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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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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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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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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전야제(3)

DUMMY

5.

아침식사.

오늘의 식탁은 레렌이 가져온 빵과 과일.

그리고 사제가 한껏 실력을 발휘한 야채 스프가 장식했다.


“키리아 양께서는 꼭 다 드셔야합니다.”

“···.”


넬이 샐러드와 차를 함께 내주자 키리아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마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을 것이다.

키리아는 필사적으로 식탁 위에서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고기··· 고기는 왜 없는 거야?!’

‘큭큭, 이건 죄다 풀 쪼가리뿐이잖아.’


있을 리 없었다.

변방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 흔한 토끼고기조차 귀한 것이다.

겨울에는 무리해서 사냥을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드물게 덫에 걸린 짐승들의 고기를 소금에 절여 육포로 만들어 비축하는 것이 전부였다.

맛조차도 보장할 수 없어.

이따금씩 식탁에 올라오는 것들은 순전히 영양실조를 막기 위해서일뿐이었다.


결국 키리아는 넬의 배려가 가득 담긴 아침식사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식탁을 체험하게 되어 좋겠구나? 응? 키리아?’

‘너, 이럴 때만 그 이름을··· 게다가 무슨 여유야? 내가 저걸 먹는다는 건 너도 괴롭게 된단 걸 모르진 않을 텐데?’

‘네가 알아서 해. 위장 구조는 충분히 변화시켜 놓았다.’

‘뭐라고?’

‘킥킥, 미각 신경을 끊어버리면 그만이야. 힘내보련, 나는 잠이나 잘 테니까.’

‘이··· 이 배신자! 나 혼자서만 당하라고?’

‘다 자업자득이지.’


한편, 그윽한 눈길로 키리아를 바라보는 넬의 온화한 얼굴에···.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레렌은 심장이 요동쳤다.


‘레렌, 레리엔느 베이커. 너 뭘 망설이고 있어?’


레렌은 초조하기만 했다.

사랑하는 소녀는 아직도 연모하는 사제에게 축제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정신 차려, 내일이 바로 축제란 말이야!’


하지만 이미 성당으로 들어서기 전에 넣은 각오는 무너진 뒤였다.

소녀는 넬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요동쳤다.

마음이 아려와.

망설임이 커져갔다.

레렌은 두려워졌다.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사제님이 거절하시면 어쩌지?’


레렌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성당에 찾아온 이유를 몇 번이나 되짚었다.

잠들기 전에 맹세했던 것을 되살리려했다.

그러나 레렌은 그러지 못했다.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수렁에 빠지는 마음, 스스로도 답답하다고 생각하지만 차마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키리아 양, 식욕이 없으신 건 압니다. 하지만 어제 레렌이 말한 건 기억하고 계시죠? 이럴 때일수록 배를 든든하게 채워야합니다. 하루의 시작인 아침은 특히나 중요해요. 자, 어서···.”


평소처럼 넬과 단 둘이었다면 레렌은 틀림없이 고백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넬이 키리아에게 보이는 과하다싶을 정도의 관심과 지극정성이 레렌의 마음에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레렌은 키리아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갑자기 날 왜 노려보는 거야?’


키리아는 꿈에도 몰랐지만.

레렌은 그 이상으로 비참한 기분이었다.


‘내 얼굴이 키리아만큼만 예뻤다면 사제님이 날 바라봐주었을까?’


불가능한 바람에 레렌의 마음이 다시금 갑갑해졌다.


모성애가 저절로 나오는 창백한 얼굴과 새하얀 피부···.

언제보아도 질투 나는 아름다움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떤가?

햇볕에 타 까무잡잡하고 자세히 보면 주근깨마저 있다.

···비교의 대상조차 못되는 것이다.


“키리아 양?”


스프를 앞에 두고 스푼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키리아. 때문에 넬이 걱정스런 목소리를 흘렸다.


‘너, 이··· 빌어먹을 사제 놈. 젠장, 젠장···.’


요괴는 눈앞의 것들을 차마 음식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희멀건 액체를 납작한 접시에 담은 뭔가.

야채를 잘게 썰어놓은 것들.

곡식을 갈아서 반죽해 구워낸 조잡한 덩어리.

어느 것 하나 키리아의 식욕을 떨어뜨리는 음식들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피하고 싶은 일만 만들어내는 것인지?

