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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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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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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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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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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DUMMY

“바쁘시네······”


우르르 리아들이 떠난 방에서 아이리스는 쭉 기지개를 켰다.



“라프리트 씨도 그렇지만 루비아 씨도 보기와는 다르게 좋은 사람들이었어.”


평소 꼬박꼬박 안네를 먼저 보내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알려왔던 라프리트가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는 놀랬지만, 사정을 알고 보니 그녀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아무런 방문 예약도 안 하고 찾아오는 루비아를 말리기 위해 따라온 모양이었다.


그런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성실하게도 사과하는 라프리트는 역시나 눈여겨본 인격자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방처럼 스스럼없이 의자까지 멋대로 가져다 놓은, 너무나도 당당한 소베르비아―― 며칠 전 처음 만났던 그녀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니. 그냥 별로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쩌다가 자신의 어머니가 저런 사람과 친해졌나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루비아는 대충 빠르게 인사한 뒤에 물어왔다.


요즘 리아―― 어머니는 어떠냐고.


이미 리아와 모자 관계인 걸 알고 있는 루비아는 첫 만남 이후 곧바로 라프리트를 대하듯 편안하게 대해왔다.


그 점은 어머니의 친구이기도 하고 연장자이기도 하니 괜찮았지만······ 루비아, 그녀의 표정이 참으로 의외였다.


정말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내심 아닌 척 태연하게 물었다만 차마 다 감추지는 못했다.


염탐한 일을 사죄하러 왔을 때 다른 방에서 마법으로 지켜봤던 모습으로 보건대 그 정도의 감정은 충분히 숨길 수 있었으리라.


감정을 숨겨야 하는 일이 많을 거 같은 귀족으로서는 좋은 자질이겠지. 나쁘게 말하면 내숭의 귀재지만.


그런데도 드러났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는 뜻일 거다.


아마 진심으로 리아를 걱정하는 듯했다.


연기였다면······ 꽤 소름 돋을 만한 일이지만, 리아가 올 때까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차분하게 있지 못하던 그녀의 행동으로 보면 아닐 거다.


그것마저 연기였다면――


‘······음, 너무 들어갔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그 정도까지 뒤틀린 성격의 소유자가 아님은 알 수 있었다. 애초 그런 이상한 여자였다면 그녀의 가장 가까이서 따르고 있는 레딧츠가 저리 정성껏 모신다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이러나저러나 패닉에 빠졌었다는 이후로 어두침침했던 리아가 홀로 산책하러 나가고 돌아왔을 때는 상당히 밝아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한시름 덜었지만, 그건 루비아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아니면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은 오기였을 지도.


뭐가 됐든 루비아는 평소의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돌아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었다. 리아도 근심 걱정 따윈 느껴지지도 않은 분위기였다.


아주 좋은 징후였다.



“이게 다 네 덕분인가.”


아이리스는 소파에 폴짝 올라가 드러누운 페리를 봤다. 상당히 느긋한 자세이다. 적응 기간 같은 건 필요 없어 보인다.


처음 본 동물에 아이리스는 유심히 살펴봤다.


날렵한 몸과 부드러워 보이는 털. 전체적으로 뭉실뭉실 한 것이 제법 취향이었다. 리아가 데려오려 한 것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는 말은 당연히 핑계에 불과할 뿐이니 믿지 않았다.


드래곤인 자신의 모습도 마냥 귀엽다고 하는 리아이니 눈이 잘못된 게 아닐까 의심해 볼 수도 있지만. 의외랄까, 리아의 심미안은 생각보단 평범했다.


페리가 따라온 것도 분명 이유에는 포함되어 있겠지만, 아마 본인이 키우고 싶다는 욕구가 거의 과반수를 차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못 말리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리아이기에 자신을 주워 어머니로서 애정을 다해 키워 온 게 아닐까 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아이리스는 페리가 누운 소파 옆에 기대어 앉았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페리. 난 아이리스. 널 데리고 온 이스피리아―― 어머니의 아들이야.”


앞발에 턱을 올려 누운 상태로 페리는 눈만 떠 힐끗 쳐다봤다.



《멍청한 암컷의 자식이었나. 내 부하의 자식이니 너도 내 부하다. 앞으로는 맛있는 걸 바치면서 이 몸을 잘 모시도록 해라.》


오호······ 좀 성격이 괜찮은 녀석이다.



“말을 이쁘게 해야 하지 않을까? 기껏 돌봐주는데.”

《어차피 너와 멍청이 말고는 내 말을 듣는 인간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부하가 이 몸을 모시는 건 당연하다.》


아이리스는 마음을 다스렸다.


리아의 기분을 풀어준, 나름대로 도움을 준 고양이 아닌가. 어느 정도의 무례함은 참도록 하자.



《거기다 멍청한 걸 멍청하다고 하는데 무슨 문제냐. 그러고 보니 너도 불쌍하군. 기껏 낳아준 어미가 저리 멍청해서야.》

“그렇구나~ 꽤 신랄한 말이네. 페리, 우리 잠깐 같이 나가 볼까? 찐하게 대화를 나눠봐야 할 필요가 있어 보여. 걱정 마, 금방 끝날 거야. 거기에 널 위한 것이기도 해. 내 선에서 끝나는 편이 좋을걸?”

