쓰는 공왕이라 하더라도 자기 대에서 공국을 망칠 수 있다는 겁은 날 테고, 공무만큼은 함부로 땡땡이치진 않았다.


‘뭐······ 벨루디스는 밑의 것들이 난리라서 행정 처리가 제대로 안 되는 거라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어쨌든 왕의 시간은 다른 자들보다 몇 배나 귀중한 것이었다. 함부로 뺏을 수도 없으니 보안과 모양이 나쁘더라도 모두가 빠져나간 연회장에서 대화하는 거다.


‘사실 핑계지만. 아버님의 시간은 널널하니까.’


거의 대부분의 일은 자신이 정리해두고, 공왕은 시행하며 착오를 확인하는 정도다. 시간은 다른 왕들보단 상당히 여유롭다. 오라버님들도 돕고 있으니 더더욱 여유만만일 거다.


아마 신하들에겐 바쁜척하며 혼자 은밀한 놀거리를 즐기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도 굳이 연회장에서 대화하는 건······ 변덕이랄까. 그냥 귀찮아서였다.


언제 집무실까지 가고 또 방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해충이 들어올 자리는 확실히 막아놔서 안전한데 아무 데서나 이야기하면 되지.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순 없고, 부모님들도 한시라도 빨리 듣고 싶어 하니 장소 같은 건 대충 정해도 될 거다.



“흠······ 모두 물러가거라.”


공왕의 명에 근위대장, 디카이로트와 레딧츠를 제외한 전원 고개를 숙이곤 방에서 나갔다.


모두 나가서 휑해진 방안에서 공왕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지 말없이 고뇌에 잠겼다.


그렇게 한 3분여가 흘렀을 무렵, 공왕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루비아. 정말 괜찮은 게냐? 되돌리려면 아직 늦진 않았다.”


걱정이 어린 말과 진지한 얼굴에 루비아는 싱긋, 깔끔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승산은 높――다라고 하긴 그렇고, 얼추 반반쯤은 돼.”

“반이라······. 나라의 명운을 걸고 도박을 하기엔 너무나 낮은 확률이군.”

“도박이라니.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전략전이야. 운에만 모든 걸 맡긴 그딴 놀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도박도 나름의 전략은 있다만?”

“당신······?”

“아, 아니라네! 성 마을로 내려가서 내기 같은 걸 한 적은 결단코 없다네!”


공왕, 그란은 필사적으로 무죄를 주장했으나······ 이건 꽤 위험한 발언이지 않을까 싶다.


레이니 공왕비도 이 말의 허점을 눈치챘는지 눈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렇다는 건 마을엔 몰래 내려가셨다는 거군요.”

“아······”

“디카이로트 근위대장님.”

“예!”


호명된 디카이로트는 뒷짐을 진 상태로 허리를 폈다.



“폐하와 함께 마을로 간 적이 있습니까?”

“시찰을 위해 보름 전, 3시간 동안 다녀왔습니다.”

“그때의 행색은 어땠나요.”

“허름한 행색으로 백성들과 분별하기 어렵게 했사옵니다.”


창백해진 공왕이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꽤 절박했는지 근엄한 말투도 사라졌다.



“자, 잠깐. 그건 시찰을 위해서야. 대놓고 왕이 간다면 일상적인 백성들의 생활 같은 걸 볼 수 있을 거 같아?!”

“일리는······ 있군요. 백성들의 생활을 보다 가까이에서 접하고 직접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시려 한 폐하의 깊은 뜻은 알겠습니다.”


정말 그런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란은 안도하는 행색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런 그란을 보며 레이니는 그리 궁금하지 않다는 느낌으로 툭 내뱉듯 말했다.



“하온데 백성들은 사이에선 무슨 내기가 유행이온지요?”

“아? 어······ 그러니까 요샌 라타로 하는 경주 레이스가 인기―― 헛!”

“헤에~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런데다가 ‘요새’라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전엔 어떤 내기가 유행하셨는지도 잘 아시는 듯하군요.”

“······”


식은땀을 흘리는 그란에게서 고개를 돌린 레이니는 물었다.



“디카이로트 근위대장님. 폐하께선 얼마를 버셨습니까?”

“······.”


고민이 가득해진 디카이로트는 힐끔 그란을 쳐다보더니 마음을 정한 듯 눈을 감고 대답했다.



“총 20번의 내기 끝에 주금화 4장을 잃으셨습니다.”

