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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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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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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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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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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DUMMY

베르다드의 수업은 보통 하루 2개 내지는 3개 정도로 적은 편이었다. 그 수업도 쉬는 시간 포함 2~3시간 정도로 나름 적당하다고 할만했다.


다만 리아에게는 아니었다.


현재 리아는 졸려서 감기는 눈을 억지로 참아내는 중이었다. 흡사 만화에서 나오던 정신과 머시기의 방에 갇힌 것만 같았다.


‘저, 정신 차려, 이스피리아! 아이리스가 열심히 하는데 네가 그러면 안 되지!’


거센 다독임에도 버티려 하면 할수록 눈은 점점 감겼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 자면서도 들을 수 있으니까.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에 더 졸립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리아의 눈은 감겼다.


그 순간, 빠르게 무언가가 날아왔다.


팟.



“칫. 또 실패했나. 어이, 그 아가씨 좀 깨워.”


분명 험상궂은 인상일 거라 생각되는 사람의 말이 들렸다. 그리고 바로 조심스레 몸을 흔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리아 양, 주무시면 안 돼요.”

“으응······”


리아는 거하게 하품하며 눈을 떴다. 물론 숙녀로서 크게 입을 벌리는 건 꼴사납기에 손으로 가렸다.


그런데 손에 무언가를 짚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응? 뭐지······?’


살펴보니 작은 나뭇조각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어? 서, 설마······?”


라프리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면서도 잡다니 도대체 뭘 어떻게 훈련해왔던 거냐? 살기도 안 냈는데.”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웃는 얼굴의 그리모르가 있었다. 근데 오른쪽 뺨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와 근육질의 다부진 몸매로 인해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 웃는 게 아닌 듯했고.



“왠지 험상궂게 들리던 목소리는 진짜였나······”

“헤에~ 본인 앞에서 잘도 말했군.”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내 수업에서 이리도 자주 자는 학생이 있을 줄이야. 세상은 넓군······ 아가씨, 일어난 김에 인마대전이 종결된 이유나 말해봐.”

“넷!”


인마대전은 850여 년쯤, 인간과 마족 간의 대륙 전체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 전쟁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했지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마족에 의한 선제 침공이 원인이란 것이었다.


전쟁의 자세한 내용으론――


마국, 베스티디논은 치밀해서 오랜 시간을 들여 마족은 이웃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인간사회에 깊숙이 침투시킨 다음, 때를 기다려 내부에서 한 번에 봉기―― 인간들 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주면서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와해하거나 통합된 나라들이 생겨났고, 현재의 3국 체제가 됐다.


60년 가까이 진행된 이 전쟁이 종결을 맞이하게 되는 건, 국가를 따지지 않는 인간 연합과의 싸움에서 힘이 밀린 마국이 먼저 협상을 제안해오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마국에서의 침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이유를 근거로 침공 금지조약을 체결했다 판단하는 자들도 있는데······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왜냐면 협상한 당사자들―― 벨루디스의 건국왕과 지금의 공국, 제국을 대표했던 인물들이 공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과 마족, 양 진형의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는 것이다.


모든 방면에서 수백 년은 퇴보했다고 할 정도이니 전쟁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는지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라는 게 그리모르가 진행한 교양 수업내용이었다.


이는 중등부에서도 교양수업 때 배운다는데, 고등부에 비해 자세한 내용은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워낙 유명한 일화라 딱히 배우지 않더라도 알 사람은 다 안다고 하는 이 내용을 당연하게도 리아는 생판 처음 들었다.


‘여하튼 결국 전쟁이 벌어졌던 거구나.’


몇 년 전에 보았던 일지를 떠올리며 리아는 마지막까지 제대로 대답하였다.



“잘도 자면서 수업을 듣네.”

“에헤헤······ 별거 아니에요.”

“······칭찬이 아니야.”


어이없어하던 그리모르는 계속 수업을 진행했고, 리아는 다시 한번 졸음과 싸움을 시작했다.


이쪽이 졸면서도 수업을 듣는다는 걸 알아서인지, 그리모르는 더 이상의 지적은 빠르게 포기하고 수업의 진도만을 나갔다.


그렇게 나름 무사히······라고 할 만한 수업이 끝나고.



“리아 양, 혹시 밤에 못 주무시나요?”


함께 다음 수업을 들으러 이동하던 라프리트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뇨! 잠은 잘 자고 있는데······”


정말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잘 자고 있다.


하지만 마력의 안정부터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어 선잠 자는 거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응. ······절대 재미없거나, 정말 오랜만에 학업에 충실해 졸던 게 아니야.’


조금 뜨끔한 리아는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것보다 라프리트 씨야말로 괜찮아요? 저야 같이 수업을 들으니 좋긴 한데.”

“당연히 괜찮죠. 그리고 처음 배우는 것도 아니에요. 저도 나름의 호신을 위해 조금 단련했답니다.”


리아는 검술이나 체술 등, 제대로 된 무예를 배우기 위해 마법반에서는 극히 드문 격투술에 수강을 신청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따라 라프리트도 같은 수업을 듣기로 하였다.


그 외의 수업도 마찬가지다. 모든 수업을 자신과 똑같이 맞췄다.


덕분에 계속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어 기분은 좋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참고로 또 한 명의 친구인 소베르비아와도 겹치는 수업이 제법 있었으나, 그녀는 격투술 수업은 신청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죠?!”

“네. 너무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리아 양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기대되는걸요?”


거듭되는 염려에도 라프리트는 자신만만했다.


