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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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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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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축제(8)

DUMMY

14.

네프리티나가 넬을 광장에 인도하자 사람들이 길을 트기 시작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어느새 가장자리로 피한 상태.

젊은이들은 중앙으로 모이기 시작해,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거기에 떠돌이 악사의 연주가 더해지자 더욱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불꽃이 휘날리는 하늘도 점차 남색으로 변해갔다.

이제 축제는 막바지에 달했다.


댄스 타임.

배우자가 없는 남자 한 쌍이 춤을 추는 시간이다.

이 밤의 무대에 강제성은 없어.

부끄럼 많거나 끌리지 않는 이는 참가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참여는 오로지 자유.

일 년 중 단 하루만 허락되는 어둠 아래에서의 무도.

그것이 바로 축제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댄스 타임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레렌도 그 중에 하나였다.


‘이제 결전의 시간이야!’


찰싹.

레렌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리며 기합을 넣었다.

드디어 그간 연습해온 춤 솜씨를 뽐낼 때.

그리고 넬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기회가 왔다.


레렌은 이것으로 넬도 더 이상 자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축제날 댄스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요청은 변방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전통이다.

아무리 둔하다고 할지라도.

이 정도로 적극적인 구애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지, 진정해. 레렌, 레리엔느 베이커! 자신을 가져. 몇 번이나 거울 앞에서 연습했었잖아.’


얼굴이 달아오른다.

가슴이 요동친다.

지금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격한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일어나 이성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었다.


레렌은 마른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넬을 향해 다가갔다.


“사, 사제님.”


해냈다.

겨우 사제에게 말을 거는 데 성공했다.

아직 요청은 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 이뤄냈다면 나머지는 어렵지 않다.

이윽고 레렌의 용기가 무르익었다.

이제 소녀는 자신의 진심을 고백할 수 있으리라.


“아, 레렌. 어서 오세요.”

“저, 저기···.”

“음?”


미소와 함께 뒤를 돌아오는 넬의 모습에 레렌은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한 번 불이 붙은 마음을 막을 수 없어.

드디어 레렌은 준비해둔 말을 내뱉었다.


“사제님, 저랑 춤추지 않으실래요?”


레렌은 얼굴이 새빨간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연기했다.

소녀는 요청의 정도를 넘기고 싶지 않았다.

추하게 매달리는 것은 레렌 쪽에서 사양이야.

그것은 변방 여자의 자존심이었다.


넬의 얼굴에 한순간 놀란 기색이 보였다가 곧 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되돌아왔다.


···됐다.

해냈다.

레렌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들뜬 소녀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줄까?

그렇지 않으면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일까?

그것도 아니면 귀족처럼 ‘저라도 괜찮다면 기꺼이’ 하고 고개를 숙이려나?

그러나···.


“···죄송합니다.”


넬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소를 지은 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절이었다.


“어?”


확신한 만큼 되돌아오는 충격은 컸다.


“네, 네에?”


레렌은 되묻고 말았다.

제대로 들었으면서도, 사제의 대답이 도저히 믿기지 않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레렌. 저는 키리아 양과 춤을 추려합니다.”


그 선언에 놀란 것은 레렌 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넬의 말을 듣던 키리아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나타났다.


“어, 키리아랑···요?”

“예. 아시다시피 키리아 양은 불과 며칠 전에 마을에 흘러들어왔습니다. 그것도 불미스런 사건 때문에 말이죠. 당차게 행동하고 있지만 아직 마음의 상처가 클 겁니다. 심지어 기억마저 잃었을 정도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요. 저는 그런 키리아 양에겐 추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네. 그건 그렇···죠.”


악의가 아냐.

오직 선의만이 있을 뿐이다.

이 사제에게 소녀를 괴롭히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레렌은 그것을 잘 안다.

어쩌면 이 마을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지도 몰랐다.

그래서 좋아했으니까.

사제가 그런 사람인 것을 알기에 반했던 것이었다.


