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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연재수 :
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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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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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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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붉은 마수(1)

DUMMY

1.

황혼.

주황색의 빛이 대지를 비춘다.

밤의 경계, 하늘이 청과 적의 그라데이션을 그렸다.


해가 저무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무너진 마을을 보수하던 사람들은 어둑해진 하늘을 신호삼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을 멈췄다.

머지않아 덮쳐올 어둠을 대비하기 위해.

밤의 공포를 피해 각자 자신의 보금자리도 되돌아갔다.


그러나 해가 저문 때는 휴식과 안락의 시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두려움을 억누르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네프리티나에게 있어서 집이란 가족이 미소로 맞이하는 포근한 공간.

특히나 소중한 것이었다.


넬의 붕대를 갈아주는 것으로 네프리티나의 볼일은 끝났다.

알리시아는 오늘도 사소한 수다에 시간을 내주었다.

축제가 끝남과 동시에 찾아온 밤의 마수 때문에 온 마을이 불안감에 휩싸였음에도 두 여인은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아!”


네프리티나는 즐거웠지만 정작 지루한 것은 캐시 쪽이었다.

어른들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에 끼어들 수 없던 캐시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흔들며 슬슬 돌아갈 시간임을 알렸다.


“그럼 내일봐요, 알리시아.”

“그래, 자기도 들어가 봐.”


알리시아와 인사를 나눈 네프리티나는 캐시의 손을 잡고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네프리티나는 쭉 미소를 유지했다.


캐시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요괴의 이야기만 들어도 이불 속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네프리티나는 혹여 캐시가 불안감을 느낄까싶어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네프리티나의 연극은 금방 탄로 나고 말았다.

캐시는 오히려 평소보다 과장스런 엄마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응, 왜 그러니? 우리 아가?”


캐시는 가던 길을 가다 멈추고는 네프리티나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다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

캐시에게 그것은 평소의 네프리티나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어린아이의 직감이란 신기한 것.

캐시는 네프리티나의 마음속에 담긴 초조함과 두려움까지 간파하지는 못했으나, 묘한 불안함이 감돌고 있단 사실만큼은 어렴풋이 눈치 챘다.



“아무 것도 아녜요. 어서 집에 가요.”


캐시는 엄마의 손을 끌어당기며 재촉했다.

네프리티나는 캐시의 좁은 보폭에 따라서 걷게 되었다.

걸음걸이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지만 캐시 나름대로는 서두르는 것이었다.


“우리 딸,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작은 몸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자신을 끌고 가는 모습이 너무 앙증맞고 귀여워. 네프리티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가 기다릴 거예요. 저녁 차려줘야 해요. 그리고 엄마도 오늘 아무 것도 안 드셨으니까.”


뒤돌아보지도 않고서 말하며 보채는 캐시.

네프리티나는 겨우 딸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렇구나. 서둘러야겠네.”


캐시는 네프리티나가 배가 고픈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캐시가 금방 데려다줄게요.”


네프리티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졌다.


캐시는 어느덧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잘 살피며 배려하는 착한 아이로 자랐다.

네프리티나는 그런 딸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이런 일도 있었지. 집 앞에 먹이를 주던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낳다 힘이 빠져 죽어버린 적이. 그걸 본 캐시는 하루 종일 울음을 터뜨렸어. 남은 아기 고양이들을 기르게 해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나도 그만 마음이 약해져서 캐시의 요구를 허락 할 수밖에 없었다니까. 후후, 그게 바로 어제 같은데··· 정말로 많이 컸구나. 우리 캐시···.’


이것이 행복.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쁨···.

단지 길기만 했던 요괴의 삶보다 훨씬 짧으면서도 값어치 있는 세월.


그렇게 네프리티나는 과거에 없던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 엄마?


캐시에게 끌려가던 네프리티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골목 사이로 기다란 나무 막대를 든 어린 남자아이가 서있다.