단순히 위로하려 한 말은 아닌듯하여 리아는 조금 마음을 놓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무래도 라프리트와는 신장 차이가 있다 보니 속도를 맞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물론 힘들진 않다.


‘그런데······ 훈련장 너무 멀지 않아?’


격투술 훈련장은 마법 실습장과는 정반대인 곳에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되었을 때 피해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였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귀족이 많은 마법반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함으로도 보였다.


라프리트나 소베르비아는 별로 귀족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요 이틀간 봐왔던 다른 귀족들은 딱 틀에 박힌 전형적인 귀족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마찰이 있을 거란 상상은 쉽게 됐다. 영 엉뚱한 추측은 아닐 듯싶다.


‘첫날 그리모르 선생님에게 대들 때도 그랬고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라프리트 씨 같은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어.’


새삼 인복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으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호······ 여기가 훈련장인가요?”


훈련장은 흙바닥의 운동장이나 다름없었다.


긴 의자 수십 개와 몇몇 훈련용 무기가 갖추어져 있긴 했지만, 잔디를 비롯하여 표적 기타 마도구가 갖추어진 마법 실습장과는 달리 뭔가 단출하기만 했다.


‘설마 차별받고 있는 건가. 평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반반이라서? 에이······ 아니겠지?’


하지만 이런 의심과 달리 훈련장의 넓이는 무척이나 넓었다. 마법 실습장의 거의 8배는 되어 보인다. 더군다나 이런 곳이 세 군데나 더 있었다.


차별당하는 것치고는 굉장히 넓은 부지인데다, 리카드라면 이러한 일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 같다.


단숨에 의혹을 접은 리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시간은 제법 남았기에 훈련장에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들 중 목표했던 사람을 찾은 리아는 빠르게 달려갔다.



“어? 리아 양?!”


당황하는 라프리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리아는 멈추지 않고 뛰었다.


나름 조절은 했으나 마음이 반영된 탓인지 상당한 속도였는데, 그 뒤를 에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왔다.



“아이리스!!”


리아는 도중에 알아차려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아이리스를 그대로 껴안았다.



“어, 어머―― 음.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그야, 아이리스를 만났으니까?”

“그게 무슨······”

“리아 양!”


작게 한숨을 쉬는 아이리스를 뒤로하고 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크면서도 작게 소리친다는 기교를 해낸 라프리트는 뛰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왔는데, 앞에 당도하자마자 바로 훈계를 시작했다.



“리아 양, 아무리 아이리스가 반갑다고 하더라도 치마를 입고 그렇게 뛰다뇨. 그, 그러다가 보이시려면 어쩌려고······”

“보이다니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안 보이게끔 에르가 마법으로――”

“――그런 문제가 아니랍니다.”


말을 삭둑 자른 라프리트의 훈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구구절절 옳게만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토를 달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래서 얌전히 경청할 수밖에 없는데, 이번엔 아이리스가 구원해주어 짧게 끝이 났다.



“자자, 라프리트 씨. 아직 식사 안 하셨죠? 괜찮으시다면 지금 드실래요?”

“그······렇네요. 시간은 남았습니다만, 서둘러 식사하는 건 좋지 않죠. 가시죠.”


식사는 뷔페 형식의 학원 식당을 이용해도 됐으나, 첫날에 맛을 보고 얼굴을 찡그린 에르가 “형편없군”이라는, 잔혹한 평가를 하곤 본인이 직접 차려주기로 했다.


학원에서도 직접 해 먹든, 식당을 이용하든 간에 자주성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며 각자의 선택에 맡겼기에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그 연장선으로 교내에 따라다니는 사용인은 1명으로 정해둔 거라고 하는데······ 나와는 연관 없는 이야기지.’


리아는 훈련장에 있는 벤치로 가 에르가 깔아주는 ――아이리스는 맨바닥이다―― 천에 앉았다.


오늘의 점심은 이곳에서 해결이다. 야외 식사 기분도 내고 나쁘지 않다.


‘온통 흙바닥뿐이지만.’


그러나 라프리트도 은근 마음에 들었는지 불평 하나 없이 언제나처럼 안네가 깔아주는 천에 기품있게 앉았다.



“에르, 부탁해요.”


고개를 끄덕인 에르는 바로 [차원수납]에 보관하고 있던 도시락 3개를 꺼냈다.



“[수납]이 부여된 아티팩트라······ 몇 번을 봐도 신기하네요.”

“네. 저도 그랬어요.”


물론 [수납]의 아티팩트가 아니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맞췄다.


이곳 사람들의 수준을 보면 [차원수납]은 절대 볼 수 없는 마법이라 여긴 에르의 판단 때문으로, 아예 사용을 안 하자니 모든 짐을 그가 들어야 해서 이처럼 속이는 형태로 사용하게 됐다.


그런데다가 본의는 아니나 국빈이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능력 같은 걸 보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지금처럼 당당히 남들 앞에서 마음껏 쓰기로 했다.


주목받는 건 별로 원한 일이 아니지만, 그로 인해 아이리스의 학원 생활이 원만해진다면 상관없었다. 솔직히 편하기도 하고.



“여기요, 라프리트 씨.”

“고마워요.”


리아는 에르에게 받은 도시락 중 한 개를 라프리트에게 넘겼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차원수납]답게 보관한 도시락은 방금 막 만든 듯 따뜻했다.


‘안네 씨가 조금 곤란해했지만, 밥은 역시 따듯하게 먹는 게 좋지?’


자신을 따라 함께 도시락을 먹겠다는 고마운 라프리트에게 이 정도의 친절은 당연히 베풀어야 하지 않겠나. 애당초 안네가 걱정하는―― 독을 탈 마음도 전혀 없거니와.


