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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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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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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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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9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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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DUMMY

리아가 있는 대륙, 세그언도 대륙은 중앙에 성국 세인트리안을 기점으로 주위에 세 국가가 존재한다.


북동쪽으로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발전한 벨루디스, 서쪽으로는 마수와 마물을 독자적인 기술로 사역하여 다루는 루 몬테르 공국, 서남쪽으로는 수많은 나라를 통합하여 이룩한 폰타르트 제국이 있었다.


이전에는 좀 더 많은 나라와 인간――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현재는 인구의 수가 급감하고 나라도 단 3개의 국가뿐이었다. 그것도 생활 구역은 한참 줄어들어 세그언도 대륙의 중앙―― 드넓은 초원에 벽을 쌓아 올려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실정이었다.


대륙 전체로 따지자면 좁쌀만 한 정도로. 이전 대륙 외곽에까지 나라를 만들어 타 대륙과 무역 거래를 하던 것과 비교하면 현격한 쇠퇴였다.


이렇게 된 원인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손꼽는 이유는 당연히 인마전쟁의 발발이다. 인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모두 퇴보시키게 만든 그 전쟁이야말로 현 사태를 만든 원인으로 판단하는 이가 대다수다.


그럴 것이 외부로의 위협―― 간혹 군단도 이룬다는 강대한 몬스터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몸을 지킬 수단이 적어진 것이다. 생존을 위해 옹기종기 모여 살 수밖에 없던 거다.


설명해주기로는 각 나라마다 정기적으로 외곽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여 몬스터들이 성장하기 전에―― 동, 식물조차 위험군이면 마수와 마물로 자라기 전 사전에 싹을 잘라 놓는 작업도 한다고 한다.


덕분에 지금은 변두리에 있는 영지의 마을이라도 큰 위협 없이 평화롭게 지내고는 있다고 하나, 영토 바깥의 세계에는 여전히 발을 디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바깥의 세계를 탐색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모험가라 불리는 사람들의 시초로, 옛 인간들이 살던 마을의 물건―― 지금으로서는 만들 수조차 없는 오버테크놀러지인 아티팩트나 귀중한 물건을 탐색하는 모험가라는 직업이 붐을 일으키게 되기도 했다고 한다.


‘물건에 따라 억 소리 나는 가격을 받을 수 있다니까 일확천금을 위해 뛰어드는 사람도 많겠지. 트레져 헌터 같아서 뭔가 상상하는 거와는 좀 다르지만. 그리고 죽는 사람들도······ 많겠지.’


이러한―― 졸면서 들었던 교양 수업의 내용을 정리하며 리아는 다음 수업을 들으러 학원 내를 걸었다.


다만 방금 들었던 교양 수업은 초급으로, 중등부의 아이도 많이 껴있는 기초 중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런 수업에 리아가 가니······ 전혀 이상함을 못 느낄 만큼 아이들 사이에서 잘 동화되어있었지만, 중등부부터 다니던 사람만 있는 건 아니기에 성인―― 고등부에 처음 입학한 사람들도 적지 않게 이 수업에 있었다.


더불어 기초 지식이기에 사전에 어느 정도 교육받고 오는 귀족은 다 아는 시시한 내용뿐이니 이 수업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존재했다.


위로는 몇 명밖에 없는 까마득하게 높은 신분의 귀족 영애가 한 명. 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 어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침묵하는 교실과 수업을 진행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는 선생님은 실로 가관이었다.


눈치로 보면 선생님은 혹시 교실을 잘못 찾아오지 않았나 묻고 싶은 낌새였지만, 애당초 귀족에겐 익숙지 않은 듯 보였고, 거기에 혹여 후작 가의 영애에게 실수할까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선생님조차 어려워한 그 대단한 신분의 영애는 현재 자신의 옆에서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같이 걷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라프리트 씨. 뭔가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걱정해주셔서.”


미소로 괜찮다고는 하지만 라프리트는 이어진 그리모르의 수업에서도 어쩐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 평소와는 달리 세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찌르기가 전혀 없었다.


‘어제 이후로 계속 그러시니 방금 수업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닌 거 같은데······ 혹시 루비아 씨의 본 모습을 보시고 충격받으신 건가?!’


물론 깜짝 놀랄만한 변모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평범한 내숭이 아닌가.


이럴 때는 인생 경험이 풍부한 자신의 지식을 살릴 순간이었다. 언제나 많은 배려를 해주는 그녀를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도록 하자.


이번에도 빌린 검을 안고 리아는 빠르게 라프리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갖가지 사람이 존재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며 뻔하디뻔한 말을 꺼내려 했다.



“실례하네, 레이디 이스피리아.”

“라프리트 씨······ 응?”


자신을 부르는 남성의 목소리에 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돌아본 그곳엔 금발벽안의 진지한 인상의 미남이 있었다.


라프리트는 그 미남을 보더니 바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레온하트 전하.”

“껴들어서 미안하네, 라프리트 양. 잘 지냈나?”

“예. 덕분에 무사안일을 보내고 있사옵니다.”