소년이 입은 옷에는 여기저기에 지저분한 흙먼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조나단이니?”

“아차···.”


네프리티나와 눈이 마주치자 존은 얼른 자신의 등 뒤로 막대를 숨겨버린다.

그러나 어깨너머로 빼꼼 튀어나와 숨긴 의미가 없었다.



“이 녀석, 칼싸움은 안 된다고 했잖니?”


어머니의 호통에 소년은 흠칫하고 놀랐다.

존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했다.


“칼싸움이 아니라 그··· 연습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니? 못써요. 남을 상처 입히는 걸 배운다니, 엄마는 슬프단다.”

“그래도 이건···.”

“그만하지 못하겠니?”


네프리티나의 꾸중에 조나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까지 소년은 단 한 번도 어머니를 이긴 적이 없었다.

네프리티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올바르게 자식들을 인도한다.

어머니는 항상 옳았다.

그렇기에 조나단은 네프리티나에게 대들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 남자는 나뿐인걸. 그러니까 엄마랑 캐시는 내가 지켜야 한다고요.”

“존···.”

“어제도 그렇고··· 요괴가 나타나잖아요? 닉슨 형도 죽어버렸고··· 다들 무서워해요. 하루라도 빨리 내가 강해져야 한단 말이에요!”


축제날에 보았던 영웅담도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비록 어린아이의 발상이지만 존에게는 나름대로의 책임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른 커서 자경단에 들어갈 거예요. 이 마을을 지킬 거라고요.”


네프리티나는 그런 아들을 더 이상 야단칠 수 없었다.


일순간 네프리티나의 머릿속에 슬픈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이 아이들의 아버지는 어떤 인간이었을까?

네프리티나가 잡아먹고 가죽을 빼앗았던 이 여자는 어떤 인간이었을까?

만일 네프리티나가, 아니 로크가 아이들의 진짜 어머니인 여자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캐시와 조나단은 어떻게 자랐을까?


지금의 네프리티나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네프리티나의 표정에 묘한 감정이 드러났다.

갑자기 그녀는 조나단을 향해 다가갔다.


“조나단.”


존은 갑작스런 엄마의 접근에 움찔했다.

순간 네프리티나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자, 잘못했어요!”


뒤에 이어질 손찌검을 예상하고서.

소년은 뒤늦은 반성을 외치며 눈을 찔끔 감았다.




“어···.”


짧은 침묵.

예상했던 아픔이 없다.

그 대신 몸을 감싸는 포근함과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감촉만이 전해진다.

조나단은 살며시 눈을 뜨고서 눈앞의 엄마를 보았다.


“어, 어라?”

“오빠는 바보야.”

“시, 시끄러워!”

“캐시도 이리오렴···.”


갑작스레 네프리티나는 캐시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아우?”

“어, 엄마? 갑자기 왜 그래요?”


조나단과 캐시는 엄마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네프리티나는 아이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차게 끌어 안았다.


‘절대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소중한 아이들을 품으며, 네프리티나는 다시금 결의를 다짐했다.


“엄마, 답답해요! 다음부턴 안 할 테니까 이것 좀 풀어줘요, 네?”

“전부 오빠 때문이야, 오빠 바보!”


조나단은 이것이 새로운 형식의 벌칙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캐시는 자신에게도 불똥이 튀었다며 오빠를 원망했다.


‘반드시··· 지켜내고 말겠어.’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로크가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극히 짧아.

그렇지만 로크에게 지금은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이 중요했다.


십년의 추억은 하늘의 요마 로크를 한 사람의 어머니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본디 요괴에게 있을 리 없는 모성(母性)의 감정을 얻어버린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인육을 먹는 괴물이 아니게 되었다.

지켜야 할 소중한 무언가가 생겨버린 지금, 그녀는 그 어떤 어머니보다도 자상하고 강했다.


인간의 마음이.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그녀를 그렇게 바꾸어 놓았기에.


