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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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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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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전야제(2)

DUMMY

3.

알리시아와 네프리티나가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그 시간.

성당을 향해서 걸음을 옮기던 레렌은 익숙한 그림자를 보았다.

여우 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친 새벽의 부지런한 일꾼이 있었다.

한 소년이 양손에 가득 찬 양동이를 들고서 힘겹게 앞으로 내딛는 중이었다.


“어라, 한스?”

“레, 레렌?”


레렌이 이름을 부르자 소년은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양동이를 쏟을 뻔 했다.


“이렇게 일찍부터 웬일이야?”

“너야말로···.”


소년은 힐끗 레렌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미심쩍게 바라봤다.

되묻긴 했지만 대충 알 것 같다는 눈치였다.


“나는 당연히 성당에 가는 길이지. 사제님 뵈러!”


숨기지 않아.

별것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자신의 볼일을 밝혔다.


“넌? 보통 이렇게 일찍 물 기르러 가진 않잖아? 이 시간이면 아직 어둡고··· 강물이 얼어있을 지도 모르는데.”


레렌의 물음에 한스는 시선을 피했다.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흐응··· 이상한 녀석. 소꿉친구인 나한테까지 숨긴다 그거지?”


그 말처럼 레렌은 이 마을의 유일한 동갑내기인 한스 포드와는 꽤 오랫동안 사귀어온 소꿉친구였다.

한스는 성실하고 착한 성품을 가진 소년이었다.

하지만 레렌이 보기에 여자인 자신보다 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은 참기 힘들만큼 답답하기만 했다.

당장 살갑게 인사를 건네도 뭐가 문제인지 굳은 표정으로 대꾸하는 한스의 태도는 레렌을 서운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 레렌은 한스를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말하기 싫으면 그만둬. 흥, 하나도 안 궁금해.”


낯가림이 심하긴 하지만 한스는 사실 좋은 아이.

어린 시절부터 어울린 경험으로 안다.

이제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사과해올 것이었다.

레렌은 등을 돌리곤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면서 한스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나 한스는 예상대로의 행동을 보였다.


“···오, 오늘부터 집에 머무는 손님이 있어. 그 사람이 집세 대신 술 담그는 걸 도와준다고 했거든. 아버지는 또 인력이 있을 때 얼른 끝내버리는 게 좋다고 그래서··· 또 내일은 축제니까 시간이 없고···.”

“뭐야, 별일도 아니었잖아? 진즉 그렇게 이야기 할 것이지!”

“미안.”

“그런 것쯤 주정뱅이 아저씨들한테 들어서 벌써 알고 있었다고. 수도에서 온 악사가 너희 집에 머무른다고 말이야. 그런 게 뭘 숨길 일이라고 그래? 아아, 한스! 이 누나는 슬프단다.”


같은 나이면서.

토라져 중얼거리는 한스.

하지만 별로 기분 나쁜 기색은 없다.

오히려 익숙해.

이것이 그 두 사람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 악사님은 미남? 역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니까 엄청 잘 생긴 사람이겠지? 아아, 만나보고 싶네. 기다랗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는 수도의 악사님···.”

“···기대하지 마. 무슨 산적같이 생긴 남자니까.”

“날 놀리려는 거니? 그런 연주가가 세상에 어디 있어? 정말 나쁜 아이네···.”

“누, 누나 흉내 그만 좀 해! 정말이라고. 나도 처음에 그 남자가 가게에 들이닥치는데 깜짝 놀랐다고. 얼마나 흉악하게 생겼는지!”

“알았어, 알았어. 산적같이 생긴 악사라 그거지?”


한스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거짓말이 아니라고 레렌은 생각했다.

하지만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흉악하게 생긴 남자라니?

레렌으로서는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앗.”


그때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레렌의 어깨 너머로 내려와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레렌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위를 바라보자 하얗기만 하던 새벽하늘이 어느새 푸른빛으로 변해하고 있었다.


“벌써 아침이 다 됐네. 나는 이만 성당에 가볼게. 한스도 일 열심히 해.”

“레, 레렌.”


