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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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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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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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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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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키리아(6)

DUMMY

7.

하늘은 끔찍한 잿빛이.

지상에는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그것은 마치 의지를 가진 듯 움직여.

억누르던 빛이 물러가자마자 순식간에 세상을 뒤덮어 나갔다.

구름의 회색과 밤의 남색.

그 흐리고도 불길한 색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골목에서 끼리끼리 모여 장난을 치던 아이들은 물론, 낮부터 일하던 어른들 모두 한참 전에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집집마다 촛불이 하나 둘씩 꺼져간다.

사람들이, 마을이 잠들기 시작했다.

정적이 세상을 지배하자 달빛이 약하게나마 대지에 비친다.

마치 꿈속에서 바라보는 모습 마냥 어둠이 내린 마을은 평화롭기만 하다.

···고요한 밤이었다.

이틀 전 세 명의 남자가 처참하게 찢겨죽었다고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

밤이 몰고 온 정적을 깨뜨린 것은, 불만에 가득 찬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야, 앞으로 어쩔 셈이냐?”

“···뭘 말이야?”

“네가 원하던 옷은 받았잖아? 목적을 달성했는데 이 마을에 무슨 볼일이 있어?”

“아직 이야.”

“아니, 대체 왜?”

“부족해.”

“뭐야? 더러운 꼴을 보고도 아직 성에 안찼냐? 그 역겨운 나무 열매가 어지간히도 맘에 들었나보지?”

“그런 거 아니야.”


순풍에 구름이 흘러간다.

월광이 흩뿌려진다.

옅어진 장막의 틈으로 달의 조명 아래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보랏빛의 소녀가.


“아직··· 나는 녀석들에게 받아낼 것이 많아.”


시야를 가리지 않을 만큼 가지런히 잘린 앞머리가 이마에 작은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다.

새하얀 얼굴 아래.

새빨간 눈동자의 시선이 어딘가를 주시한다.

지금 키리아가 서있는 장소는 전날 밤 요괴에게 잡아먹힌 희생자들의 잔해가 발견된 장소였다.

소녀의 모습을 한 요괴는 바로 자신이 저지른 참사의 현상에 나타난 것이었다.

···일대는 정돈되어 있었다.

물을 퍼 나른 양동이와 도구들은 그대로였지만, 적어도 바닥에 검붉은 흔적 같은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당한 게 많단 말이야. 고작 이 옷가지 하나 받았다고 내가 만족할 거 같아?”

“너도 참 징하군.”

“그래. 여기서 물러나기엔 내 분이 안 풀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저질러볼까? 잔뜩 날뛰어 보셔. 마을 놈들에게 지옥을 보여주란 말이다. 바로 어제처럼!”

“···.”

“뭘 망설여? 설욕을 갚으라고, 자! 어서!”


뺨에서 돋아난 입이 표독스럽게 재촉했지만 정작 키리아는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래선 내가 지는 것 같잖아.”

“하? 모조리 죽이면 되는데 이기고 지고가 어디 있어? 명심해. 살아남는 게 강한 거다. 애초에 이 웃기지도 않는 놀이를 계속 이어갈 이유가 있냐?”

“난 아직 충분히 배우지 못했거든. 여기서 빠지면 얻은 것 없이 끝나버려. ···나 말이야, 어차피 놀이를 시작한 이상 끝까지 사람을 연기하기로 마음먹었어. 작정하고 놈들의 울타리에 들어가 줄 거야. 그리고··· 놈들이 나를 충분히 믿게 되었을 때 배신해주겠어.”

“호오?”

“그 계집애를, 사제 놈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처넣어줄 거야.”

“불필요한 짓거릴···.”

“나의 미학에는 인내가 필요한 거야.”

“또 그 잘나신 미학 타령.”

“어머? 경박하게 부르지 말아줘. 이제 나에겐 훌륭한 이름이 있으니까.”

“···설마 내게도 키리아란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거냐?”

“응.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어.”

“돌았냐? 아주 놀고 자빠졌군, 그래.”

“맞아. 이건 놀이야. 아주 즐거운 장난이지. 그러니까 언니도 맞장구 쳐 줘.”