넬은 여전히 얼굴 한가득 친절하고 다정한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레렌의 마음은 더 괴로웠다.


“어··· 어쩔 수 없네요.”


고작 이런 일로 사모하는 사람에게 추태를 보일 순 없다.

사제에게 미움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레렌은 힘껏 웃어보였다.

진심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그것은 처절한 소녀의 오기였다,


“그럼··· 키리아를 부탁드릴게요.”


그것으로 레렌은 몸을 돌렸다.

순진한 소녀가 견딜 수 있는 정도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레렌은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레렌?”


남겨진 넬은 영문을 몰라 도망치는 레렌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그, 글쎄요.”


키리아의 공생체는 ‘확실히는 몰라도 십중팔구 넬 네놈 탓일 거야.’ 하고 생각했다.

이 둔해빠진 사제는 소녀에게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것이라 납득해버렸다.


“자, 키리아 양.”

“네?”

“가시죠.”


살짝 자세를 낮추어 손을 내미는 넬.

키리아는 그것이 무언가를 부탁하는 예법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춤을 청하는 것이리라.


‘큭큭, 거절하지? 성가실 텐데.’

‘그건 또 어떨까나?’


키리아는 짓궂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인간 흉내를 내는데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

결국 키리아는 넬의 손을 잡았다.

넬은 부드럽게 소녀의 손을 잡고 함께 장작 기둥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이봐, 도련님.”


여태 말없이 넬과 키리아 쪽을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유고였다.

그는 자신의 바로 아래의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잠자코 보고만 있을 거야?”


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우, 나도 사랑이라느니 그런 거랑은 여태 별로 연이 없어서 제대로 된 조언은 못해줄 것 같지만···.”


무언가 망설이는 소년의 모습에 악사는 답답한 듯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을 하던지 후회할 거라면 적어도 말이야, ‘그렇게 해보는 게 좋았을 텐데.’ 따위 보다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어.’ 가 더 났다고.”


한스는 뜬금없는 유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해보기 전까진 모른다는 거야.”

“네?”

“고백이란 그런 거지. 사랑이란 그런 거야.”

“유고 형.

“지금 막 사제 형씨한테 퇴짜 맞은 저 아가씨도 같다는 말이야. 알겠어, 도련님?”

“모, 모르겠어요.”

“자, 기회를 잡으라고!”


유고는 한스의 어깨를 툭 쳤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대답을 받아. 단 그 결과가 항상 좋은 쪽으로 향하진 않지. 거절 받을지도 모르지. 무서울 거야. 하지만 그래도 하는 거야. 나중에 아무것도 안했다가 해볼 걸 하고 후회하는 것만큼 비참한 건 없단 말이야.”


한스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생겨났다.


“···만약에요.”

“응?”

“만약에, 그걸로 여태까지 제가 참고 견뎌왔던 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면··· 그러니까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던 게 한 번에 무너져 내려버린다면··· 차라리 안하는 것만도 못한 건 아닐까요?”


그 말에 유고는 씩 웃으며.


“어려운 소리 하지 말라고, 도련님. 난 여태 뒤 같은 건 안 보고 살아온 놈이야.”

“뭐, 뭐예요? 먼저 말해놓곤··· 저보고 어떡하란 거예요?”

“그건 왜 나한테 물어?”

“유고 형···.”

“누가 도련님더러 당장 뭔가 저지르랬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래, 그렇지.”


유고는 곡주를 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시원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실의에 빠진 공주님을 위로해주는 걸 망설일 이유는 없다는 거야.”



15.

레렌은 광장에서 도망쳤다.

인파를 피해 멀리 떨어졌지만 그래도 좁은 마을이야.

아직은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 머물러있었다.

하지만 차마 다시 다가가진 못했다.


비참한 기분

우울한 마음에 소녀는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레렌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는다.

훌륭한 오기.

소녀는 적어도 넬의 앞에선 울지 않았다.


