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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201
추천수 :
926
글자수 :
790,487

작성
22.09.23 18:30
조회
43
추천
4
글자
13쪽

북쪽 끝

DUMMY

내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세 번째 눈동자였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아는 얼굴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날씨가 서늘해지기 시작했으니 솔리 여자들은 사월을 떠났을까?


평범한 고기국수와 차 한 잔을 주문했다. 많은 걸 잃었지만 단골 가게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군. 사월의 다른 모든 게 변하더라도 세 번째 눈동자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엘 님, 왜 이렇게 오랜만이죠?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음식을 가져다주는 점원이 나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뇨, 별일 없었어요."


그런데, 변하지 않는다는 게 반드시 좋은 일인가?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오랜 시간을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 주는 경외감 같은 게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변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맛있게 드시고 자주 찾아주세요!"


여기 다시 올 일이 있다면 좋겠는데. 나야 그러기를 바라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여야지.


나는 혼자 식사를 하고, 혼자 숙소로 돌아와 냉장고에 남아 있던 케이크 반 개를 냉동실로 옮겼다. 냉동실에 있으면 당분간은 상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내 방을 치울 일이 생기더라도 상한 케이크를 버려야 할 일은 없겠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건 정말 불쾌한 일이다.


만약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연락하시겠습니까?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일을 사서 하지는 않는 유형의 인간이다.


당장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힘든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하나하나 가정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다니.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나는 지금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까? 내 침대 옆에 놓인 통신기를 바라보며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연락처가 없었다. 질문을 조금 수정해야겠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 나는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까?


레몬은 무사히 안타레스에 도착했겠지. 그렇다면 유리오나 거기 있는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어 마리포사나 모모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그쪽은 내 연락을 받지 않아도 잘 지낼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지우다 보니 남는 사람이 딱히 없었다.


나는 내일 죽는다고 해도 연락할 사람이 없는 건가.


"거참, 삭막하구만."


총은 가져갈 생각이었다. 검과 쇠뇌를 챙기긴 했지만, 이것들이 도움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펜 어디 있더라?"


글씨를 쓰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내 주변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 건실한 사람이 누굴까? 누구 앞으로 글을 남겨야 문제없이 잘 처리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루토 시칼트라 앞으로 글을 남겼다. 그녀가 유리오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내 마음대로 유리오의 후견인 역할을 떠맡기기로 했다.


화살, 단검과 먹물, 로프와 함정. 마법 총알까지. 이랬던 적이 있었나, 싶은 정도로 최대한을 챙겨 넣었다. 추운 지역이라 두꺼운 옷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승님의 집에 가서 잔디와 화분에 물을 주기로 했다. 청소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집안은 깨끗했다.


조금 망설이다가 실비나의 통신기로 연락을 보냈다.

"네, 실비나 카잔치카입니다."

"이엘 알체이라입니다. 자나 씨를 좀 바꿔주시겠어요?"


자나는 아직 새로운 몸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어쩌면 대화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실비나는 잠시 침묵했다.


"이엘 씨. 어디 가시는 건가요?"

나한테 장단을 맞춰줄 줄은 몰랐는데.

"사냥의 숲에 갑니다."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 눈치가 빠르네. 하긴, 내가 어디로 가는지 누군가 한 명은 알고 있는 게 낫겠지. 그래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자나와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아, 네. 통신 정도는 가능할 것 같네요. 바꿔드리죠."

"이엘 씨."

"그래요, 자나 씨. 거기는 별일 없습니까?"


이전의 자나에게 나는 반말을 했었다. 이전의 자나는 휴게소에서 내 돌을 훔쳐 간 도둑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자나는 나와 처음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높였다.


"네, 그런 것 같군요. 무사히 수복 중입니다. 이엘 씨는요?"

"자나 씨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든지 물어보세요. 제가 완전한 대답을 드릴 수 있는 상태는 아니겠지만."

"자나 씨는 이렇게 말했었죠, 영혼이 완전히 파괴된 한 사람을 만났었다고. 그 영혼의 파편 하나를 레몬에게 심었다고요."


"네, 그랬던 것 같네요. 다행히 제 기억에 남아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파괴된 영혼은 다시 조각을 맞춰 붙일 수 없는 거겠죠?"


자나는 내 질문이 무슨 뜻인지 고민했다. 떨어져 나온 조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거겠지?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거였다.


"아마 그럴 겁니다. 레몬과 이쉐 알첸브라임은 완전히 별개의 존재라고 봐야 해요."

"레몬의 안에 이쉐 알첸브라임으로서의 특성이 남아 있어도 말입니까?"


"그래요. 레몬이 이쉐 알첸브라임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레몬은 이쉐의 조각이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누군가 유리병을 깼습니다. 한 조각이 크게 떨어져 나왔죠."


유리병이 이쉐 알첸브라임,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이 레몬인가. 나는 고개를 기울인 채 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떨어져 나온 조각은 제멋대로 닳았습니다. 유리병 역시 이전과는 다른 모양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그 조각을 다시 유리병에 맞추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맞춘다고 하더라도 처음의 유리병이 아니겠지요."


그래, 사람은 퍼즐이 아니지. 레몬과 이쉐 알첸브라임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이쉐 알첸브라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미 내가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이야기다.


이제 내가 자나에게서 들을 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왜 당신을 죽이려고 한 겁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제가 필요 없어졌기 때문일까요?"