“네, 네놈! 내 그리 은밀히 해달라 했건만――”

“――그냥 구경만 한 줄 알았는데, 내기까지 참가하셨다고요? 왕이란 사람이요? 거기다 따지도 못하고 잃으셨다고요??”


레이니가 하도 자연스러워서 그랬나. 단순히 떠보는 말이었는데 모든 걸 불어버린 디카이로트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이미 말은 떠났고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디카이로트도 뒤늦게 눈치를 채고 흠칫했지만, 감히 끼어들진 못하곤 그저 미안하다는 눈만을 그란에게 향했다.



“자, 잠시······ 그, 그래! 이 또한 백성들의 놀거리를 알기 위함으로 직접 참여해야만 보다 생생히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랬다네.”

“거짓말까지 하시고요? 그런데다가 알아보신다면 두어 번이면 되실 텐데, 굳이 20번이나 참여한 이유는 뭔가요?”

“······그, 그건.”

“변명은 됐습니다. ······일주일간 각방을 쓰도록 하죠.”

“그것만은――! 다, 당신이 없다면 무슨 낙으로 밤을 지내겠는가?! 외로이 홀로 잘 순 없다네!”


벌떡 일어나 외치는 말에도 레이니는 흘깃 쳐다보기만 했을 뿐 대꾸해주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나, 그란은 넋이 나간 얼굴로 힘없이 쓰러지듯 도로 자리에 앉았다. 어머님을 무척이나 아끼기에 충격은 상당해 보였다.


하지만 자업자득――이랄까, 오늘이 처음도 아니건만 어째서 맨날 이리 끝날 줄 알면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다 놀았어?”

“논다니 무슨 소리 하느냐?! 심각한 문제――”

“――당신. 반성이 부족해 보이네요. 2주로 늘릴까요? 전 혼자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요.”

“너무하네······”


2주로 늘린다는 게 너무하다는 건가, 아니면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한 게 너무한 건지. 모호한 발언을 한 그란은 팍 기가 죽어 고개를 떨구었다.


여러모로 나름 볼만한 구경거리다. 재미도 있고.


하지만 지금의 사안은 중대했다. 쓸데없는 짓에 마냥 시간을 보내기엔―― 내일 자신이 놀 시간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따위 일은 참을 수 없지.’


어딘가 그란과 사고구조가 비슷하지 않나 싶은 의문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 조금 고개가 갸우뚱거리기도 했지만, 루비아는 가볍게 내리누르고 입을 열었다.



“바보 같은 짓 그만하고. 궁금한 것들이 있을 거 아니야?”

“음······ 그렇지.”


그란은 왕으로서 그리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뒤떨어진 무능한 왕도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한심한 얼굴을 갈아치운 그란은 왕으로서의 위엄을 되찾고는 진지한 시선을 보내왔다.


이에 레이니와 디카이로트도 자세를 다지고는 바라봐왔다.



“서한을 받았다만······ 내 보기엔 저 여식―― 이스피리아라는 애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 진 잘 모르겠더구나.”

“뭐, 겉보기엔 믿음직스럽진 않지. 어머님은?”

“제가 보기에도 뭔가 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았어요. 하지만 루비아가 적극 추천하는 거니 무언가 굉장한 점이 있겠죠.”

“디카이로트 경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마법사라 하기엔 지척에서도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몸동작도 여기저기 빈틈투성이였습니다. 저에겐 평범한 아이로 보일 뿐입니다. 어째서 공주 전하께서 그리 원하시는진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그렇군.”


실로 지당한 평가에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비슷한 평가를 했기에 셋의 평가가 전혀 의아하지 않았다.


다만 서신의 내용을 제대로 못 본 듯한 디카이로트는 그렇다 치지만, 부모님들의 평가는 좀 의외였다.


그런 생각을 알아봤는지 그란은 무겁게 말을 꺼냈다.



“해충―― 세인트리안은 약하지 않아. 한 방 먹여두면 앞으로가 편해질 거라는 건 알겠다만, 실패한다면 여파가 만만치 않을 거야. 지금이 기회라는 건 네가 보낸 서신으로 이해는 했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이길만한 승리 요소가 너무 적어. 아무리 마력레벨이라든가, 여러 가지 기묘한 기술을 사용한다지만 한 개인만 믿고 참가하기에는 불안한 점이 많아.”

“잘 알고 있어―― 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볼게. 신성들이 얼마나 강한지, 아버님은 알아?”