《싫다. 내가 뭣 하러――》


아이리스는 무시하고 페리의 뒷덜미를 잡아 일어섰다.



《놔라! 멍청한 암컷의······》


버둥거리던 페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대신 시간이 멈춘 듯 경직하더니 한 점을―― 아이리스를 바라봤다.


너무 이른 때에 인간으로 변한 부작용으로 대부분 사용하지도 못하고 잠든 듯 꼼짝도 하지 않던 아이리스의 마력이 꿈틀대고 있던 것이다.


아이리스는 리아의 혼과 마력이 섞였기에 많이 희석되었지만, 그 근본은 용의 후예다.


――그리고 에르의 마력 특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오엘문리아에 사는 존재라면 절대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다. 그 정도는 에르에 미칠 바가 아니지만, 인간보다 감각이 예민한―― 그것도 야생에서 살아왔던 페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인간은―― 이 존재는 위험하다.


뭔지 모를 불길함과 공포감을 페리가 느꼈지만 늦었다.


아이리스는 페리를 들고 창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지간하면 이런 예의 없는 짓은 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방안에서 ‘대화’를 나누기엔 비좁았고, 가구를 부술 수도 있었다. 달리 갈 곳도 없고.


‘거기다가 어머니라면······ 눈치챌 확률이 높아. 신속하게 끝내야만 해.’


빠르게 창문 밖 정원에 내려선 아이리스는 페리를 대충 내려놓은 다음 곧바로 시야와 소리, 마력을 차단하는 결계를 펼쳐냈다. 특히 마력차단의 결계는 꼼꼼히 3중으로 펼쳐 절대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했다.


더해서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면 안 된다고 강제로 인식을 심어두는 고도의 결계까지 만들어냈다.


본래라면 인간으로 변한 아이리스에게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간단한 마법조차도 시원찮은데 가능하겠는가.


그렇지만 지금의 아이리스에게는 가능했다.



《이제 대화를 시작할까?》


기숙사의 2층쯤 되는 크기의 회색 드래곤이 페리를 내려다봤다.


웅장하게 울리는 소리에 꿈인지 생신지 전혀 분간이 안 되는지, 페리는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이후로 여러 일들이 벌어졌으나 목격자는 아무도······ 아니, 에르만이 아이리스의 마력을 느끼고 살짝 의문을 품었을 뿐이었다.


리아는······ 모처럼의 선생님 역할에 푹 빠져있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아이리스는 페리와 찐하디찐한 대화를 잠시 나누었다.











“리아! 전혀~ 조금~도 압축되지 않는데 뭐가 문제야?”

“처음부터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잖아요. 좀 더 시간을 갖고 여유롭게――”

“――그냥 네 설명이 너무 부실해! 뭐가 꾸욱~~ 하고 누른다는 느낌으로 하면 된다는 거야?!”

“하,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하는 걸요······ 그, 그리고 라프리트 씨랑 레딧츠 씨는 하셨잖아요. 제 설명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크······ 이해가 안 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딴 설명만 듣고 할 수 있는 거야?”

“루······비아 씨가 평소에 마력조작 연습을 게을리하셔서 그런 건······”

“뭐?”

“아, 아뇨······ 조, 좀 더 연습하시면 가능하실 거예요.”


실제 땀은 안 흘리지만, 식은땀을 흘릴 것만 같은 모습인 리아가 있는 곳은 마법 실습실―― 그중에서도 개인 교습을 하기 위해 준비된 장소였다.


그렇지만 특별한 사정이 아닌 한 빌릴 수 없는 그곳을 루비아는 공주라는 이름으로 계속 대절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행보에 불만이 나올 수도 있겠다 생각도 했었는데, 평소에 내숭을 얼마나 잘 떨었는지 학기 초반임에도 열심히 노력하는 공주로만 비쳐 루비아의 주가는 상승했다. 특히 공국의 백성들은 광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감격하고는 본받자며 학업에 열의를 띄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토 다는 사람도 없고 이제는 그냥 루비아 개인만을 위한 실습실이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 됐다.



“주인님, 이제 시간이 됐습니다.”


루비아가 불평하고 있을 때부터 어색하게 있던 레딧츠가 말을 걸었다.



“벌써? 리아, 리카드에게 다녀와야 한다고 했지? 빨리 다녀와.”

“어, 루비아 씨는 계속 연습하시게요?”

“당연하지! 라프리트도 할 수 있는데 이 내가 할 수 없다니 말이 안 되잖아!”


근처에서 안네와 함께 연습하고 있던 라프리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가 말이 안 되나요. 게을렀던 업보가 돌아온 거뿐이에요. 루비아 님과는 달리 전 평소에도 열심히 해왔었거든요?!”

“큭. 업보라고? 나한테 쫌 건방지다?”

“불만이시라면 일단 아주 조금이라도―― 네, 저기 있는 모래 알갱이 정도는 압축하시고선 정정을 요구하시죠.”

“······.”


‘오······ 라프리트 씨가 이겼다.’


매번 조금씩 밀리기만 하던 라프리트의 감격스러운 첫 승리다.



“이스피리아 님.”


제 일이 아닌 양 구경하고 있는데 레딧츠가 불렀다.



“네?”

“실례이옵니다만, 저 혼자 배웅해도 되겠나이까.”


