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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연재수 :
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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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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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조우(1)

DUMMY

1.

밤이 도래했다.

잠들기는 아직 이른 시각.

하지만 태양은 이미 오래 전에 저물어 하늘을 아득한 군청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 시간에 밖을 당당하게 활보하는 것은 막 밤 산보를 시작한 고양이 정도···.

그것도 아니면 변방의 규율을 지키지 않는 질 나쁜 인간들뿐이었다.

흐린 구름이 달을 가리자 지상은 순식간에 그림자로 뒤덮였다.

그리고 짙은 어둠 속에서 마을의 방탕아 닉슨과 두 명의 졸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험악한 얼굴.

하나같이 날카로운 눈빛···.

마치 사냥감을 찾아 밤을 해매는 짐승 같은 행색이었다.

스무살의 청년 닉슨 베델롯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불량한 사내였다.

마을 내에서 안 좋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던 그는 질이 나쁜 측근들인 피터, 알베르 등과 어울려 마을을 누비며 온갖 소동을 일으키고 다녔다.

본래 오만한 성격이던 닉슨은, 딱히 배운 지식도 없으면서 자신의 관심사 이외의 것들을 경멸했다.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음란한 의도가 담겨있어.

그가 던지는 언사는 모두 저급한 추파.

길거리에서 누군가와 시선이라도 마주친다면, 어김없이 패싸움이 오갔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항상 마을에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던 무리였다.

···그리고 오늘의 닉슨 패거리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방앗간에서 훔친 곡주로 낮부터 술판을 벌였다.

밤이 될 때까지 잔뜩 퍼마신 모양이야.

세 사람은 모두 얼굴이 상기된 상태였다.

술에 취한 세 망나니가 밤길을 나돌아 다니는 이유야 뻔했다.

단지 시비를 걸 행인을 찾기 위해서였기에.

얼마나 껄렁거리는 걸음을 옮겼을까?

이들은 곧 인적이 뜸한 골목 어귀에서 먹잇감을 찾아냈다.

누군가가 구석진 그림자 속에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봐, 이 늦은 밤에 왜 바깥에 나와 있지?”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닉슨이 음흉한 웃음과 함께 오늘의 희생자에게 말을 건넸다.

굵고 기분 나쁜 목소리.

끈적거리는 어투였다.

그것은 필히 그늘 속에 숨은 이의 가느다란 실루엣을 보고 그 정체가 여자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으리라.


“아가씨, 여기서 이러면 아주 위험해.”

“그래, 위험하고말고.”

“바로 우리 같은 놈들이 얼쩡거리고 있으니까.”

“킥킥킥···.”


불량배들은 취기에 비틀거리면서도 자신들의 저급한 악의를 숨기지 않았다.

닉슨과 그 친구들이 가진 목적은 오직 상대가 자신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늘 속에 숨은 가녀린 그림자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어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조용한 읊조림이 어둑한 골목에 울려 퍼졌다.

곱고도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너무나 맑은 음성이었다.

닉슨과 친구들은 순간 그 목소리가 요정이 속삭이는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어? 뭐, 뭐?”


닉슨과 그 친구들은 크게 당황했다.

좁아터진 마을이야.

토박이였던 만큼, 그들은 상대의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닉슨 패거리는 상대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늘에 너머의 늘씬한 모습을 보고서 그들은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은 확실해.

그러나 그 청아한 음성은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아니, 너무도 생소해서 심지어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랬다.

정체를 모르는 타인이란, 언제나 무시무시한 것이기에.


“넌 누구지? 이 마을 사람이 아닌데?”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는 거냐?”


더욱이, 닉슨 패거리가 놀란 것은 단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보통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피하려 했으며 두려워해.

그 소문은 이웃마을까지 퍼져있다.

그러니 대게 여자들에게 이야기를 건넸을 때 들려오는 반응은 예외가 없다.

상관 하지 말라는 식의 경멸과 무시가 돌아오지.

절대로 호의적인 대답을 해줄리 없었다.


“···키득.”


그 순간.

월광을 가로막고 있던 구름의 장막이 걷어졌다.

달의 조명이 비춰지자 그늘 속에 숨어있던 이방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어둠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한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커다랗고 예쁜 눈, 오뚝한 코, 작고 아담한 입술은 둘째 치고···.

제비꽃이 스며든 비단과 같은 강렬한 느낌의 보라색 머리카락은 대체 무엇인가?

신비한 다홍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인다.

그에 반해서 월광에 비춰지는 소녀의 새하얀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어.

여기저기 찢어진 망토 사이사이로 보이는 피부도 눈에 띄게 빛난다.

