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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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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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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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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DUMMY

비명이 잠잠해지자 소베르비아는 슬쩍 리아를 풀어줬다.


품에서 벗어난 리아는 빨개진 볼을 쓰다듬었다.


‘아으으으. 아퍼······. 진짜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어!! 너무해!’



“응? 만족하지 못했어? 한 번 더 해줄까?”


리아는 화들짝 놀라면서 주춤 뒤로 물러섰다. 다만 최대한 억지로 웃으려 한 탓인지 표정이 제법 비굴했다.



“저, 저는 불만 따윈 조금도 없습니다요. 헤헤, 어찌 감히 루비아 씨에게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요.”

“······.”

“······.”


조용했다.


정말 모두 조용했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연무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학생들의 기합 소리뿐이었다.


――아니, 하나 더 슥슥, 비비는 소리도 들렸다.



“너,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상상도 못 했는데······ 묘하게 어울린다는 것이 쇼크네······”


기가 찬다는 듯 루비아는 어이없어했다.



“리아 양, 표정도 그렇지만, 손만은 정말 그만둬주세요.”


뒤이어 한숨까지 섞어 말하는 라프리트였다.


그 말에 리아는 ――맞잡아 비비고 있던 손을 멈췄다. 라프리트의 눈빛이 매서워지고 있기에 무척이나 신속했다.



“본 적은 없지만, 시정잡배들이 비굴하게 굴 때 저러지 않을까 연상되는 훌륭한 시연이었어. 연습해왔던 거야?”

“헤······ 감사합니다요. 따로 연습은 안 했지만, 루비아 씨가 흡족해하시니 몸을 둘 바를······”

“리아 양――?”


라프리트의 눈이 번뜩였다.


무서웠다.


히익, 소리를 낸 리아는 꾸부정하던 허리도 바짝 세우고는 슬그머니 에르의 곁으로 이동했다.


도움을 바라며 올려다본 그는······ 매우 다정하고 따스한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리아는 빤히 바라봤다.



“에르······?”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부끄러운 탓인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에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알 정도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말없이 살짝 머리를 쓸어줬다.


사용인 역할에 충실 하려고 한 탓인지 짧은 시간만이었지만 상냥한 손길을 느끼게 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흐응······ 평소의 둘은 이런 느낌이구나.”


신기한 걸 본 듯한 루비아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즉시 에르는 완벽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다정한 에르를 알아봐 주길 원하기에 아쉽기도 했지만, 지금은 여러 상황도 있고 나중에 정식으로 소개할 때 확실히 그러한 점을 알려도 괜찮을 거다.


리아가 떨어져 다가가자, 루비아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꽤 딴 길로 샜지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도록 하죠.”


그러고 보니 왕자가 어쩌고, 정치가 어떻고, 거기에 자신이 자진해서 뛰어들었다고 말하긴 했다. 정말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자신의 볼이 따끔해지는 일까지 흘러갔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게 고개를 돌리다가 리아는 루비아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몰라? ――라고 말하는 듯했다.


한 번 몸을 떤 리아는 황급히 입을 열어 도망쳤다.



“와, 왕자님! 네. 어째서 레온하트 전하와 정치 이야기가 나온 건지 알려주세요!”


대놓고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시도에 잠시 조용해졌지만, 넘어가 주기로 한 듯 루비아가 받아줬다.



“음······ 내가 해줘도 되지만, 아무래도 자국의 이야기가 될 테니 여기는 라프리트 양이 알려주시는 게 어떤가요?”

“······.”

“나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정이에요. 제가 그런 것 하나 모를 거라 보시나요?”


라프리트는 나라의 사정을 타국의 사람에게 알리기를 껄끄러워 한 것이니라.


하지만 말마따나 소베르비아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로 보이는 데다가, 정치에 어느 정도 몸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조금 고심하는 듯했던 라프리트가 말했다.



“리아양. 아시다시피 벨루디스에는 왕자님이 두 분 계세요.”


안다.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의 제1 왕자와 그와는 극명히 다른 느낌의 호감만 쭉쭉 쌓인 제2 왕자. 둘, 모두 보긴 했다.


근데 그게 어떻다는 건가 싶었던 리아는 떠오르는 생각에 물었다.



“아, 설마······ 정치라고 하니까, 후계자 문제로 다툼이 있나요?”


정답인가 보다. 라프리트가 살짝 놀라더니 대답했다.



“네······ 대놓고 다툼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보통 왕위를 다툰다고 하면 그건 가? 파벌을 나누고, 암약을 펼치고 하는 그런 거?’


시대극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다.


볼 때는 흥미를 자극해 방송시간에 TV 앞에 붙들어 매는 소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태반이기에 실제 왕조 국가에서는 그런 암투가 많이 벌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예외는 아닐 거다. 그렇지만 시대극은 초반에만 반짝 관심을 두고 열중했지만, 가면 갈수록 흥미가 급격히 떨어졌기에 자세하게는 모른다.