리아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살짝 주춤거렸던 루비아가 금세 활기를 되찾아 반격하였고, 거기에 라프리트는 지지 않고 응수하고 있었다.


안네가 조심스럽게 말리고는 있지만 끝나려면 멀어 보인다.



“네. 부탁드려요.”


레딧츠는 짤막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그 뒤를 리아와 에르가 따랐다.


본래 손님을 사용인만으로 배웅하는 행위는 상대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과 같기에 그다지 바람직하다곤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런 의도는 없다는 걸 잘 알고 리아도 아무렇지도 않고 괜찮았지만, 그래도 손님만 가는 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배웅해준다.


그것이 예의라는 데 어쩌겠는가.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랏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고.’


그런데다 레딧츠는 사양해도 한사코 그럴 수 없다고 만류할 것만 같았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해도 서로를 위해 따라야 하겠지.



“조심히 가십시오, 이스피리아 님.”


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움찔하지만, 이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딧츠는 평범히 불러달라 해도 절대 들어줄 거 같지 않았다. 성실하다고 여기면서 익숙해지는 편이 좋으리라.



“배웅 고마워요. 이만 가볼 테니 레딧츠 씨도 얼른 돌아가 보세요.”

“······.”


레딧츠는 아무런 말 없이 쳐다만 보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인다.


잠시 지켜보고 있으니 레딧츠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드리옵니다.”


단순히 지금 한 말에 대한 감사는 아닌 듯 보였다.



“아니에요.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주인님과―― 소베르비아 공주님과 친하게 지내주시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무슨 소릴 하는가.


어느새 자신만이 아니라 라프리트와도 허물없이 대화하며 지내는 루비아. 티격태격할 때도 있지만 그녀들과 같이 있는 건 정말 즐거웠다.


그런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건 결코 일방적인 요구에 의한 관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리아는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감사받을 일이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루비아 씨랑 친구가 된 거예요. 레딧츠 씨도 여태 루비아 씨를 잘 보필해줘서 감사하다고 하면 좀 곤란하시죠? 그러니까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알겠사옵니다.”

“아! 그리고 제 쪽에서도 말씀드릴 게 있어요.”


의아한 듯 보는 레딧츠에게 리아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앞으로도 제 친구를 부탁드려요.”

“······.”


레딧츠에게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여러 감정이 드는 듯했다.


여전히 고목같이 딱딱한 얼굴에 드러나는 건 없다만 마력을 통해 이를 알아본 리아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인사는 다 했고 감정을 정리하는 사람을 빤히 보고 있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았다.


그렇게 에르와 함께 복도를 나아가던 리아의 귀에 작게 레딧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사한 말씀. 잘 새겨들었습니다, 이스피리아 님.”


돌아보진 않았지만 어쩐지 고개를 숙이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런 레딧츠를 상상한 리아는 살짝 웃었다.



“뭘요.”






배웅받고 리아가 향한 곳은 리카드가 있는 학원장실.


학원 외부라면 모를까, 실내의 길은 잘 모르기에 헤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안까지 모두 훤히 꿰뚫고 있는 에르 덕분에 그러지 않고 단박에 찾아올 수 있었다.


근데 기껏 도착한 학원장실 앞에서 리아는 들어갈 생각은 없이 문 앞에서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일 뿐이었다.


이런 행위를 하는 것엔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여는 데 꽤 힘이 필요하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의 거대한 문 때문이었다.


위쪽이 아치형으로 된 문은 장식과 문양으로 화려함과 웅장함을 뽐내면서도 성인 남성 8명은 줄 세워 한 번에 들어갈 정도였다.


‘정말 무지하게 비싸보이네.’


앞으로 얻을 7년간의 손전등 판매금으로도 이 문은 절대 못 사지 않을까······



“리아?”


의아해하는 목소리에 리아는 정신이 돌아왔다.



“무슨 문제 있어?”

“아뇨. 크기에 놀란 거예요.”


에르는 슬쩍 문을 훑어보더니 코웃음 쳤다.



“쓸데없는 데에 치장을 공들였구먼. 리카드 녀석도 은근 과시욕이 있는 모양이야.”

“그, 그럴까요? 그렇게 보이진 않으시던데······ 어쨌든 들어가 보죠.”


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 에르. 살살 두드려요.”

“응?”


쳐다보는 에르와 함께 문이 스르르, 예상보다도 너무나 가볍게 열렸다.



“어서오세요. 찬크에르 씨, 이스피리아······ 양? 왜 그러시나요?”


열고 나온 사람은 리카드였다.


노크로 인해 문에 흠집이 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리아는 뻥졌다.


설마 [염화]로 방문을 알릴 줄이야······


조심스러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면 이미 몇 번 리카드와 [염화]로 대화를 주고받은 것 같은―― 기억을 좀 거슬러 올라가 보니 학원에 온 첫날에 그런 적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문도······ 마법이 걸려있구나. 아마 [경량] 마법이라 불러야 하나.’


문 자체가 마도구나 마찬가지인 형태로, 안쪽에 박힌 마광석이 대기 중의 마력을 자연스레 빨아들여 마법이 유지되고 있었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아니요······ 안녕하세요, 리카드 씨. 어쩐지 오랜만이네요.”

“예. 좀 일이 있다 보니 부르는 게 늦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죠.”