화려한 자색과 해쓱한 살결.

대조되는 색체에서 기묘하면서도 병적인 아름다움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신묘의 미색이자, 자연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지고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래, 난 다른 곳에서 왔어. 그것도 아주 먼 곳에서.”


여전히 감미로운 목소리, 거기다 신비한 소녀의 외모에 닉슨과 친구들은 말문을 잃어버렸다.


“···자, 잠깐.”


닉슨은 한동안 정체불명의 소녀를 넋을 놓고 바라보다, 주변에 감도는 냉기에 애써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피터와 알베르의 얼굴을 바라봤다.

혹여 친구들에게 얕보였을까?

한순간이나마 소녀에게 위축된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인 것은 아닌가?

그따위 자존심부터 걱정 한 것이었다.


“야, 너희들!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없냐? 이렇게 끝내주는 여자가 이런 촌구석에 올 일이 있느냐고?”

“몰라. 낸들 알겠어?”

“타지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단 소린 못 들었어. 그것도 저렇게 예쁜 아가씨 소식은 더더욱 말이야. ···아, 혹시 이주일 전에 마을에 온 샌님의 가족 아니냐?”

“누구?

“그 사제 말이야. 멀대같은 놈.”


그들이 아는 한 최근 마을에 흘러들어온 사람은 그 이외에 없었다.


“···그런가? 하지만 난 그 얼빵이 사제 놈이 다른 사람이랑 같이 들어왔단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알게 뭐야, 수녀나 그런 거 비슷한 거겠지. 엉, 성녀님?”

“오, 수녀인거야? 이거 멋진데···.”


방탕아 삼인방은 다시금 소녀에게로 고개를 향했다.

역시나 눈앞의 소녀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상당한 미인.

그간 봐왔던 마을 처녀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미소녀였다.


“이봐, 아가씨. 방금 내가 잘못들은 건 아니겠지? 아까 말했잖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누굴 기다리고 있었단 거야?”


닉슨이 음흉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언제나나 같은 저급한 추파.

사실은 본인들도 그다지 기대하고 있진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어차피 자기네들을 상대해줄 리 없기에 못 먹을 감을 찔러나 보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난 너희 같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어.”


뜬금없는 대답에 닉슨의 얼굴에 당혹감이 나타났다.

도무지 소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닉슨은 다시금 소녀에게 되물었다.


“뭐, 뭐야? 우리를 기다렸다고?”

“응, 맞아. 너희를 기다렸어.”


무표정으로 답해오는 소녀의 모습에 닉슨은 무언가 말로는 표현 못할 거리직함을 느꼈다.


“대장. 저 계집애,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그러게. 영문도 모를 말을 지껄이는 것도 그렇고 어딘지 좀 모자라 보이지 않아?”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머리가 좀 맛이 간 모양이네.”

“그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우리한텐 오히려 잘 된 일이지. 안 그래?”



닉슨은 꾸며낸 미소를 지으며 소녀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좋아, 아가씨. 오늘밤은 이 오라버니께서 진득하게 놀아주지.”


닉슨은 소녀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눈짓으로 자신의 방탕한 동료들에게 사인을 보냈다.

하룻밤을 보낼 모두의 장난감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소녀의 정신이 올바른지의 여부는 그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세 명의 불량배는 소녀에게 시커먼 욕정을 품고 있었다.


“자, 우리랑 같이 가실까?"



닉슨이 억지로 끌어당기자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여기가 좋아.”


바깥에서 해.

소녀의 발언은 다시금 닉슨 패거리를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도 야외에서 이런 일을 벌인 적이 없었다.

이런 그들도 최소한 세간의 상식이나 보편적인 도덕관념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닉슨은 곧 망설임을 버렸다.

어차피 머리가 모자란 아이의 헛소리.

그렇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해버리면 그만이다.

닉슨에겐 당장의 욕구를 푸는 것이 흐릿하고 애매모호한 자신의 윤리 따위를 지키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기에.


“야, 닉슨··· 너 정말 하려고?”


그들은 소녀의 파격적인 제안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금 자기들만의 은밀한 신호를 주고받았다.


“이제 와서 뭘 쪼는 거냐? 어차피 방해꾼도 없을 텐데.”



닉슨은 사람들이 해가 지면 밖으로 나돌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밤의 규율.

변방에서 어둠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시시한 미신 때문이었다.

변방에는 어떤 괴담이 있다.

태양이 자취를 감추고 나면 마가 깨어나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로 변한다는 괴담이 있었다.

오래도록 전해지는 민담에서도 사악한 존재들은 낮에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밤이 되면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나이 많은 어른들은 말했다.

