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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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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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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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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축제(6)

DUMMY

11.

“휴우, 이 맛에 음악을 그만두질 못한다니까. 정말 수고했어, 도련님.”


구경꾼이 슬슬 흩어지고 나서 유고가 한스의 등을 살짝 후리며 말했다.

그래도 역시 덩치에 걸맞게 힘이 실렸는지, 한스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으··· 됐어요. 고생은 유고 형이 했죠.”

“아니야. 도련님이 없었으면 이 즉흥극의 웃음거리가 많이 줄었을 걸? 야, 내년에도 부탁해.”

“으··· 다신 안 할 거예요.”

“에이, 그러지 말고. 이번엔 진짜로 성장한 스팬서경의 역을 줄 테니까!”


한스는 질색하며 유고를 피했다.

그리곤 공연 때 무기 대신으로 사용했던 빗자루를 돌려주고 온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버린다.


“사제 형씨도 멋졌어. 이제 다 큰 사내들끼리 뒤풀이나 할까? 같이 마시자고.”


두 사내만 덩그러니 남겨지자 유고는 이번엔 넉살좋게 넬의 어깨에도 손을 올렸다.

다행히 사제는 불편한 기색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고개를 저으며.


“죄송합니다. 사제의 몸이라 술은 마실 수 없습니다.”

“아차, 그렇지. 아무래도 교리 때문에?”

“그렇죠.”

“이런, 이런.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도 말인가? 사제란 재미없는 직업이구만.”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캬, 솔직한 양반이구만. 형씨 마음에 드는데?”


두 사내는 금세 친해졌다.

이방인끼리라는 무의식적인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허물없는 인간됨됨이를 가진 두 사람 사이의 유대였을까?


“이제와 말씀드리지만 정말 멋진 각본이었습니다.”

“에이, 너무 칭찬하지 말라고.”

“빈말이 아닙니다. 극단에 자주 초대를 받아서 꽤 자주 연극을 봤지만 대부분 격식이나 억지 기품으로 꾸민 것들뿐이었거든요. 무대는 화려하지만 그런 건 지루하기만할 뿐이죠. 그에 반해 악사님의 이야기는 훌륭했습니다. 자연스러운 흥미 유도에··· 과격한 연출까지. 모두들 재미있게 즐겼으니까요.”

“지나치게 호평 받으니 이거 기분이 묘하구만.”

“음유시인처럼 책을 써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하하, 그건 안 돼. 난 무대 채질이라 당장 사람들 앞이 아니면 연주도, 이야기도 잘 안 풀리거든. 이런 연극을 할 때도 같은 이야기는 못해. 주제가 정해져있다고 해도 매번 새로운 이야기지. 그냥 하는 게 편해. 정해진 건 고리타분해서 싫어.”

“심오하군요. 단 한번 뿐인 즉흥극이라니.”

“그렇게까지 예술적인 건 아니야. 그냥 놀이라고, 놀이. 모두가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거지.”

“훌륭합니다. 그런데···.”


넬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모든 이야기가 지어낸 것은 아니지요.”


그 말에 유고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뭐야, 형씨··· 알고 있었나?”


조금.

그렇게 말하며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펜서 경의 이야기를 하신 건 조금 경솔했다고 생각합니다.”

“하핫, 설마하니 이런 변방에서도 그 이름를 아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어디에서 들었나?”

“저는 성도의 사제였습니다. 서고를 뒤지다보면 이런저런 기록들을 보는 일도 많답니다.”

“이봐, 그거···.”

“민중의 영웅이었지만 끝내 반역자라 매도당하고 배신당해 심지어 역사에 이름조차 지워진 한 남자의 이야기라던가 말이죠.”


기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유고는 무표정으로 넬을 내려다보았다.

상대의 꿍꿍이를 알아내려는 위압적인 시선이었다.

하지만 사제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먼저 정적을 깨버린 것은 유고 쪽이었다.


“역시 보통 내기가 아니구만.”