인사 이후 간단한 안부를 묻는 둘은 처음 본 사이가 아닌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미들네임이 같구나. 먼 친척 사이이신가 보네. ······어, 그럼 뭐야. 라프리트 씨 왕가랑 친척이시니 공주님 같은 거였어?! 우, 우와아아~! 대단하셔.’


루비아도 물론 진짜 공주이지만 행동부터 모든 것이 우아하기만 한 그녀와는 달리, 여태 마음 편하게 친근히 대한 라프리트가 그런 대단한 신분이라 생각하니 다가오는 느낌이 완전 달랐다.


‘왠지 주변에 계신 분들 모두 굉장하지 않아······?’


파고들자면 남편인 에르부터가 굉장하긴 했다.


그렇게 주변 인물들에 대해 생각하던 리아에게 라프리트가 말을 걸어왔다.



“리아 양. 여기 계신 분은 레온하트 디안 벨루디스 전하예요.”


딴생각하다가 소개받자 리아는 허둥대면서 서둘러 치마를 잡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스피리아라 합니다, 레온하트 디안 벨루디스 전하.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비록 바지를 입었더라도 깔끔하기만 한 리아의 인사에 레온하트도 가슴에 손을 얹고 고풍스럽게 인사를 해주었다.



“나도 만나서 반갑군. 레온하트 디안 벨루디스라 하네. 모쪼록 이후 편하게 부르시길.”

“분부대로. 레온하트 전하.”

“솔직한 마음으론 전하도 필요 없다만, 그러면 자네에게 부담이 되겠지.”


‘······다른 귀족분들과 다르게 엄청 예의가 바르시네.’


아직 그래 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어딘가 우월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다른 귀족들과는 달랐다. 상대와 같은 시선―― 대등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왕자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호감도가 쭉쭉 오르는 걸 느끼며 리아는 물었다.



“전하께선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말하기 껄끄러운 듯 잠시 신음을 흘리던 레온하트는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한 번 흔들곤 진지한 눈을 고정했다.



“레이디에게 할 짓은 아니지만, 대련을 신청하러 왔다네.”


‘레, 레이디!!’


처음에도 그리 불러줬었으나, 대해주는 것까지 여성 취급을 당한 건 굉장히 드물었다. 아이를 대하듯 귀여워하는 거라면 또 모를까.


덕분에 리아의 마음은 활짝 열려 갔다.



“보아하니 라프리트양과 연습할 모양이니, 그 후라도――”

“좋습니다! 바로 시작하죠!!”

“라프리트 양과는······ 괜찮은 건가?”

“하······ 전 괜찮습니다, 전하. 리아 양도 할 맘이 가득해 보이니 그다지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한숨을 쉬는 라프리트를 알아차렸지만, 리아는 이미 뛰어가 거리를 벌리곤 신나서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그런 듯하군······ 라프리트 양, 위험하니 조금 떨어지게나.”


고개를 숙인 라프리트가 멀어지고 레온하트도 자세를 잡았다.


중단을 가로질러 검을 앞으로 내밀고 한발을 살짝 뒤로 뺀 평범한 자세였다. 하지만 오랜 연습을 한 것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꽤 묵직한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왜 왕자가 이 정도로 검에 매진한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리아는 잡생각을 멈췄다. 예의도 아니었고, 새로운 걸 배울 좋은 기회였다. 그걸 놓치고 싶진 않았다.



“먼저 시작하셔도 좋아요.”

“미안하네만 사양하지 않도록 하지.”


대답과 함께 레온하트는 선수를 양보한 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리스보단······ 조금 빠른 정도인가?’


다른 연무장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둘러본바 이곳에선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속도였다.


리아는 박차 흩어지는 흙먼지와 함께 왼쪽 상단에서 베어오는 검격을 막았다.


끼익끼익.


조금도 꿈쩍하지 않고 쉽게 공격이 막히자 살짝 눈을 가늘게 한 레온하트는 바로 검을 물리더니 날카롭게 찔렀다.


‘하지만 속임수고 허리를 베려는 건가.’


그런데 마력을 읽어 파악한 대로 찌르러 들어오던 검은 방향을 바꿔 횡으로 이동했다.


잘 살펴보면 허리를 통째로 베려는 것이 아니라, 검 끝으로 살짝 베어 어떻게든 잔 상처라도 만들려고 하는 듯했다.


이는 분명 대련용이 아니다. 실전에 가까운 검술이었다.


‘그만큼 진지하다는 거겠지. 날 다치게 하려는 게 목적은 아닌 거 같고. 그랬으면 처음부터 전력으로 휘둘렀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리아는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이후로도 서서히 속도와 힘을 높여가는 레온하트의 공격을 막아가던 리아는 슬슬 반격하기로 했다.


받은 게 있으면 돌려줘야지.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하면 대련을 하는 의미가 없는 거다.


그렇기에 리아는 루데릭에게 배운 손발을 다 쓰는―― 이곳에서는 하지 않는 전투법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흡!”


빙글 회전하며 레온하트는 왼쪽 허벅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을 보았지만 리아는 검을 움직이지 않았다.