그래서 잘 감은 잡히지 않지만······



“파벌 싸움이 대두되지 않았다고 할 수준이라면······ 왕세자가 누구나가 인정할 만한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왕세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거의 유력한 상태, 혹은 대척할 왕자가 없는 수준이라는 건가? 또 하나는 파벌의 덩치 차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거나, 초읽기를 하듯 서로 간을 떠보는 정도인가.”


생각나는 건 이 정도가 전부다.


나름 최대한 열심히 고뇌해 나온 답이었는데, 즐거워하는 루비아와 놀라는 라프리트를 보니 별로 틀리진 않았나 보다.



“대부분 맞아요. 왕세자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모든 방면에서 제2 왕자 전하보다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 제1 왕자 전하―― 레오노반 님이 유력하다 보고 있죠.”

“그에 따라 제1 왕자님을 필두로 하는 파벌이 훨씬 거대하고요?”

“네. 그렇기에 아직 왕세자를 확정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별다른 파벌 싸움은 없어요.”

“언제든지 이길 수 있으니까 상대 세력을 그다지 위협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 거군요. 거기에 폐하는 아직 한창 일하실 나이시니 벌써 왕위 계승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겠네요.”


전해 듣기로는 아크티알은 70대쯤이 됐다고 한다. 선왕도 이미 타계했고, 본인도 지구라면 은퇴하고 느긋한 노후를 보낼 나이다. 가끔 저 나이에도 반 현역으로 있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150세까지 현역으로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아크티알이 몇 년이나 더 왕으로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은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크큭.”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리아에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 한창 일할 나이래. 키킥.”


소베르비아다.



“아, 미안미안. 웃겨서 말이야.”


사과하고도 멈추지를 못한 그녀는 좀 더 웃은 뒤 말하였다.



“하······ 좋아. 미안해요, 라프리트 양. 하지만 마음은 이해하는데 조금 답답하니 제가 이어서 말하도록 할까요? 제 쪽은 타국이고 하니 부담도 없고, 왜곡도 없이 전달할 수 있을 거라 보는데요?”

“······아뇨, 괜찮습니다. 배려만 감사히 받도록 하죠.”


라프리트는 단호하게 사양하고 리아를 쳐다봤다.



“리아 양의 생각은 거의 맞지만 틀린 부분도 있어요. 우선 우리나라의 왕위 계승에 대한 준비는 상당히 느린 편이에요.”

“그런······가요?”


힐끔 주위를 살펴보더니 라프리트는 소리를 낮췄다.



“네. 까놓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왕이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리에요.”

“과로로 인한 건 아니겠죠.”

“그렇지요. 야망을 품은 자들에게 뭔가를 당할 확률이 상당히 높죠. 적어도 다른 자리보단. 그게 아니더라도 병이라든지, 급사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말이죠. 그런데 만약 그렇게 갑작스레 왕이 떠난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보통은 미리 준비된 후계자를 그대로 왕으로 세우면 그만이에요. 초기에는 약간의 혼란은 빚어지겠지만, 큰 소란은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벨루디스는 왕세자가 없으니······”

“잔뜩 후원한 왕자가 왕이 되도록 파벌 싸움이 격해지겠지요. 본래라면 바라보지도 못할 자리에 앉을 수도 있으니 말이죠.”

“물론 나라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시는 말씀으로 봐선······ 그런 사람은 적은가 보군요.”

“······네, 안타깝지만요. 오랜 평화로 인한 탓인지 타국의 압박과 회유에도 쉽게 넘어가는 분들도 계시고요.”

“참고로 공국은 어제부로 이 나라에 대한 활동은 모두 철회시켰어. 정보원들은 남겨뒀지만.”


들으라는 식의 말에 루비아가 툴툴거리며 껴들었다. 그리고 라프리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의외인가요? 라프리트 양. 그런데 이 나라가 멀쩡해야 리아가 무사히 베르다드에 졸업할 수 있잖아요. 졸업 후 공국에 오기로 돼 있는데 그전에 벨루디스가 사라져서야 곤란하죠.”


‘아니······ 간다고 한 적은 없는데.’


리아는 어느새 공국으로 가는 게 확정되어있는 거 같아 당혹스러웠으나, 그건 금세 사라졌다. 중요한 건 다른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어째 몇 년 안에 이 나라가 큰일 날 것처럼 들리지 않아?’



“잠시만요! 그, 그렇게나 이 나라의 상황이 안 좋은 건가요?”

“아······뇨. 아직까지는······”


힘없는 말로 보아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라는 게 충분히 잘 느껴졌지만 루비아는 대충 넘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직’은 괜찮을 수 있어. 벨루디스 폐하와 파라디우스 공작께서 동분서주 수습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겨우 둘이야. 단둘로는 나라 전체가 틀어지는 걸 바로 잡기란 절대 쉽지 않아. 리벨리타스 후작도 나름 힘을 보탤 테지만, 아마 본인 영지를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벅찰 거야.”


