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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연재수 :
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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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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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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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축제(5)

DUMMY

10.

큰 도시에 비해 구경거리가 적은 마을축제이기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새로운 연기자의 등장에 아이들뿐이던 광장 모퉁이에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관객이 늘어나자 겁쟁이 소년역인 한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안 그래도 어린 아이들 앞에서 어색하게 연기하는 것만 해도 부끄러워 죽을 노릇인데···.

이번에는 매일 보는 어른들을 상대로 재주를 부려야 하다니?


“우린 연주를 구경하러 온 것뿐인데 이게 뭐람···.”

“에잇, 사소한덴 신경 쓰지 마! 연기자가 부족한 걸 어쩌겠어. 떠돌이 예인 좀 살려준다 치고 도와달라고. 예쁜 아가씨.”

“예, 예쁜 아가씨라고요? 헤에···.”


유고의 독단에 불만을 터뜨리는 레렌.

하지만 치장한 자신의 모습을 뽐내는 것이 내심 싫진 않았는지.


“흥, 축제니까 봐드리는 거예요. 다른 때 같았으면 어림도 없어.”

“핫하! 거 고맙구만. 그럼 제 2막, 시작해보실까!”


우렁찬 목소리에 이어서 리라의 선율이 울렸다.

묘하게 신나는 리듬이었다.


“···겁쟁이 소년은 오랜만에 휴가를 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네. 양부모는 별로 반기질 않았지만 어쨌든 소년이 돈을 많이 벌어서 기뻐했어. 키워준 만큼 은혜를 보이라 뻔뻔하게 닦달했지. 그래도 소년은 웃으면서 기꺼이 금화를 냈어. 정말로 소년은 양부모에게 감사하고 있었거든!”


오, 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한스에게 향했다. 기특하다는 눈빛이었다.

관객들은 겁쟁이 소년이라는 한스의 배역에 감정을 이입한 모양이었다.


“소년은 시장터로 나갔지. 이유? 음, 별로 없었어. 고향에 돌아와서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이유는 필요 없지. 사실은 이야기의 요정이 인도한 게 아니었을까? 어쨌든 겁쟁이 소년은 마을을 둘러봤지. 그리고 거기서!”


짝.

유고는 일순간 연주를 멈추고 자신의 큰 손으로 박수를 쳤다.


“어찌된 것일까! 무슨 일일까! 신기한 일이지, 거기서 소년은 있을 리 없는 것을 보았다!”


다시금 시작되는 경쾌한 연주.

유고의 시선이 어느 한 소녀에게 집중되었다.


“공작가의 딸이 소년의 고향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어린 관중들이 기쁘게 일어섰다.

나이 많은 관객도 감탄했다.

유고의 자연스러운 진행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아리따운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바로 키리아였다.


“···아?”


테이블 위의 말린 고기를 바라보고 있던 키리아는 갑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수많은 시선에 화들짝 놀랐다.


“여러분에게 소개하지. 명예로운 귀족 영애, 공작가의 따님인 소녀가 등장했다네!”


유고의 선언에 사람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어머, 진짜 귀족이라고 해도 믿겠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 예쁜 얼굴하며···.”


아이들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들이 연신 감탄했다.


“이야, 어린애들 보라고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이거 꽤···.”

“성당에 산다는 아가씨 이야기를 소문으로만 듣긴 했지만 이렇게나 아름다울 줄이야!”


연주에 이끌려온 아저씨들도 좋은 술안주거리가 생겼다고 히죽 거렸다.


“내 안목이 나쁘지 않지?”


키리아에게 살짝 윙크를 보내는 유고.

그러나 정작 공작가의 딸 역할을 맡은 여배우는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저기, 저기, 악사 아저씨! 나, 나나는요?”


키리아의 배역이 정해지자 레렌도 기대에 차 물었다. 유고는 짓궂게 웃더니.


“어, 거기 아가씨는 공작가의 딸을 돌보아주는 시녀···.”

“네에? 왜 나는 시녀에요?!”

