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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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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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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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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9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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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62

DUMMY

“누구였니? 아이리스.”

“어······ 그게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 공주님? 그분께서 방문해도 괜찮겠냐고 하시던데요?”

“오늘은 놀러 오시는 분이 많네.”


태평한 리아와 달리, 2시간 전 먼저 찾아왔었던 라프리트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뭐라 하셨나요?”

“······일단은 라프리트 씨도 계시는 데 괜찮다면 좋다고 했어요. 공주님이라는 데 거절하긴 좀 그렇잖아요.”

“그렇죠.”


경계심이 가득한 라프리트와 그 모습을 보고 좋은 소식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낀 아이리스도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헤······헤······ 그러면 오, 오늘은 이제 끝난 건가?! 루비아 씨, 고마워요!’


리아는 점심때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 찾아왔던 라프리트의 여러 설교와 공부에서 해방된 것에 기뻐하기만 했다.


물론 저 둘의 반응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부 자신을 위한 것이라지만, 길면 지치기 마련이지 않은가. 휴식을 반기더라도 잘못되진 않았으리라.


‘근데 내 마법이 그렇게나 기묘하게 보였구나. 라프리트 씨가 조심하라고 그리 신신당부했으니 앞으론 나도 평범하게 발동어를 외쳐야―― 아니, 그건 무리. 부끄러워서 평생 마법도 못 쓰고 다닐 거야.’


그래도 라프리트가 걱정해주니 학원에서 배운 범위 안에서 마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똑똑.


벌써 왔나 보다.


라프리트는 친한데다 빨리 만나고 싶기에 서둘러 자신이 문을 열었지만, 소베르비아마저 그러긴 조금 부담됐다.


‘어디서 배운 예의냐고 부모님을 흉보이게 하면 안 되지.’


그렇게 에르가 문으로 가고, 리아는 라프리트와 함께 일어나 방문자를 맞을 준비를 했다.


에르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고, 소베르비아는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루비아 씨.”

“먼저 실례하고 있었습니다, 소베르비아 님.”

“무례에도 불구하고 반겨줘서 고마워요, 이스피리아 양. 그리고 환담을 방해해서 미안하답니다.”

“뭘요. 저는 고맙기만······이 아니라, 루비아 씨가 와주셔서 기쁘기만 한걸요.”


인사가 끝나고 소베르비아는 미소 짓고는 진한 갈색의 머리칼과 진한 청색의 눈을 한 집사가 꺼내주는 의자에 앉았다.


방의 주인도 아니건만, 자연스럽기만 한 행동은 역시나 공주님이었다.


‘저분은······ 아까 점심때 계셨던 분이네.’


평소와는 다른 동행인을 빤히 쳐다봐서였을까. 소베르비아는 살짝 굳은 미소로 집사 같은 남성을 소개해주었다.



“이 자는 레딧츠. 제 사용인들을 총괄하는 집사예요.”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레딧츠라 합니다.”


정중한 인사에 리아도 귀족의 예법으로 답례했다.



“이스피리아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레딧츠 씨.”

“저 따위에게 분에 넘칠 정도의 인사. 감사드립니다, 이스피리아 님.”

“아뇨.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그렇지 않아요, 이스피리아 양. 보통은 종자나 사용인에게 주인과 똑같은 인사는 하지 않는답니다. 종자와 같은 급으로 여겨지는 걸 싫어하는 분들도 계시니까요.”

“아, 맞다. 그렇다고 했지.”


입학식 전, 자신의 방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됐던 라프리트의 교양 수업 시간에 배웠었다.


벌써 까먹고 그런 건 아닌데, 리아의 입장으로서는 인사조차 신분에 따라 다르게 하는 귀족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따라 하는 게 영 어색했다.


그래도 실수한 건 맞기에 리아는 사과하려 했으나······ 그전에 소베르비아가 막았다.



“괜찮답니다. 제 집사를 아껴줘서 그런 거잖아요. 고마울 뿐이어요. 그런데다가 이스피리아 양은 귀족의 예법은 최근에 배우셨잖아요. 저나 레딧츠를 욕보일 목적도 아니 온대, 트집 잡는 건 멋이 없죠.”


‘쿠, 쿨해! 이게 진짜 어른인 여자라는 건가!?’


너그러운 모습과 우아하게 자태는 머릿속에 그리던 이상적인 여성 자체였다. 저 모습이라면 아이리스에게 위엄을 보이기에도 전혀 무리 없을 거다.


그렇게 판단한 리아는 동경하는 눈빛이 되어 소베르비아의 행동을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그 사이 눈빛을 조금 예리하게 한 라프리트가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소베르비아 님. 어찌 리아 양이 예법을 최근에 배우셨다고 생각하셨는지요?”

“그전에 일단 앉으세요. 언제까지고 저만 앉아 있어서야 죄송하지 않습니까?”


소베르비아는 슬쩍, 마찬가지로 서 있는 리아를 쳐다봤다.



“읏. 알겠습니다.”


라프리트와 리아가 자리에 앉고, 곧 에르가 준비한 차를 전원에게 따라줬다.



“음~ 꽤 괜찮은 향이군요. 어디 산인가요?”