“그쪽도 보통 악사는 아니고 말이죠.”

“체, 못 당하겠군. 하지만 난 그냥 악사야. 평범한 악사지.”

“외람된 말씀이지만 유고 씨는 그 영웅 스펜서 경과 무슨 관계가 있으십니까?”


넬의 질문에 유고는 모자를 눌러썼다.


“···뭐시기, 한 백년 정도 전에 있었던 일을 우연히 알게 되어서 말이야.”


유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해방전쟁이니, 노예혁명이니 하는 것들이야. 다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지. 뭐,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다 거기서 거기인 전쟁일 뿐이지만 말이야. 사실 모르는 게 나을 참혹한 역사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 와중에··· 모두의 자유를 위해 싸운 아주 멋진 녀석이 하나 있었다고 해. 부조리한 계급이나 그런 이상한 거 다 집어치우고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주고 노력한 만큼 대우받게 해달라고 높으신 분들에게 떼를 썼다지.”


유고는 거기서 한숨을 쉬었다.

넬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후, 일단 앞뒤 다 집어치우고 결론만 말하자면 녀석은 패배했어. 아주 무참하게 졌다고 해. 역시 권력이란 녀석이 무섭긴 한가보더라고. 그런데 그게 또 같은 일을 만들 수 있다나 뭐라나? 독사 같은 몇몇 귀족 나부랭이들이 말이야, 그걸 없는 일로 만들려고 별별 짓을 다 했다나봐.”


유고의 커다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모르고 있었다면 나랑 별로 상관없겠구나, 하고 넘겼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걸 우연히 알게 됐지. 역사에 그렇게 멋진 자식이 있었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난 알게 모르게 변방을 떠돌면서 그 자식 이야길 노래하고 있지.”

“혁명가, 혹은 선동꾼 유고 그라임즈··· 중앙에선 꽤 유명한 이름이죠.”

“후후,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전부는 아니지만··· 상층부에서 꽤 미운 털이 박힌 분이란 건 압니다. 설마 실명을 그대로 내놓고 활동하시는 겁니까?”

“맞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장에 진정성이 없으니까. 스팬서에 대해서는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왜냐면··· 녀석은 영웅이잖아. ···제길, 그 자식은 진짜 영웅이었다고! 약자를 위해 검을 들고 폭도들을 상대로 올바른 설교를 날리고··· 무진장 멋져먹은 멍청이였지. 내 생각엔 말이야, 이걸 모르고 있는 건 절대 옳지 못해. 영웅담이란 게 있어야 한다고.”

“그렇··· 습니까?”

“그 뿐이야. 난 그 이상의 관계는 없어. 정말이야.”


이번에는 넬이 유고를 추궁하듯 바라보았다.

마치 방금 전까지 있었던 상황이 정반대가 된 것만 같았다.


“난 이게 옳은 일이라 믿걸랑. 그러니까 형씨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연주하는 걸 멈출 생각은 없어.”


넬이 느끼기에, 유고가 모든 사정을 이야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

그들은 서로가 이 마을의 이방인이란 것을 알기에 동질감을 느꼈고, 그렇기에 서로의 깊은 속사정을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다.


“형씨, 경고할 생각으로 말한 건 아닌 모양이군?”


유고는 넬이 자신의 정체를 해코지할 의도가 추호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진심으로 걱정해서 충고를 건네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고는 그마저도 듣지 않았다.


“난 형씨가 싫지 않아. 그러니 날 막지 말아줬음 하는데.”


그것은 추호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사제는 알 수가 없었다.

이만큼 맹목적인 목적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기에.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쪼록 조심하시길.”


넬은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유고의 각오를 충분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그래도 내년까진 와주셔야 하겠는데요.”

“음?”

“이야기의 결말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고요.”

“하하, 고마운 말이군. 벌이는 시원찮지만 말이야. 흥··· 은화나 동화도 안 쓰는 시골이라니. 손해야, 손해! 에잇, 촌놈들 같으니! 이래선 수지가 안 맞으니까 술로 본전을 찾아야겠어!”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어대는 유고.