“···가 아니고 공녀의 언니인거지! 너무 열 내지 말라고. 예쁜 얼굴이 흉해지면 곤란하잖아.”

“그렇게 얼렁뚱땅 넘기려 해도 이미 늦었거든요?”

“하하하, 여러분께 다시 소개드려야겠는 걸!”


유고가 현을 튕기며 익살스런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것도 연극의 일부처럼 재미있게 흘러가,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보시라, 이제 두 송이의 꽃이 시장에 마실을 나왔다네.”

“키야, 악사님 말 한번 잘 하는구만! 그렇지, 레렌은 우리 마을에서 손꼽히는 미인이지!”

“옳소!”

“멋지다, 레렌 누나!”

“어, 어음···.”


이만큼이나 호응을 얻는데 차마 화를 낼 순 없었는지 레렌은 불만은 겨우 털어냈다.

두 아가씨의 배역이 확정되자 유고는 더욱 신나게 리라를 연주했다.


“아아, 공작가의 따님들은 꿈이 많았지. 백마를 탄 기사님, 황야를 여행하는 음유시인··· 세상의 모험이나 그런 멋진 것들을 동경했지. 영지 안에서의 생활은 너무 지루해서 꿈 많은 소녀에겐 맞지 않았다네. 그래서 두 공녀는 어느 날 꾀를 냈어! 가장 친한 시녀에게 돈을 주고 반나절 동안만 외출을 하러 나온 거지. 서민들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누려보고 싶어서 말이야!”


키리아는 유고가 자신을 가리키며 이야기하는 것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멍하니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낼 뿐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 모든 것을 해탈한 무표정이 세상만사 지루한 공작가의 딸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어.

묘하게 어울렸다.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유고가 번뜩이는 재치로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공작의 딸들은 보통 여인네들의 초라한 옷을 입혀 변장했다네. 그리곤 시장터를 누비었지.”


유고의 말에 따라 레렌은 흰색 천을 키리아에게 걸쳤다.

한스가 주변에서 식탁보를 빌려온 것이었다.

화려한 드레스가 가려진 것이 실망했는지 관객들이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리아도 옷가지가 거추장스러워 기분이 나빴다.


“공작가 아가씨도 천민들 옷을 입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야!”


왓하.

유고의 경박스러운 웃음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키리아의 분위기가 얽혀들어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 떠돌이 악사는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웃음의 마법이나 다름없는 유고의 익살에 어느새 연극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따라 웃고 있었다.


“상인들이며 행인들이며 아무도 공작가 아가씨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네. 설마하니 그 높은 귀족 아가씨가 넝마를 걸치고 나타났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 단 한 사람, 공작가의 딸에게 완전히 반해있는 한 소년만 제외하고!”

“우, 우앗?!”


유고가 한스의 등을 툭 떠밀었다.

소년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넘어질 뻔했지만 어찌해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설 수 있었다.


“유고 형,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소년의 앞에는 꿈에 그리던 그 아가씨가 서 있었다네?”

“앗···.”


유고의 말 그대로 한스의 눈앞에는 키리아가 있었다.

소녀의 얼굴과 불과 한 뼘 거리.

한스는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한스는 소녀의 예쁜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미, 미안해!”


무턱대고 사과하는 한스의 안 좋은 버릇이 나왔다.

반면 키리아는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로 주춤하는 한스를 바라볼 뿐.

소녀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어, 덕분에 상황이 묘하게 우스워졌다.


그야말로 주역인 겁쟁이 소년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닌가?

또다시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여기 만났습니다! 소년은 엄청나게 놀랐지. 설마하니 여기에 사모하는 여인이 나타날 줄이야! 하지만 당연히!”


유고는 잠시 연주를 멈추더니 큰 목소리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곤 까불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높디높은 공작가 따님이 천민 사내 하나를 어떻게 기억하겠어?”


유고는 가볍게 뱉어낸 말이었지만 한스를 바라보는 관객의 분위기는 조금 씁쓸해졌다.

