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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46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11.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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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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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3쪽

진짜 이야기

DUMMY

이쉐 알첸브라임은 책이 든 상자를 내려놓고 제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간을 흘낏 보고는 금속 줄을 풀어 시계를 바닥에 내던졌다.


시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이엘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마치 생물이 추락하는 소리 같았다. 시계는 파편조차 튀기지 않고 거꾸로 떨어져 깨졌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니? 너는 누가 상을 차려줘도 숟가락을 못 드는구나."

"뭘 바라셨습니까? 제가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머리라도 날려 드리길 바라신 겁니까?"


저 눈빛. 할 말이 있어도 하지 않겠다는 듯한 눈빛. 그런 시선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 도달과 갈라설 때도 도달이 꼭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지?"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너야말로 도대체 뭘 바라고 온 거니? 너를 죽이려면 컨테이너로 오라고 한 건 너잖아. 갑자기 책을 찾아 달라느니, 헛소리를 하며 등을 돌리면 말이지. 그대로 뒤에서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야지. 그게 사냥꾼이야. 이걸 말로 해줘야 알다니."


한심하다는, 안타깝다는 듯한 눈빛. 이쉐는 제 제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그가 자기보다 키가 훌쩍 자라 버렸음에도.


이엘은 그 눈빛을 보고 모든 걸 깨달았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감정이나 자기 생각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그 역시 모르지 않았다. 이쉐 알첸브라임이 세상의 적이라면 그 공적(公敵)을 처치하는 일은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도, 만약 두 사람의 입장이 반대였다면 제 스승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자를 향해 총을 들이밀었으리라는 것도.


하지만 만약,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고 생각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더라도 그런 일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왜 피하고 싶었느냐고 묻는다면 두렵다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


"저를 사냥꾼으로 키운 걸 후회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니?"


"택시 기사가 되라고 하셨잖아요. 제국 사냥꾼 같은 건 그만두고, 운전을 잘하니까 택시를 모는 게 어떠냐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별걸 다 기억하고 있구나."


세 번째 눈동자에서 술을 마시고 한 이야기였지. 별 뜻 없이 한 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걸 누가 마음에 담아두래? 그런 말을 듣더라도 딱히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듣고 택시를 몰기 시작했다. 그냥 그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래,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그건 진심으로 하신 말씀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듣자니 어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그런 말을 한다더군요. 넌 이런 거 하지 마라."


어떤 감정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걸까. 그는 부모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걸 물을 만한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말이 뜻하는 사회적인 맥락을 깨닫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건 자식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었어요."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니? 내가 너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다고?"

"아니라고 하지 마십시오."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이엘은 굳이 그렇게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애써 외면했었다. 제국 사냥꾼을 그만두라는 이야기에 어떤 맥락이 있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스승이 자신에게 그 말을 내뱉었는지.


"너도 나처럼 살고 싶냐고 말씀하셨었죠. 그 '나처럼'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듣지 못했습니다."


한없이 멋지다고만 생각했었다. 옳지 않은 걸 참지 않고 행동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게 훌륭한 일이라고 여겼다.


세상은 그럴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언젠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도.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현실과 똑같았어요. 세 번째 눈동자에서 저에게 제국 사냥꾼을 그만두고 택시 기사가 되는 게 어떠냐고 하셨던 것까지는."


이쉐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깊은 수면 아래 작은 파문이 일었다.

"너도 나처럼 살고 싶니? 그렇게 물으셨죠. 전 그렇다고 대답했고, 제 뒷머리를 툭 치셨습니다. 그래서 앞머리를 그릇에 빠뜨리고 말았죠."


"그래, 기억나는구나."

"꿈에서 그 장면의 뒷부분을 봤습니다."

"계속 말해."


끊임없이 악인의 수급을 취하고 피를 밟으며 걸어간다. 세상에 아무렇지 않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 없는 게 아닐까. 이쉐 알첸브라임이 그럴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그럴 수 없을 터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밤마다 악몽을 꾸고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다고."

그리고 죽어서도 버릴 수 없는 것들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꿈에서 깨고 나니 그게 사실이었는지 궁금해지더군요."

"꿈과 현실을 구별 못 하는 나이는 진작 지나치지 않았니?"

"아뇨. 구별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지나쳐 온 수많은 밤을 떠올렸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기묘한 환청을 듣고, 고통스러운 꿈을 꾸던 나날을.


자신이 충분히 강하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 일을 겪는다고 생각했었다.

얼마나 우스운 착각인지.


"이상한 일이죠. 당신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버린 걸까요? 소년이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가려면 제국 사냥꾼이 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믿었던 당신은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은 한 소년을 제국 사냥꾼으로 키워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제국 사냥꾼이 되려는 자기 딸을 막지 않았다. 이엘은 단지 알고 싶어질 뿐이었다. 그 모든 모순되는 행보 뒤에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거기 어떤 거대한 진실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도대체 뭘 하고 싶으셨던 겁니까? 지금은 뭘 위해 움직이는 겁니까?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무것도 분명해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아뇨, 이것보다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저는 그냥 당신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당신이 뭘 하고 싶은지, 뭘 원하는지, 뭘 두려워하는지가요."