넬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유고형, 와이어트 씨가 한잔 하시자는대요?”

“오우, 좋지! 바라던 바다!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달라고 전해줘.”


사제와 악사의 밀담이 끝나려할 타이밍에 마침 한스가 나타났다.

양손에 그릇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 연극 하느라 못하던 술안주 심부름을 다시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야기지.”


심각한 이야기는 유고가 사내다운 웃음으로 흐지부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유고는 사제의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도련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더라고. 더 질투하기 전에 적당한 선에서 해줘. 별로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애들한테 미움 받는 건 좀 슬프잖아?”


넬은 잠깐 동안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 쪽도 여러모로 고생 많겠어.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도.”

“네?”

“아니, 정말 모르는 건가··· 형씨, 눈치가 빠른 줄 알았는데?”


유고가 건넨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넬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난 이만 주정뱅이들 흥이나 돋궈주러 가겠어.”

“과음하시면 안 됩니다.”

“에이, 오늘 같은 날에는 술을 안 마셔도 자연스레 취한다고. 반대로 술을 마셔도 안 취하지.”


유고는 리라를 짊어지고 취객들이 몰려있는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유고는 작고 귀여운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맨 앞자리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사내아이, 조나단이었다.


“음?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꼬마?”


유고의 물음에 조나단은 맹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저씨, 정말 내년에도 오실 거예요?”


영 탐탁지 않은 얼굴.

조나단은 흐지부지 끝나버린 연극의 결말이 아직까지도 영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나단은 연극하는 내내 가장 큰 호응을 해주었던 관객이었다.


산기슭 아래의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던 이 소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악사의 공연을 보았다.

좀처럼 드문 일인데다가 이런 마을에선 곡예나 연주로 돈벌이를 할 수 있을 리 없어.

소년은 다음 축제에 악사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불안했던 것이다.


“어른들이 그랬어요. 이런 시골에 악사님이 다시 올 리 없다고요. 분명 축제시기를 놓쳐서 어쩌다보니 여기 흘러들어온 것뿐이라고.”


침울해하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악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고는 악기를 연주하던 커다란 손으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뭘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거야?”

“어?”

“관객과의 약속은 꼭 지킨다. 예인한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내년을 기대하라고, 꼬마 도련님.”


그 말에 소년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었다.

유고의 장담이 어지간히 기뻤는지 쪼르르 달려 가버린다.

조나단은 인파들 사이에서 한 여인의 손을 잡고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엄마, 엄마! 악사님이 내년에도 오신데!”


조나단의 어머니.

네프리티나는 넬과 유고 쪽을 보더니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유고는 뭔가 겸연쩍은지 콧등을 긁었다.


“하핫, 이거 이젠 노잣돈 안 벌린다는 핑계도 못 대겠는걸.”


제길, 하고 유고는 모자를 덮어썼다.

그리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이봐, 사제 형씨.”

“예.”

“뜬금없는 소리긴 한데. 난 천성부터가 떠돌이거든? 그런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마치 여기에 날 위한 자리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군.”


넬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적 속에는 더 할 나위없는 공감이 담겨있었다.

유고는 얼굴은 챙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래로 드러난 두툼한 입술만은 기분 좋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제기랄, 여긴 정말 좋은 마을이야,”



12.

유고가 꼬마 손님을 안심시키고 있을 무렵.

레렌과 키리아는 음식이 올라간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야! 좀 더 로맨틱하게 만들었어야 한다고 봐!”

“그런···가요?”

“하여간, 남자들이란 칼 들고 싸우는 이야기에나 신경 쓰지. 섬세한 게 없다니깐. 생각해봐, 주인공 소년이 공작가 아가씨랑 이어지니까 기사 쟝은 남은 등장인물인 언니하고 어떻게든 되어야 맞지 않아?”


레렌은 넬의 배역과 이야기 속에서 얽히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불만인 모양이었다.