기분 좋게 웃으며 리아는 자신의 도시락을 열었다.


그 안에는 초록색과 흰색, 가끔 붉은색도 섞인 내용물이 들어있었다.


즉 샐러드였다.


에르 특제의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오리엔탈 소스가 들어가 있어 짭조름하면서도 시큼한 맛이 일품이다. 차가운 것따윈 아무래도 좋을 정도다.


리아는 군침을 흘리며 곁눈질로 아이리스의 도시락을 쳐다봤다.


아이리스는 스테이크와 감자가 곁들어진―― 묵직한 열량을 자랑할 것만 같은 도시락이었는데, 어딘가 미묘하게 대충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전체적인 퀄리티는 높았다.


‘이것들 만드는데 꽤 비싸려나······’


리카드에게 받은 돈은 전부 에르가 관리하기에 알 순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재료들인 것 같아 가격이 조금 나갈 듯싶었다.


그렇게 지갑 걱정을 하며 점심을 먹고 있으니 문득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껴졌다.



“엇.”


라프리트가 눈이 마주치자 당황했다.



“응? 왜 그러세요?”

“아뇨······”


말을 흐리는 라프리트를 의아하게 여기다,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을 떠올리고 깨달았다.



“드셔보고 싶으세요?”

“그게 그러니까···”


허둥지둥하는 라프리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 리아는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짚었다.



“자, 아~ 하세요.”


“네?! 그런 일을······!”


내밀어 오는 리아의 젓가락을 보며 우물쭈물하던 라프리트였으나, 샐러드의 유혹을 뿌리치긴 힘들었는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냉큼 먹었다.


입가를 가리고 우물우물 맛을 보던 라프리트의 눈이 커졌다.



“정말 맛있어요! 리아 양.”

“그렇죠?! 에르의 솜씨가 좋거든요. 헤헷.”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에르를 쳐다보는 라프리트의 모습에 리아는 자신의 코가 높아지는 듯 뿌듯해했다.


이후로 리아도 라프리트에게 몇몇 반찬을 얻어먹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이어 나갔다.


“잘 먹었어요, 안네.”


식사를 마치고 매우 기분이 좋은 듯한 라프리트가 기품있게 입가를 닦았다.


그 동작을 관찰하던 리아는 똑같이 따라 하며, 빈 도시락통을 정리해주는 에르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잘 먹었어요, 에르.”

“괜찮았어?”

“네. 오늘도 정말 맛있었어요. 하지만 힘들지 않아요? 아침부터 준비하느라.”

“전혀. 필리아가 그랬듯, 나도 리아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행복하기만 해. 그러니 괜찮아.”

“에르······”


리아는 환하게 웃는 에르의 손을 잡았다. 에르도 살짝 움찔했지만, 조심스럽게 맞잡아주었다.


어쩐지 오래간만에 잡아본 듯한 그의 크고 따듯한 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 때에 아이리스가 작게 속삭였다.



“자, 잠시만요······”

“왜 그러니?”

“왜긴요. 어머니, 라프리트 씨들도 있다고요.”

“어?”


다급해 보이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돌아봤더니······ 라프리트와 안네의 새빨개진 얼굴이 보였다.


리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와 허리를 살짝 숙여주고 있는 에르와, 그런 그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얼굴에 가까이 붙이고 있는 나 자신이 있었다.


‘어느새······’



“······리아 양? 호, 혹시 리아 양의 낭군님은······”


라프리트는 에르를 쳐다봤다.



“그, 그렇게 보이셨나요?”

“네. 너무나도 다정한 사이로 여겨지시던데······ 아니신가요?”


확인차 물었지만, 라프리트는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 상황을 넘기려 거짓말해도 통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그리고 리아도 에르와의 사이를 거짓으로라도 아니라 부정하긴 싫었다. 물론 에르는 이해해줄 테지만.



“어, 음······ 마, 맞긴 하는데요······”


라프리트의 눈이 커졌다.


곁에 대기하던 안네도 티를 내려 하지 않았지만, 놀라는 기색을 다 감추지는 못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내 당혹스러워하며 살짝 라프리트를 쳐다봤다.


그러한 안네와는 달리 라프리트는 곧 차분해졌다.



“아이리스는······”


여러 가지를 우려해 숨기기로 했던 거지만, 애초에 에르와 아이리스, 둘과의 관계를 조금도 숨기고 싶지 않았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라프리트에게라면 솔직히 말해주더라도 괜찮다는 기분이다.


그리 생각하니 떨리는 마음도 사라져 리아는 묻는 라프리트에게 당당히 밝혔다.



“에르와 저의 아들이에요.”

“아, 아들이요?!”


라프리트는 빠르게 자신의 입을 막았다.


혹여 남이 듣지나 않을지 조심한 것으로, 실제 앉아 있는 벤치 주변엔 아직 사람이 별로 없지만, 훈련장에는 슬슬 제법 사람이 모여있었다.


엄청나게 놀라면서도 친구의 안위를 염려해주는 모습은 역시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좋은 인품이 잘 드러난다.



“아이리스는 확실히······ 리아 양과 찬크에르 씨를 닮긴 했네요. 그러고 보니 이름도······ 리아 양에게서 따온 건가요. 전 영락없이 친척분이나 동생 정도로 여겼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잠시 말이 없던 라프리트는 이쪽을 한 명씩 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뭔가 사연이 있으시겠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리아 양과 두 분의 관계를 떠벌릴 마음은 전혀 없어요.”