라프리트가 살짝 움찔하고, 에르는 조금 눈을 가늘게 했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게 훤했다.


그러나 그리 숨길 건 아니다. 차의 향을 맡고 어디 건지 알아낸 리아는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제 고향에서 가져온 거예요. 향이 괜찮죠?”

“······.”

“예. 제법 특색있는 향이네요. 맛도······ 약간 떫긴 하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군요. 고마워요. 좋은 차를 대접해줘서.”


웃는 얼굴로 소베르비아는 준비해준 다과와 함께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던 라프리트는 상당히 놀란 듯했는데, 소베르비아도 이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꼬았다.



“뭔가······ 이상한가요? 라프리트 양.”

“아닙니다. 그보단 제가 여쭤본 건?”

“아아, 그렇지요. 제가 어찌 이스피리아 양이 평민인 걸 알았나······ 였었나요?”

“······.”


리아는 딱히 숨길 일은 아니라 생각했고, 그리 적극적으로 숨기려고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쉽게? 루비아 씨와는 접점이 그다지 많진 않았으니 쉽게 파악할 순 없었을 거라 여겼는데······’


모두가 똑같이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게 재밌었는지 소베르비아는 작게 웃었다.



“미안해요. 여러분들의 반응이 조금 신선해서 말이죠.”


정말 즐거운지 한 차례 더 웃은 소베르비아는 이어서 말했다.



“눈썰미가 좋은 분이라면 금방 아실 거예요. 어차피 숨기려고 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라프리트 양도 아시는 듯합니다만, 그리 특별한 건 아니랍니다.”

“――에?! 그, 그랬어요?”


――어째서 네가 놀라냐?


소베르비아는 이러한 물음을 담은 시선으로 소리를 친 리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상당히 친해 보이기에 어지간한 이야기들은 다 주고받았던 것으로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일은 없었다. 굳이 떠벌릴 일은 아니었으니.



“······네. 사실은 보자마자 알았어요.”

“처, 처음 만나셨을 때요?! 아니, 잠깐만······ 그럴 수 있으려나. 그땐 아무것도 몰랐으니.”

“딱히 모른 척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아하! 그래서 저에게 예법을 가르쳐 주셨던 거군요! 국빈으로서 체통을 지킬 수 있게.”

“그래서 그런 건 아닌데······”


라프리트는 어물쩍 말을 흐렸지만, 리아는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져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냉큼 두 손으로 라프리트의 손을 감쌌다.



“고마워요······ 라프리트 씨. 제가 평민인 걸 알면서도 잘해주시고. 그리고 친하게 지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제 첫 친구가 이런 멋진 분이라 정말 다행이고 기뻐요.”


오버하는 게 아니다. 귀족이란 틀을 벗기더라도 라프리트 정도의 인격자를 어디 쉽사리 만날 수 있겠는가.



“리아 양······”


계속 긴장해있던 라프리트의 눈썹이 팔자로 늘어지며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이에 리아도 활짝 웃으며――


앉아 있던 라프리트의 목을 껴안고는 볼에 뽀뽀를 선사했다.



“무, 무무무무무······무엇을?!”


기습공격에 라프리트는 심하게 당황해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리아가 매달려 있다는 걸 파악할 정신은 있었는지 땅에 떨어지지 않게 몸을 안아줬다.


거의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해 라프리트의 두 손은 비게 되었다.


덕분에 저항할 수도 없어, 그대로 얼굴을 붙여 볼을 비벼오는 리아를 말릴 수도 없게 됐다.


둘 모두에게 나름 행복한? 시간이 이어지고――



“흠흠. 아가씨?”


뒤에서 말을 거는 에르로 인해 겨우 끝났다.


안네조차도 귀족의 예의를 완전히 벗어난――그것도 타국의 공주 앞에서―― 이러한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없어 당황하느라 반응하는 것이 늦어졌다.



“아······ 나도 모르게. 미, 미안해요, 라프리트 씨.”

“아으으으······ 헛! 아, 아아아뇨!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전 행복―― 호홈······ 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친구끼리인데 괜찮아요.”


마음껏 비비며 잔뜩 만족했던 리아는 얌전히 손을 놨고, 라프리트도 조심스럽게 리아를 내려줬다.



“정말 사이가 좋으시군요.”

“못 볼 꼴을 보여 실례했습니다, 소베르비아 님.”

“앗. 그렇지. 미안해요, 루비아 씨.”

“아니어요. 저 또한 순수한 여러분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답니다.”


조금의 악의도 없는 말에 라프리트는 정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마음이 있는 인간이랍니다. 그리 놀라실 필요는 없어요.”


마치 마음을 읽힌 듯한 대꾸.


라프리트는 살짝 움찔하더니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았고, 리아도 따라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저기? 그런데 루비아 씨는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그렇지요······ 너무 즐거운 시간이라 저도 모르게 볼 일을 까먹었군요.”


············.


‘그런데 마, 말이 없으시네······ 혹시 어, 어려운 부탁을 하시려고?! 어쩌지! 나 돈 없는데······’


보통이라면 이렇게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일이라면 돈 문제 말고는 없을 거다. 지구에서의 80여 년의 인생이 확실하다고 속삭였다.