‘낸들 알아? 이 망할 계집은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너랑 죽이 잘 맞는 거 같다만?’

‘웃기지마! 내가 연극에서 지적하고 싶었던 건 좀 더 극적인···.’

‘···아, 그러셔?’


레렌의 잔소리를 견디면서도 키리아가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오늘과 같은 축제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

고기 요리들 때문이었다.


“아, 잔뜩 말했더니 배고파졌어. 자, 키리아도 어서어서.”

“음···.”

“사양할 것 없어! 다 먹어!”


레렌은 가까이 있던 접시와 포크에 집어 키리아에게 내밀었다.

그 내용물이 고기라는 것을 깨닫곤 키리아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케케, 사실은 아까부터 이미 먹고 있었지만 말이야! 이것봐라, 키리아! 익힌 고기도 제법이잖아.’


그 말 그대로.

이 식탐 많은 요괴는 교묘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주변에 늘어진 음식들을 입으로 가져간 것이다.

겉보기에는 얌전히 레렌의 말을 경청하는 것 같지만.

사실 키리아는 손바닥에 자그마한 또 하나의 입을 만들어 게걸스럽게 고기를 탐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기묘한 포식.

지나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접시에 손을 얹는 것만으로도 요괴는 말린 고기부터 시작해서 돼지 통구이까지 하나하나 맛볼 수 있었다.


‘적당히 해! 너, 내가 먹을 것까지 전부 비워버리면 어떻게 해?’

‘상관 없잖냐? 어차피 네 몸이 내 몸이니까.’

‘나는 맛도 못 봤는데?’

‘그게 억울하면 주도권을 넘기시던가?’

‘흥, 그건 별개의 이야기야. 거기다 잘못하면 들킨단 말이야. 저길 봐.’


키리아는 뒤에서 오가는 대화에 청각을 집중시켰다.


“이상하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소금절인 고기가 있었는데···.”

“뭐야? 자기가 먹어놓고 시치미 때는 거 아냐?”

“아니야! 정말 사라졌다고.”


당장 앞에 있는 접시에서 음식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을 깨닫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영악한 요괴의 공생체는 우왕좌왕 놀래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겼다.


‘킥킥, 놀려먹는 재미가 있군. 이거 나도 널 닮아가나 보다?’

‘적당히 해. 나는 간만의 만찬을 좀 즐기고 싶으니까.’


레렌의 앞에서 키리아는 귀부인마냥 입가를 소매로 가렸다.

침이 배어나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인간의 고기 요리.’


수저를 든 키리아는 레렌이 건넨 접시로 손을 가져갔다.


그릇에 담긴 것은 삶은 닭고기.

축제를 맞이해서 큰 맘 먹은 농가의 주인이 잡은 모양이었다.

키리아는 기대가 컸다.

제대로 조리된 요리는 요괴에게 미지의 영역이었기에.

아까부터 코를 자극하는 양념의 향취가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요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순진무구.

일말의 한 치도 악의 없는 어느 순수한 영혼이 자신의 행동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키리아는 포크를 닭고기에 막 박아 넣고서야 겨우 그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아우.”


옹알이와 같은 감탄사.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자그마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키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움츠려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키리아와 마주선 아이는 기껏해야 열 살을 조금 넘긴 것처럼 보였다.

바로 네프리티나의 딸인 캐시였다.


“왜 키리아? 먹다가 말고?”


뒤늦게 캐시를 본 레렌이 친근하게 물었다.


“어어, 캐시? 너 존은 어디 두고 혼자 여기 있니? 너희 엄마는?”


캐시는 엄지손가락을 빨면서 어눌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엄마는 알리시아 아주머니랑 이야기하고 있어요. 캐시는 여기 있으래.”

“뭐어?”

“여기서 언니야들이랑 같이 있으랬어요.”

“···이거 봐, 키리아. 네프 언니는 이렇게 제멋대로라니까.”


레렌은 골치 아프다며 이마를 짚었다.