“고마워요, 라프리트 씨. 그리고 숨겨서 미안해요. 저는 아무래도 괜찮지만, 아이리스와 에르에게 나쁜 소문이 돌까 봐 염려되었거든요.”

“충분히 이해해요. 그러니 미안해하시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절 믿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하죠. 하지만······ 저도 조금 염려스럽군요.”

“염······려요?”

“네. 조마조마해 보인다고 할까, 솔직히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라프리트는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리아 양,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허술해요!”


‘허술······해?’


스스로는 전혀 자각이 없었던지라 리아는 충격으로 멍해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라프리트는 재차 다른 표적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찬크에르 씨! 당신도 허술합니다!”


손가락으로 지목하자 또 하나의 표적―― 에르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알겠나요? 아무리 리아 양이 사랑스럽고 귀엽다지만 제대로 말리셔야죠. 거기서 그리도―― 흠흠. 어, 어쨌든 받아주시면 안 됩니다. 당신도 리아 양에게 묘한 말이 도는 건 원치 않으시겠지요?”

“음······”

“그 말대로 입니다!”

“어? 아이리스?”


할 말이 없어 곤란해 보이는 에르를 밀치고 아이리스가 앞으로 나섰다.



“어머니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바보 아빠가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야 하는데, 언제나 해롱해롱하고 말이야. 금방 들킬 줄 알았다니까. ······라프리트 씨?”

“저, 저요?”


평소 접하던 차분하고 친절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아이리스에게 당황하면서 라프리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번 일처럼 나무라기 어려운 일도 솔선해 조언하는 용감함······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여겨봤지만, 역시 어머니에게는 라프리트 씨와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부디 폐가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저희 어머니를 도와주시겠나요? 라프리트 씨.”

“아이리스······ 물론이에요! 친구를 위한 것인데. 앞으로도, 아뇨! 앞으론 더욱 엄하게 리아 양뿐만 아니라, 찬크에르 씨에게도 훈계를―― 조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역시나 훌륭합니다! 제 눈은 정확했네요. 라프리트 씨, 잘 부탁해요.”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아이리스! 언제라도 의지해주세요.”


마치 서로 전우라도 된 양, 뜨거운 눈빛으로 아이리스와 라프리트는 손을 맞잡았다. 그러더니 둘은 목소리가 커져 가는지도 모르는지, 열기를 띠며 바로 토론에 이르렀다.


에르가 미리 방음 결계를 쳐놔서 다행이지, 안 쳐놨다면 주변에 다 들렸을 음량이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리아는 황당할 뿐이었다.


‘아이리스와 라프리트 씨가 친해진 건 다행―― 아니, 너무 친해진 거 아닌가? 그런데 뭐가 어떻게 돼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에르를 쳐다봤지만, 그도 상당히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아가씨? 아이리스님? 담소 중 죄송합니다만, 슬슬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안네의 말로 둘은 토론을 멈췄다.



“그럼 아이리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에.”

“네. 기다릴게요, 라프리트 씨.”


벌써 눈빛만으로 대화할 수 있었는지 둘은 말없이 서로 쳐다보다 같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한 황당한 의식을 마친 아이리스는 넓은 훈련장에서 중등부 쪽으로 이동하고, 리아도 한껏 흡족해하는 라프리트의 손에 이끌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으러 갔다.


격투술 수업의 복장은 자유였기에 옷은 에르가 만들어줬다.


에르가 만들어준 옷은 가죽 질감의 옷이었는데, 상의와 하의가 모두 심연처럼 어두운 검정 일변도였다. 신발도 마찬가지로 검었지만 그나마 앞굽에 덮인 금속 덕분에 조금은 색의 다양성이 생겼다.


디자인은 에르가 만든 것이니 보기 좋고, 착용감도 에르가 줬던 다른 옷보단 조금 떨어졌지만, 상당히 괜찮은 편에 속하였다.


‘오오. 어쩐지 모험가가 된 기분인데?! 여기에 내 검과 세트인 망토도 둘렀다면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내심 아닌 척하지만 리아는 판타지스러운 옷을 입어 어린아이처럼 들떴다. 곁에서 라프리트가 웃는지도 모를 만큼.


그 상태로 리아는 고등부의 수업이 열리는 곳으로 갔다.


한 학년만 사용하는 마법 실습장과는 달리, 격투술 훈련장은 3학년까지 있는 학원의 전교생이 모이는 터라 처음 보는 사람이 제법 눈에 띄었다.


‘일반반의 학생들은 나이대가 다양하네.’


마법반도 어느 정도 나이 차가 나는 사람들도 한두 명 있긴 했지만,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일반반은 딱 봐도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는 중년 아저씨 정도의 외모가 아니라면, 겉모습으로 나이를 판별하긴 힘들었다. 그래서 실제 나이보다 높게 봤다면······ 미안하다.


‘뭐, 리카드 씨도 제법 다양한 연령대가 다닌다 했으니 그리 틀리진 않았겠지? 응? 저 사람은······’


여기저기 둘러보던 리아의 눈에 입학식장에서 본 이후로 마주친 적이 없는 두 사람을 보였다.


한 명은 꼬마라 놀렸었던 아서 알펜리트란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라프리트 씨, 저분이요. 사람들이 왕자님이라 하던데 맞나요?”


리아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라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나라의 제2 왕자님이신, 레온하트 디안 벨루디스 전하에요.”

“와~ 이름도 멋지네.”

“네?”

“호호······ 아녀요. 가까이에서 왕자님을 봬서 놀란 거예요.”