“···엄마?”


작게 흐느끼는 소리에 조나단과 캐시는 몸부림을 멈추었다.

그 슬픈 음성은 자신과 캐시를 품에 끌어안은 어머니에게서 들려왔다.


남매는 편안하게 감겨진 엄마의 두 둔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눈물을 보고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양이 저물기 직전.

가장 환한 빛을 선사한다.


그 아래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모가 벅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2.

태양이 산 너머로 그 모습을 감추자.

이제 방에 남은 유일한 빛은 등잔뿐이었다.


일렁이는 불꽃을 따라 기묘한 춤을 추는 두개의 그림자가 보인다.

이 방안에는 기묘한 빛과 자연스런 어둠이 공존하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한 남자가 깊은 잠에 빠져있다.

이마에 붕대를 감은 사내.

넬은 어쩐지 편안한 얼굴이었다.


마치 천국을 여행하는 행복한 표정, 즐거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반면에 방 끝 모서리에는 무릎을 모아 앉은 한 소녀는 우중충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웅크린 몸을 따라 바닥에 보라색의 머리카락이 흩뿌렸다.


“···.”


키리아는 네프리티나가 방에서 나간 후부터 쭉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넬의 상태를 관찰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편이 회복에 힘쓰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로크의 독은 더할 나위 없이 치명적.

만일 키리아가 독소에 저항력이 없는 생물이었다면 이미 지금은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리라.



“묘하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뭐가?”

“로크라는 녀석의 신경독 말이다. 지나치게 강해.”

“그래서 그게 뭐?”

“잘 생각해봐. 이 세계에 살아가는 보통 생물이 표적이라고 가정해보자고. 놈이 날리는 검은 파편의 위력··· 아마 신경독이 효과를 보이기도 전에 꿰뚫려서 죽는 게 더 빠를 걸?”


키리아는 자신의 몸에 파고 들었던 로크의 공격을 떠올리곤 살짝 소름이 돋았다.



“듣고 보니 그렇네?”

“그 말은 즉, 놈의 생체 파편은 오직 동족만을 사냥하기 위한 무기라는 의미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래,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야. 굉장한 거지. 어설픈 각오로는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없거든.”

“미친 짓···?”

“아무리 우리들 요괴라 해도 독소를 뿜어내는 신체기관을 만드는 건 쉽지 않다.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을 정도야.”


공생하는 요괴가 말하려는 요지를 깨닫자마자 키리아는 몸서리를 쳤다.


“신체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적합한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다 해도 체내에 독을 만들어내는 짓거리만큼은 피해야 해. 독에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스스로 항성 물질을 함께 분비할 수 있어야하지, 독에 대한 저항을 키워나가는 데에는 긴 시간이 소요되거든. 잘 되리란 보장도 없어. 그 사이에 적응해내지 못하면 골로 가는 건 자신이 될 테니까. 거기다 동반하는 고통도 장난이 아니겠지.”

“···녀석은 그걸 다 견뎌냈단 말이네.”

“애초에 독이라는 특성은 엄청난 세월이 필요해. 수 십 세대를 거쳐서, 종이 변화할 정도의 아득한 시간이 걸리는 거야. 그리고 이 세계에 살아가는 독을 가진 모든 생물들이 그 과정을 거쳤지.”

“엄청나구나.”

“맞아. 그런 구조, 형태를 단 시간에 구축시키려 했다면··· 치명적인 신경독 때문에 생기게 될 부작용 역시 어마어마했을 거야. 목숨을 걸어야 해. 수명이 줄어드는 정도라면 운이 좋은 편에 속할 지도 모른다.”


키리아로서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모험.

허나 그것을 로크는 극복해냈다.

무모하고도 위험한 과정을 네프리티나는 이겨낸 것이다.