――분명 이대로라면 오래가진 못할 거다.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루비아가 쳐다봤다.


그만큼 상황은 좋지만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삐걱거림은 심해질 거라는 걸 예견하는 듯 보였다. 거기에 라프리트의 잔뜩 굳어진 표정도 이 의견을 더욱 기정사실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거기다 그 벌레들이―― 세인트리안이 본격적으로 이 나라에 개입하려는 모양이야. 아니······ 이미 개입하고 있으려나?”


숨기지도 않고 경멸하는 음색이 가득했다.


리카드도 그렇고 소베르비아까지. 세간에서 성국의 평가는 역시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인트리안―― 성국이 벨루디스에 무슨 계책을 부리나요?”

“성국?? 그딴 광신도의 나라를? 리아, 내 앞에서 그딴 말은 꺼내지도 마.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니까.”


루비아에게서 살기와 함께 그녀의 마력이 쩌릿하게 퍼져 나왔다. 아무리 내숭 부리지 않는 모습이라지만 남의 시선 같은 건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 정도로 루비비아에게 있어 세인트리안은 경멸의 대상이자, 접하고 싶지 않은 부류인 거겠지.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리아를 보며 루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걔네들 정말 짜증 나서 말이지.”

“아뇨. 저는 괜찮은데······ 세인트리안은 여태 무슨 짓을 했길래.”

“후우······ 대표적으로는 치유사의 독점.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어. 이 때문에 나라에서도 최대한 확보를 하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쉽지가 않아.”

“강······압 때문에요?”


리카드에게 들었던 내용으로는 그랬다. 자세한 건 꺼리면서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마 목숨의 위협이라든지, 생계의 압박이라든지 방법은 많다.


다만 의아한 건 타국에서 그만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멀쩡히 그 나라의 국가기관들이 있을 텐데도 그들의 만행을 제지하지 못하는 건가 의구심만 들었다.


그때―― 리아는 라프리트와 함께 수도를 돌며 봤던 순백의 큰 교회를 떠올랐다.


그 교회는 상상도 안 되는 돈을 쏟아부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크기와 화려함을 겸비한 곳이었다.


그리고 주말이었다지만 수많은 인파가 몰렸었다.


교단――이라기보단, 생명의 신 루시아스를 모시는 백성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니 ‘자국’의 백성이 원한대로 넓은 부지를 쥐여주고, ‘자국’의 백성이 자발적으로 돈을 지원하여 교회를 건설했다――?


‘어쩌면 강압이라기보다는······’



“치유사는 교단에 속해야 한다는 풍조가 생겨난 건가? 그리고 그런 분위기가 생길 정도로 민심을 장악했으니 타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도 전혀 문제없다?”

“정답――.”


무심코 나온 말에 루비아가 대답해줬다. 조금 전과는 달리 다시 즐거워진 듯했다.



“물론 만점짜리는 아니야. 한 30점쯤? 그래도 별 정보도 없이 잘도 거기까지 도달했으니 칭찬은 해줄게.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풍조에 동조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런데도 치유사들은 교단에 속하는 걸 택하지. 왜일 거 같아?”

“주위의 눈치가 보여서요?”

“그렇기도 한데······ 너무 단락적이야.”

“윽······”

“생각해봐. 왕이 아무리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이라도 따르는 백성이 없다면 혼자서 하는 역할 놀이에 불과하잖아?”


당연했다. 그건 그저 아이들이 하는 역할극 그 이상도 아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어. 그 해충들은 거기를 파고들었지.”

“무슨 소리죠?”

“간단해. 루시아스 교단은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부터 존재해왔어. 오엘문리아를 만든 신 중 하나이고, 생명―― 삶을 관장하니 당연하겠지? 그리고 최하층 시민들에게까지 널리 신봉됐어. 그런 곳에서 이렇게 외치는 거야. ――치유마법은 루시아스 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라고. 어때? 간단하지?”

“즉 치유마법을 루시아스 교단의 전유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건가요.”

“응. 생명의 신과 치유마법. 어딘가 그럴싸하게 들리잖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자도 많지 않기도 하고. 배움이 짧은 서민들은 그대로 믿었겠지. 무려 교단에서 설파하는 것이기도 하니.”

“하지만 제대로 된 사실을 말해주면――”


아니다. 루비아의 말대로 이미 굳게 신봉하고 있었다면 교단의 말이 곧 진실이다. 다른 말은 들리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나라가 백성을 억압하려 든다고 반발심만 생길 뿐이다. 잘못하면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려 든다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심하면 봉기까지 일어나지 않을까.