‘난 뭘 기대했던 걸까···.’


올해로 열일곱.

농가 일을 돕고, 여자들과 수다를 떨며 바느질을 배우면서 살아온 일생···.

그 평범한 시골 소녀에게 처음 찾아온 사랑이었다.


수도에서 찾아온 훤칠한 키의 잘 생긴 사제라니?

소녀를 낭만적인 옛날이야기처럼, 음유시인들이 부르는 사랑노래처럼 다른 세계로 인도해줄 것만 같았다.

레렌은 넬에게서 꿈을 찾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유치해빠진 착각에 불과했다.

저렇게 멋진 남자.

훌륭한 사제님이 지저분한 시골 여자 따윌 좋아해줄 리 없었으니.

지금까지 수도에서 그가 보아왔을 온갖 귀부인과 영애들에 비하면 자신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리라.


소녀는 기대했다.

만에 하나라도 꿈속 이야기가 현실이 될지 모른다고 허황된 희망을 가졌다.


‘바보, 사제님은 바보···.’


나쁜 생각들이 레렌을 괴롭혔다.

왜 그렇게나 열심히 춤 연습을 했지?

어째서 축제날에 맞춰 드레스를 만드느라 고생을 했을까?


사제는 소녀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대담하게 밀어붙여보기도 했지만 사제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었다.

넬은 예쁘게 몸단장한 자신을 봐주지 않아.

오히려 옆에 있던 키리아에게만 넋을 놓았다.

넬이 키리아와 춤을 추려는 이유는 레렌도 잘 알았다.

키리아는 외톨이.

불쌍한 아이다.

돌봐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레렌은 슬퍼.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 속의 저릿한 마음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레렌!”


소년의 부름에 소녀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레렌이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서 무슨 큰일이라고 얼빠진 얼굴의 한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일 년 중 가장 기쁘고 행복해야할 축제날, 어째서인지 레렌은 마가 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스는 어느새 광장을 가로 질러서 레렌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헥, 학, 헥. 레, 레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한스를 본 순간 레렌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소꿉친구에게 뭐라 해야 한단 말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허나 레렌이 전혀 바라지 않은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레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스가 먼저 입을 땐 것이다.


“레, 레렌. 곧 댄스타임이 시작될 거야. 여기서 뭘 하고 있어?”


레렌은 날카롭게 대꾸했다.


“너야말로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아니, 나는···.”


한스는 난처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난 그냥··· 네가 갑자기 광장 밖으로 나가는 걸 봤어. 그··· 걱정 돼서···.”

“거, 걱정은 무슨···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괜한 참견이야.”

“그, 그랬니?”

“기분 나쁘게 뭐야? 내가 어디서 뭘 하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뭐가 문제였을까?

한스는 그의 말처럼 자신을 염려해서 따라온 것이었음에도 레렌은 신경질만 내고 있었다.

소녀는 스스로도 그런 자신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상관이냐니···.”


그것은 적어도 어릴 적부터 좁은 마을에서 함께 어울린 소꿉친구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한스는 기가 죽어 말꼬리를 흐렸다.

레렌의 기분도 좋지만은 않았다.


이상한 상황.

평소와는 반대로, 이번엔 레렌이 한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 질문에 레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스는 계속 물었다.


“사제님이 뭐라고 그런 거야?”

“아냐!”


갑자기 레렌이 소리를 지르자 한스는 깜짝 놀랐다.


“사제님이랑은 관계없어··· 아무것도 아냐.”

“레렌, 너 지금 울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한스 너 이상해. 울긴 누가···.”


말하기가 무섭게 레렌의 커다란 눈에서 물방울이 맺혔다.

숨이 막히고 억눌린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레렌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레렌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가녀린 어깨가 떨린다.

웅크린 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졌다.


“몰라, 모르겠어. 사제님이, 당연히 파트너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열심히 연습도 했는데··· 나···.”