혼자 뻘쭘해진 리아는 자신을 보고 조용히 웃는 에르의 모습에 얼굴을 붉히면서 서둘러 학원장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간 학원장실은······ 난잡했다.


말이 좋아 난잡한 거지 그냥 정리를 안 한 거다.


리아는 조금 놀라면서 실내를 둘러봤다.


각종 책과 서류가 기숙사 방보다도 넓은 학원장실 곳곳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뭔지 모를 도구들도 놓여있었는데, 개중엔 마도구도 많아서 여기저기 마력의 잔향 같은 게 뿜어댔다.


다만 이 모든 게 보이는 리아에겐 희뿌연 연기가 껴있는 듯했다. 뒤죽박죽 섞여 오색빛깔로······


다행이라면 신경 쓰지 않으면 그다지 잘 모를 정도였고, 최근에 사용한 물건은 별로 없는지 진하게 남은 것은 몇 없다는 점이다.



“리카드, 정리도 제대로 못 하나?”


눈살을 찌푸리는 에르에게 리카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 일단은 정리한 것입니다만······”

“이게?”

“······네.”

“하아······”


깊고도 깊은 한숨을 내쉰 에르가 마법을 썼다.


청소를 위한 것으로, 에르가 마법을 발동하자마자 창문이 열리더니 먼지가 모조리 밖으로 배출됐다. 이윽고 모든 먼지가 사라지자 창문은 닫혔다.


순식간에 먼지 청소가 끝났다······ 모든 주부들의 꿈이자, 환상 같은 마법이었다.


하지만 언뜻 쉬워 보이는 이 마법은 서류 종이 한 장 흔들리지 않는 것이 보기와는 달리 무척 섬세한 마법이다.


아마 중요 문서가 섞이지 않게 배려한 거겠지.


역시 멋지고 자상한 남자다.



“잘도 이딴 곳에 리아를 불러들였군. 아니, 건방지게도 네놈 주제에 리아를 불러댔군.”


자상한 남자가 맞을······


아니. 맞다.


왠지 종이 하나 대신 뒤치다꺼리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함께 오지 않았더라면 먼지 청소는커녕 그냥 돌아갔을 것만 같은 분위기지만, 에르는 자상한 남자가 분명했다.



“조, 종이 냄새가 저······정감이 가는 방이에요. 에르도 그렇죠?”

“응. 나쁘지 않아.”

“······.”

“리카드 씨,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자자, 일단 앉도록 할게요. 에르도요.”


보라, 근심 걱정 없이 빛나는 에르의 미소를. 대답도 나쁘지 않다고 해주지 않았는가. 분명히 리카드를 걱정하여 마음을 모질 게 먹고 독한 말을 내뱉은 것일 거다.


소파 위에도 가득 놓인 서류를 보고 작게 혀를 차곤 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건 다른 방문자가 찾아왔을 때를 걱정하는 것이니라.


‘역시 에르······’


리카드도 눈에 힘이 풀리고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런 에르의 착한 마음을 잘 알아보고 반성하는 듯했다.


다음에는 정리하려 노력하겠지.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리카드가 힘없이 차를 가져와 따라줬다. 미리 준비한 듯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잘 마실게요.”

“네······”


목소리에도 힘이 없다.


아무리 어른이라도 혼나면 기죽겠지. 그런 리카드를 위해 기운 차릴 시간을 줘야겠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리아는 따듯한 차에 데지 않게 조심하며 한 모금 마셨다. 청포도 같은 향기와 함께 너무 씁쓸하지도 달지도 않은 적당한 맛이 느껴졌다.


‘음~ 잘 내리셨다.’


리카드는 이런 가볍고 부드러운 맛을 선호했었다. 언제나 매번 이런 느낌의 차만 마신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


‘으응?! 아니아니, 잠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지?’


본능적으로 가슴에 가져가 본 손에서는 별다른 게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지난번처럼 딱히 술렁이는 것도 없었다.


‘이, 이상하네.’



“맛이 이상합니까?”

“그게 이상한 게 아닌······ 어, 아니요! 맛만 좋아요. 리카드 씨는 차를 잘 내리시네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수상한 반응을 한 것에 에르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걱정하면 안 되기에 리아는 재빨리 [염화]를 사용했다.



『괜찮아요, 에르.』


에르도 곧바로 [염화]로 말을 걸어왔다.



『아무것도 느껴지진 않았건만, ······순간 놈이 독이라도 탄 줄 알았어. 그딴 짓을 해봐야 소용은 없겠지만.』

『아뇨! 리카드 씨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그렇지만 방금 자신의 행동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자, 오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표정을 굳히면서 가슴을 부여잡다니······ 영락없이 독을 마신 사람의 반응 같지 않은가.


오해 살만한 짓을 했다.



『그럼, 갑자기 왜? 혹시 저번처럼?』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니긴 한데······ 왠지 리카드 씨의 취향? 을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호오······』


의미심장하게 말을 흘리는 에르를 보고 리아는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다급히 이어서 말했다.



『아니에요! 뭘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라요, 어디선가 들어봤다고 해야 할까? 알고 있는 기분이에요.』

『아는 기분?』

『네. 뭐라 잘 설명은 못 하겠는데요······』

“저기······ 무슨 일 있습니까?”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돌려보니 맞은편에 앉아있던 리카드가 안절부절못하는 낌새로 있었다.