잡담하고 있는 사이 리아가 익히 잘 아는 선생님이 도착했다.



“만나서 반갑다. 중등부 때부터 봤던 녀석도 있다만, 처음 보는 놈들도 있으니 일단 자기소개를 하지. 난 그리모르라고 한다. 원래는 일반반의 담당 교사였다만, 지금은 마법반 1학년을 맡고 있다.”


짤막한 소개를 마친 그리모르가 주위를 둘러보다 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 뭐야, 아가씨. 아가씨도 격투술 수업 들어?”


‘라프리트 씨······에게 하는 말이 아니지?’


단지 격투술 수업을 듣는지를 물었을 뿐이지만, 어쩐지 길을 잃어버린 어린이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리아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의문 어린 시선에 부담스러워하며 대답했다.



“네······ 제대로 온 거 맞아요.”

“어, 음······ 그래.”


생기 없는 리아의 목소리에 그리모르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 일단 오늘은 첫날이니 각자의 실력을 보려고 한다.”


격투술 수업은 검술, 창술, 투창술, 방패술, 호위술, 근접 전투, 맨손 전투 등 20여 가지에 달하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전투기술 수업을 통칭하여 일컫는 것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잘게 세분화하여 최종적으론 200여 가지가 넘는 수업들이 있다고 한다.


다만 전 학년 통틀어 궁술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약 400여 년 전에 타국의 귀족을 암살하려 했던 소동이 벌어진 후로 아예 폐지했다나 뭐라나.


그 중 리아가 수강한 수업은 검술이었다. 담당 선생님이 그리모르인 건 몰랐지만.



“으음······ 맘에 드는 게 없네.”


첫 수업인지라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날이 안 선 연습용 검을 사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자신의 검과 비슷한 크기의 검은 없었다.



“못 고르시겠나요?”


라프리트는 이미 검을 골랐는지 얇은 레이피어 같은 세검을 들고 있었다.



“그건 아닌데······ 좀 커다란 검은 없나 하고요. 아쉬운 대로 이 검으로 할게요.”


리아는 결국 길이만 어느 정도 비슷한―― 대충 신장만 한 검을 골랐다.



“그, 그렇게 큰 거로 괜찮겠어요?”

“네. 전 이 정도 길이가 딱 좋아요. 자주 휘둘러보기도 했고요. 검술 같은 건 배운 적이 없지만.”

“그렇군요.”


순간 이해해 빛을 띤 라프리트는 더 묻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니 전원이 무기를 골라 돌아왔다. 그리고 양손으로 검을 껴안듯 들고 있는 리아에게 시선이 쏠렸다.



“어이······ 아가씨?? 그건 아가씨에게 너무 크지 않을까.”

“아뇨. 전 이게 좋아요.”

“전사로서 큰 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만······”

“정말로 괜찮아요. 오히려 짧고 작은 검이 더 어색해요.”

“정말이지?”

“네.”


리아는 계속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에 딱딱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 모습이 생떼 부리는 거라 착각했는지 그리모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아간다는 거로 하고. 대신 내가 아가씨에게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다음에는 바꾸는 거다?”

“으음······ 알겠어요.”

“좋아. 그럼 각자 개인 연습을 하거나 짝을 찾아 대련해라. 다치지 않게 힘 조절하는 거랑 시작하기 전에 몸 푸는 거 잊지 말고!”


학생들은 대답과 함께 대련하기 위한 짝을 빠르게 찾기 시작했다.


중등부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있고, 격투술의 다른 수업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되는지 다들 익숙해 보였다. 드문드문 개인 훈련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라프리트에게 말을 걸었다.



“라프리트 씨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리아 양만 괜찮으시다면 같이 살짝 대련해볼까요?”


라프리트는 기대감이 가득해 보였다. 리아도 살짝 기대되기에 기꺼이 응하려 했으나, 그 전에 그리모르가 다가왔다.



“그건 좋지만, 아가씨는 나와 먼저 해보기로 하지. 혹시나 다칠 수도 있으니.”


라프리트를 다치게 할 리는 없었지만, 이쪽을 걱정해주는 그리모르의 배려를 무시할 순 없었다.


의외로 잘 챙겨준다고 생각한 리아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리는 어느 정도로 떨어져서 하나요?”

“아가씨 편한 대로 해.”

“그러면······”


리아는 그리모르와 15m 정도 거리를 벌렸다.


한 호흡 정도면 닿을 만한 거리지만, 대련이고 하니 충분해 보였다.



“여기서 괜찮을까요?”

“그래!”


OK 사인에 리아는 검집을 빼 땅에 내려놨다.


‘아, 몸 풀라고 했지.’


별로 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을 거 같았지만, 이 준비운동을 소홀히 하다가 다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지구에서의 이야기지만.



“잠시 몸 좀 풀게요!”

“그래. 조심해라.”


티는 안 내려 하지만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그리모르를 보며 리아는 대충 루데릭과 대련하던 정도로 검을 휘둘렀다.


슈슉!


4번 벴는데 2번의 소리가 겹쳤다.


긴장해서 조금 힘이 더 들어갔다.



“어······ 아가씨, 혹시 검을 배운 적 있어?”

“아뇨. 배웠다고 할 정돈 아니에요. 그저 가끔 제 오라버니나 아이리스와 대련한 정도에요.”

“그래···?”


그리모르가 약간 진지해진 거 같았다. 걱정하던 기색도 사라졌다.


거기에 에르와 함께 조금 떨어져 있던 라프리트는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고, 대련하려던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하나둘 멈추더니 쳐다보기 시작했다.