왜 이제야 감정이 폭발한 걸까?

혼자 있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레렌은 자신이 끔찍이도 싫었다.


‘한스를 봐, 이렇게 착한 아이에게 몹쓸 말이나 하고. 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나쁜 건 난데···.’


흐느끼는 레렌을 바라보며 한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레 소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일분이 지나고 이분.

이윽고 오 분이 지났다.

레렌은 한순간이나마 격하게 마음을 쏟아낸 후에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미안해. 한스, 미안해.”


소녀는 겨우 솔직한 말을 꺼냈다.

어설픈 사과에 소년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레렌.”


한스가 레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렌은 한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의 손바닥만을 볼뿐이었다.

소년은 한숨을 쉬더니 소녀의 손목을 잡았다.


“앗, 아앗? 갑자기 뭐야?”

“가자, 레렌.”


당황한 레렌에게 한스는 미소로 답했다.

그것은 좀처럼 소년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아보였던 듬직한 얼굴이었다.


“우리의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16.

하늘은 황혼을 넘어 짙은 남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광장 중앙의 장작기둥은 아직도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어.

광장에 울려 퍼지는 현의 선율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행렬이 이어졌다.

남녀가 리듬에 맞춰 발을 움직인다.

서로 허리와 목덜미에 손을 올려 장단을 맞춘다.


댄스타임은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변방의 전통.

그 기원은 여신이 지상에 내려올 때 태양을 상징하는 춤을 춘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민속 춤 이기에 방법은 간단하다.

그저 여자는 남자가 내민 손바닥 위에 살며시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상대의 어깨나 허리를 잡는다.

그리곤 번갈아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뒤로 빼며 천천히 원을 그리며 빙빙 돈다.

수도의 고급스러운 사교춤도 사실 이것에서 크게 차이나진 않는다.

단지 손동작이 조금씩 다른 것이 전부였다.


타닥.

소리를 내며 흩뿌려지는 장작의 불씨.

장렬하게 이어지는 마을 풍악단과 떠돌이 악사의 연주.

그리고 여물어가는 밤.

젊은이들이 춤을 추는 이 시간에는 오직 낭만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욱!”


갑자기 광장 어딘가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분명 손을 맞잡고 춤추는 이들에게서 나왔다.


“죄송해요.”

“아, 괜찮습니다, 키리아 양.”


비명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넬이었다.

그가 소리를 지른 까닭은 소녀의 발끝이 자꾸만 사제의 발등을 밟았기 때문이었다.


“계, 계속하죠.”


넬은 해맑게 웃고 있었지만 그의 이마에서는 연신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사실 넬은 발등이 욱신거려서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전력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


‘너, 순순하게 요청을 받아들인다 싶더니 이걸 노리고 있었냐?’

‘아하하하, 바보! 내가 순순히 춤 따윌 쳐줄리 없잖아?’


키리아는 속으로 우스워죽을 것 같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요괴는 이 마을에 온 이후로 이만큼 유쾌했던 적은 없었다.

이 장난꾸러기 요괴는 실수를 가장해서 발을 밟을 때마다 안색이 달라지는 사제의 얼굴을 즐기고 있었다.


“헉···.”


또 한방.

넬은 고개를 푹 숙이고 고통을 참아냈다.

키리아는 능청스럽게 입가를 가리며.


“익숙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사제님···.”

“아, 아뇨··· 신경 쓰지 마시길.”


넬은 불굴의 사나이였다.

이 와중에도 웃음을 보일 수 있다니, 키리아는 놀랄 지경이었다.


‘생각보다 근성 있는 녀석이군. 말라깽이에 그냥 키만 큰 멍청인 줄 알았는데.’

‘후후후, 전부 허세야.’


넬은 다정하게 웃으면서 키리아에게 다시 설명했다.


“음, 그러니까 키리아 양. 제가 발을 내밀면 키리아 양은 그쪽 발은 뒤로 해주셔야합니다. 이렇게요. 하나, 둘. 하나, 둘···.”