종교로 인한 문제로 나라가 갈라져 전쟁이 일어난 일은 지구에서도 빈번했다. 딱히 엉뚱한 상상만은 아닐 거다.


결과······ 나라의 입장에서는 섣불리 손을 댈 수가 없다. 의도하는 바가 뻔한데도 말이다.


리아는 놀란 눈을 루비아에게로 향했다.



“아주 음침한 녀석들이지? 개인적으로는 이 지경으로 만든 멍청한 선조들을 욕하고 싶긴 하지만 어쩔 수 없던 것도 사실이야. 당시는 전쟁이 끝난 시점이니 나라를 부흥하기 위해 힘썼어야 했으니.”

“인마전쟁······”

“해충 녀석들에게는 딱 좋은 시기였겠지. 안 그래도 뒤숭숭했으니 신자는 늘어만 가고, 모든 나라가 엎어지면 코 닿을만한 거리로 모여들었으니. 더욱이나 지들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니 신관이나 사제들을 지원하기도 편했겠지.”

“이해됐어요. 서서히 그렇게 사람들의 인식이 생겨났다면 교단에 속하지 않은 치유사는······ 상당히 이상하게 보이겠네요.”

“그렇지~ 생명의 신에게 축복도 받아놓고 감히 루시아스님을 섬기지 않는 거냐! ――라면서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알아서 배척하니 딱 교단이 바라는 대로 됐지.”


평소에는 친절하고 상냥했던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해서 모멸 어린 말과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면······ 확실히 버티기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단에 속한 치유사가 된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술렁였는데, 그때 라프리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발적으로 교단에 속하는 자도 많아요. 권력을 누리기 위해.”

“권······력이요?”


신을 섬기는 자들과는 가장 멀어 보이는 단어에 리아는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이내 리카드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의 치유사들이 어떤지 말이다.


진짜 신이 있는 세상에서 대담하달까······ 그들은 경건한 신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신의 이름을 앞세워 어떻게든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 하는 질 나쁜 장사꾼에 불과했다.


물론 직접 만나보진 않았기에 뭐라 하긴 그렇다. 하지만 리카드의 반응이나, 눈앞에 있는 그녀들의 반응만으로도 판단할 근거는 충분해 보였다.



“리아 양, 일부 지역에서 치유사는 귀족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고 해요. 그리고 거기에 매력을 느낀 자들이 교단에 속해 사제라는 직급을 얻고 활개 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거죠.”

“······어떻게 막을 순 없는 건가요?”

“그게 골치 아픈 점이에요.”


잠시 인상을 쓴 라프리트가 이어서 말했다.



“일단 치유사들은 세인트리안의 수도, 성도라 부르는 곳의 백성―― 신도들은 무료로 치유해주고 있어요. 거기서 이렇게 주장하는 거죠. 신도가 아닌 자들에게 루시아스 님의 자비를 베풀었으니 감사의 뜻으로 헌금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더불어 신의 기적을 행사해주는 것이니 높은 금액을 측정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둘러대고 있지.”

“뻔뻔하기 짝이 없는 궤변이죠.”

“하지만 대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열불 터지지.”


만약 교단이 오랫동안 신봉되어 온 게 아니었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존재했을 것이다. 가장 간단하게 세인트리안과의 교류를 단절―― 단교를 하면 그만이니.


애당초 문제의 근원이 들어올 곳을 틀어막으면 끝이었다.


그런데 이미 치유사는 루시아스 교란 인식이 만들어졌다. 달리 손 쓰기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시민들 또한 생명의 신을 모시는 자도 많아 섣불리 교단과의 대립―― 어? 아니······야. 나는 지금 관점을 잘못 잡고 있어. 사람들이 모시는 건 생명의 신이야. 교단이 아냐!’


리아는 황급히 물었다.



“아까 모든 사람이 교단의 뜻을 지지한다는 건 아니라고 했죠? 그러면 거부하는 사람들, 불만을 표하는 치유사나 신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질문을 듣자 루비아와 라프리트, 그녀들뿐만 아니라 안네와 레딧츠의 표정마저도 굳었다.


여태 없던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진중한 분위기였다. 이번에도 연무장에서 퍼지는 소리만이 들렸지만, 무겁도록 착 가라앉은 공기로 인해 전혀 다르게 여겨졌다.


촤악!


이때 정자 안에 날카로운 소리가 퍼졌다.


――모두의 시선은 부채를 펼친 루비아에게 향했다.



“당신, 찬크에르라고 했죠. 레딧츠의 미행을 간파한 당신을 믿고 부탁하죠. 이 자리에 누가 다가오는지 감시해주시어요.”


리아도 뒤를 돌아봐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에 에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자를 뒤덮을 만한 결계를 펼쳐냈다.