“아, 에르와 이 차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부드러운 맛이 참 좋더라고요.”


순간 무슨 소리인가 생각하는 눈치이던 리카드는 곧 이해의 빛을 띠었다.



“그냥 말씀하셔도 괜찮으신데 말이죠. 이 차는 벨루디스 남부 지방 쪽에서 가져온 홍차입니다. 저도 자주 즐겨 마시죠. 혹시 입맛에 맞지 않은 건가 걱정했습니다.”


마음이 놓인 듯 리카드는 조금 지친 미소를 보였다.


학원장이라고 그저 맘 편한 직책은 아닌가 보다. 여러 가지 눈치도 봐야 하는 일도 많겠지.


‘생각보다 업무가 고될지도.’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학원장실에 있는 난잡한 물건들 사이를 뚫고 거대한 창문에서 빛이 내리쬈다. 어두침침했던 방이 조금 밝아진 듯 보였다. 애초에 잘 보이긴 했지만, 덕분에 더 잘 보이는 느낌이다.


지적인 생김인 리카드의 얼굴도 측광 때문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여기에 원래 끼고 있던 안경이 있었다면 잘 어울려서 한층 더 잘생김을 뽐내지 않았을까······


리카드가 눈이 좋아져서 아쉬울 뿐이다. 기껏 고쳐준 안경도 제 역할―― 만화처럼 번쩍이는 것도 못 하고.


그 한순간을 위해 눈도 좋은 사람이 불편함도 감수하고 도수 없는 안경을 낀다고 들었었는데······ 리카드는 모처럼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아니야, 다음 기회를 잡으면 돼. 얼른 도수 없는 안경을 만들어서 드려야겠다. 사모하시는 분이 계시면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할 테니. 그리고 역시 리카드 씨는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이 잘 어울――렷??’



“리카드 씨. 혹시 안경 가지고 계신가요?”


갑작스러운 말에 에르와 리카드는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네. 갖고 있습니다만.”

“잘 됐다! 한 번 써 보실 수 있나요?”


리아는 필살기―― 두 손을 맞잡고 애처로운 얼굴로 귀엽게 꼬물거리기를 시전했다.


물론 이것도 전생의 손녀가 하던 것이다. 이것에 당하면 허허 웃으며 자연스럽게 지갑을 열었었다. 그리곤 아들 부부에게 혼났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이를 먹고 나서는 잘 하지 않게 된 이것을 부끄러움도 참아내며 하는 거다.


그리고 효과는 강력했다!


필리아가 아닌 이상 당연히 그래야만 할 터인데―― 리카드는 눈이 혼비백산하며 곤혹스러운 낌새를 보였다.



“······.”

“어······ 아, 안 될까요?”


얼굴이 빨개질 거 같은 창피함도 참아가며 한 필살기다. 필리아 이외의 사람에게 통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저리 곤란해하는데 억지로 씌울 순 없다. 너무나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뭔가 떠오를 거 같았는데······’


리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흐려지며 고개가 내려갔다.



“그, 그럴 리가요! 괜찮습니다. 쓰겠습니다!”


우뚝 멈춘 리아의 머리가 초고속으로 올라왔다.



“정말요?!”

“무······물론이죠! 그 정도쯤이야 괜찮고 말고요. 이런 걸로 뭔 일 있겠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응?”


고개를 갸웃하는 리아를 내버려 두고 리카드는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매우 다급한 것이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도 보였다.


이상함에 리아는 에르를 쳐다봤으나, 다정하면서도 진한 미소가 반겨주기만 했다.


뭔지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어쨌든 부탁은 들어주는 모양이니 리아는 맘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잠시 기다리니 식은땀을 흘리면서 리카드가 안경을 꺼냈다. 저번에 고쳐준 안경이었다.


다시 봐도 탐이 날 정도로 아주 귀엽고 예쁘게 만들어진 걸작이다. 항시 품에 지니고 있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한 리카드의 기분도 공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너무 맘에 들어서 함부로 쓰기 싫어하셨던 게 아니야? 컬렉터 같은 사람들은 사용하진 않고 보는 맛에 수집한다고 하니까. 리카드 씨도 힘들 때마다 한 번씩 꺼내 보면서 위안을 얻고 그러시는 거 아냐?’


그런 욕구들이 이해되진 않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굉장히 미안한 짓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억을 위해서라도 리아는 드물게도 독하게 가기로 정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안경을 꺼내든 리카드는 엄청나게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렌즈도 없고 하니 쓰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을 텐데도.


그 모습에 리아는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역시 리카드는 상당한 진성 컬렉터였나 보다.


‘미안해요, 리카드 씨! 더 이쁜 걸로 만들어서 선물할게요!’


저리 쓰는 것조차 주저할 정도의 안경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상실감을 풀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


리카드가 마음을 정하는 시기는 생각보단 길었다. 그렇다고 다그칠 수도 없다.


좀 더 기다리니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처럼 결연한 표정을 지은 리카드가 안경다리를 펼쳤다. 그리곤 서서히 얼굴로 가져가 귀에 걸쳐 착용했다.



“훗.”

“응?”


바람 빠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에르가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리아. 리카드 녀석이 생각보다도 잘~ 어울려서 말이지.”

“······”


그 말에 리아도 말이 없는 리카드를 다시 쳐다봤다.