근데 공주가 돈을 꿔달라고 하는 것이다.


분명 평범한 액수는 아닐 거다. 하지만 그런 돈은커녕 동전 하나 만져본 적 없는데, 있을 리가 없었다.


리카드가 준 돈이 있긴 했다.


그렇지만 그 돈은 가족 모두의 생활비였다. 맘대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리스에게 못난 엄마라 눈총 당하기는 절대 싫고, 암만 친구라 하더라도 금전 관계만큼은 확실히 해야 하는 법이다. 어설프게 감당되지도 않은 돈을 빌려줬다가는 서로에게 좋지 않게 끝나기 일쑤였고.


안타깝지만 여기는 확실히 거절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긴 침묵으로 인해 생긴 어색한 분위기에 슬슬 몸이 근질근질 쑤실 때쯤 소베르비아가 입을 열었다.



“이스피리아 양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거절합니다!!”

“······네?”


이 자리의 있는 모두가 놀라지만, 리아는 등줄기를 펴고 당당하게 손까지 내밀며 재차 확고한 의사를 전달했다.



“거절합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하더라도 돈 관계는 함부로 맺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정말······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그 말씀은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렇지만 너무 매정하게만 말하면 쪼금 그러니. 제가 확실히 금전을 절약하며 생활하실 수 있도록 조언해 드릴게요.”

“아······뇨······. 전 그렇게 재정에 큰 어려움이······”

“흑······.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신다니. ――설마 루비아 씨에게 상처를 준 건가?! 어, 어쩌지? 그래도 정말로 본의는 아니에요! 루비아 씨도 반드시 아시게 될 날이 올 거예요. 제가 왜 이런 정 없는 짓을 했는지. 그러니 미워하지 마시고 계속 친구로 계셔주세요!”


혼잣말하듯이 외친 리아를 보며 소베르비아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마치 생에 처음 보는 생물과 조우한 듯 사고가 멈춰 보였다.



“아가씨······ 상대의 말은 끝까지 듣고 판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침묵을 깨고 에르가 말했다.


덩달아 정신을 차린 라프리트도 작은 목소리로 리아에게 속닥거렸다.



“그, 그래요! 리아 양. 멋대로 지레짐작하시면 안 돼요.”

“짐작이라니요. 친구에게 꺼내기 어려운 말이라면 돈을 빌려달라는 것 말고는 있을 수 없다구요!”

“다······른 일이 있을 수도 있죠. 그리고 공주님께서 돈이 모자랄 리가 있겠나요.”

“그건 모르는 거 아니에요? 자립심을 기르기 위해 아버지가 용돈을 적게 보내주셨다든지. 라프리트 씨는 안 그래요?”

“어. 저도 그다지 많이 받진 않지만······.”

“거봐요. 자고로 부모란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식이 성장하길 바라서 비정한 마음을 먹을 때도 있는 거예요.”

“그런······건가요?”

“네. 그런 거예요.”

“그래도 소베르비아 님의 아버님은 공왕 폐하이신데 그럴 리가······ 있을까요?”

“왕이셔도 결국 부모님이잖아요.”

“그렇······군요······”


자신만만한 리아의 말에 라프리트가 점점 설득되어갔다.


다른 때라면······ 이리도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다. 평소의 그녀를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래 봬도 리아는 실제로 아이리스의 엄마이자, 어엿한 한 사람의 부모였다. 거기다 전생엔 손녀까지 있는 꽤나 긴 생을 살아왔었다.


어딘지 말이 묵직했던 거겠지. 더불어 라프리트가 어느 정도 리아를 알고 있던 점도 한몫했다.


――다만 힘차게 헛방망이를 휘두른 것만 아니었다면 참으로 좋았을 거다.



“아하하······ 아하하하핫!”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소베르비아가 큰 소리로 웃었다. 언제나 우아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그녀가.


배를 누르고 허리까지 살짝 굽혀 웃는 이러한 모습에―― 이상적인 여성상이 깨진 것에 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마찬가지였다. 레딧츠 또한 고목의 딱딱하고 진중한 이미지조차 무너지고는 살짝 입까지 벌리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하핫······ 아버님이 용돈을 적게 주셔······ 이 내가 돈을 빌리러 왔대. 크큭······. 그렇군요, 평민들 사이에서 어려운 말이란 돈을 빌리는 거군요. 그야 그건 어렵겠죠. 흐흐. 조언해 주실 절약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어, 어······ 루비아······ 씨?”


혼잣말의 내용으로 볼 땐 기분이 상한 듯도 보이나, 눈물까지 살짝 맺히면서 웃고 있으니 그렇진 않을 거다.


그래도 자신이 한 말로 그녀가 이리 변모한 것이니 리아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 괜찮으세요?”

“물론이어요. 괜찮다마다요. 실로 기분이 좋기만 하답니다.”


대답은 했지만 아직 멈출 순 없었는지, 소베르비아는 좀 더 웃음소리를 이어갔다.


잠시 후 겨우겨우 진정한 소베르비아는 레딧츠에게 받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은 뒤 말했다.



