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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66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11.1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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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책의 무덤

DUMMY

"한때는 총 두 자루의 이름을 각각 내가 붙일 생각이었어."

"뭐라고 지을 생각이었는데요."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그건 대답이 바로 튀어나오지 않을 때의 습관이었다.

"글쎄. 대화와 타협? 대화와 타협으로 잘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멋지잖니."

"유행이 조금 지났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난 요즘 사람이 아니잖아. 그걸 먼저 생각해야지."

"요즘 사람의 정의는 뭡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꼬치꼬치 따져 묻기 시작했니?"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예전부터 했던 생각이다. 옛날 사람이니, 요즘 사람이니 하는 기준이 대체 뭐냐고. 요즘 살아 있으면 어쨌든 요즘 사람 아닌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랬죠."

"그래, 뭘 그렇게 납득할 수 없었는지 들어나 보자."


이쉐 알첸브라임은 높은 선반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할지, 이렇게 종이가 가득한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위험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피우기 시작하셨네요. 사람 목숨 끊는 게 담배 끊는 것보다 쉽다고 하시더니."

"그래, 사람 목숨 끊는 것보다 어려운데 어떻게 끊겠니."


6년이라는 시간은 길다. 아이를 위해 담배를 끊었던 엄마가 다시 담배를 피우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등에 메고 있는 활을 저 가슴팍에 꽂아버리면 모든 일이 끝날 텐데.


이 사람도 분명 그걸 알고 있을 터였다.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할 거니?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기다려 주고 있잖아."


그래서 머리 위로 그런 말이 떨어졌을 때도 놀라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대화할 자리라니. 이런 게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는 했다. 내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총알이 당장 내 머리로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컨테이너 밖에는 도달이 대기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 머리가 날아갈 상황을 막기 위해서.


"혼자 오셨습니까?"

"어떨 것 같은데?"

"혼자 오셨을 것 같네요."

"글쎄, 어떨까."


스승은 높은 선반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대충 봐도 내 키보다 훨씬 높은 곳이었는데. 발목이나 무릎은 괜찮은 걸까? 이제 슬슬 관절을 걱정해야 할 나이 아닌가.


"왜 여기서 보자고 했니?"

"남들에게 가장 피해를 덜 끼치는 곳일 것 같아서요."

"이엘답구나."


주변에 있는 거라고는 그저 책, 책, 그리고 책. 종이. 여기 있는 책들은 더 이상 팔리지 않을, 말하자면 악성 재고라고 했었지. 이 컨테이너 자체가 버려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레이먼드 디베나가 대표로 있었던, 출판사 '데바'의 컨테이너였으니까. 데바는 새 대표를 내세워 새 출발을 하겠다는 포부를 보였다. 그러려면 레이먼드 디베나가 만들고 있던 책은 모두 폐기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사회적 인식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잘못한 거지 책이 잘못한 건 아니지 않나? 누군가에게 읽히리라 생각하고 만든 책일 텐데.


"레이먼드 디베나, 데바라는 출판사의 대표였지."

"인간쓰레기기도 했고요."

"출판사 데바는 아리나딘 교단에 관한 책을 낼 예정이었어."


내 스승은 주변에 널린 책을 쭉 둘러보았다. 책들은 종이 포장지에 꽁꽁 싸여 있어, 겉으로 봐서는 내용물을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악성 재고라고 하더라도 그걸 함부로 들춰 보는 건 왠지 저항감이 느껴졌다.


"어떤 책을 낼 생각이었는지 궁금한데요."


궁금하다는 건 진심이었다. 정황상 레이먼드 디베나가 아리나딘 교단과 연관성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아리나딘 교단의 업장에서 대량의 하라딘이 나왔고, 레이먼드 디베나는 하라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레이먼드 디베나는 그 약의 출처에 대해 증언하기도 전에 병원에서 죽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목이 졸려서. 아리나딘이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고 한다면 앞뒤가 맞지.


"신과 관련된 내용이라고만 들었어. 나도 직접 읽어 본 건 아니거든."

"왜 읽지 않으셨습니까? 궁금할 법도 한 내용인데요."

"다른 해야 할 일이 더 많았거든. 이제부터 천천히 읽어 볼까 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스승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 표정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널린 종이 상자들을 가리켰다.


"이 중에 있을 거거든. 같이 좀 찾아주겠니?"

"진심입니까? 책을 읽으시겠다는 게."


"왜, 읽으면 안 돼?"

"저를 죽이기 위해 여기로 오신 거 아닙니까?"


나는 분명 온실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나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팔경 지구의 컨테이너 단지에서 만나자고. 수많은 컨테이너 중 하필 데바의 컨테이너에서 마주친 건 우연이었다.


나는 내가 휘말린 사건을 떠올렸기 때문에, 수많은 컨테이너 중 하필 여기로 왔다. 이 사람은 무슨 근거로 이 컨테이너에 온 걸까.


"무드가 없구나. 창고로 들어서자마자 총으로 머리를 날려 주기라도 바랐던 거니?"

"아마 바로 머리가 날아가지 않을 정도의 준비는 했을 겁니다."

"얼마나 준비했는지 궁금한걸."


스승은 싱글싱글 웃으며 쌓여 있는 상자 더미 앞으로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하나 꺼내고는, 상자를 묶은 노끈을 능숙한 솜씨로 잘랐다.


"손대도 되는 겁니까? 아무리 당장은 주인이 없는 물건이라도."

"인제 와서 그런 걸 다 따지다니. 그러면 여기 들어와 있는 건 괜찮고?"