동정표를 유도하는 연출의 일환이었다.


“지저분한 꼬맹이가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야?”


어느새 또 배역에 몰입했는지 레렌이 뭉그적거리는 한스에게 날카롭게 말을 건넸다.


“아무 할 말 없으면 저리 가줬으면 좋겠어. 길을 가는데 방해되잖아?”

“레, 레렌···.”

“흥, 이 꼬마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우린 그런 사람 몰라!”


그리고는 키리아의 등을 떠밀며 한스를 지나쳤다.

유고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훌륭한 배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녀의 언니는 성격이 불같은 아가씨였네!”

“누가 성격이 불같다고요?!”

“와하하하하!”


또 다시 관객이 웃었다.

악사와 소녀의 농이 사뭇 심각해지기 쉬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조율한 것이었다.


“공작의 딸은 소년을 못 알아봤다네. 아주 차갑게 지나쳐버렸지. 아아, 슬프다. 이건 너무 슬픈 비극이지. 여기서 소녀와 소년은 헤어져서 평생 만날 일이 없었어··· 라고 하면 이야기가 재미없잖아. 안 그래?”


순간 얼토당토않은 결말에 놀란 관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는 이제부터 재미있어 진다네! 아아, 소년과 엇갈려서 길을 걸어가던 공작가의 아가씨는 예상치 못한 위기에 처하게 됐어. 아니, 설마 불량배랑 마주칠 거라곤 꿈에도 몰랐지! 그것도 하필이면 겁쟁이 소년이 제일 무서워하는 그 녀석이, 불량배 안톤! 누가 안톤이지? 안톤는 어디에 있을까? 놀랍게도 안톤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어.”


유고가 갑자기 자신의 모자를 벗어 어딘가로 집어던졌다.

그리곤 느닷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지금까지 연주와 해설만을 이어가던 악사가 무대 위로 올라온 것이다.


“내가 바로 안톤이다!”


느닷없는 등장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관객들은 유고의 험악한 인상이 딱 불량배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유고는 리라로 느린 템포로 켰다.

뚝뚝 끊어지는 기묘한 연주였지만 묘하게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악사는 천천히 두 소녀에게로 다가가더니.


“거기 아가씨. 얼굴 한 번 반반하시구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오셨나?”


유고의 연기는 흉내치곤 너무 어울려서 정말로 밉상.

어느새 연극을 보던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성공적인 호응일 것이리라.


유고는 연기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음에 드는걸. 나랑 같이 놀아주실까!”


키리아는 말없이 유고를 바라볼 뿐이었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것이 더욱 절묘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제 관객들에게 키리아는 영락없이 공작가의 딸이란 설정으로 잡혀버린 모양이었다.


‘유치해! 뭐가 영애라는 거야!?’

‘의외로군. 너는 이런 연기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인간을 흉내 내는 것도 그렇고.’

‘웃기지 마! 나는 이딴 것 보다 좀 더···.’

‘좀 더, 뭐?’

‘세련되고··· 이지적이고, 아무튼 아름다운!’

‘뭔 차이인지 모르겠는데?’

‘크으으···.’


키리아는 단지 자신이 구경거리가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나마 키리아가 묵묵히 가만히 있는 이유는 유고가 연주라는 리라의 선율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 저 연주라는 것만큼은 괜찮다고 칭찬하겠지만 말이야.’

‘짐승의 힘줄을 당겨 만든 도구인가? 활시위 같은 것에서 저런 소리가 나다니, 인간들은 괴상한 재주를 지녔단 말이야.’

‘저급한 놀이치곤 연출도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겠어.’


험상궂은 유고의 껄렁한 말투에 지켜보는 관중들이 긴장했다.

위압적인 연기와 훌륭한 연주.

둘 모두가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


“무례하다! 우리가 누구신줄 알고 함부로!”


레렌의 연기도 한껏 물이 올랐다.

소녀의 호통에 관객들이 일어섰다.


“우우, 저 불량배 녀석 재수 없어!”

“닉슨 녀석이랑 비슷한 것 같아.”