“흠흠. 아, 여러분 정말 실례했어요.”

“어음······ 저기요?”

“아아, 물론 저는 금전적으로 여유롭답니다. 아버님과 공국은 절 좋아하거든요.”

“다, 다행이네요.”


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안 리아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모습에 소베르비아는 황급히 부채를 펼쳐 입가를······ 아니, 눈가 근처까지 가렸다. 평소의 우아한 동작 따윈 전혀 없었다.



“그러면 어떤 말씀을 하시려?”


리아는 그거 말고 친구에게 말하기 어려운 일 따위 존재하냐는 얼굴을 했다. 그러자 소베르비아가 가리고 있던 부채 안쪽에서 “푸흡”이라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응?”

“아녀요. 사실은 여러 가지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도록 하죠. 이스피리아 양. 저는 여기 이 레딧츠를 시켜 당신의 뒤를 좀 캐내려 했습니다.”

“저를······요?”


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에르와 라프리트는 표정을 굳혔다.


그 반응을 곁눈질로 보았던 리아는 침착하게 물었다.



“왜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나 취향 같은 것을 알아보려 했어요.”


알아서 뭐에 쓰려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리아는 답답함에 시뮬레이션을 멈추고 사고를 맑게 했다. 그러고는 찬찬히 기억도 훑어보면서 소베르비아의 말을 확인했다.



“으으음. 확실히······ 한 3km쯤에서 레딧츠 씨가 계속 주위에 계시긴 했네요.”


소베르비아는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아실 수 있으세요?”

“네. 전 기억력이 좋은 모양이에요. 조금 생각해보면 금방 떠올릴 수 있어요.”


사실은 레딧츠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를 묻는 듯했다.


그렇지만 라프리트가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고향의 평범한 어른들도 신묘하게 보일 듯한 이곳에서 에이브안도 놀란 마력탐지 범위를 지녔다고 알릴 순 없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당부한 것도 있으니 모른 척하기로 했다.



“레딧츠 씨도 굉장하시네요. 제 마력을 감지하지 못하셨을 텐데도 바로바로 잘 쫓으셨네요. 거리도 계속 일정하게 유지하셨고요.”

“······가, 감사드리옵니다.”


뜻하지 않은 칭찬에 레딧츠는 당혹스러워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네요······ 정말 살기는커녕, 살펴보기만 하신 거네요. 정리해보자면, 저에게 말씀드리러 온 건 아마 에르에게 들킨 걸 알아차리신 거겠네요. 그리고 이토록 갑작스레 찾아오신 거니, 크게 틀어지기 전에 빠르게 사과하시려 한 것 같은데······ 맞습니까?”


평상시의 어리벙벙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차분하며 분위기조차도 상당히 어른스럽게 된 리아에게 둘―― 소베르비아와 레딧츠는 놀람을 숨기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소베르비아만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는 리아의 물음에 답했다.



“네. 그 말씀대로. 전 당신과 틀어지고 싶지 않거든요. 오히려 잔뜩 호감을 쌓아 공국으로 모셔가고 싶을 뿐이랍니다.”

“루비아 씨께서 겨우 평민인 저에게 자세를 낮추시면서까지 저를―― 저와 에르에게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신 거군요. 그래서 접근하신 거고요.”

“그래요.”


반대로 그렇지 않았으면 다가오지도 않았을 거란 속뜻도 리아는 제대로 이해했다.


역시 공주랄까. 상대방 따윈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직설적인 말이었다.


그래도 소베르비아는 정말 있는 그대로의 진심만을 말한 것일 거다. 마력도 살펴봤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말투도 조금 가벼워진 것으로 보아 평소엔 내숭을 떤 것이니라.


‘아직도 좀 내숭이 남은 듯하지만······ 여자로서 다들 어느 정도는 있겠지.’


지구에서도 여자가, 특히 아내가 슬슬 친해진 이후에 변모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질색······하기보단, 조금 무섭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니 나름 친숙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도······ 아니야, 그만두자. 엉덩이는 소중한 거야.’


이러나저러나 뭔가 마음이 술렁거리던 전의 소베르비아보단, 지금인 상태가 훨씬 호감이 생겼다.


물론 전의―― 내숭 떨던 모습이 바라던 이상향임에는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음! 정말 멋졌지.’


나중에 내숭 버전인 소베르비아의 행동을 분석하기로 하고, 리아는 전해야 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각자 원하는 바가 있으니 노력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루비아 씨가 크게 잘못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도 않고요. 하지만 그러면 루비아 씨가 납득······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실 테니 확실히 결착을 내도록 하죠.”

“호오······. 의외로 저를 제대로 파악하고 계시네요.”

“의외라뇨?! 전 이렇게 보여도 똑똑······ 하려나? 어, 어쨌든 친구도 제대로 잘 눈여겨보는 여자예요!”


성을 내는 리아의 모습에 소베르비아는 살짝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흘렸다.



“그렇네요. 제 쪽이야말로 잘 파악하지 못한 거 같네요. 그럼, 정식으로 사과하도록 하죠. 이스피리아 양, 몰래 염탐하는 짓을 해 미안합니다.”


