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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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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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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축제(1)

DUMMY

1.

레렌은 새벽이 되어서도 깊게 잠들지 못했다.

밤은 싫고 어둠은 무서워.

하지만 소녀의 들뜬 마음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리도 없었다.


이제 해가 뜨면 축제날이 온다.

그것은 오직 일 년에 단 하루뿐인 여신의 날.

겨울 동안 움츠려있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광장에 모여 웃고 떠드는 즐거운 행사···.

그리고 사모하는 넬 사제와 함께 보내는 첫 축제였다.


소녀는 꿈속에서도 소망했다.

사람들이 그간 음울하고 무기력하게 지내던 나날들을 털어버리고 활기차게 웃을 수 있기를.

여명의 손길이 닿아 어서 축제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덧붙여 사제와의 관계도 한 걸음나아가기를.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어둠을 가르는 여명과 함께 새벽이 찾아온다.

햇살이 창가를 넘어 침대에 닿자 곤히 잠든 레렌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아침은 소녀의 얼굴에서 그늘을 몰아냈다.

그리고 소녀의 순진한 영혼까지 불러냈다.


“···으응.”


반쯤 감긴 눈이 아침을 받아들인다.

레렌은 몽롱한 꿈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아침을 맞이했다.


“어, 어라? ···엄마아아아?!”


갑자기 소녀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덮고 있던 이불이 침대 아래로 떨어져도.

지금 자신의 차림새가 잠옷인 원피스 한 벌과 속옷 하의 한 장뿐이라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달려갔다.


“이제 일어났니?”


알리시아가 웃으며 부엌에서 아침인사를 건넸지만.

레렌은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너무해요! 왜 안 깨워준 거예요?”

“뭐 어떠니. 오늘은 일도 없잖니. 무엇보다 축제날인데.”

“그러니까 더! 더! 일찍 일어나야죠!”

“얘는··· 몸단장은 지금부터 해도 늦지 않아. 아니면 어제 늦게까지 이것저것 옷 입어보던 것만으론 부족하니?”

“아니에요! 저만 치장하는 게 아니라요, 키리아도 꾸며주기로 했단 말이에요!”

“키리···? 아하, 요괴 사건의 그 아이 말이구나?”


자신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여유 넘치는 알리시아의 태도에 레렌은 더 심통이 났다.


“약속했단 말이에요! 언니니까 제대로 돌봐주어야 하는데···.”

“벌써 늦어버린 걸 어떡하니? 편하게 생각하렴.”

“우으, 사제님도 게으른 여자애라고 생각할거 라고요···.”


이번에는 시무룩한 얼굴이 된 레렌.

알리시아는 그런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걱정할 필요 없단다. 성당에는 네프리티나가 먼저 갔으니까.”


그 순간, 레렌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네, 네프 언니가요?”

“그래, 조나단이랑 캐시도 올해엔 제대로 세례 받아야지. 너도 잘 알잖니? 그간 성당의 주인이 없어서 못했었으니까. 어제 나한테 그러더구나, 오늘처럼 가장 기쁜 날에 축복을 받고 싶다고. 겸사겸사 그 아이의 몸단장도 함께 도와준다던데?”

“쳇, 이 불여우···.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치다니.”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네프리티나는 그 아가씨랑 같은 서쪽 출신이라 돌보아주려는 것뿐이야.”

“그 아줌마는 아이가 둘이나 있으면서 주책이잖아요! 분명 사제님을 노리고 있는 거야!”

“얘, 레렌?”

“흥, 몰라요! 안 그래도 얼굴이 나이에 안 맞게 너무 젊어! 전에 마을 아저씨들 여럿 홀렸던 걸 잊으신 건 아니죠?”

“동안으로 태어난 게 네프의 잘못은 아니잖니?”

“셈난다고요!”

“후후, 질투하는 건 이해한다만.”

“으으, 분해요! ···어라,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 안돌아오셨어요?”

“그렇네. 그이는 아직 소식이 없단다.”

“별일이네요? 언제나 축제 당일 날 아침까진 오셨었는데··· 웬일로 올해는 늦으시지?”

“글쎄? 작년보다 짐이 많아졌는지도 모르지. 케빈이 고집피워서 무리하게 작물을 많이 싣고 갔잖니?”

“아, 맞다. 케빈 오빠도 함께였었죠? 두 사람은 은근히 죽이 잘 맞으니까 이웃마을 관광이라도 하고 오는 걸까요?”

“그럴 지도? 그보다 레렌··· 너 지금 꼴이 아주 우스운 거 아니?”

“네? 뭐가요?”

“아, 아니다. 됐어. 음, 그래도 그건 좀···.”

“이따가 말씀해주세요. 저는 지금 바쁘다고요!”


