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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29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9.16 18:30
조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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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2쪽

마음의 문제

DUMMY

크다.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건 평범한 사람이 아니구나. 다리가 거의 내 어깨 정도까지 올라올 정도로 길었다. 의자에 앉아 머리카락을 털던 젠이 반사적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괜히 깼어, 창문."


그것을 올려다보려면 목을 한껏 꺾어야 했다. 이 집은 천장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는데, 머리가 거의 천장 바로 밑에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럼 다시 붙여."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정말 내 입에서 나간 말인가? 하지만 분명 내 목소리였는데.


"알았어요."


그것은 바닥을 향해 팔을 뻗더니, 무언가를 퍼 올리듯 손짓했다. 산산이 흩어진 창문 조각들이 서서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젠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미친······."


마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조각들이 천천히 퍼즐처럼 짜 맞춰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마침내 창문은 원래 상태처럼 돌아왔다.


아니, 자세히 보니까 한 조각이 비어 있잖아.


"여기 있어."


그것이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른발을 들었다. 구두 밑창에 유리 조각 하나가 깔려 있었다. 다시 손짓하자 마지막 한 조각이 비어 있는 구멍에 딱, 하고 맞았다.


"넌 누구야?"


이번에도. 나는 하지 않은 말이 제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이건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하지만 그걸 어떻게 말할지는 고민하고 있었다고.


"알타이아."

"그게 네 이름이라고?"

"그래요."


우리는 복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진짜 복도가 아닌가 보군. 마치 얼마 전 대로에서 아리나딘의 사자를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이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문이 깨졌다면, 누군가는 달려왔을 텐데. 집 안은 아무도 없는 양 조용했다.


"왜 나를 찾아온 거야?"

"당신을 데리러."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젠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도 없구나, 여기는. 나와 그것밖에는. 그것은 흰 코트처럼 생긴 옷을 입고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렸지만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다 보였다. 나는 그것을 올려다봐야만 했으니까.


"나를 왜 데리러 온 건데?"

"당신은 신이 될 거예요."


이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을 바로 얼마 전에 만난 적이 있었지. 그것은 스스로 아리나딘의 사자라고 소개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것과 한패일까?


"나는 신이 될 생각이 없어. 얼마 전에도 말했을 텐데."


나는 당황했다. 그것이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슬프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안타까움, 실망감,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의 허망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얼굴이었다.


"당신은 신이 될 거예요."


그것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체 왜 우는 거지? 하지만 그것의 감정은 파도처럼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나는 그것이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꼈다.


내가 오른팔을 들자 그것은 내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나는 소맷자락으로 그것의 눈물을 닦았다.


"아니, 나는 신 같은 건 되지 않아."


그것은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기다란 팔을 뻗어 내 눈을 가렸다.


눈앞이 밝아졌을 때, 나는 깨진 유리 조각 한가운데 서 있었다. 뻥 뚫린 창문으로 비바람이 거침없이 들이쳤다.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가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죠? 괜찮으세요?"


파리스 씨가 뚫린 창문과 그 주위를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지금이 대체 언제지? 그러니까, 창문이 깨지고 나서 실제로는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파리스 씨는 창문이 깨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달려 내려왔을 터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것을 만났던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된 건가?


문득 젠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젠은 나와 함께 거기 있었는데. 그것이 유리 조각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모습을 보고, 젠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어 시칼트라 씨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내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멀쩡한지 확인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보다니.


"전 괜찮아요, 선생님."

"누가 이런 일을 한 거죠? 봤나요?"


그걸 어떻게 설명한다.


"평범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키가 아주 크고 흰옷을 입고 있었어요."


파리스 씨가 제 주머니에서 통신기를 꺼내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학장실 보안이······경비 인원을······."


시칼트라 씨는 내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깨진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창문을 깬 범인을 찾으러 가는 거겠지.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 내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치는데, 내 옆방, 그러니까 젠이 쓰던 방의 문이 열려 있었다.


"거기서 뭐 해?"

"여기 있으면 안 돼."


젠은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원래도 짐이랄 건 거의 없었지만. 검 한 자루와 옷 몇 벌이 전부였다. 한숨을 쉬고는 내 방으로 들어가 마찬가지로 짐을 챙겼다. 나도 검 한 자루와 옷 몇 벌, 그리고 총 한 자루······.


총은 여기 없지. 시칼트라 씨의 방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게 있다고, 잠시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으니까.


"총을 가지러 가야 해."

"어디 있는데?"

"시칼트라 선생님 방에."

"그럼 이쪽이야."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어볼 타이밍은 아니겠지. 나와 젠은 무슨 도둑처럼 시칼트라 씨의 방으로 숨어들어 갔다. 책상 위에 내 총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허리에 찼다.


"가자, 이제."


나도, 젠도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았다.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둘 사이에 완벽하게 합의되어 있었으니까.


무언가가 나를 노리고 있고, 안전한 곳은 없다. 한 군데에 오래 있었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뿐이야.


우리는 2층 복도 끝에 난 창문을 통해 정원 뒤쪽으로 뛰어내릴 계획을 세웠다. 정문으로 당당하게 나가려다가는 붙잡힐 게 뻔했으니까.