은밀히 마법을 발동했기에 알아차리지 못했을 테지만 루비아는 에르가 부탁을 받아들이자 짧게 묵례로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심호흡하며 고심 가득해 보였던 라프리트는 마음을 정한 듯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세인트리안에는 두 개의 무력을 바탕으로 둔 세력이 존재해요. 하나는 성기사단. 전원이 치유사인 동시에 강력한 전사, 마법사로 구성된 부대에요. 그들의 주요 역할은 세인트리안을 지키는 검이자 방패인――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자들이죠.”

“그렇다는 건······”


라프리트는 눈을 가늘게 했다.



“반대로 그림자처럼 음지에서 활동하는 교황 직속의 특활공작부대, ‘일신성단’이 있어요. 신의 뜻을 대행한다는 일신성단은 각각의 병과에 따라 총 4개의 부대로 나누어져 있죠. ······그리고 그 안에서도 최고위라는, 주어진 명에 전투도 불사하는――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신성들만 있는 심판관이 있어요.”

“덧붙이자면 신성은 한 명, 한 명이 전원 괴물 같은 힘을 지녔다고 하지.”

“네. 그러한 자들이 찾아가는 거예요. ――교단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들에게.”


전생의 아들이 보고 있던 만화에 나오는 이단심문관이라는 자들을 떠올려보니 이해하기 쉬웠다. 거기에서는 이의나 반문을 제기하는 자를 교단의 뜻에 따라 때론 잔혹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목적을 이뤘었다.


너무나 사실적이고 세세한 묘사들로 인해 당시에는 무조건 아이의 정서에 좋지 않을 거라 여겨 아들에게 보는 것을 금지했지만, 후에 알기로는 실제 중세시대에 벌어졌던 일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했다.


잘도 그런 잔인한 형벌과 기구들을 만들었구나, 라며 질색했었는데, 이곳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건 없다.


오히려 마법이 있는 곳이니 더욱 끔찍한 짓거리도 가능할 거라 여겨졌다.


다만 생명의 신 말고도 다른 신이 존재한다는 건 확실하니 지구에서 보아오던 것들처럼 다른 신을 모시는 걸 배척하여 이단으로 몰아세우진 않겠지.


‘생각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 응?’


리아는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대봤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평소와 같았다.


피와 살, 내장이 찢기는 것과 여러 고문을 하는 그때의 장면을 떠올렸음에도 고요했으며, 평온했다. 조금의 요동도 치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는 성기사단이나 일신성단이라는 말을 되뇌는 것이 그리우면서도 분노가 미치는, 뭔지 모를 기분을 느낀다.



――어서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려 리아는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대충 알겠어요. 직접적으로 목숨과 직결되어 있으니 억지로라도 따른다는 거죠. 민중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일이 퍼져있다는 거고.”

“그런데 일신성단이 존재한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어. 녀석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지 않거든. 심적 증거는 넘쳐흐르지만.”


그러니 자국 내에서의 불법적인 행동에도 항의하거나 대처를 취할 수 없다.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질책한다는 말인가. 속수무책이다.


어조는 가벼웠지만, 라프리트 못지않게 굳어있는 루비아에게서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아니, 신성은 전원 괴물 같다고 했다. 라프리트도 이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만약 증거를 찾더라도 무력 충돌을 두려워해 아예 항의의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루비아가 분한 듯 보이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닐지······



“그래서 교회에 사람이 그렇게 많았던 건가.”


국가의 중추에 있는 사람들도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데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대립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거다. 조용히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그러니 치유사는 교단에 소속되고, 민중들은 많은 돈을 낼 여력이 안 되니 신도로 인정받고 치유를 받기 위해 교회로 몰려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벨루디스는 좀 나은 형편이긴 해. 여기는 최근 들어서야 교단이 날뛰기 시작했지만, 다른 나라들은 이미 진작에 침투되고 있었어.”

“공국도요?”

“그래······ 우리는 몬스터를 길들여 활용하니 더욱 귀찮게 굴지. 멍청하게도 생명의 신이 인간의 목숨만 아끼는 줄 아나 봐. 지들이 모시는 신을 치졸하게 보이도록 낮추고 있다는 걸 전혀 몰라. 그전에 인간의 목숨도 돈줄로밖에 생각하지 않지만. 거기에 더 질이 나쁜 건 놈들은 나라를 완전히 망하게 만들지는 않아. 자기들의 뜻대로 흘러가게 만들어놓고는 혼란만을 조장할 뿐이지. 최대한으로라도 정권만 바뀌고 유지되게끔만 해.”


루비아가 잡은 부채에서 뿌득뿌득 소리가 났다. 평소 여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그녀가 손가락이 허옇게 될 정도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교단의 횡포에 화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아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이니 길가의 돌을 치우듯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다고, 공국과 자신을 얕잡아보듯 무시하는 교단의 오만함에 화가 난 것이다.


······그렇지만 고고하고 표독스러운 게 그녀다웠다.