‘뭐, 뭐지······ 왜 다들 이쪽을 주목하는 거야?’


지켜본다 생각하니 조금 긴장된다.



“서, 선생님. 시작은 어떻게 하나요?”

“아가씨가 내키는 대로――라 하고 싶지만······. 어이! 거기 잘생긴 놈. 근처 돌멩이나 동전을 살짝 하늘로 던져봐.”

“아~ 떨어지면 시작이라는 거죠?”

“그래. 그런데 자세 잡지 않아도 돼?”


리아는 한 손으로 검을 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스스로도 상당히 건방져 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것이 가장 편한 자세인데.


루데릭과 바지탄스들이 싸우는 모습을 전부 분석해보고 적용도 해봤지만, 이상하게도 힘을 쭉 빼고 있는 이 자세가 제일 편하고 좋았다.


‘솔직히 멋져 보여서 마음에 들기도 했고.’



“음······ 그러냐.”


그리모르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지목됐던 에르는 미리 꺼내둔 동전 하나를 잘 보이게 들었다.


리아와 그리모르, 모두 보고 있다는 걸 확인한 에르는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회전하며 하늘로 올라간 동전은 천천히 땅으로 떨어져 갔다.


상당한 집중을 하고 있던 리아에게는 좀 느리게 느껴졌는데――


팅.


땅에 닿자마자 그리모르가 검을 들고 있지 않은 리아의 왼쪽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헉!”

“빨라!”


설마 그리모르가 선제공격할 줄은 몰랐는지, 구경하고 있던 다른 학생들의 경악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다.


마력까지 품은 검의 궤적 선상에 리아는 자신의 검을 끼워 넣었다.


키이이잉······!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울렸다.


‘묵직하네.’


예상보다도 강력한 일격에 리아는 감탄하고, 목을 베러 오는 다음 일격을 막으며 그리모르의 마력레벨을 확인해봤다.


그리모르, 그의 마력레벨은 239였다.


바지탄스나 에이브안보다 10 언저리 차이로 높긴 했지만 거의 비슷했다.


‘그렇지만 실력은 바지탄스 씨보다 많이 뛰어나겠는데?’


그리모르는 자잘한 근육의 움직임이나 눈짓 또는 기세를 활용한 페인트로 상대를 속이는 노련함, 그리고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빠르고 강한 일격이 장점이었다. 그런데다 판단 또한 무척이나 빠른 것도 모자라, 즉시 실행하는 대담함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한방, 한방 강력한 일격의 바지탄스와, 그보단 조금 떨어지지만 강한 일격과 빠른 속도를 모두 겸비한 그리모르.


상성이 나쁜 탓도 있겠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순수 실력만으론 바지탄스가 그리모르를 이기긴 힘들어 보였다.


에이브안은······ 아쉽지만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비교할 순 없었다.


‘과연, 전 길드 마스터!’


이쪽도 기술 자체는 전혀 상대가 안 됐다. 마력의 흐름을 읽어 먼저 공격 방향을 읽지 못했더라면 단 한 번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일격 이후로 차츰 능력치를 줄여, 그리모르와 비슷한 수준으로 제한한 지금의 상태에선.


리아는 마음속으로 그리모르에게 경의를 표하고는, 그의 기술을 분석하기 위해 시뮬레이션 일부를 일시 종료하고 그 여유 공간을 모조리 이쪽에 투입했다.


근육의 수축 이완, 몸의 중심 이동, 호흡, 걸음, 보폭, 마력의 움직임, 또 사용하는 갖가지 페인트 동작들까지, 그리모르의 모든 걸 눈에 새겨넣으며 분석했다. 그리고 분석이 끝나는 순서대로 바로바로 재현하여 상황에 맞게 펼쳐냈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금속음이 무수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변을 느낀 듯 눈을 크게 뜬 그리모르가 거리를 벌리려 크게 휘둘렀다. 리아도 그에 응해 똑같이 휘둘렀다.


깡!


강한 충격으로 날아갈 듯한 몸을 리아는 뒤꿈치 쪽에 발판을 만들어 밟고 버텼다.


그리모르는 애초 의도대로 멀리 거리를 벌려 촤악~, 신발 끄는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아가씨······ 지금 날 따라 한 거야?”

“아! 죄송해요. 허락도 안 받고.”

“애당초 그걸 가르치려 선생 노릇을 하는 거니까 상관없는데······ 굉장하군. 별로 나한테 배울 것도 없어 보이고.”

“아니에요. 완벽하지 않아요. 기껏해야 70%쯤 따라 한 정도인걸요.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주셨으면 해요.”

“싸우면서 70%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이긴 하는데······ 뭐, 괜찮겠지. 전사는 원래 탐욕스러운 법이니까. 아가씨, 이름은?”


리아는 검을 내려놓고 바지라 조금 어색했지만, 가상의 치마를 머릿속으로 그려 배운 대로 인사했다.



“이스피리아라 합니다. 그리모르 선생님.”

“아는 대로 그리모르다.”

“네. 잘 부탁드려요.”

“그래.”


살짝 웃은 그리모르는 검집에 검을 넣었다.


오늘은 학생들의 현 실력을 체크하는 것이니, 혼자 그리모르를 독점하고 배울 순 없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리아도 검을 다시 주워 들고 몸을 돌렸다.


――꿀꺽.


‘꿀꺽? 어라······’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사람들이 넓게 원으로 둘러싸 있었다.


먼저 대련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포함, 중등부의 사람도 왔는지 아이리스도 보였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교직원 선생들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의 숫자를 보면 아마 훈련장의 있던 전원이 모여있는 게 아닐까.