소녀는 어머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몸을 획 돌려버렸다.

알리시아는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누굴 닮아서 저리 방정이람.”


걱정 많은 어머니는 차마 지금 딸의 잠옷 원피스 뒤가 말려 올라간 것을 말해줄 수 없었다.

다 큰 처자가 천한 장만 두른 채 엉덩이를 내놓고 허겁지겁 집안을 돌아다니는 꼴이라니.


‘하아, 역시 아직 철부지 어린애야. 축제에 들뜬 것만으로 잠을 뒤척이다 늦잠을 자다니.’


알리시아는 기도했다.

가능하면 상처받지 않기를.

딸아이가 바라는 사랑을 쟁취할 수 있기를···.


‘여신이시여, 저 아이의 미소야말로 저의, 아니··· 우리 마을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부디 해럴드, 그이도 무사히 돌아와 주길.’



2.

한스는 일찌감치 일어나 마을남자들과 함께 술을 옮겼다.

전날 마을 중앙광장에 배치해둔 나무 탁자들 위로 술 단지를 올리는 것이 사내들의 몫.

이후에 그 옆을 음식으로 장식하는 것이 여자들의 일이었다.

한스는 지금 막 마지막 술통을 내려놓고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땀이 다 날 정도야.

한스는 그제야 날씨가 따뜻해진 걸 실감했다.


“야야, 작은 친구. 마른 몸치곤 힘 좀 쓰는데?”

“···그거 비꼬시는 거죠?”


 쩌렁쩌렁 울리는 호쾌한 목소리.

돌아본 소년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고가 양팔 위의 어마어마한 짐들 때문이었다.


무슨 힘이 이토록 무지막지한지.

이 기막힌 악사는 한스가 겨우겨우 들고 온 술통보다 서넛 배는 더 큰 것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말이다.


“아, 그건 이쪽으로··· 도와드릴까요?”

“아냐. 괜찮으니까 옆으로나 좀 물러나.”


유고는 별 것 아닌 듯 슬쩍 몸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간단히 술통을 탁자 위에 올렸다.

원채 키가 크기에 가능한 묘기 아닌 묘기였다.

한스를 비롯한 마을 남자들은 기가 막혔다.


“허허, 형씨는 역시 평범한 악사가 아니야.”

“아앙?”

“그렇잖아요. 저는 타지의 전투사도 아저씨만큼 힘 쌘 사람은 본 적 없어요. 악사일리 없어요.”

“너무하군. 도련님은 어젠 연주까지 들려줬는데 아직도 그런 소릴 하는 거냐?”

“그래도 못 믿겠어요.”

“그래, 연주는 덤이겠지. 사실은 뭔가 위험한 일을 하는 양반인거야.”

“거참 이 사람들 의심도 많네. 오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줘야 겠구만! 아직 축제 시작하기 전이지만 살짝 보여주지.”


유고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더니 자신의 악기를 앞으로 쓱 빼냈다.


“행, 도련님. 어젠 맛보기에 불과했다고. 이제 제대로 된 진짜 음악을···.”

“앗.”


한스가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지르자 유고는 씩 웃었다.


“뭐야?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그렇게 놀랄 필요 없···.”


하지만 한스가 놀란 까닭은 유고 때문이 아니었다.


악사는 멀리서 광장으로 달려오는 누군가를 보고서 겨우 그 원인을 깨달았다.

엷은 색의 금발을 뒤로 묶고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어여쁜 소녀가 있었다.

바로 레렌이었다.


“아주 멋진 아가씨잖아? 이봐, 도련님? 뭘 그렇게 넋을 잃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응? 뭐하는 거야?”


레렌이 다가오자 한스는 슬그머니 유고의 뒤로 몸을 숨겼다.

소녀가 광장에 다다르자 마을 남자들이 손을 흔들었다.


“다들 안녕하세요!”

“레렌, 오늘도 힘이 넘치는구나.”

“에헤헤!”

“오늘도 성당부터 먼저 가는 거냐? 아아, 이거 사제님이 부럽군. 내가 10년만 젊었더라면.”

“림블 아저씨, 자꾸 짓궂은 말씀 하시면 엘자 언니한테 이를 거예요?”

“으힛힛. 괜찮아, 괜찮아. 우리 엘자는 마음이 넓은 여자거든.”

“정신 차려, 임마! 시작부터 취했냐? 레렌, 좀 봐주렴. 오늘은 축제잖니?”

“안 봐줘요! 오늘 여자들끼리 소문 다 퍼트릴 테니까 각오해요.”


메에, 레렌이 혀를 배꼼 내밀어 보이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한스만은 안절부절 못하고 유고의 다리 너머로 레렌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닌데! 어쨌든 이 바보 아저씨들, 축제날이라고 너무 퍼마시지들 말아요!”