“연주자 아저씨, 진짜 불량배 아냐?”


배역에 어울린단 소리에 유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악사는 다시 해설역으로 돌아갔다.


“아니, 난 진짜 결백하다고. 예술가한테 주먹패라니 너무들 하잖아. ···어쨌든 자, 공작가의 아가씨에게 닥친 위기! 이 위험을 타파할 이는 누구인가! 누가 불량배 기기의 손아귀에서 아가씨들을 귀해낼 수 있겠는가!”


불량배와 나레이션 역이 겹쳐진 괴리감을 컸지만 사람들이 신경 쓰는 것은 이야기의 다음이었다.


유고의 외침에 관객들의 시선은 당연히 한스에게로 향했다.

유고가 손짓하자 한스는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주인공이 나타나자 유고는 다시 악당의 역할로 돌아갔다.


“넌 마을의 유명한 겁쟁이가 아닌가! 언제 고향에 돌아왔데? 뭐야, 그 낯짝은? 정의의 기사 흉내라도 하고 싶은 거냐? 아앙?”


유고의 열연이 어찌나 사나운지 한스가 움찔했다. 그래도 연기란 걸 알고 조금이나마 용기를 냈는지.


“그, 그 여자에게서 떠, 떠···떨어져 기기!”


어설프기 짝이 없는 대사.

한스에겐 연기자의 재능이 없는 모양이었다.


“흥, 다리가 다 떨리는구만. 까불지 마, 애송아.”

“우, 우앗?!”


유고는 살짝 한스의 어깨를 밀었다.

그리곤 다리를 거두었다.

한스의 자세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진짜 싸움이었다면 소년은 엉망진창으로 바닥을 굴렀겠지만, 이 무대에선 든든한 악사가 있었다.

유고는 한스가 넘어지기 직전에 소년의 등을 받쳐 넘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도 관객들에게는 무뢰한이 소년을 내동댕이친 것처럼 보였으리라.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오라고.”


호통 치는 불량배의 기세에 눌려 반항조차 하질 못하는 겁쟁이 소년의 모습에 관객들은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유고는 사태를 수습하고자 해설자의 입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아아, 슬프게도! 약해빠진 소년은 아무것도 못했다네. 그도 그렇지, 불량배 안톤은 마을에서 제일 쌘 주먹이었으니까! 사실 겁쟁이 소년이 아니라 어느 남자라 해도 기가 죽어버렸을걸? 안 그래, 여러분?”

“그래도 여자가 위기에 처했는데 저러고 있으면 너무 한심하잖아요?”


갑자기 레렌이 끼어들었다.

자신의 소꿉친구가 계속해서 안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아아, 없는 것일까! 기기에게서 아가씨를 구할 용기 있는 남자는 정말 없는 건가!”

“이봐요! 한스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요?”

“아니, 있었지. 장터에 몰려든 사람들 중에 딱 한 명 말이야!”


유고의 선언에 사람들은 크게 놀라진 않았다.

새로 늘어난 연기자 중 남은 사람은 한 명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 제 차례인가요?”

“자, 여러분! 공작가의 호위 기사 쟝을 소개합니다!”

“아하, 아하하하.”


위기의 소녀를 구출하는 역할은 나긋한 인상의 사제가 도맡았다.

새로운 등장인물은 난처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자 박수세례가 이어졌다.

어눌한 연기였지만 그래도 주인공으로서는 역시 작고 왜소한 한스보단 훤칠한 키의 늠름한 넬 쪽이 어울려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스의 편을 들던 레렌도 넬의 화려한 등장에 더 이상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유고는 넬의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아마 연극의 대사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넬이 막대를 집어 들고 무대에 나섰다.


“아가씨를 풀어줘라, 이 악당아. 그렇지 않으면 내 검으로 본 때를 보여줄 테다.”

“···앗, 아아··· 사, 사제님. 그런 대사는 너무···.”


오글거려.

부끄러운 대사에 흠칫한 레렌이 서둘러 말렸다.