요괴는 사제가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용서 못해! 글을 배우고 나면 죽여 버릴 테야! 넬 노튼··· 누구보다 먼저 네놈을 잡아먹어 버릴 거야!’

‘큭큭큭, 하지만 우선 이 고난을 견뎌내야 하겠지?’

‘언니··· 내 미각 쪽도 끊어줄 순 없는 거야?’

‘물론 가능하지.’

‘그럼 어서 나도···!’

‘하지만 거절한다.’

‘···아?’

‘네가 괴로하는 꼴이 나는 너무 재미있거든. 그러니깐 전력으로 거부해줄 거야. 킥, 키키킥!’

‘너, 너 이···.’

‘자, 안심하고 실컷 괴로워해라.’


결국 공생하는 요괴 쪽마저 자신의 적이 되어버린 상황에 키리아는 거의 울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못 써, 키리아!”


망설이는 키리아를 앞에 두고서, 갑자기 레렌이 무엇을 결심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호한 목소리.

키리아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렌의 시선에 맞대응했다.



“어제도 말했지? 건강해지려면 먹어야 해.”


기가 막혀.

지 까짓 게 뭔데 대요괴인 이몸에게 먹어라 마라지?

키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밖으로 차마 그걸 내뱉진 못한다.

알게 모르게 위축되어 있었기에.

슬쩍 올려다보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지금 레렌의 목소리에는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먹을 거지?”

“···.”

“키리아?”


키리아는 이제 시선을 돌려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응, 키리아?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안 그래도 몸이 약한데 음식까지 피하면 되겠어?”


애를 달래는 말투.

키리아는 순간 울컥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 내 육체는 여기 있는 그 어떤 놈들보다 강하고 그리고 또···.’


그러나 레렌의 미소가 은근히 무섭다.


“힘내야지, 키리아?”


도와줘.

키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넬 쪽을 바라보았다.


“레, 레렌. 정말 드시기 싫다는데 어쩔 수 있나요?”


마음이 통한 것인가?

강압적인 레렌의 태도에 보다 못한 넬이 손을 뻗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소릴 했어!’


넬이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살짝 키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레렌에겐 통하지 않았다.


“사제님은 가만히 계세요! 다정함만으론 안돼요. 어제도 말씀드렸잖아요? 자, 키리아. 어서 먹지 못하겠어?”


요괴는 정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넬은 그래도 조심스럽게 권하는데.

이 계집애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악마인가?

이게 거침없는 인간의 본성이란 말인가?


끈질기게 갈구고 또 강요한다.

키리아는 결국 스푼을 집어 들었다.


“응, 옳지. 그래야 내 동생이지.”


키리아가 스프를 떠 입에 집어넣자, 레렌도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져.

구토감이 끓어올라 죽을 지경인데 왜 안심이 되는 걸까?

키리아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자, 다음은 스프랑 같이 샐러드도··· 사제님이 타주신 차도 다 마셔. 아, 그 빵은 질기니까 꼭꼭 싶어먹어야 해.”

‘죽인다··· 너도 넬 녀석과 같이 가죽을 벗겨서···.’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면서도.

키리아는 어느새 치아 구조를 본래의 뾰족한 모양에서 인간의 것으로 바꾸고 있었다.


“보셨죠?”


넬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레렌은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보였다.

그 활기찬 모습에 사제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 대단하네요. 레렌.”

“헤헤, 별것 아닌걸요.”

“저라면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뭘요. 다 우리 키리아가 착해서 그래요. ···그렇지?”


테이블 아래 스푼을 쥔 키리아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레렌.”

“에헤헤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래도요 ···어?”

“왜 그러시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라?

레렌은 어느새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소녀는 깨달았다.


사제의 감사.

그 한마디에 레렌의 복잡한 마음이 풀어져버린 것을.


“저, 사제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결심이 되살아난다.

벅찬 감정이 몰려온다.

그래,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레렌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진심을 사제에게 알리려했다.


“이번 축제에서 저랑···.”

“응?”


그러나 소녀의 연심은 끝내 전해지지 못했다.


쨍그랑.

요란스럽게 울리는 그 소리에 넬의 시선은 레렌에게서 떠나 키리아에게로 향했다.

탁자 위는 물길가 흥건해.

아무래도 키리아가 찻잔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키리아?”