소베르비아는 부채도 접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비록 앉아서 그저 고개만 숙인 귀족으로서의 예법도 아니었지만, 일국의 공주가 평민에게 머리를 숙인 거다. 있을 수 없다라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라프리트의 반응만으로도 이것이 얼마나 예외적인 일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진지하게 사과를 받아야 할 것이다.


리아는 일어서서 소베르비아에게 다가갔다.



“루비아 씨, 고개를 들어주세요.”


스르륵 천천히 소베르비아가 고개를 들고 리아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는 그녀를――



“이게 사과에 대한 제 답이에요.”


――안아줬다.


모시는 사람에게 접근하니 레딧츠가 잠깐 경계하는 낌새를 보였지만, 바로 물러나 줘서 다행이었다.



“이스피리아······ 양?”

“리아로 불러주세요. 그리고 친구끼리는 원래 이렇게 화해하는 거예요.”


물론 여자 한정이다.


다만 이것도 단지 추측으로, 진짜 여자들이 이렇게 화해하는진 전혀 모른다. 그저 만화나 영화, 드라마······ 근근이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데에서 이리 하길래 그렇지 않을까 싶은 것뿐이었다.


지식이 참으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있나. 이번 생은 여자지만, 친구는 이번에 사귄 이 둘이 처음인데. 경험해보기는커녕 싸워볼 기회조차 없었던 거다.


나트알에서도 다를 건 없었다. 동년배의 여자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외모만은 마을 아주머니들도 다들 젊어 보이긴 했으나, 전원 필리아와 비슷한 연배 내지는 연상이었다. 친구로 지내기엔 힘들겠거니와 다들 이쪽을 아이로만 봤다.


‘전생에서는 남자였기에 털털해서 그런지, 말로 사과하고 밥 좀 먹거나, 술 좀 마시면서 대화하다 보면 금방 풀려서 편했지만.’


하지만 만약 남자끼리 이러고 있다면――


‘윽.’


남자였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기분이 조금 알싸하게 된 리아는 잡념을 멈추고 안고 있는 소베르비아를 쳐다봤다.


소베르비아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태 만나며 생겼던 이미지 때문인지······ 귀여웠다.


‘아마 부모님 이외의 또래들은 전부 사양하느라 껴안는다거나 한 적이 없으시겠지. 공주님이니까. 그렇다면 좀 더 듬뿍 귀여워해 드리지 않으면!’


자기만족이 아니다.


분명 소베르비아에게서 감미로운 향이 나는 데다, 피부도 매끈거리고 마음껏 부비고 싶었지만, 이 모든 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합리화를 한 리아는 라프리트 때처럼 몸을 밀착하고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소베르비아가 곤란해한다면 모를까, 딱 보기에도 그다지 싫어하는 느낌은 없어서 거침없었다.


‘흐히히. 부드럽다~ 계속 부비부비하고 싶네. 거기다 어쩜 이리 좋은 향기가 나는 걸까? 향수만 쓰신 건 아닌 거 같은데. 이것도 한 번 분석해 볼까.’



“향.수.만 쓴 거예요.”


바로 옆에서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들렸다.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조금 떨어져 보니, 목소리 못지않은 싸늘한 시선으로 소베르비아가 쳐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워하던 모습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대, 대단하세요. 제 생각도 읽으실 줄 아시는 거예요? 가족들 말고는 없었는데······”


이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표정을 짓는구나, 생각하고 있던 리아에게 소베르비아는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스피리아, ――리아 양이 혼잣말을 하셨잖아요.”

“에에······엥? 제가요? 루비아 씨도 참······ 농담을 잘하시네요.”


‘음음. 내가 중얼중얼 혼자 떠들다니 그런 버릇이 있을 리가······’



“지금 그렇게요.”

“헛?!”


아무리 봐도 소베르비아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리아는 고개를 돌려 라프리트를 쳐다봤다.


그녀는······ 눈을 피했다. 곁에 있어 같이 시선에 들어온 안네마저.


‘흐엇?!! 지, 진짜라고? 에르나 아이리스, 마을 가족들도 전원 내 마음을 딱 알아차리고 대해주시던 게 아니었······어?’



“흠. 상냥한 가족분들이시네요. 다만 리아 양. 혼잣말은 좀 품위가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근데 코를 벌렁거리시면서 남의 냄새를 맡으시는 건······ 아니, ‘후헤헤’ 나, ‘으히힛’ 같은 천박한 소리를 내시는 건 정말 그만둬주세요. 표정도 어쩐지 아저씨 같으니까.”


‘아저씨······ 내가 그, 그랬었다고······?!’


전혀 몰랐던 사실에―― 배려해주느라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던 나트알 주민들의 친절함을 알게 된 리아는 충격에 입을 벌리고 넋이 나갔다.



“그리고 전 남에게 당하기만 하는 걸 싫어한답니다. 언제나 받은 만큼 반드시 되돌려주죠. 그러니――”


소베르비아는 슬쩍 거리를 벌렸던 리아를 잡았다.



“저도 한 번 부비부비라는 걸 해보죠.”