“이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소녀여! 저는 용기를 맹세한 기사입니다. 저런 불량배 따위는···.”

“으, 으이이! 그만해요, 사제님···.”


심취해있다.

얌전한 넬에게 이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레렌은 자신이 알고 있던 사제에 대한 정보를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사제가 아니라 쟝이랍니다. 기사 쟝이에요.”


레렌의 걱정를 아는지 모르는지 괜히 의욕만 넘치는 넬이었다.

어째 유고는 이 상황을 즐기는 모양인지 사제의 연기에 맞장구까지 쳤다.


“그는 용감한 기사였다네!”

“검술도 뛰어나다고 해주세요.”

“사제니이이임!”

“오, 좋지. 기사 쟝은 뛰어난 검사이기도 했지. 민들레 전쟁에선 칭호도 하사받은 멋진 남자였다네!”

“자꾸 이상한 설정 집어넣지 말아요!”


외적으론 엉망진창이었지만 연극은 꽤 훌륭하게 진행됐다.

이들의 입담으로도 관객들은 충분히 웃고 떠들어댈 수 있었다.


“에잇, 기사라니! 그것도 그 유명한 쟝이라고!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군! 쳇, 아가씨들 운 좋은 줄 알라고!”


유고를 주춤하는 흉내를 내면서 뒷걸음질 쳤다.

이제 리라는 톡톡 튀기듯 우스운 음색을 냈다.

유고는 한 바퀴 몸을 돌리며 다시 해설자가 되었다.


“불량배 기기는 기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줄행랑을 쳤지! 두 아가씨는 멋진 기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네!”

“감사합니다, 사제··· 아, 아니 기사 님···.”

“별 말씀을. 여인들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기사로서 당연한 행동입니다.

“으, 으브브브···.”


레렌은 어째서인지 자신이 더 창피해져서 키리아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

멍청이들.

그 사이에 끼어있던 키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꼬마들을 뭐가 좋은지 신이 나서 시끄럽게 조잘거려. 계집애들도 연신 떠들어대고 있어. 성가신 것들···.’


키리아는 이 바보짓이 언제 끝날 지만 생각했다.

이 영악한 요괴의 유일한 관심사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이며 말린 쇠고기에 익힌 닭고기들뿐이었다.

하지만 악사는 아직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기사님이 여인들에게서 찬사를 받고 있을 동안에 겁쟁이 소년은 비참한 기분에 빠졌다네. 자기 손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도끼를 휘두르는 것 뿐, 그에 반해 기사 쟝은 번쩍이는 강철 갑옷에 커다란 검을 휘두르는 일류 기사! 상대가 안 되지, 이길 수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보라, 공작가의 아가씨도 늠름한 쟝의 모습에 완전히 넋을 잃었다네.”

‘킥킥, 이거 의외로 재미있군. 정말 쉴 새 없이 잘도 이야기를 지어내잖아? 이 덩치 녀석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든 걸까? 안 그러냐? 응, 키리아?’

‘나빠! 전혀 세련되지 못했어! 이런 난잡한 이야기 따위···.’


유고의 해설에 악담을 하는 키리아였다.


‘틱틱 그러면서도 꽤 순순히 따르네?’

‘흥, 의외로 인간을 연습하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니까.’

‘매번 싫다고 불평하지만 넌 역시···.’


그때였다.

유고가 간곡히 부탁한 것은.


“···아가씨, 웃어! 부탁이니 좀 웃어줘 봐! 이 장면에선 공녀의 미소가 필요하다고.”


유고의 속삭임에 본심을 숨기고 교묘하게 미소를 보이는 키리아.

만들어낸 웃음이었지만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여태 무표정 일색이던 소녀가 웃어보이자 나름대로 감정적으로 보였다.


“보라, 얼음 공주와도 같은 그녀가 웃었다네!”

“황송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넬.

레렌은 그것을 또 부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자자, 그래도 말이야. 다들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주인공은 소년이라고? 이제 소년에게도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안 그래? 앞으로의 모험은 확확 지나갈 테니까 귀를 기울이고 잘 들으라고!”