뜬금없는 말에 그란의 눈이 동그래졌으나, 이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심판관들이라 불리는 그들이 어느 정도――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알아야 작전의 정밀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란도 뜻하는 바를 알았는지 침착해지고는 조금 말을 끌면서 입을 열었다.



“으으음. 나도 정확히 아는 건 없다. 너도 알다시피 그들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도 남아있지 않으니. 다만, 아직 내가 왕세자였을 때 성기사단의 단장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베르다드에서? 동창이었다고 했었나?”

“그렇단다.”


그란은 추억을 회상하듯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 되었다.



“치유마법은 차치하더라도 그 전투력만큼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전혀 학생 수준이 아니었어. 최상급반은커녕 교수 중에서도 그와 견줄만한 실력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 그러한 자가 학원에 왔는지 궁금했을 정도였지. 짐작하기로는―― 일반 성기사도 이만큼이나 강하다는 의미로 세인트리안이 과시하려 보냈겠지만.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거다. 그는―― 리시타 비론 브리타스는 그 당시 정말 일개 성기사 단원이었을 뿐이야.”

“아직도 기억할 정도라면 해충의 의도대로 눈도장을 제대로 남기긴 했네. 어쨌거나 지금이라면 더 대단할 거란 거지?”

“그렇지. 지금이 전성기일 거다. 분명 더욱 엄청나졌을 테지.”


그란과 동창이라면 현재 리시타 비론 브리타스의 나이는 대략 80 언저리······ 확실히 힘 뿐만아니라 경험까지 쌓인 노련한 베테랑이 되어 있을 시기다.


추측하기론 그란이 기억하던 그와 현재의 리시타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을 듯 보인다.


이전―― 질서의 주교와 포용의 주교가 공국에 방문했을 당시, 그 둘을 수행한 청발의 수려한 생김새의 남자를 떠올려보며 루비아는 물었다.



“그래서 아버님은 신성들이 리시타랑 비등하거나 더 강할 수도 있다고 보는 거지?”

“아마도. 내 생각엔 신성으로 추앙하고 있으니 그자보다도 강할 거란 예상이다.”


루비아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일당백에 달하는 자라면 삼백 명 정도를 투입하면 충분히 제압 가능했다. 일당 삼백이라면 구백여 명을―― 곱절에 달하는 인원을 투자하면 되었다.


하지만 일당 천을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더 이상의 숫자놀음은 의미가 없었다.


자신도 옛날에는 개인의 강함 따위야 압도적인 숫자의 우위 앞에서는 간단히 쓰러지리란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강자라는 걸 만만히 보았다고 해도 좋았다. 어렸을 때의 자신은 그딴 건 별거 아니라고. 분명 그리 믿고 있었으니.


그렇지만 레딧츠―― 카딜라신디의 수령인 그를 만나고 나서는 그 인식이 바뀌었다.


레딧츠의 능력은 여태 보아왔던 그 어떤 자보다도 뛰어났다.


정면 대결이 아닌―― 암살로 천여 명을 처리하라고 하면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단 한 명 남김없이 도륙할 수 있으리라. 당연히 정체 같은 건 들키지 않고.


그 이상―― 목표가 2천 명이라도 시간의 경과만이 다를 뿐 결과는 똑같이 단순 작업을 하는 것처럼 깔끔히 해낼 거다.


디카이로트도 뛰어나긴 했다. 근위대장을 맡을 정도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기사다.


그와 레딧츠가 대결한다면 나름 괜찮은 승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더러운 암투도 마다하지 않고 그에 필요한 기술마저 갖추고 있는 레딧츠와는 쓰임새가 다르다. 폭넓은 활용도 측면에서는 절대 따라올 수 없고.


그렇지만 그건 레딧츠보다 떨어진다는 거지 일반 평범한 시민들보단 무얼 하든 더 잘 해낼 거다.


그런 점을 알 수 있게 된 덕분일까. 강자 한 명이 얼마큼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이걸 몰랐거나 여전히 별거 아닌 취급이었다면······ 언젠가 중요한 순간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중요한 걸 일찍 알 수 있었다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레딧츠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고 여길 정도였다. 물론 절대 입 밖으로 낼 일은 없지만.


뭐, 어찌 됐든 이러한 강자들을 막을 수 있는 건 비등한 자뿐이다. 어설프게 실력 좀 있는 자로서는 그냥 먹이. 그저 일감이 늘었단 것 그 이상도 아니다.


‘그러니 아버님이 굳이 레딧츠를 비교 대상으로 꺼내지 않는다는 건······’


그란은 레딧츠가 어떠한 자였는지 안다.