하나, 키리아 쪽이야말로 캐시의 등장을 성가시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 꼬맹이, 설마 아까부터 내 옆에 있었던 거야?’

‘그러면 본건가? 내가 손을 통해 입을 만들어 음식을 먹던 것들 전부?’


키리아는 캐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춥춥, 하고 손가락을 입에 문 어린 아이의 생각을 요괴가 알리 만무했다.


“언니야.”


어린 소녀의 부름에 흠칫하는 키리아.

정체를 들켰는지 어쨌는지 제대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거.”


갑자기 캐시가 무언가를 내밀자 키리아는 반사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접시.

완두콩 몇 알과 소스가 범벅이 된 토끼가 담긴 접시였다.


‘이게 뭐···.’


키리아는 영문을 몰라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자신의 손아귀를 바라보았다.


“우리 캐시, 키리아 언니한테 양보하는 거야? 기특하기도 해라.”


레렌은 칭찬과 동시에 캐시를 품에 끌어안았다.

키리아였다면 필시 버둥거리며 뿌리쳤겠지만.

캐시는 용하게도 비비적거리는 레렌에게 별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선물?”

“얘, 키리아.”


키리아가 멍하니 서있자 캐시를 품에 안은 레렌이 이를 보이며 얼른 먹으란 제스처를 취했다.

레렌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가?

마지못해 포크로 고기를 집는다.

그리곤 가능한 자연스럽게 입가로 가져갔다.


“맛있어요?”

“···으응.”


사실이었다.

생고기와는 달리 부드럽게 씹혀.

식도로 넘어가는 토끼 요리는 요괴가 처음 경험하는 식감이었다.


“이거 우리 엄마가 만든 거예요.”


캐시는 히죽 웃었다.

왠지 모르게 따라 웃어야 할 것만 같은 미소였다.

단, 키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프 언니네 딸이야. 실은 조나단이라고 말썽쟁이인 오빠도 하나 있어. 기억나? 연극할 적에 맨 앞에 있던 그 꼬마 말이야.”


레렌의 이웃 소개에도 키리아는 그저 계산 없는 어린 아이의 행동을 분석할 뿐이었다.

요괴는 고민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눈을 빛내며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캐시를 어떻게 대했을까?


“키리아, 혹시 어린애 안 좋아하니?”


키리아가 캐시를 대하기 어려워하자 레렌이 걱정스레 물었다.

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좋아해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확실히 키리아로서도 아이를 좋아하긴 했다.

단, 다른 의미로.


‘그 쪽이 맛있어.’

‘암 좋아하지. 어린애 고기는 끝내주니까.’


육질이 연한 인간의 아이는 별미였다.

요괴에겐 극상의 요리.

심지어 이 두 요괴는 지금도 캐시을 바라보는 내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리곤 아주 잔혹한 궁리를 했다.

기회가 생기면, 나중에 꼭 잡아먹자고.


요괴들이 사악한 계획을 짜는 사이.

캐시는 어느새 레렌의 품에서 빠져나와 두 번째 접시를 내밀었다.


“언니야, 배고프면 더 먹어요.”

“캐시는 키리아가 맘에 들었나봐.”

“아직 많이 있어요.”


포만감이 있기에 딱히 영양적으로도 이 이상 먹을 이유는 없다.

당장 키리아가 충분히 배가 부른 것이 캐시에게는 다행이었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키리아는 접시를 받아들였다.

왜 그랬는지 키리아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지 못했다.

단지 왠지 모르게···.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캐시는 또 다시 웃어보였다.

다시 보아도 묘한 미소였다.


‘이상한 꼬맹이.’


키리아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만큼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평생토록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리라.

자신이 캐시에게서 접시를 건네받을 순간···.

너무도 자연스럽게 ‘고마워.’ 라고 말했단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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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전야제(3) +5 21.05.18 54 11 17쪽
16 전야제(2) +3 21.05.17 71 12 23쪽
15 전야제(1) 21.05.17 57 12 18쪽
14 키리아(6) +3 21.05.16 69 1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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