막을 생각이 없는 듯 가만히 있자 레온하트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리아는 빈 왼손을 주먹 쥐었다. 그러고는 다가오는 검의 옆면을 내리쳤다.


1m가 넘는 검의 끝부분에 힘이 가해진다면 지렛대의 원리로 인해 버티는 게 영 힘들 거다.


순간 가해지는 충격과 예상치 못한 방식의 반격에 레온하트의 균형이 무너졌다.


오히려 검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하는 것보단 일부러 검을 놓거나 힘을 뺐으면 대응할 수 있었겠지만, 거기까진 무리인 듯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리아는 다가가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캉!


용케도 그 자세에서 막았으나 그 정돈 예상하던 바였다.


리아는 바로 레온하트의 발을 걸었다. 그는 버티려 했지만, 이미 균형을 잃을 대로 잃은 상태로서는 쉽지 않았다.


그 와중 기지를 발휘해 뒤로 굴러 태세를 정비하려 했지만······


리아의 검이 더 빨랐다.


코앞에 멈춘 검을 보던 레온하트에게서 투지가 사라졌다.



“······졌네.”

“수고하셨어요.”


리아는 검을 거두고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레온하트는 피식 웃더니 마주 잡고 일어섰다.



“역시 그리모르 교수를 이길 정도의 실력이었다. 훌륭했네.”

“으응? 이기진 못했는데요.”

“그렇긴 하네. 하지만 상대의 힘에 맞춰준 게 아닌가? 방금도 나에게 맞춰준 것이겠지. 명백히 그리모르 교수와 대련할 때의 힘과 속도가 아니었네.”

“······.”

“한 손만으로 내 양손과 비슷한 힘이긴 했지만, 분명 어느 정도 상대와 대등하게 조건을 맞춘 거겠―― 아아, 기분 나빴다거나 한 게 아니네. 순수 기술만으로 대련하고 싶다는 자네의 기분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한다면 서로 얻는 것도 없지 않겠나.”

“맞아요! 정확해요. 잘 아시네요. 굉장해요!”

“아니··· 굉장한 건 이스피리아, 자네다만······”


감탄사만을 늘어놓으며 헤실헤실 웃는 리아.


이러한 모습에 레온하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검을 집어넣었다.



“앞으로도 가끔 대련에 어울려주면 좋겠다만. 괜찮겠나?”

“물론이죠!”

“고맙네. 그럼 난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방해해서 미안했다네.”


이런 방해라면 좀 더 해도 괜찮다.


만족한 듯 뒤돌아가는 레온하트를 떠나보낸 리아는 놔두고 온 검집을 찾아 검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많았다. 그리모르 때에도 느껴봤으니 부끄러운 수준으로 그칠 만했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전혀 다가오지도 않고,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리아는 라프리트에게 다가갔다.



“왜들 그러시지.”

“음······ 그건 수업이 끝나고 제가 말씀드릴게요.”


혼잣말에 대답해준 라프리트는 진지했다.


어쩐지 또 뭔가 저질렀나 싶은 리아는 황급히 물었다.



“저 또 뭔가 했나요?”

“아뇨. 이번엔 아무 일도 저지르시진 않았어요.”

“그러면 왜 다들――”

“――있다가 말씀드린다고 했죠?”

“읏······ 네.”


웃는 얼굴로 압박하는 라프리트.


리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하면 설교 타임이니 얌전히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진행되는 그리모르의 강의나 연습을 의욕 없이――물론 머리에는 제대로 집어넣고 있다―― 끝내고 리아는 교복으로 갈아입고는 라프리트를 따라 연무장의 정자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정확히는 수업이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손님이었다.



“어서 와, 리아. 라프리트 양도.”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손님, 루비아가 반겨줬다.


그녀는 혼자 있었지만, 오늘도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루비아 씨. 레딧츠 씨도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스피리아 님.”


인사는 했지만, 평소의 여성 사용인이 아닌 레딧츠가 있다는 것에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한 의문을 알아봤는지 루비아는 웃으며 말해줬다.



“이제 몰래 멀리서 염탐할 필요가 없잖아? 어차피 아무런 정보도 못 얻는데. 그래서 바로 앞에서 보라고 따라다니게 한 거야.”

“엥?”

“뭘 놀라는 거야. 말했잖아, 포기하지 않는다고. 널 발가벗기듯 뜯어내 하나하나 알아갈 거야.”


‘가, 각오하라는 건 이런 뜻이었어?!’


요염한 미소로 하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럴 성격도 아니겠지만.



“뭔가 무례한 생각을 한 거 같은데?”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나, 날카롭다!


삐질 움츠러드는 리아에게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하던 소베르비아는 이내 귀찮다는 듯이 휘휘 손을 저었다.



“빨리 앉기나 해.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라프리트 양도. 리아에게 해줄 말이 있겠죠?”

“네넵.”

“······.”


리아와 라프리트가 앉자마자 미리 준비됐었는지 레딧츠가 즉시 잔에 차를 따라줬다.