인사를 건네고 등을 돌리려는 찰나, 갑자기 한스가 소리쳤다.

레렌은 집을 나올 때도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상하다. 오늘따라 다들 날 자주 불러 세우네. 이번엔 두고 간 물건 없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한스는 잠깐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새로 왔다던 그 사제님, 어딘가 수상하지 않아?”


한스의 말에 레렌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레렌··· 나, 난 네가 사제님이랑 조금 거리를 둬야한다고 생각해.”

“어째서?”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그 사제님은 사실 교단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이 마을에 유배당한 거라고··· 규율을 어겨서 다신 출세할 수 없는 이런 시골로 좌천당한거래. 그러니까···.”

“그래서 그게 뭐?”

“교, 교리를 어긴 사제를 어떻게 믿겠어? 그 사람은···.”


짝.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렌의 손이 한스의 뺨을 때렸다.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양동이가 떨어지면서 물이 튀어 바닥을 적셨다.

레렌에게 맞은 것이 그리도 큰 충격이었던가?

한스는 한동안 돌아간 얼굴을 원래 자리로 돌리지도 못했다.


“남 험담이나 하는 거니? 정말 실망이다, 한스.”


레렌은 그걸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한시라도 같이 있기 싫다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한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자신을 경멸하는 레렌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


한스는 레렌이 멀리 떠나가고 나서야 겨우 양동이를 들어올렸다.

물에 젖은 바지 자락이 시려왔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 추위쯤은 한겨울에 숲을 누비는 것보다 못했다.

그만큼 날이 많이 풀려있던 것이다.

물은 다시 길러오면 그만.

어차피 강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에 저미는 찌릿한 감정만큼은··· 소년도 참기 힘들었다.



4.

레렌의 준비는 완벽했다.

뒤로 묶은 금발 머리.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한 차림새.

오른손에 쥐여진 조금 큰 바구니까지···.


“얍!”


레렌은 성당 입구에서 자신의 양 뺨을 살짝 때리며 기합을 넣었다.


“···정신 차리자, 레리엔느!”


그것은 나름의 각오였다.

전날 밤, 레렌은 잠들기 전에 결심한 것을 다시금 되새겼다.


‘사제님에게 댄스파티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거야!’


댄스파티.

오직 축제 당일에만 가능한 구애의 이벤트.

레렌은 과거부터 이어진 연인들의 행사로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었다.

마을 내에서만 도는 미신에 불과했지만 사랑에 눈이 먼 마을 처녀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레렌에겐 충분한 핑계거리도 있어.

일전에 저녁 식사 약속을 파토 낸 것을 빌미로 내건다면?

마음씨 좋은 넬은 차마 거절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좋아.”


마음을 다잡은 레렌은 손잡이를 돌렸다.

문 너머로 퀴스나트의 여신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아래에는 매일 같은 시각에 기도를 행하는 착실한 사제가 양손을 포갠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제님!”


레렌은 지금껏 몇 번이고 연습했던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레렌.”


자신을 반기는 넬의 부드러운 미소에 레렌의 얼굴에도 저절로 웃음꽃이 퍼졌다.

그것만으로도 소녀는 전날의 우울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오늘 키리아는 어때요?”


오직 넬에게 잘 보이기 위해 키리아의 안부를 물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오늘 성당에 들린 이유가 새로 생긴 동생에게 옷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것이 사제를 만나기 위한 핑계라곤 하나, 적어도 레렌이 키리아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게··· 키리아 양은 레렌이 돌아가자마자 바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녁 식사도 거른 채로요.”

“지금은 자고 있고요?”

“아직 이른 아침이니까요.”

“에이, 괜찮지 않을까요? 키리아도 어제 겨우 긴장이 풀어져서 푹 잠든 게 틀림없어요.”

“그래요.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넬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뭔가 이상해요. 하다못해 차를 한 모금이라도 마시길 바랐는데 그마저도 건드리질 않더군요.”

“···저도 그 쓴 물은 좀 거북하던데요.”


레렌은 그런 넬의 모습이 꼭 딸을 과보호하는 팔불출 아버지처럼 보였다.