유고의 익살과 연주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어눌한 겁쟁이 소년역의 한스.

아리따운 공작가의 딸인 키리아와 레렌.

성질 급하고 난폭한 불량배 안톤의 유고.

마지막으로 잘 생긴 검술의 달인인 기사 쟝을 연기하는 넬까지···.


흔치않은 구경거리에 관객이 늘기 시작했다.

어느새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이 이들의 공연을 지켜보기 시작했어.

이 연극이 벌어지고 있는 순간만큼은 악사의 연주와 관객의 상상력이 멋진 무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자, 다음 이야기는···.”


전체적인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한 영웅담이었다.

동시에 진부한 연애담이기도 했다.


이후 소년은 기사의 활약에 자극 받아 점차 변모하기 시작한다.

쟝에게 감화되어 그와 같은 기사가 되기 위해 수행에 나서는 것이 중장, 소년이 수 년 간의 노력 끝에 어느덧 영웅의 길에 오르는 것이 후반부의 이야기였다.


막바지에 소년은 해낸다.

견습에서 시작하여 겁쟁이란 접두사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훌륭한 기사로 자라난다.

그를 훈련시킨 기사 쟝은 성장한 그의 모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성안에도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탔다.

영지 내에 그의 이름이 퍼졌다.


“스펜서 렌필드, 누구도 그 기사의 이름을 잊을 수 없었지.”


모두가 유고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주인공 역할을 맡은 한스조차도 그 입담에 넋을 잃었다.


“그는 어느새 시녀들 사이에선 인기인으로, 기사들 사이에선 동경의 대상처럼 되어버렸어. 여기저기서 스펜서 기사님, 서민의 영웅 스펜서라 불렸어. 어이구, 소년시절 주인이었던 귀족 양반도 자랑하기 바빴지. 양부모도 염치없이 기대려고 했고 말이야. 그래도 좋은 일은 있었어. 이 정도로 유명해지니까 당연히 공작가 아가씨도 한 번쯤은 그 멋진 기사를 보러왔지. 명성을 얻었지만 기사 스펜서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네! 검술에는 용맹했지만 마음만큼은 아직도 총각이었거든.”


시간은 또 흐르고 흘러.

스펜서는 경비단장이 되었다.

유고가 덧붙이길 불과 3년만의 일이었다고 한다.

천민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초특급 승진이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 3년 사이에 공작가의 딸을 암살하려던 시도를 스펜서가 훌륭히 막아냈기 때문.

소녀에게로 날아가는 화살을 용감히 몸을 날려 막아낸 공을 세운 것이다.


공작은 감격하며 성과 영지의 감시를 스펜서에게 일임했다.

알게 모르게 공작가의 딸과 사이가 더 가까워진 것은 관객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아아, 그렇지만 이 시대는 그야말로 풍란의 시기. 하루가 다르게 이웃 나라에서 전쟁을 걸어오니 왕의 앞에서 한낱 신하에 불과한 공작도 수도로 원군을 보내야만 했으니···.”


연극을 감상하던 사람들은 살짝 당황했다.

유쾌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이야기는 영웅의 낭만에서 역사와 정치적인 설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경비단장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스펜서는 부사관으로 전쟁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민중의 희망이라느니 하면서 치켜세웠지만 사실은 귀족들이 자기 목숨을 아끼느라 평민출신의 병사들만 동원된 것이었다.

물론 스펜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공작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여기서 공을 세우면 귀족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야.

예전의 겁쟁이라면 무리였겠지만 지금은 달랐을 터였다.

스펜서는 자신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자신의 가능성을 실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깃발을 세우며 전장으로 나아가는 스펜서의 모습을 유고는 장렬하게 묘사했다.

물론 투영하는 대상이 한스였기에 그 부분에서는 성장한 대역으로 넬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뿐.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기다리는 여인이란 설정의 키리아와 레렌이 아련히 먼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지어진 것이다.