이유조차 말하지 않았다는 건가. 나는 통신을 끊지 않고 멍하니 누워 있었다. 문득 그에게 내 미래를 봤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자나는 세 번째 눈을 감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미래를 보며 살아간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죠? 내일 밤에도 살아 있나요? 다음 주에는? 돌아와서 세 번째 눈동자에서 밥을 먹고, 화분에 물을 주고, 도달을 다시 만날 수 있나요?


하지만 그런 질문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았다.


"이엘 씨."

"말씀하세요."


자나는 나를 불러 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언가를 봤다는 걸 느꼈지만, 무엇을 봤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내가 통신을 끊기 직전에 그가 이렇게 말했다.


"마모된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닙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문을 잠그고 나와 차에 짐을 싣고, 마지막으로 빠뜨린 게 없는지 점검했다.

역시 화분에 물 주는 건 마리포사에게 부탁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 마리포사가 직접 스승님의 집까지 오지는 않겠지만, 믿을 만한 사람한테 적당히 시키면 되겠지. 화분에 물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아니, 역시 그만두자. 화분에 물 주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검은이파리사월야자가 죽든 죽지 않든 내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냥의 숲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구월이었다. 내내 운전만 해서 가도 최소 다섯 시간은 걸릴 터였다. 내가 운전해서 가 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계시를 받기 위해 사냥의 숲에 갔을 때 운전한 건 스승님이었다. 나는 건방지게도 뒷좌석에 타서, 자고 깨고 자고 깨고를 반복하며 구월까지 갔었다.


자도 되는 건가요? 그렇게 묻자 뭐라고 대답했었더라.

"잘 수 있을 때 자라.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서 자는 것도 복이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백번 맞는 말이지. 그 시절 이후로 다른 사람이 모는 차에서 그렇게 편하게 잔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의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수많은 것 중에 스승님이 만든 건 얼마나 될까. 잔소리를 총알처럼 쏘아 대던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서 자는 건 복이다."

"사람이 먹고 싶은 걸 못 먹으면 한이 된다."

"정말 좋아하는 가게에는 절대 여자를 데리고 가지 마라."

이건 정말 뼈저리게 깨달았었지.


"그 총을 쏘지 마라."

나는 참 남의 말을 잘 들으며 살아왔군.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었다. 스승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총과 똑같이 생긴 복제품을 만들어 집에 놔두고 갔다. 그건 마법 총이 아니라 진짜 총이었다.


그리고, 내가 안타레스에서 아리나딘의 사도를 두 동강 내기 직전에······.

유리오는 분명 그 총을 쏘려고 했었다.


그건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총을 맞았더라도 죽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유리오가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다.


총이 있으면 사람은 언젠가 그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 총을 두고 갔다는 건, 마치 언젠가는 유리오가 그 총을 사용할 상황을 생각했던 것 같잖아.


여섯 시간 반. 내가 차를 댈 수 있는 사냥의 숲 초입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막연히 다섯 시간 정도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머네.


게다가 이제부터는 차를 끌고 들어갈 수 없는 구간이었다.


"허."

싸라기 같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무게도 밀도도 보잘것없어서, 어디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약해 빠진 눈이었다. 그래도 눈이라니. 벌써 북부 끝에는 눈이 내릴 만한 날씨가 된 건가?


나는 조금 두꺼운 외투로 갈아입었다. 등에는 쇠뇌를 멨다. 사실 이걸 아주 잘 쓸 자신은 없었다. 내가 이걸 챙긴 건 순전히 조준경을 쓰기 위해서였다.


무조건 내가 먼저 상대를 발견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가망이 있을 테니까. 정면으로 싸우면 승산이 없다고.


숲 입구에는 경비 초소가 하나 있었다. 경비원 한 명이 나와 내게 말을 붙였다. 편안한 옷차림에 느긋한 태도, 아마 소일거리로 여기 있는 사람 같았다.


"어디로 가시는 거요?"

"신전에 갑니다."


"뭐 때문에 가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요즘 영 정신이 없어서."

"정신이 없다니요?"


그는 큼지막한 헤드랜턴을 쓰고 있었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우스운 건, 나 역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봐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동안 사람들이 거의 안 오더니, 최근에 좀 소란스러워서 하는 말이지. 무슨 기도를 드린다느니 성물을 찾는다느니."

"신전이 있는 곳이니 기도를 드리러 오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 같은데요."


과연 숲 안쪽으로는 제법 선명하게 길이 남아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기를 지나간 모양이었다.


"염병, 그런 짓도 평소에나 잘해야지. 기도도 벼락치기를 하나?"


그는 제법 수상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나를 살펴보았다. 충분히 이해했다. 무기를 차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라면 수상해 보인다는 건 충분히 알겠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끌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 오랜만에 직권 남용을 하기로 했다.


"저는 이런 사람인데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경비원은 나무로 된 신분증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손을 휘저었다.


"그래, 가쇼. 가. 몸조심하고."

"몸조심하라니, 무슨 뜻입니까?"


그는 헤드랜턴을 껐다. 긴장한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게 바짝 다가왔다. 방금까지 보이던 느슨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그렇게 말했다.


"밤에 숲에서 총성을 들었소. 누군가가 총을 가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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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유일한 목격자 22.11.24 34 1 12쪽
135 왕의 귀환 22.11.23 35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4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6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5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3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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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5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1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9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40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4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8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5 4 12쪽
» 북쪽 끝 +1 22.09.23 44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0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4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49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6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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