레렌으로서는 넬이 왜 이렇게까지 키리아의 신변을 염려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직접 살펴보시지 그래요?”


레렌의 권유에 넬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저는 사제인걸요.”


성직자는 숙녀의 방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고리타분한 교리.

이런 부분은 또 엄격하게 지키는 모양이었다.

레렌은 한숨을 쉬며 넬에게 다른 방법을 건넸다.


“그럼 제가 키리아를 봐드릴게요.”

“아, 그렇군요. 부탁해요, 레렌.”


그제야 안심했는지 활짝 웃어 보이는 넬.

레렌은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한편, 성당 2층에 마련된 키리아의 방안은 아직도 어두웠다.

빛을 거부하듯 쳐진 두꺼운 커튼 탓인가?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의 분위기가 전해지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고자 창문을 활짝 열어볼 법도 했을 텐데···.

이 방의 주인은 여전히 그늘진 어둠을 방안에 머물게 하고 있었다.


‘인간의 보금자리도 썩 괜찮지 않아?’

‘뭐가 말이냐?’


소녀.

아니 소녀의 모습으로 둔갑한 요괴는 나름대로 자신의 아침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환기가 되지 않아서 방안에 먼지가 떠돌아도, 벽면에 눌러 붙은 눅눅한 곰팡이의 냄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적을 즐기고 있었다.


‘이불이나 침대··· 라던가?’

‘또 인간 탐구 시작이냐? 그딴 거 아무래도 좋아. 아무리 나빠도 동굴 속보단 좋겠지.’


키리아는 평소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휴식을 취했는지를 떠올렸다.

습기가 찬 동굴.

나무와 진흙 냄새가 나는 숲속에 몸을 감추고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하루.

그리고 다시 배가 고파질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잠은 자지 않는다.

애초에 잘 필요가 없다.

요괴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굉장히 안정적이야.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게 마음에 들어.’


이곳에서는 벽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준다.

신경을 거스르는 짐승의 울음소리도.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불은 포근하고 따뜻해서 물컹한 진흙 덩이의 감촉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어두운 방안에서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 야생의 긴장이 풀어진단 사실이 요괴로서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키리아는 그만큼 안정된 상태였다.


‘후후후, 시끄러운 녀석들이 없으니까 너무 좋아, 계속 이렇게 있고 싶어.’

‘다 네가 자처한 일이잖아?’

‘여행에는 고난이 있기에 즐길 거리도 있는 법.’

‘그건 또 어떤 멍청이의 헛소리야? 제기랄, 관두자. 이 논쟁도 슬슬 지겨 우니까.’

‘···잠깐.’

‘나는 질렸다고 했다.’

‘그게 아냐. 뭔가 있어.’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미세한 진동.

하지만 알아차렸다.

요괴의 초월적인 감각이 침대 아래에서 꿈틀 거리는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었다.

곧 키리아의 눈은 그것을 포착해냈다.


“찍, 찌직.”


기묘한 소리의 정체는 자그마한 짐승.

그것은 회색과 갈색이 뒤섞인 털가죽을 가진 자그마한 쥐였다.

키리아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진홍빛 눈동자로 침대 밑에서 나올락 말락 망설이는 동물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었다.

짧은 관찰에도 키리아는 금세 쥐의 행동이 별로 민첩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작은 새끼였기에.

새끼 쥐의 목적은 레렌이 올려둔 창가의 사과인가?

집요하게 그 방향으로 코끝을 향하고 있었다.


“끽!”


안전을 확인한 쥐가 벽을 타기위해 그늘에서 튀어나온 순간.

소녀의 팔이 채찍처럼 뻗어나갔다.

그리고 쥐의 몸뚱이는 어느새 키리아의 손아귀에 잡혀 들어와 있었다.


“흥, 역겨운 열매지만 저건 어디까지나 나의 것이야. 감히 내 물건을 탐내다니 건방진 녀석이네.”


알아들었을 리 없건만 쥐에게 독설을 건네는 키리아였다.


“뭐야? 좀 더 반항해봐.”


쥐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움찔거리기만 할뿐이다.