“네, 네에···.”

“어디 데이신 건 아니죠?”


넬은 소녀의 손등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상처는 없어.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죄송해요. 사제님께서 준비해주신 차가···.”


어쩔 줄 몰라 난처한 얼굴의 키리아.

하지만 사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하! 이 멍청한 놈들! 내가 이딴 잡초 달인 물을 마실 리 없잖아? 진작 쏟아버렸지.’

‘호오, 그런 수가 있었군.’


이 영악한 요괴는 처음부터 순순히 차를 마실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키리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어쩔 수 없지요. 그럼 다시 내오겠습니다.”

“···네?”

“걱정하세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요. 기왕 끓이는 김에 잔뜩 만들어놨거든요.”


일말의 악의도 없는 넬의 미소가 작열했다.

동시에 키리아 내면의 무엇인가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



하지만 넬과 키리아는 눈치 채지 못했다.

막 벌어진 작은 소동에 한 소녀의 각오 또한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참, 레렌.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레렌은 실없이 웃는 것으로 무마했다.

타이밍이 어긋나.

긴장이 풀려 차마 다시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기에.


“차는 금방 다시 준비할게요. 키리아 양이랑 레렌은 먼저 식사하고 계세요.”


하필 자리까지 피하는가?

이쯤에서 레렌은 오기가 생겼다.


‘···좋아요. 해보자는 거죠, 사제님? 그렇게 나오면 제가 고백을 못할 거 같나요? 아니! 아직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축제 당일에라도 말하면 되는 걸.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해보는 게 중요한 거야. 겨우 이정도로 우울해해선 안 돼. 키리아도 보고 있잖아? 난 언니로서 모범이 되어야지.’


레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손수건을 꺼내어 키리아의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닦아주었다.


“읍···.”

“얘도 참, 조금씩 천천히 먹어.”


키리아는 나름대로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주어진 할당량만 끝내면 이 이상 참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사실은 배가 많이 고팠던 거구나, 키리아···.”


레렌은 자신의 접시로 손을 가져가더니.


“내 것도 같이 먹을래?”

“어, 아··· 아뇨.”

“사양할 것 없어. 자, 받아.”


키리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아귀에 쥐여진 빵과 레렌의 얼굴을 번갈아볼 뿐이었다.

동생을 챙겨준 것이 무척이나 기뻤는지 레렌은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에헤헤, 그렇게 고마워할 것 없어.”

“···.”

“오, 제가 없던 사이에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뇨, 별일 아니에요. 얘, 키리아. 사제님이 차를 다시 가져오셨어. 목 막힐라, 어서 한 모금 마시렴.”


오늘, 요괴는 나락 아래에는 더 깊은 수렁이 존재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6.

오후가 다 되었을 쯤.

레렌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점심 전에 성당을 나섰다.


‘괜찮아. 불안해하지 마. 결전의 날은 내일인 걸. 어차피 하루 종일 사제님이랑 같이 있을 건데 뭐.’


짝.

소녀는 자신의 뺨을 양손바닥으로 두어 번쯤 때렸다.

이어서 양쪽 검지로 입술을 억지로 웃는 모양으로 만든다.

그것은 변방의 어머니들이 우는 아이들을 달래는 방법.

레렌은 자기 자신을 토닥였다.


성당의 창 너머로 레렌의 모습이 점차 멀어졌다. 그리고 그 광경을, 잔뜩 울상이 된 키리아가 노려보고 있었다.


‘겨우··· 끝냈어. 나는 승리했어!’

‘결과적으론 패배나 다름없었지만 말이야.’


키리아는 결국 역한 냄새가 나는 차.

말라붙은 진흙덩이마냥 푸석푸석한 빵을 두 개 반···.

그리고 희멀건 야채 스프마저 한 접시까지 완식했다.

소름끼치는 식사가 끝난 그 순간.

키리아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건넨 레렌의 대사를 잊을 수 없었다.


‘키리아 정말 기특해!’


그 대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키리아는 몸서리쳤다.

아주 일순간이었지만, 그만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단 사실이 키리아로 하여금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이다.

요괴로서 가능한 최고의 치욕이었으리라.


키리아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침대와 다락 사이를 뒤져 쥐 한 마리를 잡아내 곧바로 머리부터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끔찍한 풀뿌리의 맛을 지울 수 없어.