“이렇게요?”

“윽, 으악! 키, 키리아 양··· 거기선 바, 발을 빼주셔야···.”

“죄송해요! 제가 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물론 속내는 달랐지만.


‘킥킥, 키득키득! 저 얼빠진 얼굴 좀 봐!’


요괴가 어리숙한 사내를 놀리는데 한창 재미가 들린 사이.

다른 쪽에선 소년과 소녀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참, 한스. 그게 아니라니까! 템포가 늦잖아!”

“네, 네가 너무 빠른 거야!”


이쪽은 이쪽대로 춤이 잘 풀리질 않아 고생이었다.

유고의 연주는 수준급이었고, 마을 장로들도 그를 따라 지휘를 맞췄는데 그것은 평범한 연무곡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즉흥곡이었다.

즉, 마을 사람들은 어느 시점부터 완전히 모르는 새로운 음악으로 춤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간 익숙한 리듬으로 춤을 연습하던 레렌은 알게 모르게 습관 탓에 발이 꼬였고.

춤에 익숙하지 않던 한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소녀는 가능한 움직임에 맞춰보려 했지만 소년이 워낙 둔하게 반응해서 쉽지가 않았다.

두 사람의 궁합은 가히 최악에 가까웠다.


“이 답답이! 바보! 남자면서 운동신경이 그게 뭐야!”

“레, 레렌이야말로 여자면서 왜 그렇게 거칠게 움직이는 건데?”

“이게! 말 다 했어? 약골 주제에!”

“왈가닥이야!”

“둔탱이!”


하하하, 광장에서 춤추는 것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군중에 섞여있던 레렌의 어머니, 알리시아는 이마를 짚었다.


“···역시 겉만 다 컸어. 으이그, 창피해. 저런 걸 장녀라고··· 아직 어린애야, 어린애. 레렌! 요 기집애, 축제 끝나고 집에만 와봐라. 아휴···.”

“에이. 좋기만 한데요.”


한숨을 쉬는 알리시아의 어깨너머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봐요, 알리시아. 아직 청춘이라서 부럽기만 하네요.”

“네프리티나··· 남 일이라고 그러면 안 돼. 자긴 극성인 딸이 없어서 그런 소릴 할 수 있는 거라고.”

“어머, 저는 진심인걸요? 좀처럼 없는 일이잖아요. 동년배 남자애랑 말다툼하는 열일곱 살 처녀는···.”

“너 정말!”

“흠.”


달려들려는 알리시아와 피하려는 네프리티나 두 여인은 뒤에서 들려온 엄숙한 기침소리에 얼굴이 굳었다.

두 사람 뒤편에는 엄숙한 얼굴의 한스 아버지, 프랭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어, 어머··· 한스 아버님. 언제 거기 계셨대요?”

“내 아들놈이 숙녀에게 왈가닥이라고 할 때부터 있었소.”

“호, 호호··· 너, 너무 혼내지 마세요. 사내아이들은 철 드는 게 좀 늦잖아요? 안 그래, 네프리티나?


동의를 구하는 알리시아의 물음에 네프리티나는 손바닥을 탁 치며 답했다.


“그, 그렇죠. 한스 군도 별로 나쁜 생각은 없었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저 나이 아이들은 저런 게 자연스러운 거랍니다.”


흠, 또 다시 입을 닫은 채 무거운 신음을 흘리는 프랭크.

알리시아와 네프리티나의 눈에 그는 무언가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처음 봤다오.”

“네?”

“아들 녀석의 저런 모습, 처음 봤소.”


두 여인은 그제야 험상궂은 무표정 속에 숨겨진 랭크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것은 단지 아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어리숙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숫기없는 한스가··· 나와 있을 때는 좀처럼 저런 얼굴을 보여주질 않아서 그럽니다.”


술집 주인 프랭크는 분명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그도 결국 한 아이의 아버지이며 마을의 일원이었다.