키리아가 쥐를 낚아채는 과정에서 뼈와 내장이 다친 것이었다.


“···시시해. 너 정말로 약해빠졌구나?”


죽어가는 것.

죽음을 기다리는 것.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것.

키리아의 입이 곡선을 그렸다.

여기서 키리아가 조금만 힘을 주면 이 작은 포유동물은 생명은 끊어질 것이었다.

지금 그 생과 사를 결정하는 것은 키리아 자신이었다.

키리아는 자신의 강함을 의심치 않았다.

으득, 으드득.

작은 소녀의 손바닥 안에서 어린 쥐의 늑골이 으깨졌다.

그리고 키리아는 그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집어삼켰다.

으적거리는 소리가 요괴의 입안에서 울렸다.


“···간에 기별도 안 가.”

“킥킥, 그래도 저 사과 따위보단 괜찮겠지.”

“응. 당분간 간식거리는 걱정 없겠어.”


이 오래된 집에 쥐가 한 마리만 있을 리는 없다.

입이 심심하면 씹을 만한 뭔가가 생겼다는 사실에 키리아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키리아가 걱정하던 또다른 불청객이 찾아왔다.

덜컹.

키리아는 그것이 아래층의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소리임을 금세 알아챘다.


“칫, 좀 더 내버려뒀으면 좋으련만···.”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이어지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 앞까지 다다랐다.

어제를 떠올리며 또 얼마나 시달리게 될지 걱정이 앞서는 키리아였다.


“자는 척이라도 하지?”

“그거 좋은 생각이야, 언니.”


키리아는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안녕, 키리아! 내가 왔어! 레렌 언니란다! ···어, 아직 자고 있니?”


그래!

자는 중이니까 얼른 나가!

내 안식을 방해하지 마!

키리아는 속으로 그렇게 읊조렸다.

그런데···.


“키리··· 히, 꺄아아아아악!?”

“이, 이익?!”


슬쩍 문을 열고 들어온 레렌은 키리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덩달아 갑작스런 큰소리에 키리아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소리를 지른 것인지 알 수 없어.

소녀는 털이 곤두선 고양이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레렌은 키리아의 양 어깨를 잡았다.


“키, 키리아 너 괜찮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요괴는 식겁한다.


‘너야말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야?!’


키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렌은 겨우 안심했는지.


“아휴, 정말···.”


앞치마 주머니에서 천 조각을 꺼내는 레렌.

헝겊.

손수건인가?

키리아는 그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으읍.”


하지만 키리아는 레렌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입가를 감싸는 부드러운 감촉이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키리아는 아직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떡해, 이렇게나 흥건히···.”


레렌이 닦아낸 손수건의 표면에는 붉은 얼룩이 져있었다.

그것은 키리아가 쥐를 잡아먹었을 때 묻었던 피였다.


“키리아, 너···.”


키리아를 대하는 레렌의 눈빛이 달라졌다.

키리아는 긴장했다.

살아있는 짐승을 잡아먹은 것이 들켜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키리아는 당장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인간의 놀이는 여기에서 끝이 나는 것일까?

아직 받은 옷은 한 벌 뿐이고, 글조차 배우지도 못했는데···.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키리아의 예상은 다른 길로 들어갔다.


“병까지 있었으면서 왜 말해주지 않은 거니?”

“하?”


또 다시 새로운 오해가 늘어난 것에 키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상황은 급진전되어 레렌은 넬을 불러내 피가 묻은 손수건을 보여주며 침실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아침 무렵부터 성당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럴수가··· 키리아 양에게 지병이 있으셨다니.”

“미안해, 키리아··· 난 그것도 모르고 어젠 찬물로···.”


키리아는 난처했다.

조금 전의 손수건 사건 이후부터 쭈욱 넬과 레렌이 자신을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큭, 크크크큭! 이것들은 정말···.’

‘웃지 마···.’

‘왜? 어떻게든 잘 넘어갔지 않냐? 지들끼리 착각해선.’

‘닥쳐. 죽여 버린다.’


키리아의 평온이 부서지는 것은 불과 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오지랖 넓은 레렌은 이미 한참 전에 키리아가 각혈을 했단 것을 일러바쳤다.