다과까지 쫘악 진열되는 모습에 감탄하며 리아는 슬쩍 몇몇 쿠키들을 살펴봤다.


‘이것은?!’


리아는 굶주린 강아지처럼 빛나는 눈을 루비아에게 향했다.



“먹어도 돼.”

“오옷! 고마워요!”


허락을 얻자마자 리아는 빠르게 방금 눈여겨본 쿠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원래는 평범하게 사용인이 담아주거나 한다. 하지만 그런 예법으론 늦는다. 그 정도로 리아는 참기 힘들었다.


킁킁.


예의가 없는 건 알지만, 냄새까지 맡아 확인해봤다.


확실했다. 이 쿠키는 도대체 언제 먹어봤는지 잘 생각도 안 나는―― 리아 자신도 먹을 수 있는 쿠키였다.


‘도, 도대체 얼마만의 까까란 말인가.’


필리아도 얼추 비슷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쿠키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런데다 만드는 과정의 번거로움을 본 이후로는 만들어달라는 말은 꺼내기도 미안했다.


왠지 떨리는 것만 같은 손으로 리아는 한 입 베어 물었다.


‘마, 맛있어어어!!’


전생이었으면 이리 반기거나 좋아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여자여서 그런지, 아니면 신체가 이상하도록 잘 발달한 오엘문리아라 미각까지도 좋은진 모르겠지만 달콤한 것에는 사족을 못 썼다.


리아는 다시 한번, 이 감동을 느끼기 위해 차로 입안을 헹궈 초기화시켰다.


씁쓸한 것이 적당히 괜찮았다.


차와 과자를 번갈아 가며 전투적으로 먹는 리아를 보며 루비아는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정말 쓸데없는 정보는 없는 거네. 설마 영애들이 살 빼기 위해 아쉽게 먹는 뭔가 부족한 쿠키가 도움이 될 줄이야. 물론 ‘난’ 아니야. ‘힘들게’ 그런 짓 하지 않아도 살이 찌거나 하진 않거든.”

“우물우물. 우음. 저도요. 한 번도 쪄 본 적이 없어요.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게 그럭저럭 좀 쪘으면 하는데.”

“쳇.”

“윽.”


동시에 양쪽에서 루비아와 라프리트가 이상한 소릴 냈다.


하지만 리아는 개의치 않고 재차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아! 그리고 뭔가 부족한 쿠키가 아니에요! 최고예요.”

“그건 아무리 먹어도 안 찌는 너에게나 해당하는 거겠지.”


‘그,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는데······’


그저 칭찬하려 했을 뿐인데 왠지 싸늘했다. 구원을 바라며 라프리트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숙여 앞에 있는 과자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말한 김에 취향도 너무 독특한 거 아니야? 단 건 좋아하면서 이런 약초 같은 차를 어떻게 하면 그리 맛있게도 마실 수 있어?”


루비아는 잔을 들어 안에 담긴 연한 갈색의 차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그에 리아는 다시 차를 마셔 음미해봤지만, 맛만 좋았다. 오히려 나트알에서 가져온 것보다 개인적으로 괜찮다고 느낄 정도였다.



“저, 전혀 약초 같지 않은데요. 호······혹시 어제도?”

“어······ 쓰더라.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어.”


한 손에 얼굴을 비스듬히 괴고 말하는 루비아였다.


‘그럴 수가?!’


리아는 충격받은 얼굴을 돌렸다.



“라, 라프리트 씨도?”

“······.”


‘헉!’


살짝 고개를 돌리는 모습만 봐도 충분했다.


라프리트는 자주 놀러 오는 만큼 함께 차를 마신 적도 많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꺼리는 기색도 없이 남기지 않고 전부 마셔주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줄 알고 매번 나트알에서 가져온 여러 차를 대접했는데······


불필요한 친절이었다. 차마 성의를 무시하지 못해 억지로 마셔주는 것이었다니.


‘그, 그렇게 썼나. 평범하게 녹차 정도나 좀 과장하면 에스프레소 정도 하지 않을까 하는데.’



“리, 리아 양. 그, 그렇게까지 쓰진 않았어요. 나름대로 정······취 있는 맛이었고 거, 건강해지는 느낌이랄까. 정말 나쁘지 않았어요.”

“거, 건강······”


의외로 자신은 노인네 취향이 아닌 걸까.


쿵하고 머리가 처져 깊고도 심도 있는 자아 성찰을 하던 리아. 그러다 순간 번뜩! 이거다 싶은 것이 떠올랐다.



“아, 그렇구나.”

“뭐야?”

“아뇨······. 그러니까 그게······ 헤헤헤.”

“웃음으로 때우려 하지 말고 말해봐.”


‘윽······ 단박에 걸리네.’


살짝 혼잣말했을 뿐인데 루비아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하지만 들킨 건 이쪽의 어설픈 연기 때문이겠지. 라프리트마저 대충 넘기려는 속셈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할지도······


결국 포기한 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음······ 그러니까 말이죠? 전 어렸을 때 몸이 무척 안 좋았거든요. 할아버지 말로는 언제 오늘내일할지 몰랐다나 봐요. 그래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약초를 달고 살았던 거 같아요. 그렇게 돼서 어지간히도 씁쓸한 맛에 길들어진 게······ 아닐까 해요.”