네프리티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사실은 쭉 보고 계셨죠?”

“뭘 말이오?”


네프리티나의 물음에 프랭크는 무거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프리티나는 입가를 슬쩍 가리더니 짓궂게 말했다.


“한스 군이 연극을 시작했을 때 얼핏 아버님을 뵌 것 같아서요.”


프랭크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끼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들 녀석에겐 말하지 말아주시오.”


알리시아와 네프리티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킥킥 웃었다.


프랭크는 무안해졌는지 천천히 몸을 돌려 인파 밖으로 나가려했다.

네프리티나는 조금 미안해져서 고개를 숙였는데, 딱히 프랭크도 기분이 크게 상한 것은 아니었는지 정중하게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한참 축제를 즐기던 사이에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제 인간에게 허용된 때가 끝나 짐승들이 눈을 뜰 시간이 도래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아직 장작의 불씨가 남아있어.

오늘 만큼은 어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꿈만 같네요.”

“뭐가?”


느닷없는 말에 알리시아가 묻자 네프리티나는 머리를 앞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처음에 이 마을에 왔을 때엔 이렇게 웃을 수 있을 줄 상상도 못했어요.”


알리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프리티나, 넌 매번 축제 마다 같은 소릴 하는구나.”

“후후··· 그랬던가요?”

“그래. 꿈속에 있는 것 같다느니 하면서.”

“그래요.”


두려움이 사라진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별빛이 하늘을 장식하고 커다란 만월이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네프리티나는 한참이나 밤하늘을 바라보다 배시시 웃었다.

나이에 안 어울리는 천진난만한 미소.

알리시아는 가끔 네프리티나가 여우같다가도 이럴 때마다 그녀가 레렌 만큼이나 젊고 들뜬 처녀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네가 이 마을에 온지도 벌써 오래구나.”

“그러네요. 벌써 그렇게 됐네요.”

“존이랑 캐시가 몇 살 이랬더라?”

“조나단은 열 둘, 캐시는 아홉 살 이래두요. 알리시아··· 이제 슬슬 외울 때도 되지 않았어요?”

“믿기질 않아서 그래. 그 쪼그만 아가들이 벌써 열 살 씩이나 먹었다니까 말이야.”

“전 또 남 아이들이라 별로 관심 없는 줄만 알았죠.”

“무슨 소릴, 난 네프리티나가 막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해서 하나도 안 잊었다고. 기억 나? 그 땐 네가 영양실조로 탓에 젖이 안 나와서 정말 큰일 날 뻔 했었지. 결국 막 아기를 낳았던 다이에나가 젖동냥해줬었고 말이야. 이젠 그 자그마한 핏덩이가 이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돕는단 말이야. 시간 참 빨라. 난 이만큼 늙어버렸고.”

“알리시아가 늙었다뇨? 조금 나이 먹은 것 가지고 그런 말씀 말아요.”

“동안인 너한테 위로 받아봐야 하나도 기분 안 좋거든? 하아, 서쪽 계집애들은 사막의 축복을 받아서 잘 안 늙는다더니 정말인가 했다니까.”

“그거 다 미신이에요, 미신··· 세상에 안 늙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저도 알게 모르게 주름살이······.”

“정말? 못 믿겠는데? 보여줘, 보여줘 봐.”

“싫어요. 자기 흉한 모습을 누가 남한테 보여주겠어요?”


두 여인이 투닥 거리는 동안 춤의 행렬은 어느새 마무리를 그리고 있었다.


불꽃이 잦아든다.

연기가 흐려진다.

음악의 연주도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밖에 나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추위를 느끼는 이는 없었다.

이제 겨울의 흔적은 변방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봄이 자리를 잡았다.

새싹의 계절이, 희망의 철이 돌아왔다.

···드디어 축제는 종막을 고했다.


작가의말

축제 챕터 끝.


훈훈하게 즐기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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