그럼에도 이렇다는 건······ 그란은 신성이란 자들이 레딧츠를 훨씬 뛰어넘는 강자라 보고 있다는 것이다.


‘골치 아프네. 강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내 예상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네.’


곧이곧대로 듣기엔 솔직히 걸리는 점이 없진 않지만, 실제 성기사단의 단장과 3년을 학우로 지내본 그란이니 어느 정도는 신뢰할 만한 정보긴 했다.


거기에 리시타에 대해 말하는 그란에게선 부정적인 감정이 없었다.


해충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란의 이러한 평가로 생각해보자면 리시타는 상당 부분 뛰어난―― 적어도 머리는 꽤 유연하게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러한 자일수록 귀찮은데······


‘흐음······ 우리 쪽도 패를 늘려야겠네. 하지만 그러려면 심판관―― 신성이 몇 명 있는지를 알아야 할 텐데. 그걸 알아야 패를 맞추든지 말든지 하지. 라프리트는 알고 있으려나? 모른다면 대충 인원수를 채워야 하나. 또 제국은 어떻게 나올지 봐야 하는데. 결과야 돌아가면 알 수 있을 테지만··· 만약 인원수가 부족하면―― 아냐, 그만두자.’


머리 위로 방실방실 어벙하게 웃는 꼬마애가 떠오르자 루비아는 고개를 저어―― 상당히 승산이 높은 최적의 방안을 배제해버렸다.


왠지 그 꼬마의 미소가 흐려지는 건 좀 보기 싫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동시에 께름칙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하리만치······ 그리움이 든다.


‘응?’


갑자기 생겨난 묘한 감정에 루비아는 의아하게 자신을 진단해봤으나······ 이상한 점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왕족으로서 몸 상태를 체크하는 자가진단법을 배워왔고, 그것도 모자라 개량까지 한 자신이다. 문제가 없는 건 확실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였다.


‘그럼······ 방금 그건 뭐였던 거지?’


그 기묘한 감촉은 사라지는 것 또한 한순간이었다. 더는 알 방도가 없어졌다.



“루비아.”


부르는 레이니의 말에 루비아는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왜?”

“······아니에요. 그저······ 루비아, 당신 꽤 바뀐 듯하군요.”


뻔히 말을 돌리는 게 보였지만, 그 돌린 내용이 신경 쓰였다.


거기다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니의―― 기뻐하는 감정이 깃든 눈으로 따스하게 바라보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네. 친우분들을 데려온다길래 또 뭔가를 꾸미나 싶었는데―― 아, 실제 꾸미는 게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제 생각보다 더 친밀히 지내시는 거 같더군요. 다행이에요. 전 당신이 친구 하나 없이 쓸쓸히 보내지 않을까 걱정했답니다.”

“하아······ 역시 친우라고 알린 모양이구나, 가신들이 난리더라 했더니. 난 그리 적은 기억이 전혀 없는데 말이지.”

“어머, 그럼 아닌가요?”

“······.”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루비아를 보며 레이니는 즐거이 웃었다.



“후훗. 정말 걱정은 기우였네요. 설마 한 달여 만에 친우가 생긴 것도 모자라―― 그 친우를 위해 세인트리안과 대적하려 하다니.”


루비아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레이니를 노려봤다.


하지만 과연 자신을 낳은 어머님이랄까. 레이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유만 넘쳐서 가볍게 흘려넘겼다.



“갑작스러운 철수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학우분을 데려온다고 하면 대충 어떻게 흘러가는지야 뻔하지요.”

“자, 잠깐 친구를 위해서 세인트리안이랑 붙는 거였단 말이냐?! 루비아, 네, 네가?? 그, 그보다 진짜 친우였느냐?! 난 영락없이 레이니의 착각이라 확신했건만!”


한 명―― 그란 공왕은 뻔하지 않았나 보다. 아니, 뒤에 대기하고 있는 디카이로트도 경악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전에 믿지 못할 것을 들었다는 듯한 둘의 반응은 좀······ 특히 그란의 저따위 말은 화가 난다. 부정적인 감정이 섞인 건 아니었지만.


‘리아나 라프리트도 그랬지만, 도대체 주위에선 날 어떻게 보고 있던 거야?!’


신하들 사이에서 자신은 어떻게 통하고 있는 건지 설문을 다녀봐야 하는 건가······


마음은 심란해져 갔지만 루비아는 얼굴에 전혀 티를 내지 않고 평정을 가장하고는 무심히 말했다.