얼굴이 새빨개진 리카드와 걸작이라 할 만큼 완성도 높은 안경. 왠지 눈을 내리깔고 조금 떠는 듯도 했지만, 원판이 좋은 탓인지 그리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괜찮긴 한데······ 뭔가 느낌이 다르지?’



“리카드 씨. 그 안경, 조금 모양 좀 바꿔도 될까요?”

“네?!!”

“여, 역시 마음에 드시는 거니 함부로 바꾸긴 그렇겠죠······ 싫어하시는 데도 쓰시게 했는데.”

“아, 아닙니다! 마음껏! 마음껏 바꾸도록 하세요. 저도 이스피리아 양의 마법을 더 볼 수 있어 좋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예. 학생을 위해섭니다. 괜찮습니다. 버틸 수 있습니다.”


‘버틴다니······ 그렇게 말할 정도인데 날 위해.’


순 본인의 억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여기까지 온 거 철저히 해야 한다. 그게 리카드가 보여준 대인배적인 모습에 대한 보답일 거다.


감동에 겨운 리아는 나올 것만 같은 눈물을 집어삼키고는 마법을 썼다.


[성형]에 의해 리카드의 안경은 착용한 상태로 마구 모습을 바꾸어갔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리아는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노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다지 성과는 좋지 못했다.


100여 번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영 이거다 싶은 느낌이 없었다. 자포자기한 듯 지쳐 보이는 리카드를 위해서라도 빨리 끝내야 할 텐데.



“리아, 원하는 형태가 따로 있어?”


계속 고민하고 있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에르가 물어왔다.



“으음······ 그게요. 리카드 씨에게 어울릴 만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데요. 물론 전부 어울리시긴 했는데 뭔가 딱 와닿지 않아요.”

“후후. 그렇군, 전부 잘 어울리긴 했지. 역시 리아였어. 난 발끝에도 못 미칠 정도의 미적 감각이야.”

“에헤헤, 칭찬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에르를 따라갈 정도는 아닌걸요. 만들어주신 옷들도 전부 엄청 이뻐서 전 따라 할 엄두도······ 어? 에르에르!”

“응?”

“에르요!”


리아는 에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에르가 만들어주세요! 리카드씨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형태로요!”

“뭐······?!”


정말 드물게도 에르가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다지 표정의 변화가 없는 그가 지금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겉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참고 와준 리카드를 위해서라도 이제 와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리아는 에르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올려다봤다.



“부탁해요, 에르.”

“······”


반짝반짝, 간절해 보이는 시선일 거다.


갈등이 심해 보이는 에르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계속 바라보자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어깨를 잡아 떨어뜨렸다.


리아도 순순히 손을 풀고 물러서자 에르는 곧장 마법을 사용했다.



“고마워요.”

“다름 아닌 리아의 부탁이야. 당연한 거지.”


리아와 에르는 서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툭――



“말씀하신 것 치고는 싫은 표정이셨고, 한 번에 들어주시지도 않―― 헛, 아닙니다······ 아, 아름다운 한 쌍의 모습을 직접 대면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리아도 알아차릴 만큼 아부성이 짙은 리카드의 말이었다.


물론 생각보다 오래가게 된 상황에 불만스러워하는 건 충분히 이해하니 툴툴대는 거쯤이야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것보단 얼른 결과를 확인해봐야 한다.


뒤를 돌아 바라본 결과물은 훌륭했다.


과연 에르. 센스가 좋았다. 직사각형의 얇고 쭉 빠진 모형은 확실히 리카드에게 잘 어울렸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데.’



“리카드 씨. 여기 이쯤, 옆얼굴에 빛이 받게 서 주실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그 어색한 웃음도 좋은데, 좀 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어색한 웃음을 보여주세요.”

“······네?”


상당히 모호하기 짝이 없는 무리한 요구다. 알고는 있지만 이제 얼추 다 온 느낌이다. 좀만 더하면 기억날 거 같다.


리카드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가리킨 곳에 서서 최대한 지시에 따랐다.



“좀 더 자연스럽게!”

“이, 이렇게 말입니까?”

“아뇨! 너무 힘이 들어갔어요, 좀 풀고. 아, 입은 벌리시지 말고 잔잔한 미소로요!”

“어떻습니까?”

“딱딱해요! 조금 더 흐물한 느낌으로!”


몇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도 리카드의 표정은 나아지질 않았다.



“아니야!!”


탁!


영화감독처럼 지시를 내리고 있던 리아는 소파에 있던 서류로 말아 만든 확성기를 탁자에 내려쳤다. 그리고는 몸을 던지듯 거칠게 소파에 앉았다.


왠지······ “데밋!” 이라고 말할 거 같은 느낌이다.


잘 보이지 않은―― 아니, 리아의 현생 처음으로 보이는 모습에 리카드와 에르마저 흠칫했다.


하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리아는 손톱을 깨물면서 중얼거렸다.



“부족해······ 부족하다고. 뭐가, 부족한 거지? 좀 더 가슴에 와닿아야 해. 이런 걸로는 관객이 좋아할 리가 없어.”

“리, 리아?”

“간절하면서도 어딘가 애틋한······ 애틋한 느낌? 그래! 애틋함이 부족했던 거야!! 리카드 씨!”