전설 속 이야기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지혜로운 옛 조상들이 얼토당토 않는 전승을 남겼을 리 없다면서.

괴물은 있다.

심지어 몇몇은 실제로 요괴를 보았다고도 했다.

어쩌다 원인불명의 병으로 누가 죽기라도 하면, 언제나 부정이니 저주라느니 떠들어대며 후대에 흉흉한 금기가 덧붙여졌다.

그렇게 해서 요괴의 소문은 점점 포장되고 더욱 기괴해져갔다.


“그렇지. 이 마을 놈들은 전부 겁쟁이에 등신이니까 말이야.”



당연하게도, 닉슨과 그 친구들은 이 마을에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요괴를 본 적이 없었다.

매번 밤거리를 활보했는데도 그 어떤 두려운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

닉슨은 요괴란 것은 모두 애들을 겁주기 위해 지어낸 소리에 불과하며 어른이 돼서까지 그걸 믿는 인간들은 모두 다 멍청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밤을 누비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남자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닉슨과 친구들은 자신들의 일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 계집애, 아주 마음에 들어. 과감한 게 딱 내 취향이야, 큭큭.”


닉슨은 징그러운 얼굴부터 들이댔다.

소녀를 구석으로 몰아가며 몸 구석구석을 관찰했다.

가녀린 몸은 기껏해야 열여섯.

많아봐야 일곱 정도로 보였다.

늘씬한 팔과 다리가 닉슨의 욕구를 자극했다.

목에서 이어진 쇄골의 요염한 선과 새하얀 소녀의 피부가 닉슨을 초조하게 만들어.

닉슨은 앙증맞지만 예쁘게 부풀어 오른 소녀의 가슴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엇?”


그때였다.

소녀의 얼굴로 고개를 향하던 닉슨은 소녀의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붉은 색이 감도는 보랏빛 동공에 자신의 얼굴이 비추고 있었다.

섬뜩해.

그것은 추위가 아니었다.

봄을 불과 일주일 정도 앞 둔 시기의 밤공기를 감안해도, 이렇게 뒷덜미가 오싹해질 정도로 서늘할 순 없었다.

닉슨이 막 느낀 소름은 몸속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강렬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이질적인 무언가,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심연의 감정이었다.


“이, 이봐··· 얘들아?”


닉슨은 뒤를 돌아 자신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남겨진 두 사람은 긴장감 없이 시시덕거리며 다음 순번이 누군지 따위를 주제로 대화중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아니면 어색한 분위기 탓인가?

닉슨은 평소 자신이 벌이지 않는 행위를 한다는 데에 긴장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생각했다.

잠깐의 망설임을 끝으로 불안감을 지운 닉슨은 다시 소녀에게 달라붙어 곧장 소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키득."


닉슨은 들었다.

요사스런 웃음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조소를.

살며시 벌어진 입술, 그 모양은 아래를 향한 초승달처럼 휘어져있었다.


“···응?”


툭.

동시에 닉슨의 얼굴에 뭔가에 부딪혔다.

소녀의 자그마한 손바닥이 그의 뺨을 살짝 스쳤기에.


“야, 너 뭘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 약간의 앙탈이라 여기고 닉슨은 피식 웃어버렸다.

닉슨은 그대로 행위에 열중하려 했다.

하지만 곧 이변이 일어났다.

극심한 통증이 목 아래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으, 으! 이, 이게 뭐야!?”


닉슨이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대장? 거길 차이기라도 했냐?”

“아하하핫! 장말이냐?”


커다란 덩치의 닉슨이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자, 두 친구는 수준 낮은 농담을 하며 닉슨을 조롱했다.


“흑, 끄윽! 제, 젠장! 비비비비, 빌어먹을!”

“어··· 니, 닉슨?”


그러나 그들은 곧 그것이 웃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닉슨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니, 닉슨···. 너 괜찮냐?”


닉슨은 거의 안면 가죽이 도려나간 채였다.

그의 상판은 입술부터 왼쪽 뺨부터 찢어져 잇몸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흉하게 망가져 있었다.

격렬한 아픔이 닉슨의 사고를 지배했다.

앞으로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닉슨은 뒤늦게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소녀를 노려봤다.


“이, 이 망할 년이···!”


닉슨은 엉성한 발음으로 추악한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소녀의 목을 왼손으로 움켜쥐고서 그 커다한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닉슨의 체구는 동년배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었으며 주먹도 마을을 통틀어 꽤 매운 편에 속했다.

성인남자의 손찌검은 소녀의 작은 몸이 견뎌내기엔 너무도 가혹해보였다.