“아하핫, 모두 들었냐? 레렌 아가씨가 우리더러 적당히 마시라고 한다!”


서둘러 다시 걸음을 옮기는 레렌이었다.

소녀가 먼발치까지 가버리고 나서야 소년은 악사의 뒤에서 나왔다.


“아하, 그랬구만. 저 아이가 바로···.”


예리한 감이라고까지 할 것도 없이 유고는 한스의 반응을 보고 한눈에 알아챘다.

악사는 실실 웃으며 소년의 등을 손바닥으로 살짝 밀었다.


“도련님, 저 아가씨한테 마음이 있는 거지?”


한스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제가 왜 저런 말괄량이를···.”

“척보면 알아. 척보면. 보아하니 어제 저기압이었던 것도 저 여자애 때문이었군.”

“아, 아아아뇨. 아니에요. 그런 거랑은 상관없다고요!”

“핫핫핫, 좋을 때야. 청춘이구만, 도련님.”

“아니래도요!”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다.

이제는 축제의 개막을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3.

성당.

새벽기도를 막 끝낸 넬은 부엌으로 들어가 차를 준비했다.


흘러나오는 향취가 끝내줘.

평소보다 잘 우려진 것 같아, 사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탁상 위에 올라온 찻잔은 세 개.

하나는 말할 필요도 없이 넬 사제 본인의 것.

두 번째는 매일 아침마다 성당을 찾는 귀여운 손님의 것.

그리고 마지막 한 개는 성당에 머무는 새 가족의 것이었다.


“슬슬 레렌이 올 시간이 됐는데···.”


성당 문을 바라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습관이 되었나?

사제는 소녀의 활기찬 인사를 맞이해야만 비로소 아침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넬은 레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음?”


툭툭, 성당 입구에서 울리는 노크에 넬은 살짝 의아했다.

레렌이라면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를 건넸을 텐데 굳이 문을 두드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황하는 사이 다시 한 번 노크가 울렸다.

그 재촉에 사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의 손잡이를 당겼다.

벌어진 문틈 너머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프리티나였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사제님.”


넬은 의외의 손님의 등장에 놀라긴 했지만 금세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정하게 인사했다.


“아, 어서 오세요. 네프리티나 양, 이 시간에는 웬일이십니까?”

“왜요? 레렌이 아니라서 실망하셨나요? 후후후···.”


짓궂은 농담에 넬은 난처하게 웃었다.


“설마요? 어서 들어오시죠. 아직 밖은 쌀쌀합니다.”

“예. 그럼 실례할게요. 자, 얘들아. 얼른 이리 오렴.”


문 너머에 있는 누군가에게로 네프리티나가 손짓하자, 넬은 그녀 말고도 다른 동행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당장 사제의 시선에 비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네프리티나와 함께 성당을 찾은 손님들은 키가 작았기 때문에.


사제가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작달막한 두 방문객과 눈이 마주쳤다.


“네프리티나 양. 이 아이들은?”


네프리티나 옆에는 열 두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그보단 조금 더 어려보이는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조나단과 캐서린이랍니다.”


두 아이는 낯선 사제에게 위축되어있었다.

넬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반갑다. 나는 넬 노튼 사제라고 한단다.”

“얘들아. 너희도 인사해야지?”


네프리티나의 조름에 아이들은 마지못해.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소년이 말하자 뒤늦게 소녀도 따라 인사한다.

네프리티나는 그걸로 기특하다는 듯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귀여운 아이들이네요. 오늘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군요.”

“네? 동생들요? 후훗···.”


여인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사제가 의아해하자 여인은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사제님도 뭘 오해하고 계신담. 존과 캐시는 제 자식들이랍니다.”

“네?”


넬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렇게 놀라실 줄이야. 레렌이 아무 말도 안했나 봐요?”


입가를 가린 채 짓궂게 웃는 네프리티나.

넬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두 아이와 여인을 번갈아봤다.


“아··· 어? 전혀 몰랐습니다. 설마하니 이렇게 젊고 아름다우신 분이 두 아이의 어머니셨다니···.”

“후후, 별로 숨길 생각은 아니었는데 죄송하게 됐어요.”

“아닙니다. 그건 제가 멋대로 착각한 건데요. ···그랬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네프리티나 양, 아니 부인은 정말로 어머니셨군요. 부디 그간의 제 무례함을 용서하시길.”


넬은 이틀 전 네프리티나와 나눈 대화에서 큰 실례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칫 아이를 가진 부녀자에게 추파를 던진 것처럼 비췄을지도 몰라.

유부녀에게 추대를 부리는 것은 사제로서 해선 안 될 행동이었다.