――혹은 그냥 취향에 맞는 것이거나.


그렇지만 그건 애늙은이다. 아무리 꼬마라 불리긴 싫다지만, 애늙은이라고 괜찮은 건 아니다. 어쩌면 애늙은이 쪽이 외견과 맞물려 더욱 비참해지는 기분을 맛보는 건 아닐까 싶기만 하다.


새로운 콤플렉스를 만들 필요는 없다.


자신이 바라는 건 평범한 여성이었다. 기왕이면 내숭 버전의 루비아가 이상적이고.


하지만 거센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전생의 기억도 있고 하니 왠지······ 취향이 아닐까 하는 의견에 힘이 실려만 갔다.


‘이, 인정하지 않아!’


리아는 이런 자신의 심정이 들키진 않았나 주위를 살펴봤다.



“어, 그래······ 리아가 몸이 약했다는 건 별로··· 상상이 되진 않지만. 그랬구나.”


‘얼라리요?’


생각과는 반응이 달랐다.


이해해줬으면 하는 것까진 맞았다. 그런데 원한 건 “그랬구나!”라는 느낌의 밝은 톤이었다. 지금처럼 별로 지어본 표정이 아닌 듯, 이상하고도 어색한 얼굴을 예상하진 않았다.


라프리트도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살짝 촉촉해진 측은한 눈길로 절찬리 바라보는 중이다.


‘이게······ 아닌데?’


그래도 어떻게든 무사히 넘길 수 있는 것까진 좋았다. 조용하고 어색해진 공기가 감도는 건 별로 안 좋았지만.


그렇게 리아가 다행과 당혹이라는 상반된 두 감정에 물들어가던 때에 소베르비아가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정돈했다.



“입맛은 됐어, 그럴 수도 있지. 그것보다 본론이나 얘기하자.”


그제야 용건이 있다는 걸 기억해낸 리아는 라프리트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녀는 리아가 아닌 루비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건 괜찮지만―― 루비아 님은 즐거워 보이십니다?”

“들켰나요. 저라는 사람이 말이죠.”


별로 숨길 생각도 없었으면서 뻔뻔하게 대꾸하는 모습에 라프리트도 숨김없이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렇지만 루비아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저에게 있어선 나쁜 이야기는 아니죠. 정치 싸움에 말려든 리아가 이 나라에 질색한다면 제 손에 들어올 확률만 높아지니까요.”

“일부러 리아 양이 상처 입게 둔다고요······?”


라프리트에게서 살짝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걸 느끼면서도 루비아는 오히려 더욱 미소를 짙게 할 뿐이었다. 옆에 있는 레딧츠에게도 움직이지 말라고 손짓할 정도로 여유만 넘쳤다.



“그럴 의도 따윈 없어도 리아가 제 발로 뛰어든 거지요. 직접 경험하는 것도 좋은 배움이 된답니다, 라프리트 양? 정치에 아예 무감각한 리아라면 더욱이요.”

“······.”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는지 라프리트의 일렁이는 마력이 진정되어갔다.



“그래도 여차 일이 커지면 끼어들려는 마음은 있어요. 저의 것이 될 리아가 인간 불신에 빠지거나 하면 곤란하니까요.”

“실례지만 전 루비아 씨의 것이 될 수 없어요! 이미 에르라는 멋진 남자의 거, 것―― 으아아······ 히히······!”

“············저래 보여도 리아는 바보가 아니에요. 어지간한 위협 정돈 알아서 헤쳐 나가겠죠. 과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당신도 그 정도는 아시지 않나요?”

“그런 건 루비아 님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알고 있단 말이에요······.”

“호오······”


작게 혼잣말하는 라프리트.


루비아는 그런 그녀를 가늘게 뜬 눈으로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곧 풀어지더니 부채를 펼치곤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무리 저라도 왕자를―― 비록 대련에 불과할지라도 때려눕힐 줄 몰랐지만요. 평등한 교육을 강조하는 베르다드라지만 정말 진귀한 걸 봤어요.”


왕자를 구르게 한다든가, 감히 왕자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는다든가 더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리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리기는 했는데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들리지 않는 척했다.


현실도피라는 거다. 그렇지만 머릿속은 점점 제삼자의 시점으로 레온하트와 대련한 장면을 그려 나갔다.


‘이긴 것까지는―― 어찌어찌 아슬아슬하게 세이프가 아닐까나.’


그리모르랑 호각으로 붙었는데 그보다 분명히 약한 레온하트에게 진다면 상당히 이상하게 보일 거 아닌가.


일부러 봐주는 게 뻔히 보일 거고, 레온하트―― 그도 기껏 진지하게 요청한 대련에서 어물쩍 대강 부딪친다면 싫어할 게 틀림없었다.


그건 그렇지만 왕자의 다리를 걸어 구르게 만드는 건 좀······ 아웃일까?


‘일까가 아니야! 아웃이야!! 나, 난 도대체 무엇을?!’