얼마나 분노가 몰아쳤던지, 키리아는 이를 갈며 창밖의 레렌에게 얼른 넘어져 버리라며 무언의 저주를 보냈다.


‘이 원한, 톡톡히 맞보아라!’


그랬다.

저주.

그것은 농담이 아니야.

요괴가 건 사악하도고 요사스런 술법이었다.


그 악의가 닿은 것일까?

성당의 계단을 다 내려간 레렌은 내일 사제와 보낼 즐거운 시간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으잇?!”


계단을 서넛 칸 남겨둔 상태에서.

갑자기 레렌이 신고 있던 구두의 굽이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레렌은 발을 헛디뎌 허공을 찼다.

소녀의 몸은 균형을 잃고 결국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다.


“아야, 아야야··· 아파···.”


찡하게 울리는 볼기를 손으로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어나는 레렌.

그녀는 굽이 부러진 구두를 벗곤 한숨을 쉬었다.


“아우, 산지 얼마 안 된 구두였는데···.”


고개를 축 늘어놓고 걸어가는 레렌의 뒷모습을, 키리아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핫, 아하핫! 아하하하하! 꼴좋다. 멍청한 계집애!’

‘야, 너 설마?’


키리아는 귀부인처럼 손등을 치켜 올려 입가를 가린 채 웃었다.

나름대로 예전에 본 것을 흉내내본 모양이었지만 앙증맞은 웃음소리 때문에 별로 비슷하진 않았다.


‘그래, 저 계집애가 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신발 바닥을 살짝 긁어줬지. 아슬아슬하게 베어내서, 무게가 살짝 실리면 아작 나도록 말이야.’


요괴는 레렌이 뒤로 돌아 발걸음을 옮기는 그 찰나의 순간에 조심스레 손끝을 휘둘렀다.

인간의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가공할 속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로 손가락의 구조를 변화시켜 채찍처럼 날린 것이다.

이런 요술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도 모두 마물의 초월적인 능력 덕분이었다.


‘···고작 구두 따윌 망가뜨리려고 꽤나 공을 들였구만?’

‘뭐야?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왜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내 의도가 전달되었다니 다행이다.’


공생하던 자매가 뭐라고 하던 간에, 키리아는 생글생글 웃었다.

성당 밖에서 레렌이 축 늘어진 채 힘없는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기에.


‘흥, 그리고 남은 한 녀석···.’


아래층의 넬은 레렌을 돌려보내고 나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미지근하게 데운 물을 담은 대야에 식기를 밀어 넣고 거품이 나는 식물의 가루를 뿌려 마른 천으로 닦는 번거로운 일.

혼자 살 때보다 치워야할 식기가 늘었지만 사제의 얼굴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런데 그때.


“읏?”


생각에 빠져있던 넬이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감각.

그것은 아침 식사에서 깨뜨린 찻잔의 파편이었다.

분명히 다 치웠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게 모르게 조각이 튄 모양이었다.


“이상하네. 바닥에 떨어져서 깨진 게 왜 남은 식기에서···.”


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떠올릴 때.

위층의 키리아는 요괴의 우월한 청력으로 넬의 읊조림을 듣고 있었다.


‘걸렸구나!’

‘어쩐지 청소를 돕겠다고 나서더니··· 다 이런 장난을 위해서였냐?’

‘당연하지. 내가 정리 따윌 할 리 없잖아?’


개운한 미소.

키리아는 엄청나게 유쾌하다는 얼굴로 바닥에 귀를 가져다댄 채 연신 키득거렸다.

넬은 꿈에도 이 유치한 악의를 알지 못했다.


‘흥! 이제 요괴의 힘을 잘 알았겠지, 이 어리석은 인간 녀석들!’

‘멍청아··· 그딴 걸 뭔 수로 알겠냐? 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나의 원한은 깊다고! 내 저주는 확실히 불행을 가져다주지!’

‘···네가 이렇게 소심한 바보일 줄이야.’

‘뭐야아아?!’

‘됐다. 뭐, 그걸로 네가 만족한다면 더 이상 아무 말 않으마.’

‘흥. 어쨌든 내가 이긴 거야.’

‘···.’


소녀의 모습을 빌린 요괴는 성당으로 온 이후 처음으로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다.


작가의말

키리아의 두근두근 해피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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