그리고 넬은 곧 키리아의 맥을 짚고 머리에 손을 대보더니 깊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폐병이라고?’


지금 키리아의 몸은 단지 인간의 모습으로 끼워 맞춘 것뿐이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같은 체온과 맥박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공교롭게도 키리아를 병자로 몰고 갈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말았다.

변방에서 질병은 심각한 문제다.

온갖 암흑의 괴물들과 미신이 넘쳐나는 이 세계에 체계적인 의학은 기대할 수 없어.

미비한 감기만으로도 목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사람들은 이러한 병이 생겨나는 원인조차 요괴의 탓으로 돌려버릴 만큼 질병에 무지했다.

그렇기에 병은 재앙.

특히나 전염성을 가진 결핵은 변방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여기서 병에 걸렸다는 걸 인정하면 마을에서 쫓겨날 지도 몰라.’

‘하지만 쥐를 잡아먹었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


키리아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렌과 넬의 시선이 껄끄럽기만 했다.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동정심은 불편했다.

넬과 레렌의 관심은 키리아에게 독이나 다름없었다.


“어째서 이 어린 소녀에게 이토록 험한 시련을···.”

“정말 너무해요. 키리아는 이제 겨우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들에게 납치되어 욕을 보인 것도 모자라 깊은 병을 가진 소녀.

괴상한 설정이 추가 되었다.

키리아는 자신의 처지에 질려버릴 지경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을 거듭했다.


‘아니야, 이거 어쩌면···.’


그리고 그때.

영악한 요괴는 또 한 번 지혜를 짜냈다.

왼손을 말아 쥐고 입가로 가져다대더니.


“콜록.”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키리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키리아!”

“키리아 양, 괜찮아요?


어색한 연기였지만 넬과 레렌에겐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층 걱정스럽게 키리아를 바라봤다.

키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끝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일부러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항상 그랬듯이 조금 쉬고 나면···.”

“항상 그랬다니··· 그럼 키리아 양은 어릴 적부터?”

“···네, 네에. 아직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고 신랄한 거짓말이 이어졌다.

예전부터 침대에서 생활하는 것이 익숙했다느니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부러웠다느니···.

가슴이 답답해질 때는 혼자 침대 위에서 푹 쉬면 다시 괜찮아졌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말한다.

사정을 모르는 두 사람은 갈수록 키리아에게 안타까운 생각이 커져만 갔다.


‘어이가 없군. 이게 통하다니.’

‘후후··· 이 녀석들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모양이니까.’


키리아는 안식을 취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둔다면 넬과 레렌이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둘 것이라 생각했다.


“저는··· 익숙해요. 그러니 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요괴는 겉으로 힘겨운 척 연기를 하면서 속으로는 영리한 자신을 한껏 칭찬했다.

어쩜 겉과 속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을까?

키리아는 능청스럽게 비극적인 여주인공을 연기했다.


“키리아 양···.”

“괜찮아요. 혼자가 익숙한 걸요.”


힘겨운 듯 미소를 짓는 것으로 마무리.

이것으로 넬과 레렌은 키리아의 지병을 받아들였음이 틀림없었다.

하나, 모든 것이 요괴의 계략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오히려······.


“···키리아아아아!”

“으힉?!”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은 어디로 흘려들은 것인지 키리아의 품으로 달려드는 레렌이었다.


“이 불쌍한 것! 왜 그런 슬픈 소릴 하는 거야?”

“히···.”

“앞으론 항상 이 언니가 옆에서 쭉 간호해줄 테니까··· 곁에 있어줄 테니까···.”


키리아의 계략은 오히려 레렌의 동정심을 폭발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아뿔싸, 눈가에 눈물마저 맺힌 채 키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자칭 언니의 손길에 키리아의 몸이 굳어졌다.


‘항상··· 뭐라고?’


키리아는 소름이 끼쳤다.

레렌이 줄곧 옆에 붙어 있는 것을 상상하자 속이 뒤틀린 것이다.

꿈에 그리던 혼자만의 시간은 갈수록 멀어져.