복도 끝에 난 창틀에는 우비 두 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내가 한 벌을 붙잡아 소매에 팔을 꿰자, 젠 역시 말없이 우비를 입었다.


그러고는 차례로 창 아래로 뛰어내렸다.


"뭐 없지?"

"없어."


주위에서 수상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수상한 기색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여기는 학교 부지 안에서도 인적이 거의 없는 곳이었으니까. 우리는 작은 정원을 빠져나와 빗속을 한참이나 달렸다.


정문까지 절반 정도나 왔을까, 젠이 발을 멈췄다.


"어디로 갈 거야?"

"나도 모르겠어."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빗줄기가 얼굴을 때리는 감각이 불쾌하다는 느낌만 있을 뿐.


"어쩔 수 없지. 일단 서비에게 돌아가자. 그쪽이랑 합류해야겠어."

"그래도 괜찮을까?"


젠이 돌아갈 곳은 순례자 일행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거기로 돌아가도 되는 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가능한 한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사람을 죽인 적 없는 자만이 아이니의 그릇이 될 수 있다는 말, 사실이야?"


아리나딘의 사자라는 녀석이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 결국 아이니 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아이니의 신관, 그러니까 젠이나 서비일 터였다.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그렇다고 되어 있어. 하지만 지금도 그런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야.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하나 더. 아까 말했었지, 너와 서비는 신에 대한 마음도, 삶을 살아가는 태도도 아주 다르다고."

"그래."


나와 젠은 조금 떨어져서 서 있었다. 빗줄기는 어느덧 아까보다 잦아든 상태였다. 그래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대화를 주고받는 데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순례자 중에 가장 강신 의식을 성공시키려는 마음이 강한 건 서비야. 그렇겠지?"

"그래."

"서비는 나를 신의 그릇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신을 직접 만난 적이 있는 사람, 지금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자. 게다가 지금까지 아이니는 남성의 몸을 그릇으로 삼은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조건에 따르면 나는 아이니의 그릇이 되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다.


"서비가 너를 신의 그릇으로 삼기 위해 일부러 데리고 다녔냐는 뜻이야?"


젠이 팔을 들어 얼굴을 한 번 훔쳤다. 안대를 쓰는 사람은 비를 맞으면 더 찝찝하겠구나, 나는 그런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충 비슷한 이야기야."

"서비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와 함께 다닌 건 단순히 너를 동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대답하면 다시 돌아갈래?"


의심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 나는 잘 안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잡초처럼 계속해서 퍼져 가니까.


나는 딱히 목적 없이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비가 내게 신의 그릇이 되어 달라고 대놓고 부탁했다면, 어쩌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신의 그릇으로 만들겠다고 정해 두고 있었다면 그건 다른 이야기가 된다.


결과야 별로 다를 것도 없겠지만, 원래 제일 중요한 건 기분이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고 싶은데."

"그래."


"너는 아이니 신이 몸을 얻어 강림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고 했었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걸 서비도 모르고 있을까?"


떠올려 보면 젠과 나는 아주 급격히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서로 주먹질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었는데. 반면 서비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위치에서 항상 웃으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


"깊이 생각해 보면 앞뒤가 맞지 않잖아. 어떤 사람이 신의 그릇이 될 수 있는가. 그 조건을 알고 있다면, 신이 이 땅에 내려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고 있어야 해. 그렇지 않아?"


신의 그릇이 될 수 있는 조건이 알려져 있다는 건, 강신에 성공한 누군가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강신이 성공한 뒤의 기록 역시 남아 있을 터였다.


젠은 그걸 모른다고 해도, 서비가 그걸 모르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강신 의식과 관련된 내용은 종교적 기밀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 그게 종교적 기밀이라면 아리나딘의 사자가 그 내용을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심지어 종교와는 담을 쌓은 우리 엄마조차 무슨 이야기를 들은 눈치였어."


"그래, 그건 기밀이 아니야. 다만 난 굳이 찾아보지 않았어."

"왜 찾지 않은 건데?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하지 않아?"

"두려우니까."


그래, 나와는 달리 젠은 아이니의 사람이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 일이든 거기서 쉽게 발을 뺄 수는 없다는 거겠지. 어차피 발을 뺄 수 없기 때문에, 너무 자세히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 역시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래, 아직은 전부 추측일 뿐이지. 서비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도, 강신이 성공하면 그리 좋지만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도."


비가 그쳤다. 언제부터인가 빗방울이 모자를 때리는 느낌이 사라졌다. 젠이 재촉하듯 말했다.


"지금 나한테 제일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야. 살아남는 거라고. 일행이 있는 데로 돌아가면 적어도 도움은 받을 수 있어."

"뭐어, 그건 그렇지."


하지만 지금의 내가 위험한 일을 몰고 다니는 존재라면, 나는 누군가의 곁으로 가도 되는 걸까? 누가 됐든 여기 휘말려 버릴 텐데.


"그런데 말이야, 젠. 나는 변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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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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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5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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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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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6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5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50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6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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