“헉! 어쩐지 레온하트 전하 씨가 놀랐다고 해야 하나, 당혹스러워하신 건······”

“전하 씨가 뭐냐. 쨌거나, 레온하트도 처음 겪어 본 일이라 그랬겠지.”

“여, 역시나?! 응? 그런데······ 두 분 친하신가 봐요?”

“아니? 안면 정도만 튼 사이야. 아~ 이름을 막 불러서 그래? 여기 있지도 않은데 그 정돈 뭐 어때. 그 어정쩡한 녀석도 별말은 안 할걸?”


적어도 이딴 걸로 문제 삼지는 않겠지, 라며 말하는 루비아는 무척이나 당당했다.


‘프, 프리하시네······’


공주님이라는 우아한 가면을 완전히 내 벗은 소베르비아는 생각보다도 더 자유로운 영혼이었나 보다.


막연히 품던 공주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거 같았지만, 그녀와는 너무 잘 어울리는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리아······ 너 또 무슨 무례한 걸 생각한 모양인데?”

“또라뇨! 그저 내숭 안 떠는 루비아 씨의 모습이 더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헤에―― 나도 당당한 널 꽤나 좋게 보긴 하지만, 이 나의 면전에 대고 잘도 말해주네?”


‘무슨 말씀이시지?’


잠시 무슨 말인가를 생각해보던 리아의 얼굴은 점점 새파래져 갔다.



“아, 아니에요! 아니······ 본심이긴 한데, 그래도 나쁜 뜻은 아니고. 저기······ 그게요. 아! 그래요! 루비아 씨가 말씀하셨잖아요!!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확실히 말하라고요. 짜증 나니까 어물쩍거리는 건 그만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솔직하게 말한 겁니다.”


‘그래! 난 잘못하지 않았어. 루비아 씨의 말에 따른 거야!’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엣헴 하며, 리아는 팔짱을 끼곤 당당하게 말했다.



“네. 처음 복도에서 만나셨을 때 그러셨잖아요. 그런 자를 볼 때면은 마수의 먹이로 던져주고 싶은 충동이 드신다고.”

“리, 리아 양?? 무,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뭐긴요. 루비아 씨랑 처음 만났던······”

“야―― 리아. 나를 봐봐.”


차갑고 싸늘하게 식은―― 얼어붙을 것만 같은 음성이 리아의 말을 잘랐다.


신나게 변명하고 있던 리아도 흠칫하고는 말을 자른 그녀, 소베르비아를 쳐다봤다.


내숭을 벗어 던진 소베르비아는 빈말로라도 친근하거나 쉽사리 다가가기 편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평소에도 감정을 속이는 일은 하셨지만, 이처럼 계신 적은 없었어.’


차분히 감정이 가라앉힌 리아에게 소베르비아가 말했다.



“생각이랄까, 이성······? 뭐가 됐든 리아, 너 머릿속을 이리저리 전환하지? 잠시 원래대로 돌아와 봐.”


굉장한 눈썰미였다. 정확히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루비아는 어렴풋하게 시뮬레이션하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놀랍고 굉장했지만, 질문은 나중이다.


리아는 그녀의 말대로 시뮬레이션을 모두 멈췄다.


그것도 알아볼 수 있는지 소베르비아는 머리를 맑게 하자 바로 말을 걸었다.



“내가 질문할 테니 넌 대답하기만 해. 알았어?”


끄덕.



“너랑 내가 처음 만난 데는 어디야?”

“입학식장이요.”

“그래, 거기야. 난 너랑 학원 내 복도에서 처음 만나지 않았어.”


그런데 넌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거야?


묻지도 않은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정말, 나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혼란한 리아를 내버려 두고 루비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우물대면서 이도 저도 아닌 짓거릴 하는 놈들을 싫어하는 건 맞아. 그딴 놈들은 이루어내는 것도 없이 식량만 축낸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러니 마수나 마물의 먹이로 던져주면 적어도 밥이라는 최소한의 역할은 해낼 수 있잖아. 공국은 길들이는 몬스터가 많으니 나라를 위해서도 좋고. ――하지만 난 이런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그렇잖아, 공주가 이런 말을 하면 품위를 떨어뜨릴뿐더러, 애초에 그딴 짓을 내가 할 거 같아?”

“아뇨······”

“그게 아니더라도 마수에게 먹이로 준다니. 공주가 아니더라도 쉽게 할 말은 아니잖아. 거기에 멍청해 보이기는 해도 너는 내 그 기준에 들어가지도 않아. 그랬으면 내 걸로 한다느니 그딴 말은 하지도 않았어.”


여기서 한번 말을 멈춘 루비아는 지긋이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넌 어째서, 정말 있었던 일로 생각했던 거야? 착각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어. 너는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거 같았어.”


루비아는 정확했다.


정말 있었던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나 스스로는.


지금은 의아할 뿐이지만, 저 말을 할 때는 의구심조차 안 생길 정도로―― 추억을 말한 기분이었었다.


그렇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리아는 빠져들었다.