그럴 분위기도, 상황도 아니지만, 리아는 미소 지어질 거 같았다. 그러나 참아내고, 계속 루비아의 맘이 상한 채로 놔두는 것이 걸리니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교단이 어떤 곳이라는지는 알겠는데······ 제2 왕자님, 레온하트 전하는요?”

“······.”


루비아는 빤히 리아를 쳐다봤다.



“하아······ 위로는 따스하고 어쩌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교단도 네가 물어봐서 딴 길로 샌 거잖아.”


‘그렇게 따지자면 먼저 말을 꺼낸 건 루비아 씬데요.’



“뭔가 말했어?”

“히끅. 아, 아뇨.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에헤헤. 루, 루비아 씨?”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효력을 보았는지, 거하게 내뱉은 숨과 함께 루비아의 째려보던 눈빛에서 힘이 빠져 갔다.



“됐으니까 그 비굴한 표정 좀 하지 마. 진짜 너무 잘 어울려서 기운만 빠져.”

“비굴한 게 아니라 불쌍하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번뜩!



“넵, 안 할게요.”

“하아아아. 이 나에게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녀석은 너밖에 없을 거야.”


잠시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젓던 루비아는 잠시 조용히 있던 라프리트를 쳐다봤다.



“라프리트 양, 당신의 차례에요. 리아가 더 이상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못하게 얼른 벨루디스의 상황을 설명해주시어요.”


그 말에 라프리트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만―― 리아는 들렸다. “제가 봐도 좀 그랬지만, 기껏 리아양이 마음을 써줬는데 바보 같다니······”라며, 투덜거리는 그녀의 말이.


감싸주는 말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앞의 말은 당연히 뇌 내 필터를 거쳐 삭제되었다.


‘역시 라프리트 양! 아이리스만큼 천사 같은 분이야! 루비아 씨도 보기와는 달리 나름 착하시지만, 마음씨로는 절대 라프리트 양을 따라갈 수 없지. 암. 그렇고말고.’


리아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흡족해했지만, 날카롭기 짝이 없는 소베르비아에게 읽히진 않았을까 본인도 모르게 스~을쩍 빠르게 눈을 굴렸다.


루비아는 다행스럽게도 차를 마시느라 라프리트의 투덜거림은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여태 교단의 이야기가 아예 연관이 없는 건 아니에요.”


안도감에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던 리아에게 라프리트의 말이 들렸다.



“벨루디스는 지리적 요건―― 마국, 베스티디논과 경계해있다는 이유로 여태 다른 곳과는 무관한 안정된 생활을 지속해왔어요. 700여 년간을······”

“네. 들었어요. 속된 말로 방파제―― 다른 나라들이 마국의 침공에 대비할 시간을 버는 첨병대로써 이점을 차지하고 있었다고요.”


벨루디스에 올 때 마차 안에서 리카드가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거기서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했어요. 사람들은 해이해지고 벨루디스가 최고다, 교단이나 다른 나라는 한참 뒤떨어지는 곳이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늘어만 갔죠. 타국에서 오는 행상인들의 선단만 잠시 살펴봐도 차이가 벌어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으니 더 그러했겠죠.”

“그렇게······ 부패해갔다고요?”

“······처음은 경계했을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국이 있는데 벨루디스를 어떻게 하겠어? ――란 생각이 들었겠죠. 그리고 이내 교단이나 다른 나라들이 어떠한 수작을 부리더라도 끄떡없다, 조금 일이 잘못돼도 잘라내면 된다, 저쪽도 쉽게 떨어져 나갈 것이다, 손쉬운 일이다. ――이러한 유혹에 빠져들어, 뻔히 수작이 보이는데도 그들의 알랑방귀를 기분 좋게 받아들였겠죠.”

“터무니없네요.”

“예. 정말 말씀대로······”


‘어리석어.’


절대 안 망할 거 같았던 전 세계를 호령하던 기업조차도 수수방관하다가 침몰하는 게 현실이다.


간혹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자리를 지키려 고군분투했다.


영원히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해 두손놓고 방관하다니······


확률은 낮겠지만 용왕이, 반신이라는 정령이, 그도 아니면 신이 쳐들어온다고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그때는 지난날을 후회하며 손가락만 빨고 있을 것인가.


왜 자신이 마법으로 도핑하듯 억지로 마력레벨을 올려놓고, 시뮬레이션 등 치사하다고 여기면서도 주저 없이 시행했나. 모두 눈앞에서 소중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자신에게 지금 벨루디스의 모습은 이러한 노력을 바보 같다고 비웃는 듯해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니까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다음 왕세자가 될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은 제2 왕자, 레온하트 전하는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애매한 상태라는 거죠? 그리고 이틈을 타 교단에서도 벨루디스에 공작을 벌이고 있는 거구요.”