“체, 네 맘대로 해라. 오늘처럼 망할 고생이나 실컷해버리라고!”

“응. 정말 힘 들었지. 솔직히 말해서 오늘만큼이나 밤을 기다린 적은 없었어.”


낮 동안 하루 종일 성당의 방에서 생활했던 키리아는 오늘따라 특히 어둠을 그리워했다.

월광이 좋다.

공기가 가라앉는 정적의 때야말로, 키리아를 비롯한 모든 랑페르에서 흘러온 자들에게 안식의 시간이었다.


“후우···.”


키리아는 슬쩍 발을 구르더니 소리도 없이 땅을 박찼다.

소녀의 몸은 하늘로 튕겨 올라 삼 미터도 넘는 골목의 담을 장난처럼 넘어 그 위로 가볍게 올라섰다.

마치 고양잇과 동물과도 같은 몸놀림.

소녀는 자신의 자유를 확인한 것이 기쁜 지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아래를 바라봤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새벽이 되면 홀연히 사라져버릴 이 기분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 키리아는 슬쩍 눈을 감고 양쪽으로 팔을 뻗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달을 등지고 기지개를 펴는 키리아의 모습은 마치 어둠을 한껏 빨아들이는 듯 보였다.

해방감과 더불어 키리아의 몸 안에 밤의 기운이 충만해져갔다.

공기가 가라앉고 랑페르의 존재만이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차오른다.

키리아는 그것을 어둠의 맛, 밤의 향기라 불렀다.

인간의 냄새가 여기저기 섞여있었지만 그건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루 종일 넬과 레렌과 지내며 사람의 체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잠깐, 익숙해져있다? 내가 인간에 익숙해졌다고?’


갑자기 키리아가 눈을 뜨더니 방금 전까지 편안하기만 하던 미간이 슬쩍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기분이 나빠 불쾌한 표정을 지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까지 생각지 못하던 놀라움 때문이었다.

시선을 아래 향해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작고 가는 손가락이 다섯 개, 모두 자신의 의사대로 움직인다.

그 손으로 들어 올려 얼굴로 향한다. 손끝에서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다.

요괴는 물속에 비춰봤을 때 보았던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

위화감.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키리아의 눈에 보이는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중요한 사실을 요괴는 지금에야 자각할 수 있었다.

키리아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혼란스러운 하루.

평소 산이나 동굴에 들어가 밤이 질 때까지 잠을 자기만 하던 키리아였기에, 인간과 함께 부대낀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졌다.

넬과 마을 사람들의 우스운 착각과 내키지 않는 열매를 어쩔 수 없이 집어삼킨 것.

집요하게 들러붙는 레렌을 밀어냈던 일···.


“너, 의외로 즐기고 있는 거 아니냐? 뭐라고 했지? 새로운 경험?”

“글쎄.”


키리아는 하루종일 시간동안 인간을 바로 앞에 두고서도 죽이지 않았다.

그들이 온갖 귀찮은 짓을 해도 입을 꾹 닫고 참아냈다.

지금까지 인간을 곁에 두고서 이렇게 오랫동안 지냈던 적이 있었던가?

그것은 키리아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넬과 레렌을 생각해낼 때마다 짜증이 몰려와.

자신이 겪은 굴욕적인 사건들이 몸서리치게 떠올랐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놀랍게도 당장 살의는 없다.

아직까지는 목적을 위해 참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키리아는 자신의 인내심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났음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상관없어. 이 대가는 반드시 값아 줄 테니까! 절대로 잊지 않고 기억해놓을 거야! 우선은 이 옷, 당장은 이걸로 조금 참아주도록 하겠어.”

“그냥 빼앗으면 편할 텐데.”

“그 주제로 너랑 입씨름하기 싫어.”

“받는다면 뭐가 다른 거냐?”

“나는 아직 인간의 미적 감각을 잘 모르니까.”


키리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작 옷 한 벌을 얻어냈을 분이지만 기분은 들떠있었다.

약탈한 것이 아닌, 상대의 호의가 담긴 선물.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요괴는 강하다.