“아니. 지금이 가장 승률이―― 다시는 없을 시기가 왔을 뿐이야. 벨루디스가 무너지고 나서는 여간해선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걸? 오히려 다음은 우리 차례이지 않을까······ 아니다. 다음은 무조건 우리야.”

“······.”


자신의 딸이 확신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여태 수많이 봐와서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그란은 곧바로 진지해지고는 신음을 흘렸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끝날 때가 된 건가. 네가 친구를 위함이건 뭐든 간에 어차피 공국은 물러설 수 없다는 거군······.”


깊은 한숨을 내쉰 공왕은 시선을 위로 돌렸다. ‘왜 내 대에서 이러한 일이······’라며 투덜대고 있지 않을까 한 모습이다.


한 차례 더욱 깊게 한숨을 내쉰 공왕은 똑바로 루비아를 바라봤다.



“이유가 뭐든 그 여식이 네 선택에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할 터. 그러니 물으마,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여.”


아버님이 아닌, 한 나라를 책임진 공국의 왕으로서 묻는 말에 루비아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우아하게 예를 취했다.


대기하고 있던 디카이로트와 레딧츠도 무릎을 꿇고 예를 보였다.



“우리의 차례가 오는 건 명확하나,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그대는 좀 더 준비할 시간을―― 벨루디스에서 자원을 확보하고 채비를 갖추는 미래보다 성급하다고 볼 수 있는 현재를 택했다. 하여 이 선택엔 진정 후회는 없느냐?”

“루 몬테르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그러한 비루한 감정 따윈 전무 하옵니다. 제가 바라며, 바라본 미래는 승리뿐. 그란 페이보 루 몬테르 폐하께 감히 약조 드립니다. 이 분쟁이 끝난 그 날―― 전란의 시대조차 꺾지 못했던 우리 루 몬테르 공국의 깃발은 찬란히 빛나 이 세그언도 대륙을 환히 비추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 명한다.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여, 그대의 뜻을 펼쳐 승리로 이끌도록! 루 몬테르 공국이 그대와 함께 할 것이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공국의 앞을 비추겠나이다.”


기개가 드높은 루비아의 선언에 그란은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하긴 하지만 여태껏 공국을 이끌던 딸을―― 신하를 믿기로 한 것이겠지.



“――하오면 폐하.”


그란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루비아가 말을 걸자 의아하게 쳐다봤다.


분명 그란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이후로는 사절단이 왔다는 이유와 급한 공무는 없다는 핑계로 오늘 하루는 술을 마시며 진득하니 놀 생각이었을 거다. 때마침 각방도 쓰게 됐겠다 좋은 기회로 보였겠지.


그런 아버님―― 이 와중에도 포기할 줄 모르고 놀 생각 만만인 그란의 마음속을 루비아는 훤히 꿰뚫어 봤다.



“공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폐하와 공왕비님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보여줄 것이 있사옵니다.”

“보여줄 것?”

“예. 황공합니다만, 내일 아침 실행하고자 합니다. 부디 근위대장님과 함께 두 분도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거론될 거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는지 디카이로트는 깜짝 놀라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란은······ 진탕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거절할 순 없을 거다.


애초에 술을 마실 생각을 할 정도로 그란의 일정은 널널하다 못해 전~혀 바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전원 알고 있다.


또 공국의 명운이 달린 일이다.


레이니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못 간다는 말은 도저히 나오진 않을 것이다. 여차하면 정말 2주 동안 각방을 사용하게 될 수도 있으니.


그란도 루비아가 놓은 덫을 눈치챘는지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 모습을 보며 루비아는 입꼬리가 올라간 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짐과 왕비를 걱정하는 그대가 내 딸인 게 정말로······ 자랑스럽다. ······심히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그대의 초대를 받아들이겠다.”


언뜻 그란은 침착해 보이지만, 실은 짜증을 내는 거다.


물론 그 마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바라던 노는 시간인데 그걸 방해받는다면 몹시 화가 나지 않겠는가. 반대로 자신이 당한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다.


그러니 그란의 가벼운―― 제 부모를 괴롭히는 내가 딸인 게 정말 밉살스럽다는 것과 심히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이 간다고 투정 부리는 것쯤이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에 돌려줄 반응은 하나뿐이었다.



“황공합니다, 폐하.”

“······.”


그렇게 틀어진 미소가 아닌 환하디환한, 객관적으로 봐도 미인인 딸의 아름다운 미소에 직격당한 그란은······ 뭐 씹은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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