되도록 차분하려 했지만, 마음이 투영된 듯 리아 본인도 놀랄 만큼 싸늘하기 그지없이 차가운 어조였다.


이에 라프리트는 고개를 숙이곤 작게 그렇다고 대답해줬다. 그리고 그제야 리아는 연무장에서의 반응을 납득할 수 있었다.


레온하트의 반응도 당연하지―― 여태 주위에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가까워지려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봐주지도 않고 때려눕히고 당당하게 손까지 내밀어봐라. 당혹스러워하며 놀라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대련을 신청한 것도 그의 입장으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상대를 배려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음을 기약한 건 자신을 편히 대해주는 사람을 놓치기 싫었던 것일 거다.


즉―― 온정을, 사람을 그리워한 것이다.


‘아마 친구도 없겠지······ 안타깝게도.’


레온하트는 왕자의 신분임에도 언제나 수업 시간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훈련해왔다. 그라면 분명 나라를 걱정해 현재 본인이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노력한 것일 테다.


그렇다면 이 나라는 모르겠지만, 그는 피해자이기도 했다. 누가 친구 하나 만들어질 수 없는 상황이 되길 원하겠는가.


그러니 대견한 그를 위해 나 하나쯤은 친근하게 굴더라도 벌을 받거나 하진 않을 거다.


기분 나빴던 것도 말끔히 사라져, 가엽고 안쓰러운 레온하트와 앞으론 최대한 친하게 지내주기로 마음먹을 때였다. 리아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으응? 루비아 씨.”


부르는 말에 루비아는 의욕 없이 집어 먹던 쿠키를 내려놓고 쳐다봤다.



“왜?”

“루비아 씨는 어째서 베르다드에 오신 거예요?”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 공주라는 사람이 타국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



“아~ 그거? 그야 당연히 교단에 전부 먹히기 전에 가져갈 게 있나 살펴보러 왔지. 제국의 도련님들도 마찬가지일걸? 그런데 난 별 기대하지 않았어. 그렇잖아? 수백 년간을 굳건히 버티던 나라를 말아먹는 녀석들밖에 없는데, 거기서 무슨 기대를 하겠어. 그나마 쓸만한 녀석들은 이 나라와 운명을 함께할 거고.”


이미 망한다는 걸 전제로 하는 이야기에 리아는 조심스레 라프리트의 눈치를 봤으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공감이 가기도 했다.


한 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나라를 휘청이게 했는데,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한들 데려가 봐야 불안 요소를 떠안을 뿐이다. 오히려 다음번에는 더욱 치밀하게 계획을 짜지나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을 알아본 듯―― 루비아는 살짝 웃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그냥 맘 편히 애들 시켜서 맛난 것들 좀 가져가게 하고 난 정세나 살펴볼 겸 해서 놀러 온 거지. 하지만 이게 웬걸? 엄청난 대어를 만나버렸네~? 아니, 대어‘들’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대어가―― 응?!! 에르는 넘겨주지 않아요! 아이리스도요!”

“대어가 너라고 한 적은 없는데~~”

“아······”


리아는 잠시 멍했으나, 곧 능글거리는 표정의 루비아를 보고 장난친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의외로――


그냥 보이는 대로 성격이 안 좋다.



“또 무례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봐주도록 할게. 그리고 네 남편이나 아이는 탐내지 않아. 도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그런 취향도 없는 데다가, 어차피 자동으로 따라오는 데 힘쓸 필요도 없잖아?”


여전히 공국으로 가는 게 확정인 멋들어진 거만함이다.



“또, 또······ 쯧. 시원찮은 장난은 그만두고―― 라프리트 양? 그대는 어찌하시겠나요?”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하여 진지하게 묻자 라프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비아를 빤히 쳐다봤다.



“어떤 걸 말씀이시죠?”

“이대로 가면 이 나라는 혼란에 뒤덮이겠죠. 물론 여태처럼 나라 자체가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내분으로 인해 전란에 휩싸일 테고 쉽사리 진정되지도 않겠죠.”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라프리트 양은 나름대로 제 마음에 드시는 분이랍니다. 그래서 권하는 거죠. 리아가 올 때 같이 오시는 게 어떻겠냐고.”

“거절합니다.”


단칼에 거절당했지만 루비아는 동요하지도 않고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그대라면 그럴 거라 예상했어요. 그러므로 제안 하나 할까 합니다.”

“제······안이요?”

“저도 그대들―― 벨루디스가 교단에 먹히지 않게 도와드릴까 해요.”


라프리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하시는 게 뭐죠?”

“이야기가 빨라서 좋긴 하지만······ 바라는 건 없습니다.”


진솔해 보이는 말에도 라프리트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랄까. 이런 데서 평소의 행실이 보이는 거다.


진지한 상황임에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이 들 만큼 절절히 와닿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명받고 있으니······ 입을 다문 소베르비아가 고개를 휙 돌려 일직선으로 노려봤다.