짝······ 짝······


누군가가 손뼉을 쳤다.


잘못 들었다 싶을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점차 손뼉 치는 사람의 빈도수가 늘어나더니 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멋있었다! 꼬마야!”


‘엇, 꼬마 아닌데······’



“네놈보다 훨씬 강하다고! 제대로 누님이라고 불러라 멍청아!”


‘아뇨······ 저쪽이 나이는 더 많아 보여요.’



“저 멧돼지의 코를 눌러주다니, 보는 내가 다 시원했다고 꼬마 아가씨!”


‘누르지 못했어요. 그리고 꼬마라고 그만 해요!’



“반했다! 그 발에 밟혀보고 싶어!”


‘죄송하지만, 그런 취미는 없어요.’



“언니! 멋져요!”


‘언니가······! 맞네. 고마워라.’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리아는 열광하여 외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마음속으로 태클을 걸며 에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 걸음은 부끄러워 경보하듯 빨랐다.



“수고했어, 리아.”

“고마워요.”


리아는 에르가 회수하여 건네주는 검집을 받아 검을 넣었다.



“음······ 라프리트 씨. 이 검 어떡하죠? 조금 날이 상했는데.”


마력으로 감싸 심각한 손상은 없었지만 군데군데 날이 뭉개진 곳이 생겼났다.



“매주 수리를 한다고 들었으니 원래 있던 자리에 두셔도 될 거 같은데――”

“――나! 나! 내가 갖다둘게!”

“헛소릴! 네가 써보고 싶은 거겠지.”

“제, 제가 가져다 두겠습니다!”


서로 자기가 갖다두겠다며 외치는 사람들로 인해 라프리트의 말은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는 점점 많아지더니 원을 그리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앞에 있던 사람들은 뒤에서 몰려오는 사람에 밀려 점차 가까워져 왔는데, 그 순간―― 작지만 무시하기 힘든 조용한 외침이 들렸다.



“어이. 수업 시간이란 걸 잊은 거냐? 힘이 넘치는 걸 보니 마침 잘 됐군. 몸도 달아올랐는데 내 상대 좀 해줘라.”


진득한 살기가 퍼졌다.


그 살기의 진원지는 방금 막 대련했던 그리모르로, 얼굴이 굉장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에 다가오던 사람들은 모두 멈칫하더니, 딴청을 피우며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다른 교직원들도 정신을 차린 듯 학생들을 인솔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따금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이 튀어나왔지만, 주변에서 “멧돼지의 제물이 되고 싶어?!”라고 경고하자 순순히 몸을 돌렸다.


벽처럼 밀려드는 사람의 압박이 사라져 리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도. 아직 수업 안 끝났어. 검도 그 정도면 멀쩡하니 아까 리벨리타스 아가씨랑 하려던 대련을 하든지 해. 농땡이는 부리지 말라고?”

“넵! 선생님.”


말을 마치고 그리모르는 돌아다니며 아직 넋 놓고 있는 학생들에게 놀지 않도록 주의시키었다.


리아는 슬슬 학생들이 다시 각자 훈련하는 것을 보며 라프리트에게 물었다.



“라프리트 씨. 저희도 시작할까요?”

“읏! 네······ 살살 부탁드려요.”


조금 겁내면서도 라프리트는 기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대련 같은 걸 좋아하시나 보네.’


리아도 살짝 즐거운 마음이 되어 그리모르 때처럼 거리를 벌려 라프리트와 대련을 시작했다.


라프리트는 살짝 위축되어있었지만, 호신을 위해 배웠다는 말처럼 확실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그녀의 검을 분석하며, 생각보다 더 즐거워지는 기분에 리아는 자신이 이리도 호전적이었나 싶었다.


‘친구랑 함께라 그런 거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긴 리아는 그렇게 세검으로 펼치는 검술을 장검으로 똑같이 구현도 하는 등, 도중 나트알에 있는 기분이 되어 라프리트의 자세를 지적도 하면서 첫 검술 수업을 마쳤다.











“젠장!”


서쪽 기숙사의 방에서 남자―― 자신을 아서 알펜리트라 지칭한 사내는 들고 있던 유리컵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챙그랑.


벽과 충돌한 컵은 당연하게도 깨져 잔해가 산산이 흩어졌다.


세밀한 가공이 되어있는 컵은 서민들의 3주 치 생활비의 버금가는 비싼 물건이었는데도 아서는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지금의 분을 풀 수만 있다면 더욱 값비싼 물건이라 할지라도 던졌을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용인인 여성은 말도 없이 조용히 잔해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 건방진 꼬맹이 년은 뭐야 도대체. 지가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나. 단순 엑스트라인 주제에······. 야! 페네리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서의 말에 사용인 여성―― 페네리로는 잔해를 치우던 손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엑스트라······ 단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아서는 페네리로의 반응이 익숙하였다. 그것보단 뻔한 것을 다시 묻는 것에 화가 났다.



“그래. 그거 말고 뭐겠냐.”

“······아시다시피 그분께선 이 나라의 국빈이십니다. 함부로 폄하하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지난번의 일을 잊은 거냐고 묻는 듯한 페네리로.


비록 무표정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아서가 살던 세계―― 지구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미인이었다.


이런 미인과는 친해질 기회는커녕 대화조차 해본 적이 없었건만 뒷바라지까지 한다니 흥분했던 적도 있었다. 오엘문리아 라는 이세계에 소환되어 좋았던 일 중 하나에 들어갔을 정도로.