선언하듯이 말한 소베르비아는 곧장 리아가 했던 것처럼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리아를 제외한 일동들은 깜짝 놀라 바라보기만 했다.



“헤~ 당할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네요.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한 것이 생각보다 기분이 좋아지네요. 리아 양이 괴상한 표정을 짓던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여전히 멍하니 몸을 맡기고 있는 리아가 빠져나갈 리는 없겠지만, 철두철미한 소베르비아는 허리를 안아 도망칠 길도 원천 봉쇄하고는 마음껏 즐겼다.



“소, 소베르비아 님. 리아 양을 그만 놔주심이 어떤가요?”

“어머나, 라프리트 양도 해보고 싶으신가요? 하지만 아이처럼 따뜻한 것이 영 손에서 놓기 어렵게 만드네요.”


도발하는 듯한 미소에 라프리트는 울컥했는지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가 그런 짓을 바랄 리가――”

“――후후후. 고집스럽네요. 솔직하게 사시는 게 편하거늘. 이리도 좋은데 말이죠.”


팅~


소베르비아는 과시하듯 리아의 볼을 살짝 당겼다 놨다.



“크으윽··· 리아 양! 정신을 차리세요!”


평소 설교 당하던 것이 빛을 보았나 보다. 날카롭게 찌르는 라프리트의 목소리에 리아는 움찔하더니 퍼뜩 부빔 당하다고 있는 현 자신의 상황을 파악했다.


그렇게 파악한 현황은 어느새 무릎에 앉혀져 볼을 비비는 것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쓰다듬어지고 있는 자신.


그러나 곤란하진 않고 나름 괜찮았다.


‘그야. 이런 미인이니 기분 나쁠 리가 없잖아. 거기에······ 꽤 솜씨가 좋아. 이런 다정한 손길이라면 역시 루비아 씨는 내 생각대로 착하신 분이야. 하지만······’


리아는 몸을 비틀어 소베르비아를 쳐다봤다.



“루비아 씨.”

“네?”

“솔직하게 사시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요······”

“그럼 루비아 씨도 솔직해지셔요. 본인부터 먼저 모범을 보이셔야 하지 않겠어요?”


동그랗게 뜬눈으로 내려다보는 소베르비아에게 리아는 씨익 웃었다.


잠시 말이 없던 소베르비아는 이내 피식하더니 언제나의 우아하고 멋들어진 미소가 아닌,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비웃는 것 같은 깔보는 듯한 시선으로 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리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것이야말로 소베르비아가 마음을 연 증거이자, 솔직하게 보여주는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리아 양은······ 이것도 그만두죠. 리아는 정말 의외로 사람을 잘 꿰뚫어 보네.”

“아뇨. 전 스스로 나름 사람 보는 눈엔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라버니나 아이리스가 절대 아니라고 하니까 별로 그렇진 않은가 봐요.”

“오라버니도 있었어? 레딧츠에게 들어본 거 같기도 하다만. 그런데 어떻게 안 거야?”

“으응······ 잘 설명은 못 하겠는데 루비아 씨라면 왠~지 그러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이 내가 남들에게 들킬만한 어설픈 짓 따위를 할 리가 없는데? 뭐······ 상관없겠지. 그래서, 솔직한 나를 보니 실망했어?”

“아니요. 오히려 훨씬 정감이 가는데요.”

“내가 말하기도 그렇지만 전혀 호감이 갈 부분이 없어 보이는데도?”

“네.”

“······이상한 아이네.”

“그럴지도요. 저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주위에서 특이하다고 그러긴 하니까.”

“다행히도 주위엔 제대로 된 사람들이 있었네.”

“엑?! 그럼 전 안 그렇다는 거예요?!”

“글쎄다~ 그런 건 본인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친밀한―― 정말 친구가 대화하는 듯한 모습에 라프리트가 놀라는 기색을 숨기지도 못했다. 달라진 말투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특히 소베르비아의 집사인 레딧츠는 이쪽이 안겨들 때부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뒤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크흠흠! 이제 슬슬 내려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러네요.”


가시가 돋친 말에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리아는 민첩하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소베르비아도 만족했는지 별다른 이의 없이 보내주었다.



“소베르비아 님. 방문 목적이셨던 사과도 끝나셨으니 슬슬 돌아가셔도 괜찮으신 것이 아닙니까?”

“물론 제 볼일은 끝났지만, 친구들끼리 모인 것이니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봐도 좋지 않나요?”

“나중에 하심이? 이제 어둑해졌습니다만. 늦게 주무시면 피부에 해롭거든요. 공국의 빛이라 불리시는 공주님이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라프리트 양도 마찬가지지 않나요. 걱정해주셔서 정말 고마울 따름이지만, 모처럼 ‘리아’의 방에 놀러 왔으니 늦어도 괜찮답니다. 아~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룻밤같이 자면서 진득하니 대화를 가져보는 것도 좋겠네요. 괜찮죠? 레딧츠.”

“바라시는 대로.”

“······.”

“아아. 농담이랍니다~ 멋대로 찾아왔는데 리아의 사정도 안 들어보고 묵을 수야 없죠. 전 그런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니 그만 얼굴 좀 피세요, 라.프.리.트 양?”