그런 리아를 빤히 바라보던 루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됐어~ 본인도 모를 일을 알아내려 해봐야 헛수고지.”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온 루비아는 가벼운 말투로 말하고는 차를 마셨다.


그런데 쓴맛 때문인지, 아니면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로 있는 자신 때문인지 루비아는 인상을 썼다.



“리아,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너 기억력 좋다며. 전혀 믿기진 않지만, 자면서도 수업을 들으니까 나름대로 좋겠지. 그런 얘가 안 떠오른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어. 저절로 생각나거나 떠올리길 바랄 수밖에. 아, 그때가 되면 알려줘 궁금하니까.”

“네······”


위로의 말에도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반응에 한숨을 쉰 루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다가와 허리를 숙여 살며시 리아의 얼굴을 감싸고는 본인을 바라보게 했다.



“리아, 살다 보면 세상엔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나. 이 정돈 그런 것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나중엔 이런 일이 있었나 하고 기억도 안 날걸. 그런데 겨우 이딴 일로 주춤거린다고? 리아, 넌 내 거야. 이 내가 인정한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믿어. 하지만 만약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다면 난 절대 용서하지 않아.”


루비아의 눈을 봤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눈은 여전히 맑고 투명했으며 ――아름다웠다.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야 할지······ 어떤 수식어를 붙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강인하면서도 빛나 보였다.


‘아아―― 정말 멋진 사람이네. 동경할 거 같아.’


이 사람이라면 정말 어지간한 일들은 웃어넘길 거다.


리아는 자신을 위해 마음을 써준 루비아에게 감사를 전하려 입을 열었다. 다만 그 입가엔 어딘가 루비아를 닮은―― 살짝 틀어진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전 루비아 씨의 것이 아닌데요? 절 가진 사람은 이미 있거든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 나한테 뺏길지도 모르고. 아니, 반드시 뺏을 거야.”

“저와 에르는 알콩달콩해요. 절대 쉽지 않을 거라구요.”

“걱정하지 마. 난 만만치 않은 여자니까.”

“네. 알고 있어요.”

“이 나에게 건방지게도 구는데.”


말하는 것과 달리 조금 눈살을 찡그린 루비아의 입가엔 마찬가지로 틀어진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고마워요, 루비아 씨.”

“뭘. 귀찮지만 이 정돈 주인이 돌봐줘야지.”

“그렇다면 에르가――”


말을 멈춘 리아는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런 것 치시곤 서투신데요? 보통은 이렇게 강압적으로 달래지 않아요. 어제 저처럼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게 일반적이라고요. 레딧츠 씨를 상대로 연습하셔야겠어요.”

“아, 아니······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그런······”


갑작스레 언급된 레딧츠는 당황했다.


여느 때의 그라면 주인이 대화하는 자리에 절대 함부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루비아와 가까운 사이인 그를 고의로 끌어들인 거다.


당연히 레딧츠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럴 생각으로 한 거고.


그렇기에 당황하여 끼어들었고, 리아는 의도한 대로 흘러간 것에 만족스러워하며 루비아에게 말했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다음엔 더욱 다정해지신 루비아 씨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 기대되네요.”


빠직――


‘오호라. 이게 이성이 끊어질 때 나는 소리인가?’


물론 진짜로 들리진 않았다. 분위기상이다.



“리아는 말이야~ 원래 상태로 돌아오면 성격이 제법 괜찮아지는구나? 나쁘지 않아, 마음에 들어.”

“헤헷. 뭘 이 정도로요. 루비아 씨 만큽 읏······!”


리아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하고 뭉그러졌다.



“룹, 룹이아 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걸. 혹시 날 웃기려고 하는 거야? 이렇게 잔뜩 찌그러진 재밌는 얼굴로? 어머나, 고마워라.”


‘아뇨, 그런 기특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말로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


소베르비아가 마구 얼굴을 뭉개고 있어서······


기껏 나오는 거라고는 전혀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몸부림에 가까운 소리뿐이었다.



“어제부터 느꼈지만 말랑하고 보들보들한 게 생각보다 재밌는데?”


반죽하듯 주물럭대던 루비아는 이윽고 볼을 잡고 쭉쭉 늘렸다.



“와~ 잘도 늘어나네. 기왕 한 김에 어디까지 늘어나나 시험해볼까?”

“그기끄지가 긋이에여.”

“아직도 뭐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끝인지 아닌진 해봐야지 알지. 안 그래?”


잘만 알아듣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보다 내 볼이 위험해······. 정말로 찢어지거나 하진 않겠지만······ 아퍼!! 어, 어떻게 하면······’


보통이라면 손이 닳도록 사과하면 벗어날 수 있겠지만 이번 상대는 루비아―― 그 소베르비아다.


싹싹 비는 정도는 전혀 안 통할 거다.


장담할 수 있었다. 현재의 그녀는 안 좋은 의미로 보통이 아니다. 그러니 빠르게 주위에 도움을 줄만한 무언가를 찾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주, 주위? 그래! 그거야!’


리아는 신속하게 곁눈질로 주위를 둘러봤다.