“괜찮아요. 젊어 보인다는 말을 싫어하는 여인네는 없으니까요. 저는 오히려 기분 좋았는걸요. 후후···.”

“부군께도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그분과도 함께 오셨습니까?”


넬의 질문에 네프리티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얘, 존. 캐시 데리고 잠깐 광장에서 놀고 있을래?”

“엄마는요?”

“나는 사제님이랑 할 이야기가 좀 있단다.”

“우리 과자랑 음식 먹고 있어도 돼?”

“그럼, 축제 시작하기 전까지는 나갈 테니까 동생 잘 돌보고 있어야 한다.”


조나단은 네프리티나의 말에 순순히 여동생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의 모습이 멀어지고 나서야 네프리티나는 입을 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남편과 사별한 지 십년이 넘었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넬은 거듭 고개를 숙였다.

네프리티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마세요. 저는 별로 신경 안 쓰는걸요. 오래 전에 떠나보낸 사람인데다가 사제님이 젊게 봐주셔서 이 미망인은 정말 기뻤답니다. 오히려 감사드리고 싶을 정도네요.”

“그래도···.”

“사제님은 그나마 점잖으신 거예요. 짓궂은 마을 사내들은 매번 절 볼 때마다 상스런 농을 던진답니다. 아, 모든 사내들이 사제님만 같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부인···.”

“어머나, 이제는 양을 붙여주지 않으시나요?”

“예, 예?”

“아, 슬프네요. 그저께는 숙녀, 아가씨처럼 대해주셨는데 오늘은···.”


넬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러났다.

그런 사제의 반응이 즐거운지, 네프티나는 연신 킥킥 웃었다.

자신의 말처럼 자신이 미망인이라는 것을 별로 상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오늘도 사제님께 부탁을 드리러 왔답니다.”

“부탁···인가요?”

“사실 저희 아들은 아직 교단의 세례를 받지 못했거든요. 그간 이 성당에는 주인이 없어서 여신의 손길을 줄 수 없어서요. 이웃마을까지 가서 의식을 치루기도 애매해서··· 저,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아, 예에···.”


넬은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사제님?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글쎄요. 세례라, 그게 꼭 필요한 것인지 고민이 좀 되는군요.”


사제가 할 말이 아니야.

네프리티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신의 세례는 변방의 어느 누구나에게 필요한 게 아닌가요?”


사제는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의식은 상징적인 것, 본질을 깨닫기 위한 과정일 뿐. 저희 사제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습니다. 마술 주문같이 길고 복잡한 기도문을 외우는 것은 사실 그 안에 숨겨진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죠. 세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축복을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의식이라고들 하지만··· 저는 조금 생각이 달라요. 사실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굳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려운 이야기네요.”

“죄송합니다. 축약하면 이렇군요. 여신이 저희를 진정 사랑한다면 저희가 그 존재를 믿고 의지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분은 저희들을 돌볼 겁니다. 여신은 무한한 사랑을 가진, 유구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존재라고 하니까요. 세례를 받던 아니던··· 언제나 만인에게 동등한 축복을 베풀 겁니다. 저 아이들은 굳이 세례 같은 걸 받지 않아도 충분히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네프리티나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건 세례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입니다. 제 생각엔 의식은 불필요할 것 같군요.”


넬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네프리티나에게 그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보였다.


“그렇군요. 사제님은 견해가 남다르신 것 같네요. 세례가 필요 없다니···.”

“제가 주제넘은 말은 한건 아닐지 모르겠군요. 원하신다면 아이들에게 의식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괜찮을 것 같네요. 사제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것도 알 것 같아요. 그렇군요. 정말 여신께서 자애로운 존재시라면 저희가 무슨 마음을 먹던 축복해주실 테니까.”


네프리티나가 싱긋 웃어보이자 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자신 있는 긍정은 아니었지만 여인은 그것으로 충분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걸로 아이들 일은 끝났네요.”


네프리티나의 말은 넬에게 또 다른 볼일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넬의 얼굴에 의문이 번지자 네프리티나는 말을 이었다.


“그 아이, 키리아라고 했었던가요?”

“예에, 키리아 양입니다.”

“좀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몸단장 해주려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프리티나가 직접 말인가요?”


넬은 곧 레렌이 키리아를 치장해주러 올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네프리티나는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실은, 제가 그 아이랑 같은 서쪽 출신이거든요.”

“아, 그러셨나요? 키리아 양과 같은···.”

“그래요.”


네프리티나는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손가락을 타고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갈색 머리칼이 일순간 그녀의 눈가 주위에서 흔들렸다.

넬의 착각이었을까?

순간 네프리티나의 푸른 눈동자가 일렁인 것만 같았다.


“저희는 같은 곳에서 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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