하지만 닉슨의 주먹은 끝내 소녀에게 닿지 못했다.



“킥.”


우드득,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순식간에 뒤틀어졌다.

역 방향으로 꺾인다.

닉슨의 팔이 부러졌어.

소녀의 목을 잡고 있던 왼손이 살점 째로 찢겨져 뒤틀려버린 것이다.

닉슨의 손목은 거죽에 겨우 대롱대롱 매달려 언제든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것은 한눈에 봐도 치료를 한다고 회복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으··· 우아아아! 으아아아아아!”


피부를 뚫고서 뼈가 드러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고통이 온전히 닉슨의 머리로 전달됐다.

이윽고 닉슨은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비명을 질렀다.

반면, 소녀는 여전히 다소곳이 미소를 지은 채였다.


“···정말 잘됐지 뭐야.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줄은 몰랐는데.”


소녀는 산들바람과 같이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빛에 비춰진 머리카락은 주위를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듯했다.


“이 미친년이!”

“닉슨에게 무슨 짓을 했냐!”


불량배들은 소녀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소녀가 자신의 친구에게 무언가 해코지를 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선악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이들은 그저 의리라는 자신들만의 정의를 앞세우고서 소녀에게 동료가 다친 것을 응징하려할 뿐이었다.


“우후후후, 하나, 둘, 셋··· 킥, 키키킥···.”

“아까부터 중얼중얼! 대체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아무리 나라도 전부 다는 못 먹겠는 걸?”

“뭐?”

“상대하지 마, 등신아! 이 망할 년, 죽여 버리겠어!”


닉슨의 동료 중 하나인 알베르는 항상 주머니 속에 한 뼘 정도 크기의 나이프를 가지고 다녔다.

사람을 찌를 용기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남에게 얕보이길 싫어하는 고약한 성미가 어긋난 방향으로 튀어나간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저급한 본성이 가려지는 것은 아닌지 칼을 쥔 알베르의 손이 떨렸다.

손아귀의 작은 흉기를 바들거리며 그는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갔다.


“있지, 여기까지 오는 건 꽤 성가셨어. 마차의 흔적이 중간부턴 지워져서 산에서 길을 잃었지 뭐야. 걷고 걸어도 숲, 어딜 가던지 온통 나무밖에 없어서 고생했지. 산을 두 개나 넘긴 다음에서야 겨우 여길 찾아낼 수 있었어.”


소녀가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아무것도 들려져있아.

작은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남자들은 소녀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알베르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어, 어어? 뭐야? 너 뭐 한 거야?”


알베르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한 순간 소녀의 손짓에 놀랐지만 그만 그 행위를 모자란 여자의 기행이라고 치부한 모양이었다.


“···봤어, 대장? 이깟 거 아무것도 아니잖···.”


알베르는 헤실 거리는 얼굴로 동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분명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생각한 패거리들의 얼굴은 창백했다.


“아, 알베르. 너, 너너너너··· 모, 목···.”



알베르의 몸은 그대로 소녀 쪽을 향하고 있었다.

회전한 것은 머리 뿐 이었다.


“어? 왜 내 등이 여기 있···.”


알베르가 입을 열자 머리와 목의 접합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알베르의 몸통이 아래로 무너지더니 무릎을 꿇은 자세로 우스꽝스럽게 주저앉았다.

이어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슛.

높은 압력에 의해서 무언가가 하늘로 솟구쳤다.

알베르의 목이 있던 자리에서 새빨간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만월이, 하늘이 붉게 물들어간다.

선혈의 악몽···.

사악한 밤의 원념이 마을을 집어삼킨다.

그 아래 잔혹한 귀기가 흩뿌려진다.


“으, 으으으···!”


검붉은 액체가 자신의 얼굴에 튀자 닉슨과 친구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목덜미에 흐르는 식은땀과 딱딱 소리를 내며 맞물리며 떨리는 이빨만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 그것도 생전 처음 겪는 극도의 공포였다.



“뭐, 수컷 고기는 끌리지 않지만. 지금은 배가 고프니까 어쩔 수 없지.”


온통 핏빛으로 변해버린 골목의 끝에서 소녀가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소녀의 몸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어오는 것은?


“···큭큭, 그래. 동감이다. 이번엔 괜히 장난질 하지 말고 먹으라고.”

“후후후, 우리 먹이에 관해서만큼은 의견이 잘 맞지 않아?”

“체, 항상 이랬다면 좋을 텐데.”

“소화는 부탁해, 언니.”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두 개의 목소리가 한 몸에서 울리는 것을 듣자 닉슨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기괴한 악몽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면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손목과 입에 머무는 아픔은 진짜였다.