시선은 어느새 다가와 말리는 라프리트를 지나 연무장으로 향하고―― 발견했다.


이 상황에서 구출해줄 ‘사람들’을.



“즘시먼여!”

“응? 뭐야, 마지막 말을 남기려고? 어떡할까나. 그렇게나 건방을 떨었으니 이대로 끝내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데······ 뭐, 좋아. 난 너.그.러.운 사람이니. 유언 정돈 들어주도록 할게.”


‘유언이 아니에요!’


하지만 정말 시급을 다퉜다. 잠시만 머뭇거리면 루비아는 그대로 땅겨버릴 것이다.


리아는 빠르게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듸, 듸에여.”

“뒤에? 겨우 남긴다는 말이 그거야?”

“으녀여. 듸루 브떼여.”

“뒤를 보라고?”

“으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루비아는 절실한 리아의 모습이 의아했던지 뒤를 돌아봤다.


‘해, 해냈어! 어머니! 제 볼은 멀쩡할 거 같아요!!’


리아는 자신을 구원해줄 사람들―― 연무장에 있는 학생과 선생들을 든든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루비아라면······ 내숭을 몇 겹이나 두르고 철저하게 본 모습을 감췄었던 루비아라면! 반드시 저들이 신경 쓰일 거다.


이제 와서 본성이 들통날 순 없는 것이다.


특히 공국에서 온 사람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저 안에 있을 거다.


아무리 소베르비아라 할지라도 아이돌처럼 열성적으로 따르는 그들을 실망······ 시킨다기보다는, 공주라는 프라이드가 자국민의 입방아에 오르는 걸 꺼릴 것이다.


“들었어? 글쎄 소베르비아님이 말이야.”라면서 쑥덕거리는 자국민들이라니.


분명 쉬이 좌시하기 어려울 거다.


리아 스스로도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완벽하고 치밀한 계산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스르르 당기고 있던 루비아의 힘이 약해져 갔다.


‘됐어!’


볼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느끼며 리아는 환희했다.


하지만 그 순간, 돌아오던 볼이 멈췄다.


‘어라?’



“루뷔아 씨?”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게 된 리아의 말에 루비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우아한 미소로 웃고 있었다.


근데······ 그것이 불길했다.


저 미소는 내숭이다. 남들과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 아는 라프리트와 자신에게 보일 건 아니었다.



“리아, 네가 말했지? 친구끼리는 포옹으로 화해한다고.”


어제 한 말인데 벌써 잊을 리가 없다. 직접 실천하기도 했고.


‘포옹으로 끝내시자는 건가?’


그런 마무리라면 환영이다. 또 저 부드러운 뺨에 얼굴을 비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바라마지 않는다.


은근히 뻔뻔스러운 리아는 기대에 가득 찼으나······ 곧 굳어졌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거니 따끔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착하디착한 리아라면 용서해주겠지?”

“쟈, 쟘시만여! 사과드륄게영!!”


루비아에게서 움직이는 마력을 본 리아는 다가올 미래를 직감해 소리쳤다. 그렇지만 얄궂게도 시뮬레이션을 멈춘 덕에 더욱 선명히 그녀의 움직임을 예측할 뿐이었다.


이미 늦은 것이다.


그녀도 말하지 않았나. 처음 해본다고.


한다는 건 정해진 상태였고, 포옹을 처음으로 하는 건 아니다. 그건 어제 해봤다.


결국 남은 건 하나다.



“역시나 알아차렸어? 됐어,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시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뒷모습만 보이는 데다 빠르게 끝날 거야. 절대 모를걸?”


씩 웃은 루비아는 뭔가 말을 꺼내기 전에 행동을 개시했다.


선언한 대로 순식간이었다.


루비아는 꽈악 안아줬고, 리아도 그 품에 파묻혔다.


실외에서의 포옹은 귀족이, 그중에서도 가장 위인 왕족이 대중들의 앞에서 할 짓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기는 나름 평등을 주장하는 베르다드다. 실제로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나올 수 있는 계책이다.


소베르비아는 신분 귀천에 상관없이 친구와 우의를 다진다는―― 훌륭한 공주님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평소의 행적도 그렇고,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얼떨결에 목격한 사람들이나, 자국의 공주를 안 보는 척 힐끗 엿보던 사람들 모두 이 연출 된 장면을 보고 감동 어린 눈을 떼지 못했다.


이야기 속에서나, 상상에서나 그리던 자상하고 넓은 마음씨의 공주를 그대로 목격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만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는 리아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다면 환상은 깨질 거다.


실상은 루비아가 홍조를 띤 듯 볼이 뻘건 리아를 품에 안아 비명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꽉 안았으면 가슴에 완전히 파묻혀 리아의 머리는 절반만 보였다. 그리고······ 잘 귀 기울여보면 “너무우우해! 아퍼어어어!” 하는 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그런 리아의 비명은 한동안 이어졌다.


작가의말

잠이 안 와서 한 화마저 끝냈습니다!


이젠 진짜 자러 갑니다!


여러분들도 좋은 꿈꾸시길 바라며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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