아직 직접 대치해본 적은 없지만 인간의 군대와 맞선다고 해도 키리아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요괴라 할지라도 천을 재단하거나 바느질로 이어붙일 수는 없다.

키리아는 인간의 의복에 대해서는 일자무식.

때문에 어떤 옷을 입어야 아름다운지를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치장을 할 수 있는 인간 여성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괴는 자신이 레렌의 횡포를 참은 것이 백번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얻은 것은 있다.

앞으로 넬은 키리아가 가장 알고 싶어 하던 인간의 글자를 가르쳐 줄 거라 했다.

뿐만 아니라, 레렌도 집 안에 입지 않는 예쁜 옷들이 가득해.

그것을 키리아에게 모두 주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성당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단지 키리아는 아직 이 마을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인간을 끌어들이는데 좀 더 탁월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삼 년째, 여전히 세상에는 흥미거가 넘친다.

키리아는 매일같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나는 모르겠다. 네가 아무리 인간에 대해 배우고 공부해봐야 그 결과물은 전부 기껏해야 미인계 아니냐? 먼 훗날 인간들의 연회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거냐? 화류계의 졸부들 고기 맛이 궁금한가?”

“나는 궁금할 뿐이야.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내가 누구인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요괴는 무엇이고 인간은 또 뭔지. 그러려면 정보가 필요해. 지식도, 지혜도 말이야. 인간들은 그런 걸 추구하는 부류가 많지?”

“철학자 다 되셨군.”

“너는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


또 하나의 입은 키리아의 질문에 잠깐 신음하더니.


“···없다. 나는 요괴야. 죽이고 먹는 것 외에 뭘 더 생각해야 하냐? 그딴 시시한 고민 따윈 해본 적도 없어.”

“흥, 언니는 역시 시시한 개체야.”

“큭큭, 최근 일들이 썩 지루하진 않았다고는 말해주마.”

“어머나, 그건 의외네?”


소녀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생겨났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만일 내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이 몸을 넬 녀석에게 보여준다면 어떻게 될까?”

“호오?”

“사제란 족속은 욕구를 참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놈들이니까 반응이 볼만 할 거야. 어린애같이 양손을 눈으로 가리고 미안하다며 사과할까? 그렇지, 레렌 계집애도 넬 녀석에게 마음이 있던 것 같으니 그런 일이 생기면 정말 우스울 거야. 후후···.”

“또 한 차례 만담이 벌어지겠지.”


당황스러워하는 넬과 그런 사제을 야단치는 레렌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키리아였다.

요괴는 눈을 가들게 뜨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은 유치한 상상.

소심한 스트레스 발산이었다.

넬과 레렌에게 낮 동안 휘둘렸기 때문에 이런 망상으로라도 복수해주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 줄까? 내가 사라져서 사제 녀석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것도 좋겠지만,”

“킥킥, 그랬다간 괜히 시끄러워질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인간의 수컷은 모두 똑같다는 말이 있어. 녀석이 밤새 내 방에 몰래 들어오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잖아.”

“그런가?”


아마 아닐 것이다.

키리아와 공생하는 또 다른 존재는 넬의 본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 사내가 상상 이상의 도덕적 엄격함을 지키는 부류라는 걸.

키리아가 짓궂은 소릴 꺼낸 까닭은, 단지 유치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야.”

“키리아라니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그보다 너 말이야.”

“뭐가?”

“아까부터 왜 쪼게고 앉아있냐?”

“아?”


그 말에 키리아는 자신의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입술이 작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신기한 기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짜증을 내고 있었다는 것이 의심스러운, 이상하다는 말 이외엔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가볍고 일순간 흘러가는 바람과 같은 유쾌한 기분.

혼란스러우면서도 조금 들뜬 것 같이 느껴졌다.

키리아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충분히 밤의 기운을 만끽해 자신이 만족한 것이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키리아는 당장 걷지 않고 느닷없이 위를 바라보았다.

벽 너머로 높이 솟은 한 건물의 모습이 소녀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성당 건물이었다.

목표를 향해 소녀는 날아올랐다.

깃털과 같이 가벼운 몸놀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재빠르게 지붕 위로 도약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소녀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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