하지만 거의 종일 같이 있기도 하고, 주변엔 그녀 말고도 어지간한 여성들은 전원 미인이었다.


‘하물며 그 망할 꼬맹이조차도 지구에서는 절대 못 볼 은발에다가 나름 귀여운 얼굴이었지?’


즉 그녀 말고도 미인은 지천으로 널렸다. 매번 딱딱한 대답만 돌려주는 인형 같은 페네리로에 구애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용사라는 것만 안다면 수많은 여자가 알아서 따라붙을 테고 말이지.’


그렇기에 뭐 같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 페네리로를 큰소리로 다그치는 것도 거리낌 없었다.



“누가 그딴 얘길 듣고 싶다고 했냐?! 그냥 맞장구나 치면 될 것이지. 그리고 뒤에서 욕하는 것도 안 되냐? 방음도 잘 되어서 들리지도 않는데.”

“들리고 안 들리고의 문제가 아닙――”

“――아아, 됐어됐어. 잔소리는 그만해도 돼. 내가 애도 아니고 리카드나 너, 그리고 임금님까지 전부 이래라저래라 지긋지긋하다고. 기껏 용사로 이세계에 왔는데 내 마음대로 하지도 못하고 말이야.”

“······.”


그렇지 않은가. 소설처럼 세상을 구하기 위해 용사로 소환된 자신은 이런 푸대접을 받아도 될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일단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나중에 도와달라며 바지 끄덩이를 붙잡을 때까지.


의심 따윈 없다. 그 꼬맹이 년이랑 그리모르 자식이 싸우는 걸 보고 그렇게 놀라자빠질 정도라면 반드시 다가올 미래였다.


물론 그땐 실컷 생색낸 다음, 다시는 이쪽에게 관여하지 못하도록 으름장을 놓을 거다.



“이딴 게 뭐가 어렵다고 호들갑 떨긴.”


대충 던져놓은 검을 뽑더니 아서가 휘둘렀다.


슉슉!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펼쳐진 검격은 완벽하게 그리모르가 보였던 것과 일치했다. 앉아서 대강 휘둘렀는데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그 건방진 꼬맹이조차도 뛰어넘는 재능! 이것이 용사인 거지.”


한 번 보고 바로 완벽히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겨우 어설프게 따라 할 뿐인 꼬맹이를 보고 놀라다니······ 한심한 것을 넘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우매한 자들뿐인가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평범한 버러지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자신을 능력이 없는 자들이 못 알아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안타깝다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여러 스팩에서 그 꼬맹이보다 조금 밀렸지만, 앞으로 성장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나는 강해질 것이었다. 그때 가서 나의 위대함을 알려도 늦진 않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아서는 탁자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있어야 할 컵이 없다.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은 아서는 어느새 다시 컵의 잔해를 치우고 있는 페네리로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아직도 치우고 있는 거야?! 빨리 새 컵 가져와서 물이나 따라!”


아서의 명령에 페네리로는 빠르게 잔해들을 긁어모아 부엌으로 향했다.



“칫. 굼뜨긴.”


근데 어쩐지 돌아오지 않는다.



“컵도 빨리 못 가져오는 거냐.”


아서는 한숨을 쉬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부엌에는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페네리로가 있었다.


한마디 하려던 아서는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금방 가져갈 테니 용서――”

“――아니, 그런 건 됐으니까. 치우다가 다친 거야?”


아서는 페네리로의 손을 잡았다.



“읏.”

“아, 미안. 아팠어?”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아서님께 피가 묻습니다.”

“됐다니까 그러네. 그보다 잠깐 이쪽으로 와봐. 지혈해야 할 거 아니야.”


페네리로를 소파에 데리고 와 앉힌 아서는 소환당할 때 입고 있었던 본인의 옷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냈다.



“에? 아서 님. 그건 아서 님의 소중한 물건이 아닙니까.”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감정을 드러낸 페네리로였지만, 집중하고 있는 아서에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니야. 그냥 만화책이나 소설 보다가 거기 주인공들이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길래, 나도 그냥 한 번 넣어둔 거뿐이야. 가지고 있는 것도 지금 기억했어.”

“······”

“내 뒷주머니에서 오래 있던 거라 깨끗하다고 할 순 없지만, 일단 이걸로 참아. 치유마법도 있다며? 그러니까 나중에 그걸로 치료해.”


손에 유리 조각이 박혔나 확인한 아서는 조심히 손수건을 페네리로의 손에 감았다.


이런 미인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에 더듬거렸다. 그로 인한 결과물도 엉성하기 짝이 없어, 감겨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정도로 어설펐다.


뭔가 창피해진 아서는 조금 빨개진 얼굴을 돌렸다.



“감사드립니다, 아서 님.”

“됐어, 별거 아니야.”


두 손을 맞잡고 바라보는 페네리로의 시선에 “쪽팔린 짓을 다 했네”라며, 아서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등을 돌렸다.



“빨리 제대로 치료받으러나 가. 곧 레오노반이 올 거니까. 넌 도대체가 생긴 건 쿨한 만능 비서처럼 생겼으면서 칠칠치 못하냐? 쯧.”

“네. 알겠습니다. 잠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힐끗 살펴본 페네리로는 어쩐지 미소 짓고 있는 듯했지만――


‘설마······ 저 인형 같은 여자가? 아니겠지.’


머리를 흔든 아서는 방을 나서는 페네리로를 떠나보내고, 던진 컵의 남은 잔해들을 스스로가 치우기 시작했다.


곧 레오노반이 오는데 그가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된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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