할 말이 없군. 나는 노끈을 자르고 종이 포장지를 해체하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드러내다니. 내게 등을 보여도 안전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등 뒤에서 공격하더라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서일까. 지금에 와서 그걸 알 방법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보이시는군요."

직접 묻는 것밖에는.


"왜, 등 뒤에서 칼로 찌르기라도 하려고?"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래, 너는 묘하게 전사 같은 데가 있었어. 너도 알지?"


전사와 사냥꾼. 질리도록 듣고, 질리도록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개념이다.

"사냥꾼이라면 지금 등 뒤에서 칼을 뽑아야 하는 겁니까?"

"뽑을 것도 없지. 이미 들고 있어야 하는 거야."


종이 뭉치를 뒤적거리는 소리, 얇은 포장지를 찢어내는 소리.

"이엘."

"네."


"너는 이상하게 올곧을 때가 있어. 쉬운 길로 가질 않지. 항상 망설이고, 고민하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말이야. 우리가 사슴을 잡을 때 그게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어. 사슴을 잡기 위해 아무리 치밀한 함정과 비열한 덫을 놓더라도. 사람을 잡을 때도 달라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니?"


"사람을 죽이는 일이 불명예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는 게 아닙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더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겠지. 나는 자신을 꽤 잘 알았다.


"기억나니? 아직 사월에 무려 인신매매단 같은 게 횡행했던 시기도 있었다는 거."

"제 기억력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으니까. 아니, 내가 죽였다고 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언제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때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녀석들은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어. 어린이들을 잡아다 산 채로 배를 갈라 장기를 빼냈다지. 죽이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했을 것 같니?"

"어디부터가 죽어 마땅한 인간이고, 어디부터가 그렇지 않은 인간입니까?"

"철학자 병."


또 철학자 병 이야기인가. 마침 얼마 전에 부장에게도 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지. 아무래도 내가 철학자 병에 걸린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인제 와서 억지로 부정해 봐야 뭐 하겠는가.


"제국 사냥꾼은 철학자 병에 걸렸을 때 죽는단다. 머리가 터졌을 때 죽는 게 아니라."

"낭만적인 이야기군요."


"내가 너를 잘못 키운 거니, 아니면 너무 잘 키워서 문제인 거니?"

"너무 잘 키워서 문제라는 건 무슨 뜻이죠?"


갑자기 내 앞으로 상자 하나가 휙, 날아왔다. 스승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게 상자를 집어 던지고는, 제 눈앞에 있는 상자들을 마저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잘 키워서 문제일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내가 사라지자마자 삐뚤어지기 시작한 거야."

"일리가 있네요."


나는 상자를 받아 포장지를 찢었다. 얇은 종이가 찢겨나가는 느낌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대체 무슨 책을 찾으라는 건데.


"찾아야 하는 책 제목을 못 들었습니다만."

"그야, 안 알려줬으니까. 나도 모르거든."

"제목을 모르신다면 책을 어떻게 찾으실 겁니까?"

"이름을 모른다고 사람을 못 찾지는 않아."


그건 그렇지. 상자에서 꺼낸 책을 대충 살펴보았다. 이 상자에 든 것들은 죄다 제목이 <예술의 영원성>이었다. 소개를 읽어봐도 아리나딘 교단에 관한 내용은 아니겠군. 상자를 옆에 대충 떨어뜨리듯 던졌다.


쿵, 하는 무거운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인신매매단 말이지. 우리가 걔네 이름을 알고 있어서 걔네를 찾아 죽인 건 아니야."

"그건 사람이고 이건 책이잖아요."


내가 던진 상자 하나, 이 앞에서 해부된 상자가 대략 다섯 개 정도. 이 컨테이너 안에는 이런 상자가 수백 개는 있다. 게다가 이 안에 그 책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 않나?


"교단에서 증거 인멸을 위해 재고를 폐기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없어.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거든. 그런 하찮은 일까지 할 시간은 없었지."

"정말 진심입니까? 책을 읽으시겠다는 게."


스승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주 잘 아는 삭막한 얼굴.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이었다.


"너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일에 시간 낭비하는 거 본 적 있니?"

"없습니다."

"그래, 알면 됐다."


그러고는 다시 등을 돌려 포장 뜯기에 열중한다. 이 창고에 들어오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달은 여전히 밖에 대기하고 있을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웃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다시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쪽은 죄다 똑같은 책 같은데. 그렇게 많이 팔릴 것 같지도 않은 책을 왜 이렇게 많이 찍었지?"

"저자 이름을 잘 보십시오."

"뭐야, 레이먼드 디베나 본인이 쓴 책이었네."


저 책을 찍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를 베었을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찾기 위해 상자를 뜯고 있는 내 시간도.


"제목이 좀 특이하네. <집이 있는 아이>라니. 보통은 반대로 짓지 않나? 제목이 <집 없는 아이>라고 생각해 봐. 그럼 사람들은 어머, 가엾구나, 하겠지. 하지만 집이 있는 아이라니, 집이 있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스승은 책 한 권을 뒤로 휙 집어 던졌다. 나는 간신히 그 책을 공중에서 잡아냈다. 표지와 저자 이름이 낯익었다. 선데이 아이스. 이전에 만났던 안전사냥부의 감시관이 그런 가명을 댔었지.


소설을 쓰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었다. 가족이 제국 사냥꾼에게 죽었다는 것도. 내 신발장에도 이 책 한 권이 처박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지?


"저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나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는 걸, 누가 알겠는가.


"마지막 기회를 받고 있지, 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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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왕의 귀환 22.11.23 36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5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6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6 2 13쪽
» 책의 무덤 +1 22.11.16 34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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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5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2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8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5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9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6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1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5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50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7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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