“예, 옙!”

“얼굴 근육은 푸셨겠죠? 그럼, 다시 가죠!”


기합이 잔뜩 들어간 리카드와 함께 다시 확성기를 잡고 촬영······이 아니고, 연기가 시작됐다.


초반엔 분위기 때문에 위축된 리카드는 전보다 딱딱해져 많은 지적이 나왔으나 점차 긴장이 풀렸는지, 이 이상한 상황이 익숙해진 건지 차근차근 리아가 원하는 표정으로 잡혀갔다.



“조~옿습니다. 거기서 애틋한 시선으로 살짝 멀리―― 상상 속에 있는 어딘가를 본다는 느낌으로요. 네네, 좋아요. 그러면 이제 사모하시는 분을 떠올리세요.”

“네······?”

“뭘 하시는 겁니까?! 집중하지 않습니까!!”

“에, 아······알겠습니다.”

“······.”


리카드의 표정이 변해갔지만 부끄러움 때문인지 전보다 더 어색해졌다.



“후우······ 리카드 씨.”

“네넵.”

“사모하시는 분에게 고백하실 때도 그렇게 쭈뼛거리실 건가요?”

“······.”

“자신의 마음이 부끄러우세요?”

“그럴 리가요! 하지만······ 저의 상황은――”


표정이 흐려진 리카드는 어스름하니 미소를 지었다.


역광에 가까운 측광을 받은 그 모습은―― 원하던 것과 굉장히 흡사했다.



“어?! 그, 그거!! 그대로 스톱! 리카드 씨 움직이지―― 아아! 움직이지 마세요!”

“네? 저기 도대체······”

“쉿!! 입도 가만히! 원상복구 하세요!”


벌떡 일어난 리아는 자리를 박찼다. 리카드가 언제까지 저 표정을 유지할지 모르기에 매우 다급했다.


마법으로 서류들이 흩날리지 않게 고정한 리아는 잔상까지 남기면서 매우 빠르게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보는 각도를 달리했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얼추 3초 안팎이었을까.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리아는 소파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이 정도라면 관객―― 플레이하는 사람도 만족하실 거예요. 고생했어요, 리카드 씨. 훌륭한 재현이었어요.”

“끄, 끝난 겁니까?”


뭔지도 모를 상황에 깊은 한숨을 쉰 리카드는 어깨를 떨구었다.


그런 그를 잠시 동정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던 에르가 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변모한 모습 때문이었는지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리아······”


에르가 부르는 말에 리카드도 처진 고개를 들고 정말 너무너무 궁금하다는 듯이 똑바로 바라봐왔다.


대답을 바라는 둘의 모습에 리아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설명하려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전에 바늘은커녕 마력 한 톨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어 보이는 결계가 만들어졌다. 저번 기숙사 방에서 에르가 만들었던 것과 동일한 사양이었다.


[차원수납] 하나 열 수 없어 보이는 결계 안, 어두컴컴한 공간에 영화감독의 기분이었던 리아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단순히 과격해진 모습에 조심스러워한 게 아니었구나······’


빛 하나 없는 완전한 어둠이지만 잘만 보였던 리아는 곁에 서 있는 에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해줘, 리아. 당최 무슨 일이었던 거야?”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추태를 보였던 것에 당황할 시간도 없이 자세를 진지하게 한 리아는 조금 전 기행을 설명했다.



“에르도 대강 예상하셨을 테니 결계를 치신 거겠죠. 네, 사실 방금 리카드 씨의 모습을 어디선가 본 거 같았어요.”

“······그 게임, 손녀가 했다던 ‘리틀’ 이란 거에서?”

“맞아요. 리카드 씨도 기억하던 것보단 생김새가 덜 느끼해서 잘 몰랐지만 아마 확실해요. 무슨 장면인지는 모르겠는데 본 기억이 있어요.”

“그걸 확인해보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한 거야?”

“음······ 네, 그렇죠. 그리고 배경도 여기 학원장실이었던 거 같기도 해요. 말 그대로 배경인지라 정확하진 않지만요.”

“그렇다는 건 리카드도 공략 대상자인가 뭔가라는 건가. 레온하트랑.”

“그게 아니면 그냥 등장인물일 수도 있어요. 배경이 벨루디스라면 두 분 다 등장할 만하잖아요? 하지만······ 보통 뭔가 직책이 있는 경우가 많을 거 같아요. 그런 장르의 게임은 안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엔 그런 편이 많았어요.”

“그렇군. 서민 쪽 생활이라 봐야 거기서 거기에, 반복만 될 일상뿐이니 게임으로 즐기는 자들에겐 그다지 재밌지는 않겠지.”


지구에서의 시점으로 본다면 이곳의 서민이라도 적당히 신기하겠지만······ 그래도 왕족이나 학원장보단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도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신분 대상승인 내용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레온이랑 리카드 씨도 공략 대상자가 맞는 거 같은데? 라프리트 씨나 루비아 씨가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고. 츤츤이라고 했던가? 그거랑 치유계인가 뭔가로 해서.’


막상 다가가긴 어려운 루비아가 아닌 척 내숭 떨면서도 친해진 이후로는 이거저거 챙겨주는 모습이라든지, 친절하고 천사 같은 라프리트에게 처음부터 홀딱 반해 해롱거린다든지.