“끝? 끝이에요? 기사 스펜서는 전쟁에서 어떻게 됐는지도 안 나왔는데?”


한참 이야기에 몰입했던 조나단이 못마땅하단 얼굴로 악사에게 따졌다.

다른 관객들도 급히 끝나버린 연극의 결말이 탐탁지 않은 듯 보였다.

광장에서 열연을 펼친 다른 배우들의 표정도 무언가 아쉬운 모양이었다.


“연주가 아저씨, 그래서 영웅 스펜서는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공작의 딸과 결혼해요?”

“그래, 악사 양반. 이렇게 끝내면 재미없지. 이야길 마무리 지으라고.”


관객들의 재촉이 이어졌지만 유고는 실실 웃을 뿐이었다.


“이크크, 다음 이야기는 내년이야. 즉석으로 이야길 지어내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란 말씀이야. 힘들다, 힘들어. 이러다 손톱이 다 빠져버리겠어.”


확실히 연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시간이나 넘게 리라의 현을 튕겼으니 아무리 큰 덩치의 사내라 할지라도 지치는 것이 당연했다.


“정말 내년까지 기다려야 해요?”

“아하하! 이거 원래는 계획에도 없었는데 배우들이 모여서 확 진행한 거라서 말이야. 꼬마 도련님의 기대에 못 미쳐 미안하지만 당장은 이 파란만장한 대서사시를 끝내기엔 많은 게 부족하걸랑. 다들 관객 여러분들에게도 양해를 부탁하지.”


악사는 조나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 축제를 기약했다.


“다음엔 내 예인 동료들도 함께 데려올 테니까 말이야. 내년까지 오늘의 줄거리를 기억해주실 바래.”


그렇게 말하며 유고는 다시 모자를 썼다. 고개를 숙이며 관중에게 예를 표한다.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환호가 이어졌다.

유고의 입가에는 유쾌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작가의말

분량을 많이 초과했지만 저는 신경쓰지 않습니당.


우리 독자님들께서도 안 쓰실거라 믿습니당.


어예.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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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전기 키리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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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에필로그 +2 21.06.25 110 8 10쪽
41 붉은 마수(6) +1 21.06.25 40 5 19쪽
40 붉은 마수(5) +2 21.06.23 39 5 18쪽
39 붉은 마수(4) +2 21.06.22 53 7 19쪽
38 붉은 마수(3) +2 21.06.20 36 8 12쪽
37 붉은 마수(2) 21.06.20 34 7 17쪽
36 붉은 마수(1) +2 21.06.10 45 7 19쪽
35 요조 로크(8) +3 21.06.09 47 9 12쪽
34 요조 로크(7) +2 21.06.08 45 10 14쪽
33 요조 로크(6) +2 21.06.03 52 8 13쪽
32 요조 로크(5) +3 21.06.01 42 8 17쪽
31 요조 로크(4) +3 21.05.31 45 8 19쪽
30 요조 로크(3) +2 21.05.29 50 7 18쪽
29 요조 로크(2) +2 21.05.28 44 8 15쪽
28 요조 로크(1) +4 21.05.27 48 8 13쪽
27 축제(8) +2 21.05.26 41 7 24쪽
26 축제(7) +2 21.05.25 49 7 13쪽
25 축제(6) +3 21.05.24 55 6 20쪽
» 축제(5) +4 21.05.23 59 10 25쪽
23 축제(4) +2 21.05.22 57 11 21쪽
22 축제(3) +2 21.05.21 58 11 17쪽
21 축제(2) +2 21.05.20 66 10 14쪽
20 축제(1) +4 21.05.19 72 12 19쪽
19 전야제(5) 21.05.19 46 11 15쪽
18 전야제(4) +2 21.05.18 58 13 12쪽
17 전야제(3) +5 21.05.18 55 11 17쪽
16 전야제(2) +3 21.05.17 71 12 23쪽
15 전야제(1) 21.05.17 58 12 18쪽
14 키리아(6) +3 21.05.16 69 1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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