불꽃이 튀는 듯한 분위기와 소베르비아의 마무리 일격 같은 말에 리아는 그 대상이 된 라프리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다행히도 라프리트에게선 평온한 미소만이 반겨줄 뿐이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을 멈춘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이 설전은 완벽한 라프리트의 판정패라는 걸.


반론은 고사하고 분한 듯 의자 밑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먹만 보더라도 명확했다. 당연히 못 본 척했지만.


이런 건 세심한 영역이다. 배려를 해줘야 한다.


그렇지만 친구끼리는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게 리아의 생각이었다.



“루비아 씨······”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말이야.”


리아가 지긋이 쳐다보자 소베르비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해요, 라프리트 양. 이래 보여도 당신과도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 사실이랍니다. 앞으로도 좋은 만남을 이어갔으면 하는군요.”

“······제 쪽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루.비.아 님.”

“후후.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요.”


‘좋게······ 마무리된 느낌이지? 응. 그럴 거야. 아마······’


여전히 속마음을 숨긴 미소뿐이었지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 리아는 고민하는 걸 단념했다.



“아앗! 그러고보니 말씀드리는 걸 잊었네요!”


벌떡 일어나 소리친 리아는 손가락을 들어 소베르비아―― 루비아를 가리켰다.



“무, 뭔데 그래?”


시건방지게 누군가가 자신에게 손가락질한다는 상황 자체가 전혀 없었던 루비아가 당황하고 있지만, 리아는 자신이 할 말만을 전했다.



“우선! 루비아 씨가 아셔야 할 게 두 가지 있어요!”

“그게······ 뭐야?”

“첫 번째는 전 공국에서 살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살지 못합니다!”

“······왜?”

“공국이 싫다거나 한 건 아니에요.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데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왜 공국은 안 된다는 건가?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리아는 이유를 말해줬다.



“공국뿐만이 아니에요. 전 졸업 이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학교를 만들려고 하거든요.”

“교육기관을······ 만들겠다는 거지?”

“네. 시골이라 그런 시설이 없어서요. 앞으로 마을에선 아이들이 많이 태어날 거 같은데, 암만 시골이라도 배울 곳조차 없으면 그렇잖아요.”

“그래서 어느 나라에도 몸을 두진 않을 거다, 라는 거군.”

“그렇죠. 미안해요, 모처럼 좋게 봐주셔서 그런 말씀도 해주셨는데.”

“괜찮아.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리아는 강제로 끌고 가려 해도 통할 상대도 아니니. 그건 그런데―― 어째서 라프리트 양, 당신이 놀라죠?”

“아······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리아 양이 그런 뜻을 품고 계셨을 줄 몰랐을 뿐이에요.”


루비아는 “그런가요?”라며 넘어갔지만······ 상대의 마력을 매우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는 리아는 어지간한 심리 상태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단언할 수 있다.


지금 라프리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요동치는 마력이 확실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별일은 아닐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해의나 악의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으니 말이다.


‘마음엔 걸리지만······ 사람은 저마다 비밀이 있기 마련이니 거짓말도 할 수 있겠지.’


오히려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다.



“또 하나는?”


묻는 소베르비아의 말에 리아는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아, 그렇지 참! 가장 중요한 걸 빠뜨릴 뻔했네.”


그래. 오늘 대화한 것 중에서 제일 중요한 거다. 이것과 비교한다면 학교를 만든다는 일 정도는 전혀 알아주지 않아도 될 정도다.


강한 뜻을 담은 리아의 눈은 잔뜩 힘이 담겨 있었다. 분위기마저 살이 떨리는 긴장감을 유발했다.


급변한 이 모습에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는지 사용인들도 포함하여 모두 진지하게 듣는 자세를 달리하였다.


그런 이들에게 리아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루비아 씨나 다른 분들이 절 높게 봐주시는 건 정말 감사해요. 말씀하시는 분위기로 봐선 아마 에르까지도 높게 쳐주시는 거겠죠. ――하지만! 우리 아이리스에게 전~혀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으시는 건 너무하시지 않아요?! 들려오는 소문도 어쩐지 아이리스에 대한 건 전혀 없고!”


불만이 가득한 리아의 토로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예상과는 달랐나 보다.


더불어 왠지 불길한 기분을 느꼈는지 라프리트와 에르, 하물며 안네마저도 다급한 기색으로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리아의 입이 움직였다.



“아이리스를··· 우리 아들을 얕보지 마세요! 분명 커서 나중엔 저 같은 건 시원찮을 정도로 대단해질 거예요!! 그때 가서 탐내셔도······ 으아어읍읍!”


입이 막힌 리아는 발버둥을 쳤는데, 그 입을 막고 있던 에르는 멍하니 쳐다보는 루비아의 일목요연한 반응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푸하! 왜 그래요? 에르.”

“······”

“왜가 아니에요. 하아······ 리아 양, 자신이 무슨 말은 한 건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남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리아는 말이 없는 그와 기분이 빠진 듯 힘없는 라프리트의 목소리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방금 한 말을 되짚어봤다. 맑은 상태였기에 순식간이었다.