“요괴가 가진 적응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초월의 영역이란 소리지. 대체무엇이 놈을 그렇게까지 만들었던 걸까? 나로서는 절대로 상상도 못할 집념이다. 오직 같은 동족을 죽여내기 위해서 길러낸 능력이라니. 그 기능성만 보면 가히 최강이라 할 수 있겠지. 너의 결과만 보아도 얼마나 충분한 위력을 내는 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랬다.

어찌나 강력한지 회복력만큼은 자신 있었던 키리아가 하루 종일 몸을 가누어야 할 정도였다.


“해독이 더뎠던 건 놈의 집념이 그만큼 강하단 소리구나?”

“어, 물론 그것도 그래.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냐.”

“뭐야? 뭔가 또 있어?”

“분명 놈의 독이 가진 성질에 원인도 있겠지만··· 해독이 수월하지 않았던 건 사실 네가 다른데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도 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이면 완전히 회복되었어야 했어.”


분명 키리아는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도 쭉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복잡한 건 신경 쓰지 마라··· 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의 너에겐 소용없겠지.”

“···.”

“로크가 했던 말에 혼란스러운 거냐? 소중한 사람 어쩌고 하던 거?”

“···응.”

“인간은 어째서 서로 합치는가? 녀석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무엇? ···그런 건 다 개소리다. 밥 한 끼조차 나오지 않는 머저리들의 철학이야. 우리가 신경 쓸 게 아니야.”

“알아. 알고 있어.”

“뭘 안다는 거냐? 혈액이 머리로 향하고 있잖아?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거야?”


키리아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던 것들에 대해서 계속 되물을 뿐이었다.


그 질문은 새로운 의문을 만들고 그 의문은 다시 반복됐다.


그러나 해답이 나올 리 없어.

고뇌는 멈추질 않고.

고민을 끝내지 못했다.


넬의 목소리가, 프리티나가 던진 한마디가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하나하나 빠짐없이 파고 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늘어가는 것은 오직 인간에 대한 의문들뿐.


“···쳇, 다행히 싸움 전에 회복 되서 망정이지.”


키리아는 시험 삼아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맞아. 몸은··· 이제 괜찮아.”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 마을 사람들이 잠드는 때쯤이면 키리아의 몸은 만전의 상태가 된다.

그리하면 키리아는 전날 끝내지 못했던 로크와의 싸움을 끝마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손의 형태를 칼날로 변하게 만들며, 키리아는 지금까지 했던 생각들을 멈췄다.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여태 이딴 데에 신경을 쓰고 있었을까?”


요괴인 키리아가 가장 마지막에 이른 대답은 그것이었다.

그 순간 키리아는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겨우 떨쳐낸 거냐?”

“응. 이제야 알겠어. 녀석이 독으로 내 머릿속에 뭔가 장난을 친 모양이야.”

“호오? 그거 그럴싸해. 아니, 그게 아니라면 네 급격한 변화를 설명할 수 없지. 분명 독소가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친 거로군. 녀석의 독에는 마음이나 감정을 혼란시키는 작용도 있는 모양이다.”


키리아는 의미 없는 되물음을 끝내기로 했다.

끝없는 질문 따위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단순하게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다.


“간단하잖아. 나는 인간이 아니야. 그러니까···.”


키리아는 괜한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한 것을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그 해결책을 내놓은 것에 희열을 느꼈다.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은 모두 쳐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킥, 키리아는 나지막이 요사스러운 웃음소리를 낸다.

키리아의 눈동자에 비치던 불꽃이 일그러졌다.


“그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드디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구나!”

“후후, 걱정 끼쳐서 미안해. 내가 좀 어떻게 되었던 모양이야.”


이렇게나 쉬운 것을 왜 이제 서야 알아챈 것일까?

키리아는 밀려드는 웃음에 몸을 떨었다.


인간이 무엇이든지.

그들의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먹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저 배가 고프면 먹는다.

단순하고도 명쾌한 법칙이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꾸민 것도.

사람의 언어를 배운 것도.