상상해보니 그럴듯했다. 오히려 이 굉장한 존재감의 친구들이 등장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뭐······ 연예 시뮬레이션 장르는 감이 영 안 잡혀서 확실하진 않지만.’



“더 알게 된 건 없어?”

“음―― 네. 그 장면과 방금 마신 차를 좋아하신다는 정도에요. 아마 손녀가 재잘재잘 떠들었던 내용일 거예요.”


가볍게 한 말에 에르는 굉장히 어려운 표정을 했다. 동정심이랄까, 어딘가 먼 곳을 보듯 초점이 흐렸다.



“······일단은 알겠어. 더 기억나는 게 있다면 말해줘.”

“아, 에르! 저도 물어볼 게 있어요.”

“응?”

“저번에 그랬잖아요. 모든 게 같다면 비슷할 수 있다고요. 그러면 게임에서도 벨루디스가 기울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높을 거라고 보이지만. 리아, 게임은 게임이라고 했잖아. 우리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야.”

“네. 저도 이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가능성이 크다면······ 잘도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면서 이런 위험천만한 설정을 넣었네요. 보통은 알콩달콩한 이야기만으로 흘러가는 게 정석 아닌가요?”


서로 연애하기도 바쁠 텐데 이딴 위험천만한 상황 따위를 넣어서 어떤 플레이어를 만족시키려는 의도였나.


――그것도 전체이용가 게임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게임은 게임이라고 다르게 구분하여 생각하려 함에도 개발자를 직접 찾아가 따져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1인 개발자라고 했으니 찾으려고만 하면 생각보단 쉬울 터. 영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그런가. 그 연예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나는 잘 모르니 뭐라 할 순 없지만······ 평탄하게만 흘러가면 흥미가 떨어지니 긴박해질 요소를 추가했다든지 그런 게 아닐까?”

“전 그냥 쭉 평탄한 게 훨씬 좋은데. 우리 사이가 긴박해질 요소는 필요 없잖아요.”

“물론이지. ······응? ――어쩌면. 가능성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만, 남녀불문하고 다양하고 했으니. 리아가――? 그렇다면······. 아니, 게임일 뿐이야. 너무 진지해졌어. 괜한 것들이 주위에서 설친다라······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에르는 정말 질색하는 듯 보였다.


뭔가 다른 것과 착각한 모양이다. 그냥 둘만의 관계를 말한 것이었다만······


그래도 저리 진지하게 고민하는 걸 보니 자신을 향한 에르의 애정을 새삼 느끼기엔 충분했다.


······조금 부끄러워졌다.


기분이 쉽게도 변한 리아는 서둘러 다른 말을 꺼냈다. 이 주제로 계속 가다간 침몰 확정이다.



“으으음. 아, 긴박한 상황이면 자손을 남기려는 본능이 강해진다고들 하니까 더욱 애특한 관계를 그려내려고 그런 설정을 넣었을 수도 있겠네.”


다른 주제를 떠올리다가 무심코 혼자 중얼거렸다.



“인간은 그런 건가? 그다지 공감이――”


잠시 턱을 잡고 생각하던 에르와 들려온 말에 고개를 돌린 리아는 눈이 마주쳤다. 얼떨결에 본 것으로 에르도 딱히 의도하고 쳐다본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지긋이 보던 에르의 눈이 살짝 크게 떠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어.”


‘어?’



“에, 에르. 그건 그냥 도시 전설 같은 거예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요! 무, 뭘 상상하신 거예요?!”

“아무것도. 그러는 리아야말로 내가 뭘 생각했다고 상상하기에 그러는 거야?”


맑고 빛나는 에르의 미소가 직격해왔다.


――어쩌면 그냥 내가 발랑 까진 게 아닐까. 난 지금 생사람에게 괜한 트집을 잡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사심 한점도 존재하지 않은 엄청난 미소였다.


따지려 들던 리아는 자괴감과 창피함에 고개를 숙였다. 분명 홍당무가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저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보다 리, 리카드 씨. 네! 리카드 씨가 기다리실 거예요!”


“그러네. 리카드 따위야 아무래도 좋지만, 오늘은 좀 그러니······”


에르치고는 불쌍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말투였다. 그렇지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것에 리아는 안도했다.



“에르, 이쪽으로 와봐요.”


결계를 해제하려던 에르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빨리요.”


손짓까지 하며 재촉하니 에르는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긴 흑발이 찰랑 떨어지는 걸 보며 리아는 살짝 발돋움해 에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난번엔 고맙단 말도 못 했는데 오늘도 고마워요. 그리고 언제나 절 아껴줘서 정말 고마워요.”


굳어있는 에르의 볼에 리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잠시 후 결계가 사라지고, 그 안에선 싱글벙글인 리아와 왠지 모르게 혈색이 좋아 보이는 무표정인 에르가 있었다.



“오! 이제야. 찬크에르 씨, 갑자기 무슨 일이었던 겁니까? 그리고 이 마법은 무슨 마···법······? 얼굴은 왜 빨갛게 되셨습니까?”


작가의말

오늘의 5번째 화입니다!


아마 여기가 오늘의 마지막 같습니다. 잘하면 더 올릴 수 있고요!


여하튼 혹시 모르니 여기서 인사를 드리고 갑니다


그럼 내일에 또 봬요!


라스티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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