물론 알베르의 목이 떨어진 것도 명실상부한 현실···.

두 남자는 그 무엇 하나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딱 한 가지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눈앞의 소녀가 위험하다는 사실이었다.


“다, 다가오지 마! 오지 말라고!”


소녀가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자 닉슨의 친구 피터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졌다.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이 소녀에게 앙갚음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부상당한 친구를 내동댕이치고 전력을 다해 도망쳐야 할 것인가?


“···미, 미안해, 닉슨!”

“피터? 야, 임마! 피터!”


피터는 후자를 택했다.

닉슨을 버리고 골목에서 나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이 친구마저 배신해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우정은 기껏해야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


“어딜···.”


남자가 움직인 동시에 소녀의 오른팔이 다시금 허공을 갈랐다.

닉슨의 친구는 몸통과 함께 팔목까지 일직선으로 몸이 갈라졌다.

상체를 잃은 하반신만이 필사적으로 소녀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비참한 말로였다.


“이, 이익···!”


땅바닥에 처박힌 닉슨은 그나마 멀쩡한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필사적으로 일어나려했다.

하지만 힘이 풀린 다리는 제자리에 머물러 땅을 해엄 칠뿐이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너, 너너너는 대체 뭐야? 뭐냐고!”


부서진 아래턱에서 흘러나오는 닉슨의 뭉개진 발음이 우스운 나머지.

소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닉슨을 내려다보았다.


“어머, 아직도 모르겠니? 넌 어지간히도 머리가 나쁜 모양이구나? 정 모르겠다면 알려줄게. 나는···.”


어라?

닉슨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소녀가 갑자기 손을 휘둘렀다.

가까스로 일어나는데 성공한 닉슨이 도망치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닉슨의 도주는 거기서 막을 내려야만했다.


“흐, 으흐아아악······!”

“···그러면 못써. 난 예의가 없는 남자가 가장 싫거든.”


닉슨의 다리가 사라졌다.

닉슨은 얼굴부터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두 발로 걷는 것에 익숙한 닉슨은 그것을 잃음으로써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너무하잖아? 대화 도중에 그러는 게 어디 있어?”


그리곤 쓰러진 닉슨의 바로 앞까지 소녀가 다가왔다.


“사, 살려···.”


닉슨은 극도의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공포가 아픔조차도 집어삼켰다.

그간 마을을 뒤집어놓던 불량아는 지금 작은 소녀의 앞에 머리를 처박곤 성치도 않은 손으로 필사적으로 빌었다.


“으··· 내, 내가 잘못 했어. 살려··· 살려줘. 이렇게 빌게요. 다, 다신 밤에 돌아다니지 않겠어··· 아무에게도 잘못하지도 않을게요! 제발··· 제발, 살려달라고!”


하지만 소녀는 그런 닉슨에게 조소로 답했다.


“너 사실은 알고 있었지?”

“으, 으아아아!”

“너희는 우릴 이렇게 부르잖아? 요괴··· 랑페르L’enfer에서 흘러온 자들 이라고 말이야.”


닉슨은 보았다.

소녀의 뺨이 갈라지는 것을.

거기서 또 하나의 입이 나왔어.

그 사이로 틈이··· 온통 송곳니투성이라는 것도 확실히 목격했다.


“···큭큭큭, 또 그거냐? 너 꽤나 그 명칭이 맘에 든 모양이로군.”

“응, 좋다고 생각해. 나쁘지 않아. 이 울림··· 인간들을 새파랗게 질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어. 저길 봐. 이 녀석의 얼굴도 그렇지?”

“흑, 흐윽··· 으우우우!”

“저 바보 같은 꼴 좀 봐··· 벌벌 떨고 있는 게 참을 수 없어. 후후후, 불쌍하니까 너만은 봐주도록 할까? 아까도 말했지만, 아무리 우리라도 덩치 큰 수컷 세 마리를 다 먹진 못하니까.”

“뭐? 너 진심이냐?”

“고, 고마워! 정말 고마···.”


오른손을 내리치는 순간, 닉슨을 내려다보던 소녀의 눈동자가 타원으로 휘어졌다.

달빛에 일그러진 보랏빛 광기···.

이윽고 사악한 요괴가 입을 열었다.


“뭐, 거짓말이지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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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99 다오랑
    작성일
    21.05.12 15:11
    No. 1

    눈동자가 타원형으로 휘어지면 우찌되능교? 아이구 무서버라. 선작 추천 찍고 갑니다 작가님 화이팅^^

    찬성: 0 | 반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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