그것은 먹이를 며칠간 구하지 못했을 때와 같은 수준의 위기였다.

키리아는 지푸라기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넬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절박한지 울상이나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나의 개인 시간을 지켜줘!’


그래, 이 사제라면 알아줄 것이리라.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이고 안식이라는 것을.

하지만 키리아는 이만큼이나 당했음에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넬이야말로 자신의 평화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라는 사실을.


“그래요. 이제 쓸쓸해할 필요 없습니다, 키리아 양.”

“어··· 네에?”

“어릴 적부터 앓아온 병이라면··· 아마 남에게 옮기는 것이 아닐 거라 생각해요. 단순히 몸이 약한 것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혼자 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양손을 잡고 고개를 숙이는 넬.

사제는 진심으로 벅찬 마음을 키리아에게 전하고 있었다.


“비록 부족한 저이지만··· 키리아 양이 건강해질 수 있도록 최대한 돕겠습니다. 몸이 약한 학생들을 많이 접하면서 작게나마 약초에 대한 지식이 있으니 이웃 마을에라도, 아니 수도에라도 손을 뻗어서 약제를 구해오겠어요. 아, 그렇지!”


넬은 갑자기 손바닥을 탁 치더니.


“그러고 보니 마침 기관지에 좋은 차가 있습니다.”

“아유, 사제님도 참! 그런 걸 이제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차.

그걸로 키리아의 이성은 하얗게 변해버렸다.


“파뿌리와 생강을 함께 우려내면 피를 맑게 만들어주고 소화가 잘 되도록 돕는 효과가···.”

“잘 됐다, 키리아!”


키리아는 각오해야만 했다.

차라면, 식물의 잎이나 뿌리를 말려서 우려내는 물이 아닌가?

전날 먹은 사과의 충격을 요괴는 잊지 않았다.

이제 인간의 음식은 미지의 공포나 다름없었다.


“저를 믿으세요. 틀림없이 효과가 있으니까요. 앞으로 매일 마다 꾸준히 드신다면 증상이 많이 나아질 겁니다.”

“매일? 꾸준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키리아는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작가의말

분량이 펑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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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전기 키리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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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에필로그 +2 21.06.25 109 8 10쪽
41 붉은 마수(6) +1 21.06.25 39 5 19쪽
40 붉은 마수(5) +2 21.06.23 38 5 18쪽
39 붉은 마수(4) +2 21.06.22 53 7 19쪽
38 붉은 마수(3) +2 21.06.20 35 8 12쪽
37 붉은 마수(2) 21.06.20 33 7 17쪽
36 붉은 마수(1) +2 21.06.10 44 7 19쪽
35 요조 로크(8) +3 21.06.09 46 9 12쪽
34 요조 로크(7) +2 21.06.08 44 10 14쪽
33 요조 로크(6) +2 21.06.03 51 8 13쪽
32 요조 로크(5) +3 21.06.01 41 8 17쪽
31 요조 로크(4) +3 21.05.31 44 8 19쪽
30 요조 로크(3) +2 21.05.29 49 7 18쪽
29 요조 로크(2) +2 21.05.28 43 8 15쪽
28 요조 로크(1) +4 21.05.27 48 8 13쪽
27 축제(8) +2 21.05.26 40 7 24쪽
26 축제(7) +2 21.05.25 48 7 13쪽
25 축제(6) +3 21.05.24 54 6 20쪽
24 축제(5) +4 21.05.23 58 10 25쪽
23 축제(4) +2 21.05.22 56 11 21쪽
22 축제(3) +2 21.05.21 57 11 17쪽
21 축제(2) +2 21.05.20 65 10 14쪽
20 축제(1) +4 21.05.19 72 12 19쪽
19 전야제(5) 21.05.19 45 11 15쪽
18 전야제(4) +2 21.05.18 58 13 12쪽
17 전야제(3) +5 21.05.18 54 11 17쪽
» 전야제(2) +3 21.05.17 71 12 23쪽
15 전야제(1) 21.05.17 57 12 18쪽
14 키리아(6) +3 21.05.16 69 1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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