‘헉!’


움찔한 리아는 빠르게 구구단을 외며 머리를 비우려 들었다.


눈도 감고 중얼거리고 있자니, 루비아가 크게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건방진 생각을 하네. 하지만 라프리트 양. 저는 저런―― 이 나에게 시건방지게 구는 리아가 마음에 든답니다. 그러니 저 아이가 슬퍼할 만한 일이 벌어지는 건 별로 원치 않아요.”

“그게 벨루디스가 혼란에 빠지는 걸 얘기하시는 겁니까?”

“어머. 라프리트 양은 아니라고 보시는 건가요?”

“······.”

“네. 저 애는 반드시 그러겠죠. 저도 수년 후 빛바래진 모교를 보는 건 그다지 바라지 않고요. 그대도 그렇지 않나요? 라프리트 양.”


라프리트는 말없이 침묵했지만, 그녀 또한 자국이자 고향이 전란에 뒤덮이는 모습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바라는 것이 이상하지.’



“거기에 저도 나름대로 가망이 있지 않을까 해서 제안하는 거예요. 교단에 한 방 먹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차분히 라프리트를 바라보며 하는 그녀의 말에 리아는 생각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한 방 먹여주고 싶어서 제안하신 거 아냐?’


자신을 위해주는 그녀의 발언들은 머나먼 기억의 저편에 냅다 던질 만큼 마음속 깊이 수긍이 가는 추론이었다.


이번에도 절실히 와닿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 자업자득인 거다. 절대 내 탓이 아니다.



“리아······?”

“흐잇끄. 네, 넵.”

“한 번만 더 하면 아픈 꼴을 당할 거야.”


볼이――


만약에 한다면 이번엔 정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마구 잡아당길 것이다. 저 루비아라면 말로만 끝내지 않고 진짜로 한다.


소중한 볼이 달려있기에 리아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식은땀이 나는 듯했다.



“······후우. 리아, 네가 이러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그것만이 아닌 거 같아. 내 착각이라 여겼지만, 넌 지금 뭔가에 도망치는 기분이야. 왜 그런 거야?”



――――――들켰다.



“아, 아뇨. 전 원래 이래요. 이게 아니라요······, 그게요······”


허둥지둥, 스스로도 뭐라고 변명하는지 모를 정도로 리아는 공황에 빠졌다.


스멀스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떠올리지 않으려 억눌러 두었던 복잡한 감정들이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가던 것이 루비아의 지적으로 인해 확고히 인식되었다.


벗어나 보려 해봤지만, 의식은 점점 빠져만 들어갔다.


주체가 되지 않는다.



――보고 싶어. ――아퍼! ――부단장, 이게 매워? ――그만둬, 어째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난 도대체 무슨 짓을. ――모두 쓸어버리면 조용해질 거야. ――제가 사라지면 될 거예요, 그러니. ――아쉬워. ――아무도 안 한다면 내가 할 수밖에.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제발. ――아하하핫! 재밌어. ――이젠 아무래도 좋아.



······툭.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리아, 진정해.”


어지러이 울리는 무수히 많은 환청을 뚫고, 따스하고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에르다. 에르의 손이야.’


앞이 밝혀지듯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에 리아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왔으나······


주위에는 어느새 결계가 처져 있었다. 종류로 보자면 마력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그것이 에르와 둘만 들어가는 크기로 산속에서 생활할 때보다도 매우 견고히 만들어져――


리아의 마력을 잡아두고 있었다.


얼마나 새어 나왔는지 자신처럼 마력을 눈으로 시인할 수 없는 라프리트나 소베르비아조차도 은빛의 구체에 둘러싸여 있다고 알 정도였나 보다. 둘은 눈을 크게 뜨고는 똑바로 마력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라.”

“사전에 차단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리아. 괜찮으니 일단 마력부터 제어해줘.”


다정한 음색에 리아는 의식이 각성하듯 주변 상황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만한 마력이다. 에르가 알아차리고 서둘러 막아주지 않았다면······ 근처에 있던 친구들뿐만 아니라, 레딧츠와 안네까지도 위험했다.


제어했다면 문제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저 내뿜기만 하는 마력은 충분히 위협적이며, 공격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향한 마력방출은 적대 의사를 표현――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리아는 산들바람 같은 마력에도 목숨이 오락가락했던 적이 있기에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잘 아는 정도를 넘어섰다.


이렇게나 더 이상 압축 따윈 불가능할 것 같은 밀도의 마력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직격 했다면······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리아는 서둘러 마력을 거둬들였다. 그렇게 마력이 사라지자 에르도 결계를 해제했다.



“미안해요, 에르. 괜찮아요?”

“응,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에르는 미소로 대답해줬으나, 직접 마력을 받은 것도 모자라 막아주기까지 한 것에 리아는 미안함에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오늘의 첫번째 화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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