사실은 그 모두가 그것 때문이었던 것을 잊고 있었다.


요괴는 본질을 자각한다.

자신은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존재.

인간을 잡아먹는 요괴다.

죽이는 것이 당연해.

잡아먹는 것이 이치.


키리아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핫, 아하하하! ···정말 바보 같아.”


키리아는 웃음소리를 애써 숨기지도 않고서 밖으로 흘려냈다.

너무 유괘하고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에야 비로소 키리아는 어쭙잖은 인간의 굴레에서 요괴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래, 답답한 건 다 날려버려라. 애초에 그런 고민은 할 필요조차 없었다고!”


광기어린 폭소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둠 속에서 키리아는 그야말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잔혹한 밤의 짐승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새파란 달빛이 창밖을 통해 흘러들어온다.

그 희미한 월광은 키리아의 붉은 눈동자에 스며들어 가라앉아있던 야성을 끌어올렸다.


홍옥과 같이 아름답고.

세공된 루비처럼 투명한 광체.

그러나 그것은 잔혹한 마수의 눈이었다.


“···끝났어.”


해독이 완전히 완료됐다.

만족스러운 몸 상태에 어지럽던 사고도 정리되었다.

키리아는 최고로 기분이 좋았다.

이제 그녀가 해야 할일은 단 하나 뿐이었다.


“자, 이제 이 같잖은 놀이를 끝내야지?”

“알다 마다. 내게 수치를 준, 알량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 녀석을··· 갈기갈기 찢어놓겠어.”


끔찍하게 증폭된 증오가.

흉포하게 달아오른 분노가 키리아를 일으켜 세웠다.

본능 속에 각인된 살육의 전율이 키리아를 움직였다.


소녀는 이곳저곳에 떨어져 나간 넝마가 된 드레스 위에 얇은 겉옷과 상의만 입은 상태.

하지만 더 이상 외모 따위엔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로크에게 앙갚음을 하겠다는 일념만을 불태우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키리아의 몸이 창가를 향했다.

소녀는 채 닿기도 전에 오른팔을 휘두른다.


퍼엉!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박살난 유리조각들이 여지없이 바닥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키리아는 가볍게 뛰어 창틀에 내려앉았다.

아래에는 길게 이어진 민가들이 보여.


밤이다.

어둠이다.

마을의 불은 꺼져있고 대지를 내려다보는 것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달 뿐이었다.


그러나 키리아는 당장 뛰어내리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키리아의 시선은 어느새 넬에게로 향해 있었다.


순간 차가운 밤공기가 걱정되었다.

그곳에는 창문에서 들어오는 냉기에 넬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하고 염려하는 자신이 있었다.


“야, 너 설마 아직?”

“···조금 머리에 들어간 독이 남았나봐.”

“쳇, 가지가지 하는군.”

“하지만 상관없어. 저 사제 놈이 어떻게 되든 더는 신경 쓰지 않아. 넬, 넌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판 거야!”

“큭큭, 그렇지.”


일순간이나마 망설인 스스로를 꾸짖으며 키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모든 악감정을 로크에게로 향하고서 냉정을 되찾았다.


“자, 가자.”

“응.”

적과 결판을 내기 위해, 키리아는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둥글게 떠오른 커다란 달 아래.

붉은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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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요조 로크(4) +3 21.05.31 44 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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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축제(3) +2 21.05.21 57 11 17쪽
21 축제(2) +2 21.05.20 66 10 14쪽
20 축제(1) +4 21.05.19 72 12 19쪽
19 전야제(5) 21.05.19 46 11 15쪽
18 전야제(4) +2 21.05.18 58 13 12쪽
17 전야제(3) +5 21.05.18 54 11 17쪽
16 전야제(2) +3 21.05.17 71 12 23쪽
15 전야제(1) 21.05.17 57 12 18쪽
14 키리아(6) +3 21.05.16 69 1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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