“어라······”


‘이상하다. 왠지 내가 있는 사실 없는 사실 다 말한 듯한 기분인데?’



“듯한 기분이 아니에요. 정말 있는 그대로 다 말했어요. 리아 양, 도대체 숨길 생각은 있으신 거예요?”

“······”


다른 건 몰라도 아이리스가 아들이란 사실은 숨기려 했다.


평균수명이 200살인 이곳에서―― 그것도 아이를 별로 낳지 않는다고 하는데, 엄마랑 햇수로 8년 차이밖에 안 난다는 건 분명 이상하게 보일만 한 일이니까. 그 엄마가 현재 16살이면 더욱.


자신은 상관없지만, 아이리스에게 상처받을 시선이나 소문이 따라붙는 건 절대 싫었다. 그렇기에 에르가 사용인 노릇을 하는 것도, 가족 관계를 부정하는 것도 전부 내켜 하지 않았음에도 이것만큼은 받아들였던 거다.


그런데 스스로 밝혔다.


라프리트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함부로 말하지 않을 듯한 묘한 믿음이 들었고, 스스로 발설하지도 않았다. 전체적으로 어쩌다 상황이 맞물려 라프리트가 알아차리게 된 거였다.


더불어 당시에는 시뮬레이션 때문에 약간 멍한 상태였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몰라 패닉에 빠져들던 리아에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 아이가 리아의······ 아들이었단 말이지. 듣고 보니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저기 루비아 씨? 그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비밀로 해줄게.”


그리 말하며 루비아는 산뜻한 미소를 보였다.



“어차피 어리게만 보이는 네 자식이라고 말해봐야 아무도 안 믿을걸? 들은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넌 중등부를 건너뛰고 월반해 온 아이로 일부 착각하는 사람도 있어.”

“그, 그런가요? 어······ 근데 전 그렇게 작지 않아요.”

“후훗. 작다고 한 적은 없어.”


확실히 어려 보인다는 건 작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콤플렉스를 연상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저 혼자 뜨금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 리아를 내버려 두고 라프리트가 싸늘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루비아 님.”

“그대도 듣지 않았나요. 리아에게 미움받는 건 사양이에요. 어디 가서 나불나불 떠들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진의를 엿보듯 잠시 노려보던 라프리트는 시선을 거뒀다.



“······일단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본심을 말했을 뿐이니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라프리트 양. 그리고 저보단 오히려······”


소베르비아는 고개를 돌렸다.



“리아가 더 불안해.”

“으윽.”


스스로도 반론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보아하니 리아는 흥분하면 조금 머리가······ 음, 여러 고려를 잘 못 하는 모양이야. 그 부분은 앞으로 신경 좀 써야 할 거야.”

“넵······”


도중 말을 순화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도록 했다. 그것보단 너무나 맞는 말들이 가슴에 박혀올 뿐이었다.



“그리고 너의 짝은······”


그녀의 시선이 곁에 있는 에르에게 향한 것을 느낀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사실은 좀 더 있고 싶지만, 오늘은 늦었으니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할까? 그땐 리아의 서방님과 아이리스도 소개해주었으면 하는데. 괜찮으려나?”


슬쩍 바라보니 에르는 상관없다며 작게 말해줬다.



“아이리스에게도 물어봐야 하겠지만, 괜찮다고 하면 같이 뵙도록 할게요.”

“그래? 좋은 소식이었으면 하네. 편한 날에 말해줘, 잘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게.”

“네.”

“라프리트 양은?”

“저도 슬슬 돌아가 볼까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는 둘을 따라 리아도 배웅하러 나왔다.



“두 분 조심히 들어가세요.”

“리아 양도 잘 쉬세요.”

“응. 오늘은 진짜 재밌었어. 하지만 그 전에――”


말을 멈춘 루비아는 천천히 다가와 허리를 굽히더니 살며시 리아의 턱을 잡아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영화나 어디서인가 본 듯한 상황이었다.


그걸 미인에게 직접 체험 당하고 있으니 어쩐지 두근거린다.



“난 아직 리아를 포기한 게 아니야.”


투명한······ 보랏빛 눈이 또렷이 보였다.


사심이 전혀 담겨 있지도 않은―― 여태까지 중 가장 빛나는 듯한 그 눈이 똑바로 직시해왔다.



“학교를 만든 이후라는 것도 있는 거잖아? 나라를 위해서라도······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내 개인적으로 손에 넣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 포기하지 않아.”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리아는 멍하니 바라만 봤다.


그 반응이 재밌었는지 키득 웃은 소베르비아는 손을 놓고 문밖으로 나섰다.



“각오해두라고, 리아.”


‘오오······ 이것도 왠지 본 거 같아. 청춘 드라마인가? 이야~ 뜨겁구먼. 역시 젊음은 좋은 것이여.’


혼란이 극에 달해진 리아는 자기도 잘 부탁한다며 답도 못 하고 허튼 생각을 하면서 손을 들어 둘의 배웅만을 했다.


작가의말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이만 자러갑니다!


다들 내일 봬요!


아. 오늘 봬요 일지도... 벌써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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