이엘은 수없이 늘어선 상자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선반에서 상자 하나를 거칠게 잡아채 바닥에 던졌다. 묵직한 상자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나를 제국 사냥꾼으로 만든 걸 후회했다면 왜 유리오에게 같은 길을 가게 했는지, 유리오를 사랑했다면 왜 그 애를 남겨두고 사라졌는지, 당신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진짜로 원했던 일은 뭔지. 알고 싶어요."


이쉐는 제 제자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거침없이 다가가 그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선글라스를 손으로 걷어냈다. 선글라스는 마치 손목시계가 그랬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넌 얼굴이 똑같구나. 많이 달라져 있을 줄 알았는데."

"전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냐, 넌 똑같아. 항상 생각이 많지. 그게 너를 구성하는 수많은 특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이란다. 이 말을 잊어버리지 말렴."


그리고 생각이 많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겁이 많을 수밖에 없지. 이쉐는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소년을 제국 사냥꾼으로 키워낸 것을 후회했다.


"그래, 마지막이니까 조금쯤은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이쉐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 했지만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두 번, 세 번을 시도해도 맥 빠지는 불꽃만 튈 뿐이었다.


"그럼 제가."


이엘이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준 적이 있었던가, 그는 떠올리려고 했다. 스승이 담배를 끊기 전에는, 그는 담뱃불을 붙이기에는 너무 어렸다. 유리오가 태어나고 나서는 스승이 담배를 끊었다.


처음인 모양이군. 마지막에 걸맞은 일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트리그 레밀턴이라는 이름, 아니?"

"들어본 적 있습니다."


제국 사냥꾼으로 살아가면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였다. 트리그 레밀턴이 공식적으로 살해한 제국 사냥꾼의 수는 24명. 다만 안전사냥부는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인원이 훨씬 많을 거라고 추산했다.


"트리그 레밀턴을 붙잡은 건 나였어. 그때 이미 그 남자는 거의 죽어 가고 있었지. 누군가 그 남자를 해친 게 아니야. 그 남자는 살아갈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어."

"그게 무슨 뜻이죠?"


"약물에 절어 있었거든. 내가 발견했을 무렵에는 일상생활조차 어려웠을 거야. 이미 몸이 안에서부터 전부 썩어 가고 있었지."


이쉐 알첸브라임의 이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건, 그녀가 트리그 레밀턴을 사냥하는 데 성공한 제국 사냥꾼이기 때문이었다. 트리그 레밀턴은 제국 최악의 제국 사냥꾼이었다. 그런 그를 붙잡은 사람의 몸값이 올라가지 않을 리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그 사람은 내 눈앞에서 피와 저주를 토하며 죽었지."

"그 사람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알려줬었니?"

"아뇨."


이쉐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공식적으로는, 그 동기를 직접 들은 건 이쉐 알첸브라임 한 명뿐이었다.


"그래, 지금 와서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 어떻게 생각하니?"

"그 동기에 대해서 말입니까?"


"그래."

"그 사람이 가엾다고 생각했습니다."


타들어 가던 재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쉐는 떨지 않는 다른 손을 들어, 제자의 외투 주머니에 선글라스를 꽂아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그 사람은 제국 사냥꾼이 존재하지 않는 게 모두가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의 불행을 끝내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말했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삶은 불행하다. 트리그 레밀턴은 그런 말을 남겼다. 분명 그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건 불행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확실히 불행입니다."

"착각이라."


"그 사람은 자신이 남들의 불행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죠. 자신이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했던 겁니다. 그 잘못된 믿음을 바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바꿨습니까?"

"그래서 가엾다는 거니?"


"그 죄는 죽어서도 갚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 감당할 수 없는 걸 져야만 하는 사람은 불행하지. 자신이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더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이쉐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는 한때는 제 선배였고 한때는 동료였던 남자의 마지막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제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파문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했다.


"그래, 내가 제국 사냥꾼이라는 존재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건 선배가 죽고 나서였어. 그전까지는 이 일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지.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니? 어린아이를 강간하는 인간의 머리통을 박살 내도 그 누구도 내게 뭐라 하지 못하는데."


이쉐가 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신발 굽으로 잘근잘근 밟았다. 그 얼굴은 그녀가 이엘과 재회한 이래 가장 편안해 보였다.


"그놈의 계시. 그 계시가 면죄부일 거라 철저히 믿고 있겠지. 나는 계시에 따랐을 뿐, 사냥의 신이 내게 자격을 주었다. 선배는 그렇게 말했었지.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단다."


그녀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이엘은 그제야 그 눈가에 드리운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푸석한 머리칼 역시도. 아까까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뭐라고 했었더라. 제국 사냥꾼이 뭐라고 생각하지, 이쉐? 신의 허락을 받아 사람을 죽여도 되는 존재? 아직도 세상에 그딴 편리한 신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 말을 했던가."

"신이란 인간의 편의대로 만들어지는 존재 아닙니까?"


"아니야, 이엘."

이쉐는 고개를 저었다. 이엘은 제 스승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는 그만 숨을 삼켰다.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광기. 그 안에는 그런 것이 서려 있었다.


"신이 인간을 제 편의대로 만들지. 아이니 역시 그런 신이란다. 그 신이 만든 게 바로 너와 나, 그리고 다른 제국 사냥꾼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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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왕의 귀환 22.11.23 36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4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6 2 13쪽
» 진짜 이야기 +1 22.11.17 56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3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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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1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5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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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6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5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50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7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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